제91화. 이건 또 의외의 정체로군 (1)
이전 날에 어떤 일이 있었든, 사람들의 기억에 그날이 어떻게 각인되든, 내일의 해는 뜨기 마련이다.
오늘 또한 같았다.
전날에 어떤 일이 있었든, 다음 해가 뜨면 다시금 그 일정이 시작된다.
하물며 누군가의 부상 같은 시답잖은 일로 천마지회가 지연될 리 없었으니, 사람들은 셋째 날의 결투를 보기 위해 다시금 대결투장으로 모여들었다.
벌써 셋째 날이다.
모르는 이는 이제 슬슬 흥미가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현장의 기대감은 갈수록 치솟아 갔다.
이제 남은 조는 넷.
정말로 유의미하게 성장을 이룬 아이들만 남았다고 말해도 좋으리라.
누군가는 ‘자신의 소속으로 영입할 수는 없을까’. 같은 욕심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누군가는 일취월장한 실력에 시기를 품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또 누군가는 강해진 아이들에 대한 대견함을 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저 이들을 키운 자들에 대한 경외를 품고 바라보기도 했다.
뭐, 결국 십인십색이라.
각자가 바라보는 시선의 이유는 저마다 다를 테지만, 그 모든 시선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결국 가장 강한 것은 누구냐.’
즉, 일종의 갈증이었다.
대리전이라고는 하나, 적철진과 청명휘의 첫 맞싸움.
이번 천마지회의 첫 번째 승리를 거두는 것은 누가 될 것인가─ 같은 주제부터 시작하여, 과연 혜성같이 등장한 청유백의 이변은 언제까지 지속될 것인가, 등의 주제까지.
수많은 갈등이 욕망과 함께 허공을 오갔다.
그러나 그 욕망과는 전혀 관계없이.
초연하게, 혹은 고고하게 상황을 관망하는 이들도 있었으니─
객석의 한 구석에서 여유롭게 구경하는, 이미 탈락한 후계자들이었다.
백소하는 문득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교주께선 오늘도 행차하지 않으신 겁니까?”
객석 가장 위의 자리.
이 결투장 모든 곳이 내려다보이는 만인지상의 자리는 오늘도 어김없이 비어 있었다.
오늘뿐이었던가.
벌써 사흘이나 시간이 지났건만, 천마는 단 한 순간도 모습을 내비치지 않았다.
묵태곤이 대답했다.
“그런가 보지. 뭘 어떻게 포장해도 결국은 대리전일 뿐이잖냐? 이런 건 눈에 차지 않으실지도.”
“흐음, 그런 분이 아닐 텐데요….”
그러고 보니, 근래 들어 누구도 교주의 존안을 뵈었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본디 용건이 없으면 두문불출하는 분이시니, 누구도 이상타 생각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고작 이 정도 애들 싸움은 관심 밖이신 것일지도 모르지.”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뭐, 설마 교주께 무슨 일이 생기기야 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것부터가 지존에 대한 불경이었다.
맞장구 친 묵태곤도 같은 생각인지,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 화제를 바꾸었다.
“다음 결투는….”
“청유백과 적영입니다. 네놈이 보기엔 어찌 될 것 같습니까?”
“글쎄, 적영 녀석이 노력가이긴 하다만… 몰라. 청유백 그놈, 이상하단 말이야. 갑자기 어디서 그런 게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동감입니다. 어디서 솟아난 건지 모를 괴물 같죠.”
“그놈이 가르친 놈들도 똑같아. 어제 봤다. 나야 이번 시험은 그냥 놓아 버렸었으니 할 말은 없지만, 애들이 그냥 다른 사람 수준이더만.”
그들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어느덧 아이들이 무대 위로 올라왔다.
붉고 푸른 두건의 무리가 서로를 마주보고 대치했고, 끊임없는 함성을 배경으로 전투를 준비했다.
그러나 두 무리의 표정은 몹시도 판이했다.
청유백의 아이들의 표정이 몹시 평온한 것에 반해, 적영의 아이들은 한눈에도 긴장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로 굳어 있었다.
무리는 아니었다.
지금껏 상대가 어찌 싸웠는지를 보았다면, 충분히 그 기세에 위축될 법 했다.
…반대로, 그릇이 결국 거기까지라는 말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실제로 적영의 승리를 점치는 이들은 몇 없었다.
노력과 열정을 높이 사기는 하겠으나, 애초에 적가에는 적철진이라는 보장된 말이 있을뿐더러─
그만큼, 청유백이 준비한 것이 규격 외의 무언가였기 때문이다.
불구대천심공이라는 과거의 잔재를 끄집어내어, 완벽하게 재현된 그 결과물들 말이다.
갑작스러운 발작?
불완전할지도 모르는 결과물?
뭐가 어떻단 말인가.
어떤 변명거리와 치졸함으로 그것을 더럽히려고 해도, 무엇을 한들 ‘강함’이라는 명명백백한 결과물이 흐려지지는 않는다.
오늘의 시선 또한 그러했다.
적철진과 청명휘의 승부에는 긴박감을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적영과 청유백의 싸움에 바라는 것은 다름 아닌 학살극.
적영의 아이들에게 향하는 것은 ‘분전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수준의 눈빛이었다.
“아, 시작하려나 보군.”
─부우우우웅
결투의 개시를 알리는 나각 소리.
그와 동시에, 적색 두건을 동여맨 아이들이 각각의 무기를 뽑아들었다.
챙, 챙, 챙, 챙, 챙!
십여 개의 쇳소리가 반복해서 울리고, 서슬 퍼런 칼날이 태양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손잡이를 쥔 모습들에서 승리를 노리겠다는 패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그것이 지탄받을 만한 일은 아니리라.
맹수 앞에 선 인간이 오금을 저리는 것은 몹시도 당연한 일이 아니던가.
그들을 가르친 적영 또한 그리 일렀더랬다.
그들 하나하나에게 손수 지어준 이름을 일일이 속삭여주며, ‘할 수 있는 만큼 하되 무리하다 판단되면 승부를 포기하라’라고 말이다.
그만큼, 누구나가 압도적인 승부를 예상했다.
헌데.
“……?”
청가의 아이들이 무기를 뽑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곧 눈살을 찌푸렸다.
가장 격하게 반응한 것은, 단연 그들과 마주하고 있는 적영의 아이들이었다.
“뭐냐! 무기를 뽑지 않고도 이길 수 있다는 거냐?”
“이 빌어먹을 놈들이! 좀 세졌다고 그런…!!”
그만큼 저들을 멸시하는 것인가.
오냐. 아무리 수준이 차이난다 한들, 이런 환멸을 받고서도 물러날쏘냐.
적가의 아이들은 도리어 적개심에 불타며 서슬 퍼런 도를 꼬나 쥐었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청가의 아이들은 조금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적가의 맨 앞에 선 아이가 시뻘게진 얼굴로 목청을 울리려는,
그 찰나였다.
“…저희는.”
검을 든 가장 앞의 아이가 한 발 앞으로 나와, 그 오른손을 번쩍 치켜들고는.
이리 외쳤다.
“기권하겠습니다!”
* * *
“백소하. 두 번째 시험의 보상이 뭐지?”
백소하는 문득 떠올랐다.
어이가 없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이 어처구니없고, 멍청하고, 이유조차 모르겠는 선택이, 어쩌면 바로 어제 해준 대답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일 수도 있다.
심각한 표정으로 만마서고에 쳐들어온 청유백과 저가, 어제 어떤 문답을 나누었더라.
그래, 아마 이런 대답이었을 것이다.
“…보상 말입니까?”
“그래, 보상.”
청유백은 대뜸 그리 물었다.
너무나도 태연한 표정으로, 마치 오늘 아침에 먹었던 것이 뭐냐고 묻는 것처럼 말이다.
“이왕 말하는 것, 앞으로 남은 시험들도 쭉 읊어보는 게 좋겠군. 굳이 찾아오는 것도 낭비니 말이야.”
아! 나가 뒤졌으면 좋겠다.
내일부터라도 세숫대야에 물 떠다놓고 천자마께 저 새끼 좀 뒤지게 해 달라고 빌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런다고 지금 눈앞의 청유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저라고 모든 걸 아는 건 아닙니다.”
지난번부터 뭐 꾹 누르면 알 낳는 거위 취급을 하는 것 같은데….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한다.
그런 게 되었으면 진즉에 돗자리 깔았지, 이딴 곳에서 퀴퀴한 책 정리나 하고 있겠는가.
“첫째는 대놓고 알아보라고 정보를 뿌렸고, 둘째는 우리 백가 소관이었으니 정확히 알았지요. 셋째부터는 모릅니다. 불확실한 게 너무 많아요.”
백소하는 이런저런 불평불만을 늘어놓으며 두서없이 구시렁거렸다.
얼마쯤 말한 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해 주려 했지만, 청유백은 심드렁하게 대꾸할 뿐이었다.
“결국 모른다는 것 아닌가. 네놈, 생각보다 쓸모가 없군 그래.”
이 빌어먹을 인간이….
“…끝까지 좀 들으십쇼. 추론은 가능합니다. 정보전이 항상 첩보가 만능인 줄 아십니까? 적당한 추리와 논리가….”
“말이 길다. 아나, 모르나?”
“빌어먹을 인간.”
“뭐라고?”
“아닙니다. 이걸 보십쇼.”
백소하는 잽싸게 어딘가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왔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다지 낡지 않은, 아직 흰 색이 남아 있는 물건이었다.
백소하는 그것을 탁자에 펼치며 말을 이었다.
“서역에서 들여온 전도(戰圖)를 기존 것과 비교해서 개량한 물건입니다. 이게 또 저희 선조들의 노고가….”
“아가리 침묵. 앞에 하던 설명이나 계속해 보도록.”
“씨부럴….”
백소하는 구시렁거리면서도 전도를 탁자에 고정시키더니, 전도에 표기된 지역 중 몇 군데의 위에 작은 표기를 올려놓았다.
청유백은 그것을 보자마자 대답했다.
“마교의 지부들이군.”
“허, 네가 그걸 어찌 아십니까?”
“나를 너무 무시하는군.”
“아니, 그건 뭐….”
백소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기사, 청유백 이 인간에 대해 알던 모든 게 엉터리였지 않던가.
무력, 인간성, 성격, 뭐 그딴 것들 말이다.
이제 와 모르는 것 목록에 지식이 추가된다고 쳐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백소하는 신음을 흘리다가도, 결국 대충 넘기며 말을 이었다.
“어쨌든. 뭐 맞습니다. 현 마교의 지부들 중 일부입니다. 정확히는, 가장 영향력이 약한 지부들이지요. 결과론적입니다만.”
“결과론적이라?”
“이 지부들이 ‘뭐하는 곳’인지 보다, ‘위치’를 먼저 알았다는 겁니다. 일단 뭔지 모를 지부들에 대한 정보를 손에 넣었는데, 조사해 보니 그렇더라. 그거지요.”
백소하는 표기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을 시작했다.
발단은 백 년 전 전쟁.
세력이 약해진 마교는 그 방대하던 땅의 이권을 전부 지켜내지 못했고, 부득이하게 그 덩치를 줄여야만 했다.
그것이 지금껏 계속 이어져 왔고, 최근까지 지켜오던 지역 중 일부가 이제는 넘어가거나 그 직전에 다다라 있었다.
원인은 셋.
하나는 호시탐탐 마교를 노리고 있던 세외무림(世外武林)의 침략.
둘은 이때다 싶어 달려든 사파 무리의 참전.
그리고 마지막 셋은, 마교에서 떨어져 나간 새로운 세력─
사마신교(死魔新敎)의 이권 쟁탈이었다.
마교가 온전했을 때에는 그 누구도 반기를 들 생각을 하지 못했으나, 지금의 마교가 결코 온전치 않다는 것을 이젠 모두가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세력도는 지금도 기울어가고 있고, 저 지역들은 그 최전선에 있는 곳이었다.
라고, 백소하는 설명했다.
청유백은 주의 깊게 그것들을 응시하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총 열다섯 개. 다음 시험이 이것이란 소리군. 허나… 나는 이번 시험의 보상을 물었다만.”
“이제부터 본론입니다. 두 번째 시험의 보상은, 이 세 번째 시험의 ‘선택권’입니다.”
“뭐가 다르길래?”
“뭐… 모든 게 다르지요. 적대 세력이나, 지리 정보나…. 아, 세력이 약해지고 있다곤 하지만, 어떤 가문은 이에 절실하기도 합니다.”
“지금껏 제 이권이 있었나 보군. 지금은 빼앗길 위기이고 말이야.”
“네놈 말 그대로입니다. 적가가 그러하지요. 아마 적철진을 우승시켜서 이곳, 합밀(哈密)로 보낼 겁니다. 적가가 움직일 방향은 뻔한 셈이죠. 다른 가문들이 문제입니다만….”
그 뒤로 설명이 더 이어졌다만, 지금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다만 중요한 것은, 청유백이 그것을 전부 듣고는 곧바로 어딘가 나가 버렸다는 사실이었다.
눈꼬리는 기울고, 입꼬리는 또 사악하게 삐뚤어져, 정말 악당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 * *
수 싸움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상대가 어떤 수를 쓸지 예측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이 국면에서 이 수를 펼친다면 상대는 어찌 대응할 것이고, 나는 이리 반응하여 이러한 결과를 이끌어낼 것이다.
내가 이 말을 버림 수로 사용하면 상대방은 이리 들어올 것이고, 나는 그것을 포착하여 잡아먹는다.
그것을 물지 않는다면, 나는 반대로 파고들어가 또 다른 방법으로 미끼를 늘어놓고….
…말로는, 몇 백, 몇 천 개의 문장을 나열한다고 하여 별로 의미가 없으리라.
하지만, 저 짧은 문장에서이지만─ 이해하겠는가?
‘예측’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최선의 선택’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가령 검을 휘두른다고 해보자.
단순한, 머리를 목표로 휘두르는 종베기다.
상대방에게 있는 것은 저와 같은 검 한 자루.
그렇다면 몇 가지 선택지가 있으리라.
피하거나, 막거나, 흘려내거나, 맞찔러 들어오거나…. 이 외의, 몇 가지 더 있는 선택지 말이다.
고수들은 찰나에 이 선택지 중 상대방의 행동을 예측하여 움직인다고 말하곤 한다.
고수가 될수록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많아지겠지만, 또한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선택지 또한 많아질 테니까.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최선의 선택’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행동하여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에 불과하다.
가령, 피하지도, 막지도, 흘려내지도 않고.
그저 자신을 죽여달라며 머리를 들이미는 행위를 한다면, 상식적으로 그것을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보고 난 뒤에 반응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죽이려 한다면 그대로 내리찍을 수도 있겠고, 당황하여 궤도를 비틀다 부상을 입을 수도 있겠다.
허나, 그 어떤 고수라도 죽고자 머리를 들이밀며 달려드는 행위를 할 것이라 예측하지는 못하리라.
당연한 일이다.
선택할 리가 없는, 결코 최선이라 부를 수 없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청유백은 드물게도 고민했다.
‘대체 왜?’
녹가는 대체 무엇을 위해 고독을 심었으며, 저를 배제하려고 하는가?
녹지연이 건재했다면, 혹은 하다못해 녹가의 인원이 한 명이라도 4강에 포함되었다면 합리적인 추론을 할 수 있었으리라.
몹시 단순하지 않은가!
‘녹가의 승리를 위하여!’ 말이다.
하지만 아니다.
최소한, 지금은 아니었다.
녹가가 바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은 그것을 알 수 없지만.’
목적을 모른다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저들의 목적은 모른다.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 아직은 알 방법이 없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 또한 있지 않던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가.
무슨 결과를 이끌어 내고자 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그 결과를 이끌어 내기 위해 어떠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는, 너무나도 잘 안다.
두 번째 시험의 우승이다.
그것을 위해, 청유백 자신을 배제했으니까 말이다.
그래─그렇다면.
‘할 일은 단순하지 않은가.’
청유백은 기다렸다.
셋째 날이 끝나가고, 마지막 날. 다음 날의 해가 다시금 떠오르기를.
그리고 모든 결투의 결과가 ‘온전한 형태’로 끝나는 것을 말이다.
어떠한 잡음도 섞여들지 않게 하기 위해, 그저 이 대국의 판을 엎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