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84화 (84/200)

제84화. 내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식은 죽이 목으로 넘어간다 (4)

결국 시간은 그렇게 무의미하게 지나갔다.

적당히 눈치를 봐가며 개인의 단련을 반복하기는 했지만, 그 중 어떤 것도 ‘단체전’이라는 방식에 걸맞은 수련은 없었다.

숫자는 언제나 가장 명확한 힘의 단위.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살리는 방법을 배워야만 했지만, 결국 마지막 날까지 똑같은 일상이 반복될 뿐이었다.

일곱의 다른 아이들은 계속 영문 모를 표정으로 만마서고로 출근하고, 청유백은 방 안에서 그저 가부좌를 틀고 뭔지도 모를 명상을 반복했다.

언제까지냐고 묻는다면, 아주 간단하게 답할 수 있으리라.

“지금부터! 천마지회 제이(二) 제전─훈(訓)의 시험을 시작하겠다!”

바로, 육대가의 가주 중 하나, 적가주 적무혁이 내공을 담아 사자후를 내지르고.

─와아아아아!!

그에 호응하듯, 공개적으로 치러질 제이(二) 시험의 관중들이 연호하는.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

* * *

종목은 단체전, 방식은 승자전(勝者戰).

두 명이서 맞붙어 패자는 탈락하고 승자만이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그 꼭대기에서 최종적인 승자가 모든 영예를 가지는, 간편하고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으리라.

패자에게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작은 단점이지만, 어디 실전에서 패배한다고 하여 사지 멀쩡히 살려 보내주는 경우가 많다던가.

두 번의 기회가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에는, 별로 크게는 상관없을 테다.

열다섯 중 진정 승리를 노리는 것은 채 반수도 되지 않고, 그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의 승리는 보장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유능한 스승이 있는가, 없는가.

그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할 터였다.

비단 실력뿐만이 아니라….

가령 대기실이라던가.

‘축축하고… 습하네.’

삼아는 짚단 위에 몸을 누이며 축축하게 젖은 흙을 바스라뜨렸다.

청유백의 아이들이 인도받은 대기실은 변변찮은 초가였다.

생김새를 보니 곳간도, 창고도 아니요─거진 마구간이나 되었으리라.

그나마 나무 밑동이나 탁자 따위를 가져다 놓아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조금이나마 옅어졌지만, 삼아는 새삼 마교에 퍼진 청유백의 소문이 상당히 기묘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옛 교관들이 말하는 것을 떠올리면 분명 구제불능의 쓰레기일진대, 직접 목도한 것이나 최근 본 광경들을 보면 결코 그리 깎아내려질 위인이 아닐 터였다.

그러다 문득, 이찬이 하품하며 입을 열었다.

“곧 시작이겠지?”

“아마도.”

“규칙이 뭐야? 얼마나 이겨야 하는데?”

삼아는 왠지 오늘따라 더디게 흐르는 것 같은 시간에 몸서리치며, 일귀와 이찬에게 규칙을 설명했다.

“1승에 20점, 그리고… 책을 찾으면 50점이랬어.”

“책? 무슨 책?”

“뭐야, 몰랐어? 선생님이 계속 만마서고에 가시던 게 책 때문이었잖아. 무슨… 책 제목을 찾아야 한다던데, 나도 잘 몰라. 우리랑은 상관없는 일이랬거든.”

삼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이 있다 한들 이제 와 무슨 소용이겠는가.

당장 잠시 후면 싸움을 위해 나가야 할 테고, 그런 자질구레한 것 따위는 아무 의미 없게 될 텐데.

그저 살기 위해 싸울 뿐이었고, 더 나은 삶을, 더 훌륭한 성공을 위해 싸울 뿐이었다.

이 훈(訓)의 시험은 후계자들에게도 중요했지만, 귀아대의 아이들에게도 몹시 중요한 것이었다.

죽고 살고 불구가 되는 생사의 문제는 둘째 치더라도, 이 시험의 결과로 앞으로의 인생이 결정될 테니 말이다.

어떤 단체에 소속될지, 어떤 보직으로 삶을 끝마칠지가 바로 오늘 결정되리라.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내일 모레?

오늘 열다섯 조 중 절반을 거르고, 내일 다시 절반을, 모레에 다시 절반을 거르게 될 테니, 첫 싸움에서 지지만 않는다면 내일 모레까지 희망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우린 망했어. 좆됐다고.”

…지금 희망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어허 이찬, 나쁜 말.”

“좆까! 좆까라고! 망했다니까?! 아무것도 배운 게 없는데 어떻게 이겨!!”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함성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더불어, 찰싹찰싹 제 입가를 때리는 삼아의 손길도 성가셨다.

“그만 좀 해!”

빌어먹을, 뭐가 그리 태평한지!

하나같이 이해가 되는 것이 없었다.

보름이나 시간을 허비한 청유백도, 대체 무슨 생각인지 고분고분 그의 말을 따른 일귀와 삼아도!

일귀는 까드득, 이빨을 악물며 소리쳤다.

“처음에는 뭔가 뜻이 있는 줄 알았지. 거지같긴 해도 강한 사람이니까, 따라만 가면 어떻게든 될 줄 알았지!!”

등불을 들고 걸어가길래 길인 줄 알고 쫓아갔더니, 그 끝에 보이는 것은 성공과 영광이 아니라 끔찍한 패배였다.

아직 싸워보지는 않았지만, 굳이 말해서 무엇 하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뭔가 가르쳐 주겠지’, ‘뭔가 생각이 있겠지’ 하면서 믿었건만 결국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았잖은가.

비단 단체전에 관한 이야기만도 아니었다.

‘정말로, 아무것도 배운 게 없잖아!’

한 것이라고는 그냥 기초적인 단련,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체력 훈련뿐이었다.

심지어 그것조차, 그저 제가 짜증난다고 화풀이로 굴린 것만 같은 모양새였고 말이다.

어떠한 무공도, 심지어 저잣거리의 낭인조차 알 삼재검법(三才劍法) 한 초식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아무것도 가르친 게 없는데 어떻게 이기냐고!!”

“…….”

“이찬아….”

세 달은 길다.

이미 성장할 대로 성장하고, 더 이상 나아갈 곳이 적은 성인이라면 모르겠으나, 귀아대 수준의 어린아이들이라면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기교가 되었든, 육체가 되었든 말이다.

억지로라도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던 아이들은 이찬의 일침에 눈에 띄게 표정이 어두워졌다.

입에 담지 않았다 뿐이지, 저마다 생각했던 것은 비슷했던 탓이었다.

“…시간이 된 것 같아. 누가 온다.”

일귀는 걱정에 침음을 흘리다가도, 귀를 쫑긋거리더니 고개를 들어 문을 돌아보았다.

“두 명인가?”

“뭐? 그걸 어떻게 알아?”

“그야… 들으면 알잖아.”

발걸음의 무게와 간격을 보면 그것도 남성 둘이었다.

일귀는 확실하다는 듯 말했지만, 되려 이찬은 기가 차다는 듯 대꾸했다.

“아니, 보통 모르거든? 그딴 거. 농담할 기력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이나 좀 해봐. 대장이잖아.”

문은 굳건히 닫혀 있었고, 저 밖에서 누가 오는지도 모를진대.

그걸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찬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기에, 일귀는 머쓱해하며 제 귓가를 매만졌다.

‘…내가 이렇게 예민했나?’

그러나 지금껏 깨닫지 못했던 감각에 집중할 새도 없이, 경첩음과 함께 문이 열어젖혀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보이는 것은, 청유백과 동행한 마사급의 무사.

갑작스러운 등장에 방은 순식간에 아이들의 웅성거림으로 가득 찼다.

‘벌써? 하지만… 우리 앞에 두 차례나 있었잖아.’

‘순식간에 끝났나보지, 뭘.’

뭐가 어찌 되었든 시간이 된 것이다.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지금 나가야만 했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사형장의 이슬로 산화할 사형수의 발걸음이 그러할까.

지은 죄?

그릇된 스승을 따른 것도 죄라면 죄일 테다.

이찬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스윽, 청유백을 올려다보았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지금이라도, 무언가 승리의 비책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멍청하기 그지없는 희망을 품고서 말이다.

하지만 청유백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졸리다는 듯 하품했다.

“…씨발.”

기어코 이찬의 속내가 바깥으로 터져 나왔다.

작지만, 결코 옅지는 않은.

모두에게 들릴 법한 소리였다.

일귀와 삼아가 당황하며 이찬을 말리기도 이전에, 이찬이 청유백의 앞에 서서는 언성을 높였다.

“당신,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퍽 당황스럽군. 뭘 묻는 건지도 모르겠어.”

청유백은 가볍게 눈을 치켜뜨며 응대했지만, 말처럼 당황한 듯 보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알고도 시치미 떼는 표정.

이찬의 이빨이 거칠게 부딪쳤다.

“그 잘난 입으로 말해 보십쇼. 왜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 겁니까? 우리는 성장했어요. 당신이 구르라면 구르고, 달리라면 달리고! 뭘 하라고 해도 수행했지 않습니까!”

“…그랬지?”

왜 의문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런데 이게 결과입니까? 용두사미요?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기초를 다진 것도 아니요, 그 자체로 대단한 무언가를 깨우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허면, 뭔가 작전이 있기라도 한 겁니까? 그것도 아닐 텐데요!”

이젠 정말로 시간이 없다.

당장 귓가에 뭔가 속삭인다 하더라도, 그것을 되새기며 기억할 시간조차도 없다.

당장 결투장 위로 올라가야 할 판이니 말이다.

“단순해 빠진 이유를 묻는군.”

하지만, 그 급박한 마음은 전해지지 않은 것일까.

혹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것일까.

“산군이 어디 제 자식에게 군림하는 법을 가르치던가?”

청유백은 그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 * *

천산 외곽, 협곡 지대에 위치한 너비 백 장, 폭 팔십 장의 크기로 땅을 깎아지른 평야.

이곳을 이르기를, 마교의 대결투장이라 불리었다.

사방에 계단 형태의 벽을 둘러쌓아 방문자들이 격투를 참관할 수 있게 했고, 그 최대 수용 수는 거진 천에 달했으니.

이곳에서 치러지는 결투란, 곧 천 명의 증인을 내세운 낙장불입의 생사결과도 같았다.

결과에 만약이란 없으며, 불복이란 곧 죽음으로 갚아야 할 치욕.

모든 결과가 천 명의 시야에 극단적으로 새겨지는 만큼, 이 장소를 사용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즉, 극히 한정된 상황에서만 사용되었다는 소리였다.

복마제전, 신마번제, 적혈쟁투….

그 경우가 한 손에 꼽을 만큼 적고, 이번 천마지회는 별다를 것 없는 그 중 하나였다.

다만, 그 행사의 크기가 지금껏 있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후계의 자리가 구경거리로까지 전락했구려. 퍽 잘하는 짓이오.”

멀리서 들려오는 함성 소리를 들으며, 적가의 장로 적여문은 한탄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결투장의 한 켠, 교의 고위 인사들만이 자리할 수 있는 위치에 앉아 있었지만, 이 자리라고 해서 소란이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더 높은 자리인 만큼, 소란이 한눈에 보여 고까운 기분만 커질 뿐이다.

“어쩌겠소? 수십 년에 한 번 있는, 후일의 마교 또한 건재하다는 것을 알릴 기회인데 말이오.”

“기회는 무슨. 행동으로 알려야지, 이딴 머저리 같은 홍보가 아니라.”

“그건 동의하는 바이오만, 이쪽이 가성비가 좋게 먹히는지라. 장로께선 전쟁 한 번 하는데 군량이 얼마나 드는지 아시오?”

“알기야 하지. 알긴 하오만…. 쯧. 이래 봐야 계속 악순환 아니오. 세력이 축소되니 영향이 줄고, 영향이 줄면 돈이 줄고, 돈이 줄어드니 세력을 넓힐 수가 없지.”

적여문은 한숨을 내쉬며 제게 대꾸한 사내를 돌아보았다.

황색 거북이가 수놓아진 장포를 입은 중년 사내.

황가의 장로인 황소종이었다.

적가는 전쟁을 담당하고, 황가는 그에 필요한 군량과 보급을 담당하니 그 인사들끼리야 싫어도 계속 얼굴을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 대비는 언제 해 두어도 나쁠 것 없으니 말이다.

적여문과 황소종도, 그런 인연으로 이미 수십 년 간이나 인연에 부대낀 사이였다.

황소종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곧 해결될 것이오. 천마지회가 끝나면 군소 세력들은 제 편을 정해야만 할 테고, 감히 반란을 일으켜 새로운 마교랍시고 천명한 사마신교(死魔神敎) 놈들의 목을 칠 기회도 될 테니. 그때를 기다리면 되지 않겠소.”

“…부디 그리 되길 바랄 뿐이오.”

계획이야 좋다지만, 어디 세상사가 마음먹은 대로 흘러간다던가.

적여문은 눈을 흘기며 결투장에 오르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마교의 앞날이 어찌되든 간에, 지금 이 시험으로써 마교의 앞날을 외부에 천명해야만 했다.

우리의 후대는 이다지도 강건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역시 저 결투의 수준이 명확해야 하리라.

비록, 진짜 밑천을 내보일 수는 없으니 대리전에 그친다지만.

방금까지는 꽤 괜찮았다.

몇 가지 의외의 상황이 있어 그것을 감안한다고 해도 말이다.

옆의─다른 가문의 장로들이나 검대의 대주, 예하 문파의 대표들 따위가 웅성대는 소리를 귀에 담아 보니, 대체로 같은 이야기였다.

“녹지연 그 아이가 묵초련에게 패한 것은 의외였소.”

“그리 따지면 백가의 백소하도 마찬가지 아니겠소? 훈의 시험에서 백가는 거진 제외되다시피 할 줄 알았는데, 예상 외로 나쁘지 않은 무위였으니 말이오.”

“허허, 그게 어디 그 아이의 소위겠습니까.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겠지요.”

묵초련과 녹지연, 적영과 백소하.

청명휘나 적철진 등의 기대주들에 비하면 관심이 덜한 아이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천마지회의 참가자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체로 마교 제일의 후기지수 중 하나라는 것을 증명하는 자리와도 같았다.

‘마교의 후대가 육대가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나….’

그래도, 저들이 후대 마교의 기준점으로서 작용할 것은 명료한 사실이리라.

강함의 기준이자 서열의 기준.

그것을 오늘 세우는 것이다.

“이번 순서가….”

“청가의 청유백과 황가의 황도식이구려.”

“아, 이런. 하필 구제불능 둘이 모였구만그래. 황 가주께서는 다른 자식들도 있으시면서 어찌 황돈 같은 놈을 내보내셨는지….”

둘의 이름이 언급되자마자, 한순간에 한숨과 한탄으로 변해가는 분위기가 들려왔다.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다.

빛나는 이가 있다면, 상대적으로 바래는 이도 있는 법이다.

“그래도 청유백이는 예상보다 활약하고 있지 않소?”

“아직은 모를 일이라고 보오. 의외의 행보기는 하나, 단 한 번뿐일 행운일지, 진짜 실력일지는 아무도 모를 테니까.”

“아, 저기 오는구만. 보기나 하십시다.”

누군가의 언질과 동시에, 결투장의 한 켠에서 중앙으로 다가오는 열 명의 아이들을 가리켰다.

편을 분간하기 위해, 각 가문의 색을 가리키는 두건을 머리에 둘러맨 아이들.

지금 무대에 오르는 아이들은 황가의, 즉 황돈의 아이들이었다.

솔직히 기대는 않았다.

헌데….

저건 뭐야?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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