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식은 죽이 목으로 넘어간다 (5)
“허어, 생각보다… 상당하구려.”
“…이건 좀 놀랍지 않소?”
“저걸 황돈이 가르쳤단 말이오?”
“허허, 설마….”
아이들의 수준이 보통이 아니었다.
떡 벌어진 어깨 하며, 왠지 세 달 만에 키도 조금 큰 것 같기도 하고.
척 보기에도, 세 달 동안 혹독한 수련을 거쳐 저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눈에 서린 독기와 각자의 무기를 꼬나 쥔 저 기세는 결코 만만히 볼 수가 없었다.
각자의 가문에서 훈련시키는 후계들이나 방계의 아이들 중에도, 저런 기세를 지닌 아이는 좀처럼 없음을 알았으니 말이다.
“허허….”
“저것은….”
장로들은 허탈하게 웃으며 대체로 비슷한 생각을 한숨과 함께 머금었다.
황돈이 대단하다?
혹은, 몹시 대견하다?
아니다.
무슨 웃기지도 않은 소리인가.
저걸 황돈이 가르쳤다는 것을 믿을 바에는, 차라리 동네 개새끼가 공중제비를 세 바퀴 돌더니 사람으로 변했다는 말을 믿을 것이다.
허면 장로들이 무슨 생각을 했는가, 하면.
‘음, 뭘 잘못 주워 먹었나?’
그래, 황돈이 가르쳤다는 것을 믿느니 차라리 그게 좀 더 신빙성이 있지 싶다.
뒷산을 헤매다가 어디 인형설삼(人形雪蔘)이라도 주워 즙까지 짜 먹지 않고서야, 황돈의 아래에서 저런 아이들이 나올 수는 없었다.
‘물론 황가의 자본력을 생각하면, 그나마 흔한 것으로나마 영약을 때려부었을 가능성도 없진 않다만….’
약발도 약발 나름이지.
저건 분명히 체계적인 훈련을 받은 아이들의 기세였다.
“호부 밑에 견자 없다고들 하나, 견부 밑에 호자라….”
막말로, 저들 중 아무나 하나를 뽑아 황돈 본인과 싸움을 붙여도 가볍게 승리할 수 있을 듯 보였다.
너무 박한 평가일지도 모르지만, 이곳에 모인 인사들 중 그리 생각지 않는 이는 없었다.
황돈은 그런 녀석이었으니까.
모두가 어이없는 황당함에 빠져 있을 때, 적여문이 황소종에게 넌지시 물었다.
“황가에도 썩 훌륭한 무사가 있는 모양이오.”
“도식이 놈이야 무능하지만, 황가창법이 나약한 무공이라 생각한 적은 없소. 멸시받지 않을 정도는 되지 않겠소?”
황가가 아무리 상업의 가문이라고 한들, 육대가로서의 기초적인 무력 정도는 있다.
그 양은 부족하지만, 각 가문 최고수의 실력을 비교하면 황가 또한 다른 가문에 비해 밀리지 않을 테다.
애초에 황가의 장기가 무력이 아니기는 하겠으나─
결국에는 황돈이 이상한 것이지, 황가가 나약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말인 즉, 시선만 피한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가령, 다른 ‘스승’이라던가.
적여문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돈이 꽤 들었을 텐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구려. 나이를 먹으니 말귀가 어두워져서 원!”
“무얼 시치미를 떼시오. 어차피 물증이야 없는즉, 다들 같은 생각인 것을 모르지는 않을 터.”
황돈이 아니라 다른 이가 저 아이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대부분의 이들은 그리 확신하는 눈치였다.
증거는 없기에 무어라 추궁할 일은 되지 못하겠지만, 합당한 심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법이다.
황소종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허허, 나야 모르는 일이오. 그 아이가 머리가 나쁜 것은 아니란 것만 알 뿐이지. 설령 무언가 했다 하더라도, 뭐 어떻소?”
“어떻냐니?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응당 지켜야 할 명예가 있을진대.”
그것이 허용되지 않는 행위라는 것은 명명백백했다.
대리전이라 한들 그것을 가르치는 것 또한 개인의 재능이자 역량.
남에게 그 행위를 떠맡기는 것이 적발된다면, 어지간한 불명예로는 끝나지 않을 테다.
적여문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황소종은 도리어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명예라, 참 재밌는 말이오. 장사치에게 명예를 묻는 것도 퍽 우스운 일이지만, 글쎄….”
적발된다면.
그 말은 곧, 들키지 않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과 같지 않던가.
그리고 황가는, 그것을 막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훌륭한 방법의 대가였다.
“무엇이 되었든 그 아이의 능력이지 않겠소. 당장으로서는 말이오.”
“…뭐, 거야 그렇겠지.”
매수도 능력이다.
자금력 또한 개인의 훌륭한 능력이니, 그것으로 무어라 할 여지가 있겠는가.
들키지만 않는다면, 안 될 것은 무엇도 없다.
적여문은 탐탁찮았으나, 말마따나 증거 없이는 타박할 여지조차 없으니 그저 넘어갔다.
말뿐인 추궁은 그저 추한 언쟁으로 이어질 뿐임을 잘 알았다.
대신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허나 이리 되면 청유백이가 안쓰러워지겠구려. 이제야 조금이나마 오명을 씻으려 노력하는 모양새던데, 황돈에게 꺾여서야, 쯧쯧….”
“클클클, 뭐 어쩌겠소. 그래도 이 시험에서 진다 하여 목숨이 날아가지는 않을 테니, 그것이라도 위안 삼아야겠지.”
짧은 대화가 오가는 사이, 어느덧 푸른 두건을 두른 아이들도 결투장에 올랐다.
하지만 황돈의 아이들을 보았을 때만큼의 파격성은 없었다.
열 명 중 대다수는 기력은커녕 싸움의 의지조차 없는 것이 훤히 드러났고, 그나마 괜찮은 세 놈 정도도 손발이 굳어 떨고 있음을 멀리서도 볼 수 있을 정도로 긴장해 있었다.
길고 짧은 것은 대 봐야 아는 것이지만, 대충 봐도 견적이 나오는 것 또한 얼마든지 있는 법이다.
“금세 승부가 나겠군. 쯧, 시시해서는 안 될 터인데….”
“어찌되든 괜찮지 않겠소. 어차피 청가에는 청명휘도 남아 있고.”
그 누구도 이번의 결투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황돈에게 약간의 이변이 있었다 한들, 어차피 나아가서 다른 상대와 겨루면 그 한계가 여실히 보일 테니 말이다.
단지, 청유백이 가르친 아이들로는 그 한계를 드러내지 못할 뿐이었다.
모두가 그리 판단했다.
그러던 중, 다른 장로들 증 누군가가 흥미롭다는 양 목소리를 높였다.
“호오, 일기토를 할 생각인가?”
각 진영에서 한 명씩이 앞으로 나와 서로에게 무기를 겨누는 것이 보였다.
황가에서는 개중 가장 덩치가 큰 아이가 자신만만하게 나와 창을 치켜들었고, 청가에서는 그나마 쓸 만했다 생각했던 놈들 중 여자아이가 앞으로 나섰다.
창과 창의 대결.
무기의 우열은 없는 셈이었다.
황소종은 타박하듯 중얼거렸다.
“황가 녀석들은 유리함을 앞세워 천천히 파고들 수도 있었을 텐데, 좀 아쉽구려.”
“앞으로 싸울 차례가 세 번은 남았잖소. 전력을 온존하는 것이 악수는 아닐 테지.”
청가 녀석들이 이긴다면 조금이라도 기세를 가져올 효시가 된다.
황가 녀석들이 이긴다면 저기에서 그대로 기세로 찍어 누를 계기가 된다.
다수전의 반은 기세다.
그 숫자가 많고, 그 기세에 매몰되기 쉬운 어린 나이일수록 그러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가져오기 가장 쉬운 것은 역시나 대표의 일기토.
하지만, 가장 기세를 잃기 쉬운 것 또한 일기토다.
때문에 판단 자체는 맞다.
허나.
“…이길 자신이 있다는 건가?”
적여문은 의아해했다.
모든 일기토는 이긴다는 것이 전제되어야민 하는 전술이다.
이기지 못한다면, 그저 상황을 나쁘게만 만들 악수일 뿐이었다.
황소종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만만한 녀석 하나 먹이로 던져주고, 대충 지는 시늉이라도 하려는 셈일 테지. 저 소녀 좀 보시오. 창자루를 잡은 손부터가 떨리고 있잖소.”
“확실히… 그렇군.”
창대를 잡은 손이, 그리고 그것에서 이어진 어께 떨리는 것이 확연하게 보였다.
이 먼 거리에서 긴장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더 말 할 필요도 없을 테다.
저것이 속임수를 위시한 전술이 아니라면, 청유백에 아이들에게 승산은 전혀 없어 보였다.
* * *
삼아는 이 순간, 고작 잠깐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우리끼리 어떻게든 해야 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거지?”
“그래. 작전이든 뭐든.”
이찬이 말을 꺼내고, 일귀가 말을 정리하는 형태의 회의.
정겹고도 익숙한, 지난 수 년 동안이나 반복했던 추억의 한 편이었다.
앗, 설마….
‘이게 주마등인가?’
생각해 보니, 방금의 기억 말고 다른 게 떠오르는 것도 같다.
헌데, 뭐 별다른 떠오를 거리도 없다.
마교에 오기 전의 기억은 없다시피 하고, 그 이후로는 그저 잿빛의 일상이 반복될 뿐이었으니까.
그나 특별한 기억이라고는, 끝없이 구르고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반복되는 청유백과의 수련뿐이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방금 일귀가 언질했던 작전이 들려오는 듯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른다.
“몇 합만 주고받은 다음 빠져. 의외로 만만치 않다는 것, 상대한테 그 정도만 각인시켜주면 돼.”
“왜 하필 나야?”
“어차피 우리 실력은 비슷비슷해. 결투는 서로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시작할 테니까, 창을 쓰는 네가 조금이나마 유리할 거야.”
“…어떻게든 해 볼게.”
청유백은 결국 아무런 말도 해 주지 않았다.
‘호랑이는 새끼한테 군림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모르겠다.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앞을 바라보고, 일귀와 이찬과 나누었던 말을 조금이나마 시도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허, 참. 너희는 왜 세 달 동안 바뀐 게 없는 것 같냐?”
“…….”
“뭐,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죽이진 않을 테니까, 적당히 맞다가 들어가.”
눈앞에 선 머저리가 무어라고 지껄이지만, 귓등을 타고 그저 흘렀다.
‘하아, 하아….’
피부를 타고 내달리는 긴장에, 삼아는 그저 창대를 꼬나 쥐었다.
─꽈득, 콰드득.
손의 떨림이 멈추지가 않는다.
이게 뭐지?
‘부서져버릴 것 같아.’
이유도 없이 가빠오는 숨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고, 어느덧 결투의 시작을 알려오는 나각 소리가 허공에 울려왔다.
어지럽다.
‘선생님이 한마디만 해 주셔도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 긴장도 조금이나마 잦아들었을지도 모른다.
진정을 위해 조금이나마 시간을 주면 좋겠다고, 몇 번이고 생각했지만.
시간과 상대 중 그 누구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바로 끝내주마!!”
상대가 바닥을 박찼다.
창을 들고, 뒤로 치켜올리고, 좌측으로 뻗어 쇄도해온다….
그리고 그것이, 얼굴의 지척까지 쇄도한 순간에도 삼아는 눈을 부릅뜨고 숨을 골랐다.
그래, 세 합.
딱 세 합만 버티고 물러나면 된다.
어디선가 선생님께서 보고 계실 테니, 중간에 전음으로라도 무언가 기책을 내려 주실지도 모른다.
─삼아는, 그리 생각했다.
신형과 신형이 교차했다.
이미 지척까지 다다른 창끝이 삼아의 오른편에서 쇄도했다.
‘막아내고, 그대로 후려치자.’
늦게 반응했지만, 느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삼아는 창을 들어 대응하듯 휘둘렀다.
한 번, 창대를 부딪쳐 튕겨내고.
그다음, 안쪽으로 파고들어 머리를 노릴 것이다.
‘물론 상대도 막겠지만.’
그래도,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
그렇게 몇 번인가 공방을 반복하고 나면, 뒤로 물러나 다시금 정신을 가다듬을 시간도 생길 것이다….
삼아는 그렇게 생각했다.
─빠아악!!
한 번, 창과 창이 부딪쳤다.
서로가 서로를 가늠하기 위한 한 방이었기에, 그것에 무언가 신묘한 변화나 묘리가 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특이한 점이라면, 그 소리.
창과 창이 부딪치며 난 소리가 평소보다도 기괴할 정도로 컸다.
“……?!?!”
“?”
삼아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모든 시야가, 상대의 얼굴과 몸통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시선, 그리고 움직임.
그 모든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손끝이 아니라 몸통을 보아야만 했다.
자신이 이것을 어찌 알고 있는지는 이 순간 알 수 없었지만, 그저 알았다.
그리고 삼아가 자신이 방금 한 행동을 이해한 것은, 지금 마주한 상대의 너머.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경악에 물든 것을 발견한 이후였다.
“차, 차, 창이….”
“부러졌어…?”
‘창?’
삼아의 시선이 그제야 무기 끝을 향했다.
자신의 창은 멀쩡했다.
먼저 결정한 움직임을 그치지 않았기에, 상대방의 창을 튕겨낸 자신의 창은 신속하게 상대의 머리통을 향해 쇄도했다.
그렇다면, 부서진 것은.
“어라?”
“잠까─”
─빠아아아아악!!
삼아가 상대방의 창대가 부서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과, 상대방의 정수리가 창대에 강타당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오우.”
이찬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부서진 것이 창대인지 대가리인지 살짝 고민할 동안, 삼아는 깊게 숨을 내쉬며 주변의 시선을 돌아보았다.
자신의 손과, 지금 이 광경을 바라보는 관중과, 자신의 뒤에서 이것을 바라보는 이찬까지.
‘…이찬아.’
응.
‘일귀가 몇 합 버티고 빠지라고 했었지?’
…응.
‘근데, 이거….’
─쿠웅!
황색 두건을 쓴 육중한 신체가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아니, 이미 황색 두건은 아니었다.
피로 물들어, 정수리 부분에서부터 붉은 색이 퍼져나가고 있었으니.
삼아는 이찬을 돌아보았다.
‘…이러면 어떻게 해?’
정적.
비단 이찬과 삼아의 사이에서가 아닌, 이 무대 위, 그리고 대결투장의 관중 전체가 일순 침묵하듯 멈추었다.
그리고, 찰나.
“모, 몰라! 조져!!”
“우와아아아아!!”
일기토의 결과로써, 한순간에 생겨난 기세는 군중을 지배했다.
싸울 생각도 없었던 일곱 아이들까지, 어느 샌가 지배되어 무기를 치켜들고─
“이런 미친…! 막아!!”
황색과 청색이 한데 섞여 격돌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