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중요한 건 명분이야 (5)
“…참 반가운 면상이군.”
여기서 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적가의 무인이 개입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은 상정한 바이지만, 이 자가 직접 움직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저 참가에 의의를 둔 다른 후계자들과는 달리, 적철진은 진심으로 천마의 위(位)를 노리는 이 중 하나일 테니 말이다.
‘이런 사사로운 일에 움직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그저 바쁘니까 오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딴 하잘것없는 이유로 인한 추측이 아니었다.
적철진은 적가의 장남이며, 차기 소교주, 즉 천마지회의 우승자로 점쳐지는 인간.
이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새로운 마교의 새로운 정점으로서 군림할 것이라고 회자되는 놈이다.
‘물론 이뤄지지 않을 꿈이겠다만.’
최소한, 저잣거리의 가담항설이 듣기로는 분명 그러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마교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아이가 아니겠느냐.]
청유백은 쥐고 있던 적철민의 손가락을 놓으며 이죽거렸다.
“조용히 끝내고자 하던 일이 아니었나?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무릇 사고를 해결함에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다.
누구도 모르게 문제를 해결하고,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는다.
보통 그것을 최선으로 친다.
그 선에서 끝난다면 그 누구에게도 책임은 생기지 않는다.
‘그저 쉬쉬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다.
너무 많은 이목이 끌렸다.
개인 간의 작은 일이라고 한들, 그것이 공적인 사건으로. 양지의 일로 끌려져 나오는 순간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건의 해결은 별도의 문제이고, 반드시 누군가는 그 문제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했다.
현 마교의 모든 이목이 집중되는 적철진이 나선 시점에서, 이목을 끄니 마니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어쩔 생각이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표정에 드러나는 것이라고는 일말의 피곤함과 귀찮음 정도.
적철진은, 그저 무표정을 유지하며 입을 열었다.
“단순한 일이다.”
“단순하다고?”
“책임을 짊어져야 하는 일이 생겼고, 책임을 짊어지게 만든다.”
감정이 옅다는 것을 넘어, 마치 생각조차 멈춘 듯한 모양새.
하지만 그럼에도, 입으로 내뱉는 뜻만큼은 명확했다.
“그저 그것이 전부다.”
청유백과 적철진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싸워야 하는가.
혹은, 그럴 필요는 없는가.
서로를 짐작하고, 서로를 가늠하는 시선이 오간 뒤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적철진이었다.
“그렇군, 청가의 문양….”
적철진은 청유백의 가슴팍에 수놓아진 청색 늑대의 문양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는, 흥미롭다는 듯 목청을 울렸다.
“네가 그 청유백이군.”
“날 아나?”
“항간에 소문이 자자한데, 이상할 게 무어 있을까. 네가 날 알듯이 말이야.”
솔직히 의외였다.
저를 알고 있었던가.
최소한, 청유백의 몸에 남은 기억에서는 적철진과의 친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껏 마주치지 못했었지.’
지금껏 기묘하게 엇갈려 한 순간씩 지나치기 일쑤였으니, 오히려 모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청유백이 적철진을 알아본 것도, 적철진의 기세로 하여금 넘겨짚어 추측한 것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적철진이 청유백을 안다면, 그것은 개인적으로 조사를 했다는 뜻.
최소한 방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얕보지도 않았다.
그것의 증명과고 같았다.
적철진이 말을 이었다.
“그 흑사는 요행으로 잡을 만한 녀석이 아닌 것을 기억한다. 호승심이 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
하긴, 그저 소문으로 청유백의 결과를 접한 이들과, 직접 복마동에서 청유백을 마주한 이들의 반응은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그중에서도, 적철진은 그 흑사를 직접 보았을 터인 인물.
[하기사, 그것을 직접 본 아이라면… 그저 운으로 흑사를 넘겼다는 말은 하지 못할 테지.]
복마동에 같이 들어갔던 후계자들이 청유백을 멸시하지 않듯, 적철진 또한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적철진은 공허하게 청유백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허나, 그렇다 하여 적가의 일을 방해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적가의 일이라?”
“적가의 명예가 관계된 일이니, 적가의 일이지.”
말뜻은 명료했다.
우리의 일이니,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너는, 이곳에 있을 자격이 없다.
적철진은 무감정하게 말을 이었다.
“떠나라, 청유백.”
그 말과 동시에, 적철진이 단전의 마기를 끌어올렸다.
─고오오오!
잠시도 지나지 않아, 숨 막히는 짙은 마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꺽… 혀, 형님….”
청유백에게는 상쾌한 산들바람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적철민은 숨을 껄떡거리며 제 목을 쥐어짰다.
적철진은 무리하는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음에도, 청유백은 그 마기의 크기에 혀를 내둘렀다.
[강하구나. 저 나이에… 마두급인가. 그것도 중하위는 되겠어. 지난날의 만면귀와도 싸워볼 법하겠구나.]
‘과연, 차기 교주의 재목은 떡잎부터 다르다 이건가.’
꽤 흥미롭다 해야 할까.
이 마기의 양은 분명 신마단을 취한 방증이겠지만, 만들어진 재능 또한 분명히 개인의 능력이다.
‘지금 싸운다면….’
[현명한 선택은 아닐 테지.]
분명, 승리를 장담하기는 힘들다.
지금 끌어올린 마기가 적철진의 전력은 아닐 테고, 어차피 싸운다고 한들 곧 적가의 무인이 들이닥칠 테다.
허나, 이리 말없이 물러나면 싸움에서 진 개와 무엇이 다를까.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나는 오히려 검을 도난단한 피해자 아닌가? 그리 날 선 태도로 대할 상황이 아니라 보는데.”
“도난의 결과치고는 퍽 지나친 현장으로 보인다만.”
적철진은 바닥에 쓰러진 두 구의 시체를 가리켰다.
목에서 울컥이던 핏물도 이제는 그쳐, 바닥이 흥건하게 피로 들어차 있었다.
마교의 율법이 엄하다지만, 도둑질의 대가를 목숨으로써 받게 하지는 않는다.
허나, 청유백도 할 말은 있었다.
“정당한 결투의 결과였다.”
엄밀히 말하면, 정당하지도 않았고, 결투도 아니었으며, 아직 결과조차 나지 않았지만.
아무튼 간에. 저가 먼저 덤빈 것조차도 아니지 않던가.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먼저 치지는 않았다.
“심지어 정당방위였지. 결투는 저쪽에서 걸어온 것이다. 나는 받아들였을 뿐이야.”
“…….”
“눈이 있다면 봐라. 네놈도 알 수 있을 테지.”
도는 칼집에서 뽑혀져 나와 있고, 별다른 독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싸움의 형태는 명명백백히, 두 사람이 동시에 덤벼든 형태.
이곳에 침입한 것은 청유백이겠으나, 싸움을 누가 걸어왔는지는.
쉬이 알 수 있었다.
“…….”
당연히 그것을 적철진이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저, 한 번쯤 걸고넘어진 것뿐이었다. 이 정도 말로서 넘어간다면 쉬이 끝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안타깝다 해야 할지.
청유백이 그런 상대는 아니었다.
“…그래, 네 말이 옳다.”
먼저 이 일의 단초를 제공한 것도 적철민이고, 결투를 청하여 일을 키운 것 또한 적철민이다.
그리고 이제서 무릎을 꿇어 결투에서 패배한 것까지도 그이니, 적철진은 무어라 이치에 맞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부당했다 한들, 저 놈의 불명예였겠지.”
모든 명분이 명확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적철진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좋다. 인정하겠다.”
“그 말인즉….”
“허나, 물러나야 함은 변하지 않는다.”
어느새, 적철진의 허리춤에 매달린 칼집 하나가 비워져 있었다.
적철진의 오른손에 들린 도는 고요하게 공기를 가르며, 청유백의 목을 향해 치켜세워졌다.
─철컥.
“떠나라, 청유백.”
“적가의 명예도 땅에 떨어졌군. 결국 제 사람 챙기기에 급급하다 그건가?”
“뭔가 오해한 모양이군.”
“오해?”
오해는 무슨 병신 같은 오해.
청유백은 눈알을 굴리며 이죽거렸다.
“모가지에 칼 들이밀고 꺼지라 하는 것이 요즘 새로 배우는 명예인가 보지? 아주 흥미롭군. 내가 시대에 뒤처진 모양이야. 결국 이놈을 사지 멀쩡히 보내 달라는 것 아닌가!”
“틀렸다.”
“허, 틀려?”
끄덕.
청유백의 반문에 적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철진은 말을 이었다.
“이미 청한 결투를 무를 수는 없다. 또한, 명예롭지 않은 패배를 받아들일 수는 더더욱 없지.”
그리고 자연스럽게, 도를 한 손으로 꼬나쥐고는 냉정하게 청유백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이 결투는 너의 승리다. 청유백.”
고작 그딴 말 한마디로 결투를 마무리 지을 셈인가.
청유백이, 그리 대꾸하기도 이전에.
“……!!”
청유백의 시선이 따라가기도 이전에, 적철진은 어느새 청유백의 지척에 쇄도해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적철민의 지척.
더욱 정확히는, 적철민의 머리 위였다.
옆이 아닌, 위.
어찌 위가 되었느냐 묻는다면─
[…저, 저런…!!]
‘……!!’
─투둑.
이제, 목이 없어진 몸뚱어리가 바닥으로 기우는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
적철진은 도를 떨쳐 피를 떨어내곤, 별일 아니었다는 듯 갈무리했다.
“가문의 과오는 가문의 손으로 씻는다.”
“……!!”
“가문의 명예를 떨어뜨린 자는, 가문의 손으로 처리한다.”
“허…!!”
“결코 부외자가 손을 댈 만한 일이 아니다.”
이제 끝이라는 듯, 적철진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래, 이상하다 싶었다.
대체 어떤 책임을, 누구에게 지게 만들 생각이길래 이 녀석이 직접 왔는가.
답은 명확했다.
애초부터, 적철민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 * *
적철진은 더 이상의 무엇도 없이 떠나갔다.
인사를 나눌 사이도 아니었고, 잠시의 애도를 지닐 관계도 아니었다.
청유백이 무어라 길을 막아설 틈도 없이, 더 이상의 가치를 찾지 못한 듯 방을 나섰다.
그리고 이어 들려온 것은 먼 곳에서 다가오는 여러 장정의 발걸음 소리.
당연히 사정 설명 따위의 귀찮은 일이 청유백의 취향이 아님은 명백했다.
청유백은 서둘러 홍련검을 챙겨서 자리를 떴다.
뒷골목의 그림자를 내달려 저잣거리를 벗어나고, 마을의 경계를 넘어 숲길에 이르기까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빌어먹을.”
[…….]
만에 하나의 경우지만, 추적의 가능성은 조금이라도 없는 편이 낫다.
다짜고짜 자신을 적가 후계 암살의 흉수로 몰아 추포하는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니 말이다.
뭐, 비약이 심한 경우이기는 하다.
청유백은 까득, 어금니를 악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본디 이 정도는 아니었을 터인데.’
아무리 적가에게 명예가 중요시된다 한들, 직계의 목을 아무 주저 없이 쳐낼 정도로 냉혹하지는 않았다.
천화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 아이의 독단적인 판단일 수도 있지 않겠느냐?]
‘아니, 그럴 리는… 없겠지.’
적우각이면 몰라도, 적철진과 적철민은 같은 배에서 나온 친형제다.
일순간의 감정적인 판단으로 주저 없이 목을 쳐버리지는 않을 테다.
아니, 설령 사이가 몹시 나빴다고 하더라도 이번의 원인이 일순간의 분노 탓은 아니리라.
‘적철진은 내내 무표정한 채였으니.’
마치, 제 의지도 아닌─그저 공무를 수행한다는 듯 말이다.
감정적이라기보다는, 도리어 지나치게 이지적이었다.
필요해서 내린 판단을, 필요해서 수행한 것이다.
그러니, 적가 전체의 총의라 보는 것이 옳았다.
‘갑자기 살인 사건의 흉수로 몰리지는 않겠지만, 기분이… 더럽군.’
[그래도 괜찮지 않으냐. 홍련검이 품에 있으니, 당초의 목적은 달성한 게야. 그렇지 않으냐?]
적철민의 머리에 예절을 쑤셔 박아 주지 못하게 된 것이 아쉽긴 하지만, 못다 한 예절 교육은 염라대왕 앞에서 받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청유백은 여전히 분노한 채였다.
침묵 속에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 나뭇가지 너머에서 들려오는 날짐승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청유백이 입을 연 것은, 그러한 정적이 몇백 걸음이고 계속된 이후였다.
“천화.”
[으, 음?]
“네 대의 마교는 어떠했지? 악(惡)이란 무엇이던가? 네 대의 마교는 악하다 말할 수 있었나?”
전혀 상관없는 뜬금없는 질문.
천화는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그게 무슨 소리냐’라는 반문이 나올 뻔했다.
하지만, 청유백의 태도는 기묘하리만치 진중했고.
저도 모르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잘은 모른다. 본녀의 기억이 온전치 않으니 말이다.]
홍련검을 찾을 때 같이 찾았던 반지의 존재로 조금이나마 단편적인 기억을 찾았다고는 해도, 전체에 비한다면 극히 일부의 편린일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것은 기억했다.
그녀 본연의 기억이 아닌, 이 몸에 강림하며 얻은 다른 기억.
청유백의 기억은 온전했다.
[허나 청유백, 본래 이 몸의 주인이었던 아이의 기억에 미루어 말하건대… 그 질문의 대답은, ‘아니다’겠구나.]
악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농사를 짓는 농사꾼의 입장이라면, 작물을 갉아먹는 벌레는 해악이다.
그리고 그러한 벌레를 잡아먹는 새는 분명한 ‘이로운’ 정의의 일부이리라.
허나 어떨까.
벌레의 입장이 되어 본다면, 결코 제 동포를 포식하는 새를 정의라 일컫지 못할 것이다.
누가 마교를 악이라 칭했던가.
교인들 자신이, 민중들 자신이 스스로 악이라 칭했던가.
저 산길로 나가 반나절도 걷지 않아 나오는, 하루의 시작을 밭일로 시작하여 잠시의 새참을 생의 낙으로 여기는 사람들마저 악이라 칭할 수 있는가.
마교를 악이라 칭한 것은 간사한 중원의 무리들이다.
비옥하고, 기름진 땅을 떡하니 차지하고서, 변방의 사막이 두려워 악으로 매도하는 자들.
마교의 비호를 받는 민중의 대다수는, 그런 매도로부터 도망쳐 온 이들이었다.
[그저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를 악이라 일컫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을 테지.]
악은 그저 상대적인 것일 뿐이다.
전쟁에 선이 어디에 있으며, 악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죽고 죽이는 신념이 있을 뿐이다.
청유백이 대답했다.
“…네 말이 옳다. 분명 그래야만 한다.”
마교는 악이 아니다.
마교는 미칠지언정, 악이어서는 아니 된다.
중원의 모두가 마교를 악이라 손가락질한다고 해도, 저들에게 그리 느껴질 만한 일을 자행한다고 해도─마교의 교도들에게는 선으로서 군림해야만 한다.
좀 더 나은 생을, 좀 더 윤택한 삶을 가져다줄 신의 대리인 말이다.
하지만.
악이 상대적인 기준이라고는 하나─엄연히, 그 누가 보기에도 악이라 일컬을 만한 것은 있는 법이다.
헌데….
존속살해라.
세상의 그 누가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그것을 선이라 말할까.
이유가 있고, 명분이 있다면 변명하지 못할 것이 무어 있겠느냐만─
적가의 행위는 차마 변명하지 못할 부류의 것이었다.
“선을 넘었어.”
명예를 위해 친족을 죽였다는 말을, 대관절 어떤 이유로 변명할 수 있겠는가.
미쳤다는 말로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교가 이리되어서는 아니 된다.’
적가의 행보에 짐작되는 이유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천가가 멸족하고, 새로운 교주를 뽑는 과정에서 적가가 새로운 교주가 되었다고 했다.
천마지회라는 공평한 틀을 뒤집어쓰고는 있지만, 사람들의 행동거지를 보면 다음 교주도 적가의 후계가 이을 것이라 확신하는 것이 분명했다.
사실상, 적가가 천가의 자리를 이어받은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천화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결코 바람직한 상황은 아닐 테지. 신념과 목표에 이유가 필요하듯, 명예에도 이유가 필요한 법인데 말이다.]
적가의 명예는 본디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천가를 위한 것이었고, 나아가 마교의 위상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이 시대에는 그들의 고삐를 틀어쥘 천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주인을 잃은 명예는 광기가 되고, 제 힘을 주체하지 못한 광기는 비로소 제 목을 틀어쥐고야 말았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핍박하지 않았다. 부모의 눈앞에서 아이를 죽이고, 부모를 겁탈한다 한들 핍박하지 않았다.’
분명한 악인인 것은 맞으나, 마교에 해가 되지는 않는다.
아이에게는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일 테지만, 마교에 있어서는 승전의 영웅이다.
승자의 권리라는 것은 전쟁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청유백은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어떤 악이라 한들, 필요하다면 그것을 인정했다.
허나, 고작 명예를 위해 혈육의 목을 베는 것이─어떻게 마교에 이득이 될 수 있겠는가.
마교에 미친놈이 가득할지언정, 악인이 가득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지금껏 그러했다.
청유백이 교주로 군림하던 마교는, 분명 그러했다.
‘악인(惡人)과 광인(狂人)은 다르다.’
허면,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몹시도 어려운 질문이다.
아니, 생각 외로 단순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저 사람 스스로가 어렵다 단정지은 질문일 수도 있다.
허나, 청유백이 그 질문에 스스로 대답코자 입을 연다면, 이리 대답할 것이다.
악인은 시대가 만드는 것이고, 광인은 개인이 만드는 것이라고.
“하루라도 빨리, 천마의 자리를 다시 내 손에 넣는다.”
청유백은, 다시금 각오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