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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79화 (79/200)

제79화. 중요한 건 명분이야 (4)

“아, 거절할 생각은 하지 마라. 어차피 죽일 거니까. 그래도 명예로운 죽음이 낫지 않겠나?”

“명예라.”

거참, 흥미로운 단어다.

꼴에 적가인지, 그게 뭔지는 아는 모양이다.

적우각이 들으면 발악하며 저놈을 죽이려 들 것 같지만 말이다.

양쪽의 두 사내는 각자의 도를 꼬나쥐고 점차 청유백에게로 다가섰다.

“결투라면서? 일대일의 원칙은 어디로 간 거지?”

“일대일은 무슨 얼어 뒤질 일대일? 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알 게 뭐야.”

적철민이 비웃으며 대꾸하자, 옆의 친구들도 웃기다며 호응하는 꼴이었다.

거 병신 같은 명예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꼴이지만, 본디 명예라는 녀석은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다.

지금 적철민의 자리에 있는 것이 청유백이었다 하더라도, 상대방 쪽에서 먼저 찾아와 준다면 그냥 묻어 버리고 결투로 퉁쳤을 것이다.

증인도 없고, 증거도 없는데.

그깟 명예가 알 게 뭔가?

‘결투’라는 명제 아래에서라면 모든 것이 용납될 터인데.

적철민이 청유백과의 결투에서 이긴다면, 검을 훔쳤다는 사실 따위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결투에 걸 수 있는 것에 제한은 없으니 말이다.

승자는 패자의 생사여탈권을 포함하여, 결투에 걸린 모든 것을 가질 권리가 있다.

누군가는 명예를,

누군가는 재물을,

누군가는, 뭐. 연인을 위해서.

공적인 증인이 없다는 것이 사소한 문제가 되겠지만, 그야말로 사소할 뿐이다.

적철민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넌 여기서 뒤지고? 이 검은 내 것이 된다는 거지.”

아니, 사실 검은 핑계일 뿐이다.

그저 꼴 보기 싫은 저 건방진 새끼를 치워 버리고 싶을 뿐.

그것이 전부였다.

애초에 적철민에게 홍련검은 크게 필요가 없었다.

적가의 비전무공은 도법이고, 홍련검이 아무리 명검이라 해 봐야 검으로 도법을 펼치는 것에는 한계가 있으니.

그러므로 이것은, 그저 명분일 뿐이었다.

“자신 있나?”

“킥, 기껏해야 운만 좋은 새끼가.”

적철민은 코웃음 치며 청유백을 향해 턱짓했다.

이 이상의 만담은 시간 낭비일 뿐이다.

이미 적가의 무인이 근처에 쫙 깔린 것을 모두가 안다.

시간이 촉박한 것은 매한가지.

청유백은 손가락으로 칼날받이를 살짝 밀어, 언제든 뽑을 수 있게 검병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적철민은 그 모양새를 보고는 우습다는 듯 손짓했다.

“반항은. 우리 셋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냐?”

청유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두 놈은 죽이고, 적철민은 산 채로 잡는다.

죽음은 너무 간편한 탈출구다.

죽기 직전까지 고문할지언정, 죽음이라는 선물은 너무 호화스러웠다.

아마, 천하에서 그것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장본인이 바로 청유백일 테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이 떼어진다.

“죽여버려!!”

그와 동시에 두 사내가 동시에 청유백에게 달려들었다.

좌측과 우측, 쌍방에서 동시에 날아드는 칼날에, 청유백은 한 순간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콰광!

진수성찬으로 가득하던 술상이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허공을 가른 칼날에 탁자가 반으로 쪼개지고, 일순간 나무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

일순간 놓친 청유백의 움직임에 당황하는 이채가 서렸다.

그러나, 다음의 반응은 없었다.

틈새와 틈새를 잇는다.

일순간 인 먼지구름을 쪼개어, 다음 순간에 청유백의 검극이 목젖을 향했다.

그리고, 찰나.

“커억… 칵.”

비명에조차 이르지 못한 단말마와 함께 피가 솟구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한순간 칼날이 흔들렸고, 다시금 청유백을 향해 검을 휘둘렀을 때에는.

“이, 이놈이…!!”

이미, 머리가 몸뚱어리와 사별하여 안타까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쿠웅.

육중한 몸뚱어리 둘이 쓰러지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사방이 피 칠갑으로 변하고, 진수성찬이었던 음식들은 피로서 새로 적셔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멍청하게 여전히 검을 뽑아들고 있는 적철민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손을 떨었다.

“…무슨…?”

검극은 청유백을 향했지만, 자연히 떨려오는 그 칼에 위협이라곤 존재하지 않았다.

불과 한 순간 전까지만 해도 오만으로 가득 찼던 그 놈의 얼굴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청유백은 소매로 얼굴을 훑어 묻은 피를 닦아내며 비아냥댔다.

“살인멸구. 간편하고 좋은 방법이지. 뒤탈도 없고 말이야.”

뭐, 할 수 있을 때의 말이지만.

청유백은 천천히 적철민에게 다가섰다.

기실, 저놈 정도의 수준이라면 굳이 칼을 쓸 것도 없었다.

마기를 개방하여 압박하면, 저 멍청이는 지난번의 평 총관마냥 영문도 모를 죽음을 선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서야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직접 행차한 보람이 없지.’

청유백은 백월검을 허공에 한 번 휘둘러 그었다.

쐐액이는 소리가 진동하고, 적철민은 지레 겁먹어 발을 헛디뎠다.

“흐아악!!”

─꽈당!

적철민은 피로 범벅진 바닥에 미끄러져 뒷걸음질 쳤다.

홍련검은 여전히 손에 쥐고 있었지만, 이내 그것과 청유백을 번갈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주, 주, 줄게! 준다고! 드리겠습니다!! 가져가십쇼!!”

“그건 당연한 거고. 결투라며?”

청유백은 한 번 휘둘러 피를 떨쳐낸 백월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결투’라고 말하면서도 칼을 집어넣는 것이 모순적으로 보였지만, 서서히 다가오는 청유백의 태도는 결코 평화적인 무언가가 아니었다.

적철민은 제 실책을 알아차리곤 무릎을 꿇으며 손사래 쳤다.

“내가 졌다! 내가 졌어!! 그러니 그만…!!”

결투란 것이, 꼭 하나가 죽어야만 끝나는 것은 아니다.

청궁우가 그랬듯이, 패배를 시인해도 끝이 난다.

물론, 그 이후에 생사여탈권을 쥔 상대가 죽여버리기 일쑤이니 항복은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그래도 죽는 게 뻔한 상황에서는, 일말의 자비에 기대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근데.

“증인도 없는데 알 게 뭐냐?”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누구도 알 길은 없다.

말마따나 증인이 없으니까.

하지만 적철민은, 꼴에 어울리지 않게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 그러면. 증인도 없는데 나를 죽일 셈이냐? 뒷감당할 자신 있어?”

제가 뱉은 말이 꽤 합리적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적철민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기본적으로, 결투라는 것은 그 결투를 보증해 줄 공증인이 있어야 성립한다.

그러므로 애초에 이 결투는 성립할 수 없었다.

뭐, 저놈들이야 서로서로 짜 맞출 예정이었던 것 같지만.

“헌데, 누가 결투라 하던가?”

“뭐?”

저 머저리의 입으로 결투 운운하기는 했으나, 청유백은 이 결투를 받아들인다는 말 따위는 한 마디도 한 적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럴 이유가 없으니까.

“나는 그저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왔을 뿐이다. 아, 헌데… 너무나도 안타깝군. 도착해 보니 이미 명검에 눈이 멀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말았다니.”

“그게 무슨….”

결투는 물론 하나의 훌륭한 명분이 되지만, 결투를 신청하는 것 또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귀찮기 그지없고, 결투를 신청했다는 사실 자체로 문책이 있을 때도 있다.

“나머지 남은 한 놈은 필경 죄를 물을 범인일진대… 고작 도둑질의 죗값으로 사형은 너무 심하지. 그렇지?”

때문에 청유백은 결코 결투를 먼저 신청하지 않았다.

언제나 상대방이 요구해오기를 유도했다.

싸움에 있어 선빵은 유리하지만, 잘못은 언제나 먼저 친 놈의 잘못 아니던가.

정당방위란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부러 그럴 이유조차도 없었다.

이미 ‘자신의 물건을 훔쳐 갔다’라는 훌륭한 명분이 있었다.

“마교에 율법에 이르기를, ‘물건을 훔친 자는 손목을 자른다.’라고 하지.”

용서하니 어쩌니 하는 시시콜콜한 항목이 더 있지만, 청유백은 그딴 마음이라곤 한 치도 없으니 알 바 아닌 이야기였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점은.

“걱정 마라.”

손목을 어떻게 자르던 간에, 그 방법은 명시되어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청유백은 맑게 웃었다.

“죽이지는 않을 테니까.”

암.

팔다리 다 떼고 목숨만 딱 살려 놓는 것도 엄연히 죽이지는 않는 것의 범주다.

대체로 삼류 악당이나 하는 대사를 하고 있노라니 기분이 묘하긴 했다만, 삼류를 상대하니 삼류처럼 되는 것이다.

“자, 자, 잠깐. 괜찮겠냐? 뒤처리 할 자신 있냐고. 너, 우리 혀, 형님이 누군지 몰라?”

“알아야 하나?”

뭐, 알아야 하긴 할 테다.

후계자 중 제일로 치는 자가 적철진이니, 분명히 언젠가 꺾어야 하는 상대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리라.

청유백은 어느덧 적철민의 지척까지 다가섰다.

적철민이 막무가내로 홍련검을 휘둘러 보았지만, 손목을 쳐 제압당해 검을 놓치기까지 한 순간도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적가의 가전무공은 도법이다. 검으로 도법을 펼치지 못할 것도 없지만, 저 머저리가 들어서야 나뭇가지를 들든 천하의 신검을 들든 거기서 거기일 터였다.

“으, 흐, 흐아아아아악!!”

“아직 시작도 안 했다. 엄살은.”

청유백은 가장 먼저 팔을 제압했다. 다리를 멈추게 하고, 시끄러운 비명이 더 이상 나오지 않게 만들었다.

“주제 넘는 놈은 응당 적법한 처벌을 받아야지.”

아주 성실하게, 마교의 율법에 근거한 처벌을 말이다.

시간이 별로 없었다.

손톱을 뽑는 것부터 시작해서, 한 마디 한 마디의 뼈를 잘근잘근 부숴 주기에는 말이다.

“으읍, 읍, 으어아….”

이 일이 마무리되면 앞으로 청유백을 무시하는 놈은 깔끔하게 사라질 터였다.

하지만, 탓할 수 있는 놈은 없으리라.

“네 형이 누구든 간에, 내 알 바는 아니잖나. 그렇지?”

모든 것을 규칙에 맞게, 율법에 맞게 처리했으니 말이다.

청유백의 입가가 틀어 올려졌다.

그리고 첫 번째 손가락의 마디가 구부려지려는, 그 다음 순간.

“아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약관이나 될 법한, 청유백보다 조금 성숙한 사내의 목소리가.

“알아줬으면 하는군.”

적우각과도, 적철민과도 다른 목소리.

그러나 분명한 그 무게감이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였다.

청유백은 반사적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틀었다.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말이야.”

도대체 언제인가 열린 방문의 너머에서, 난장판이 된 방 안을 지긋이 바라보는 무표정한 청년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한 자루의 검과 한 자루의 도. 그것을 한쪽 허리춤에 함께 패용한 특이한 차림의 청년.

이 난장판이 된 살육의 현장을 보면서도, 그 얼굴에는 분노도, 당혹도 실리지 않았다.

그저, 미세한 피곤함만이 감돌뿐이었다.

청년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그리고 그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적철민의 눈빛에 생기가 어렸다.

“…….”

청유백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사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옷차림만 보아도 적가의 사람인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보다도 명확하게 그가 감추지 않은 마기가 피부를 찔러왔으므로.

강하다.

최소한,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청유백보다 조금 연상의 또래, 그리고 적가의 문양.

그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청유백은 혐오인지, 희열인지 모를 감정에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적철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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