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나뭇가지 하나는 쉽게 부러지지. 하지만… (3)
시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보다 맹렬한 기세로─일귀만큼은 어딘가 불편해 보였지만─다시금 저들을 인도하러 온 무인을 따라 나섰다.
그러나 그 기세도 잠시.
청유백은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아이들 중 한 명의 어깨를 붙잡아 세웠다.
“아, 그리고… 잠깐만.”
“……?”
아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청유백을 돌아보았다.
이름은 모른다.
그만큼의 관심을 주지도 않았고, 또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정도로 성의가 남아돌지도 않았다.
다만, 아이의 가슴팍에 수놓아진 숫자는 십(十).
아이들 중에서도 이 녀석이 가장 약하다는 것은 분명하리라.
“너는─”
청유백은 입꼬리를 올리며 아이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긴 내용은 아니었다.
아주 잠깐의 속삼임에 불과했고, 청유백은 곧 아이의 등을 치며 걸음을 재촉했다.
“─할 수 있겠지?”
“…….”
끄덕끄덕.
순순히 대답하는 아이의 모습에 청유백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결코,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 * *
청색과 백색의 무리가 중앙을 기준으로 둘로 나뉘어져 대치했다.
아니, 순수한 백색이라 하기에는 좀 뭣한 색이었다.
옅은 상아색.
이 싸움이 청가와 청가의 싸움이다보니, 그 구분이 힘들어 그저 임시방편 삼아 씌운 두건이었으니까.
많은 걸 바라는 것은 사치겠지만, 어찌 보면 우스꽝스러운 꼴이었다.
대충 두른 그 흰 두건이 어찌 보면 식모의 모자 같기도 하여, 그 모양새를 멋들어진 무림인이라 일컫기에는 퍽 어려움이 있었다.
뭐, 무림인이라는 것이 어디 멋으로 정해지는 것이겠느냐마는.
하지만 청률의 아이들은 방심하지 않았다.
도리어 굳게 검을 꼬나쥐고
눈앞의 놈들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일지언정, 결코 실력까지 우습지는 않다는 것을 이미 잘 알았다.
왜냐 묻는다면, 눈으로 봤으니까.
어제의 황돈의 아이들은 분명 겉으로 보기에도 강해 보였다.
그러나, 청유백의 저 아이들은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쳐부쉈다.
강한 쪽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쪽이 강한 것.
그들을 멸시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당황하지 마라, 말려들지 마! 우리 전략대로 움직이는 거야!!”
삼 하나는 소리치며 아이들을 통제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저 녀석들의 협동은 별것 아니야. 말려들지 말고, 우리 계획대로 싸우면 이길 수 있어!’
서로를 가늠하며 대치하고 있는 지금, 이 와중에도 놈들은 그럴싸한 진형 하나 갖추고 있지 않았다.
아니, 진형?
무슨! 웃기는 소리였다.
진형은커녕, 싸울 의지는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조장, 쟤네 왜 저래? 일부러 방심하게 만들려고 하는 건가?”
“나도 몰라. 차륜전을 노리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도 뭔가 전략이 있을 거다.”
“…하긴, 아무 생각 없이 저렇게 멍청하게 서 있을 리는 없으니까.”
서 있는 꼴 자체가, 기묘하기 그지없는 모양새였으니까.
저걸 진형이라 부른다면, 손자나 제갈량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서 머리통을 세 대쯤 때리고 저딴 걸 전략이라 모독하지 말라며 소리칠 것이 분명했다.
‘뭐든 간에 생각이 있겠지.’
신중해야만 했다.
상대방이 우스워 보이는 것은, 상대방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자신이 상대방을 간파하지 못한 것뿐일 테다.
‘분명,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뭔가가 있을 거야.’
지금의 상대의 모양새는 이러했다.
열 명 중 세 명은 흉흉한 기세로 전방에서 응수하고 있었고, 그 뒤에서 일곱 명의 아이들이 여유롭게 잇따르는 형태였다.
보호?
아니, 아니다.
저 정도쯤 되면, 관망에 가깝다.
삼 하나의 옆에서, 그를 돕는 삼 둘이 고개를 까딱였다.
“저 세 명만 유독 강한 것 아닐까?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나와 있는 것 보면….”
하지만, 삼 하나는 코웃음 치며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말도 안 돼. 굳이 세 명만 골라서 가르칠 이유가 없잖아. 누가 그런 븅신 같은 짓을 하겠어? 너랑 나만 봐도 그만큼 차이 나진 않는데.”
당연한 일이다!
설령 세 명만 가르쳤다고 하더라도,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하나와 둘이 아니라 하나와 열의 차이라고 하더라도, 결국은 다 열 살 남짓의 어린아이다.
심지어 지금까지 완전히 같은 수련을 받아온 아이들이었으니, 고작 세 달 만에 그리 큰 차이가 벌어질 턱이 없었다.
“일부러 얕보여서 진입을 유도하는 걸지도 몰라. 일기토는 받지 말고, 그대로 조여들어 간다.”
청률이 사전에 일렀던 대로, 삼 하나는 일단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했다.
허나, 간과한 것이 있다면.
“조, 조장! 조심해!!”
“!!”
─채앵!
전쟁은, 혼자서 두는 장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군 쪽에서 신중하게 접근하면 뭐 하나? 반대편이 똑같이 응수해줄 도의는 어디에도 없는데.
선두에 선 남자아이가 도를 치켜들고 갑작스럽게 몰아쳤다.
“가극이라도 연기하러 왔냐?! 광대같이 미적거리고 있어!”
“이찬! 그렇게 갑자기….”
“시끄러! 그 인간 말 못 들었어? 싸우자고!!”
이놈들은 전략이라는 걸 모르나?
‘미친놈!’
저 놈 하나만의 돌발 행동인 것도 아니었다.
다른 놈들은 미적거리다가도, 별로 상관없다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동시에, 냅다 바닥을 박차고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
그 움직임에 이렇다 할 묘리는 보이지 않았다.
다대다의 싸움이란 무릇, 얼마나 적은 소모로 상대의 힘을 받아내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가의 싸움.
그렇기에 합격진(合擊陳)이란, 하나의 대상에 있어 여러 방위를 확보하고, 그 여러 방위에서 동시에 공격을 몰아치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여러 곳의 빈틈을 만들고, 그 빈틈으로 동시에 공격을 몰아치게 하는 것.
그것이 단체 싸움의 기본일… 텐데.
‘멧돼지 새끼들이냐…?!’
놈들의 돌진에는 그런 기본이라고는 티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돌진, 돌진, 돌진!
그저 돌진!
하지만 빌어먹게도 억울한 점은, 그 단순하기 짝이 없는 돌진이 그 어떤 진형보다도 매섭게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이대로 쓸려나갈 순 없지.’
‘청률 공자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만 하면 돼!’
하지만 뭐면 어떤가.
어떤 적이 온다고 해도, 자신들의 방법으로 응수하면 그뿐인 일이다.
“받아친다! 방호진 2형!”
삼 하나의 구령과 동시에 청률의, 삼 조의 아이들이 넓은 호선으로 산개했다.
가운데에서부터 충격을 뒤로 받아넘겨, 종래에는 일자 형태의 전선을 유지하게 하는 진형.
전선의 붕괴를 막고, 천천히 적을 끌어들이는 것을 유도한다.
마지막 찰나까지 저 돌진에 무언가 술수가 담긴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무기가 부딪치기 직전까지 그 기세에 변화는 없었다.
일단, 계획대로였다.
‘설마 진짜 무슨 멧돼지 마냥 아무 생각 없이 돌진하는 것일 리는 없고…….’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나온다면야!’
이대로 첫 일격을 받아넘기고 뒤쪽으로 끌어당겨, 그대로 잡아먹듯 유린하면 될 것이었다.
전략이 있는 쪽과 없는 쪽이 붙는다면, 있는 쪽이 유리한 것이 당연지사.
삼 하나는 가장 앞에서 도를 뽑고 달려오는 사내아이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이마 위로 들어 올렸다가 힘껏 내리쳐 오는 도를, 검을 올려쳐 가로막았다.
‘좋아, 버틴다!’
흘리거나 피하여 다음 공격으로 이어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이것은 일대일의 비무가 아니라 단체로서의 결투.
즉, 굳이 위험을 감내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한 수를 막아내면, 바로 옆의 동료가 그 빈틈을 찌를 테니까.
그것이 바로 진형과 합격진의 원리였다.
그것이 계획이었고, 그대로만 된다면 맞서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콰앙!!
“흐읍?!”
그 도를 받아낸 순간.
생각이 바뀌었다.
‘어라.’
뒤지겠는데, 이거?
“워, 원호오오!!”
삼 하나의 급박한 외침에, 동료의 검이 끼어들어 도를 든 아이의 옆구리를 향해 찔러갔다.
─카캉!
하지만 역시 시간이 모자랐다.
다른 아이들이 공격할 만한 충분한 순간을 벌어줄 수 없었다.
아니, 그건 핑계일 뿐인가?
그저 압도적으로 힘에서 밀려났다.
내리쳐진 도는 전혀 힘을 잃지 않은 채로 궤도를 꺾었고, 난입해온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튕겨냈다.
“무슨, 저런 미친…!!”
“조장, 어떻게 하지? 다음 진형을!”
“……!!”
‘흘려내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찍은 주제에, 그것을 수직으로 꺾어 공격을 ‘튕겨냈다’.
한 번 방어에 부딪쳐서 힘이 꺾이고, 궤도를 틀어 또 한 번 꺾였음에도─
‘그래 놓고, 우리가 그냥 내지르는 힘보다 강하다고?’
빌어먹을. 저게 사람이야?
버텨내고 나발이고, 공격하고 자시고 간에!
한 번 부딪치는 순간, 그대로 밀려나는 꼴이라니.
이딴 걸 상대로 무슨 놈의 전략을 펼친단 말인가?
‘한 명이 막아내고, 여러 명이 동시에 공격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수를 줄여나간다….’
합격진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전술이다.
허나 이 전략의 전제는, 첫 번째로 ‘공격을 막아낸다’에 있다.
흘리거나 피한다면, 그만큼 여유 공간도 사라지고, 잇따르는 공격 또한 약해지니까 말이다.
하물며 지금은 단체전, 뒤를 찌를 수조차 없는 상황이니.
공격의 기회를 최대한으로 잡아내기 위해서는, 저 무지막지한 힘을 정면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저게 사람 새끼냐고….”
생각해 보니, 어제의 싸움에서는 똑같이 창을 부딪쳐 놓고 한쪽만 일방적으로 박살나지 않았던가.
어제까지야 그 창에 뭔가 문제가 있겠거니, 해왔었다만….
‘이게 되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격돌 자체가 불가능하다.
“조장! 지시를!”
“조장!!”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이대로 주저앉을 수도 없는 노릇.
‘그래도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지.’
삼 하나는 검을 꼬나쥐었다.
무엇을 위해 협동을 배웠는가.
무엇을 위해 다 같이 강해졌는가!
멧돼지가 아니라 호랑이라고 한들!
‘상관없어.’
힘을 합친다면 안 될 것도 없다.
통상적인 것이 안 된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그뿐이다.
다행인 것은, 저들 중 세 명은 지나치게 앞으로 나와서 돋보이려 한다는 것이었다.
즉, 저 세 명은 피격면이 넓었다.
다른 적이 뒤에 있는 틈을 찔러, 저 녀석들을 먼저 처리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수의 우위를 가져온다면!
‘…충분히 이길 수 있다!’
삼 하나는, 몹시 우연히도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설마 저 열 명 중에 딱 셋만 골라 가르친다는, 그러니까….
‘나머지는 쩌리고, 딱 세 명만 말도 안 되게 강하다.’
라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가능성을 간파했다면, 그 선택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일 것이다.
하지만 삼 하나는 그것을 몰랐다.
당연히 저들이 그랬고 다른 아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조금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저 열 명의 전력은 비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다른 녀석들을 제치고 세 명만 공략한다.’
라는 전략을 선택하기에 이르렀다.
“모사진 1형! 전위를 노린다!”
그것은 분명 행운이었다.
실제로 일귀와 이찬, 삼아가 돋보이기 위해 앞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나머지 일곱 명이 그 셋의 움직임을 따라오지 못해 뒤에서 시늉만 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리고, 그 결과.
─캉! 카강!
“큭!”
“이찬, 너무 앞으로 나서지 마!”
속절없이 뒤로 밀려나던 전선이, 조금이나마 유지되기 시작했다.
“……!!”
가능성이 보였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힘에서 밀려버린다고?
상관없다.
그렇게 날뛸 시간을 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참격과 찌르기의 힘이 절정에 이르기도 전에, 그 움직임은 전부 다른 방향으로 꺾여 다른 공격들을 방어해야만 했다.
모든 신경을 쏟아부어야 이렇게나마 현상이 유지된다는 점이 치욕스럽기 그지없었지만, 결국 살아남는 자가 강한 법.
이 셋을 꺾고 수의 우위를 점한다면, 설령 저놈들이 다른 방법으로 대처한다고 해도 차츰차츰 갉아먹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모사진 2형! 위치 교대!!”
사실상 저 뒤쪽의 일곱 명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지간히도 통솔이 안 된 무리인 모양이야!’
멍청한 것들.
아무리 강하면 뭐하나?
실전에서 하나 되어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삼 하나는 분주히도 아이들을 통솔했다.
고함치고, 검을 휘두르며, 일사불란하게 진형을 바꾸어 계속해서 적을 옥죄어 들어갔다.
“할 수 있어! 이대로만 하면!”
“좋아! 조장을 따라라!!”
일순, 모두의 표정에 희망이 스쳐갔다.
이길 수 있다.
아무리 괴물 같은 놈들이라고 결국 팔다리 두 개씩 달린 인간.
사실상 상대방의 방심에 기댄 작전에 불과했지만, 눈앞의 성과는 말초신경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그저─그들의 귓가에,
“흐음.”
작은 목소리가 울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는 없겠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