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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78화 (78/200)

제78화. 중요한 건 명분이야 (3)

“이쪽이었는데….”

청유백은 무언가를 쫓아 뒷골목으로 걸어 들어갔다.

흔한 왈패들이라도 있을 법한 으슥한 골목이었지만, 청유백의 발소리 외에는 무엇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뭘 찾는 게냐?]

“글쎄, 아마… 믿음?”

믿음?

뭔 놈의 믿음?

천화가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치자, 청유백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공자 왈, ‘친구를 사귐에는 믿음으로 하여라.’ 라 하지 않던가?”

[대관절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겠다만….]

“그러니까, 믿고 있다는 거지.”

적철민에게 데려다줄 만한 놈을 말이야.

천화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청유백은 그저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러던, 찰나.

어둑한 골목의 교차로에서, 칼날이 청유백의 사각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

“흐음.”

─채앵!

하지만 닿지는 못했다.

소리도 숨기고, 기척도 숨겼지만, 공격하는 찰나의 살기마저 숨길 수는 없었던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예상했다는 듯 들어 올린 검의 칼날받이가 기습을 받아냈다.

청유백은 흥미롭다는 듯 목청을 울리며 자신을 기습한 사내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저, 딱 한 번 마주치고 지나친 정도의 사이.

하지만, 기억하기에는 충분했다.

적철민의 옆에 있던, 그의 친우 중 하나인 사내였다.

“정확히 찾아온 것 같군. 그렇지?”

“크윽!!”

사내는 막힌 도를 다시금 짓쳐들었다.

한 번의 실패로 단념하지 않는 것은 꽤 좋은 마음가짐이다만.

글쎄.

“혼자서 뭘 하려고? 퍽 충성스럽군그래.”

더 이상, 한 번의 싸움에도 상대를 재단하고 임해야 했던 청유백이 아니었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검을 뽑아들 수 있으며, 체력을 아끼기 위해 최선의 수를 선택해야 할 필요도 없다.

신경 써야 하는 것은 주변의 이목과 명분.

그것뿐이었다.

─빠악!

“커헉!!”

청유백이 아무렇게나 걷어찬 발길질에 복부를 강타당한 사내는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청유백은 순간 안타깝다고 생각했다.

적우각과의 대결보다, 지금 이 ‘취조’가 힘이란 무엇인지 더욱 잘 일깨워 줄 수 있었을 텐데.

실로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뭐, 그것은 그것이고.

청유백은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허리를 숙인 사내의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끄윽….”

“뒷골목이라니. 운치도, 예절도, 여흥조차 없군. 차라리 야산이 낫겠어…. 너희들만의 비밀스러운 공간 따위를 마련할 생각은 못 하는 건가?”

낭만이라고는 전혀 없군.

청유백이 그리 속삭이며 머리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쩔그렁, 무거운 소리를 내며 사내의 박도가 바닥을 굴렀다.

사내는 청유백의 손목을 붙잡고 떼어내려 몇 번인가 힘을 쓰다가, 턱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양손을 펴 보이며 입을 열었다.

“하, 항복할게. 내가 졌다! 내가 졌어!! 그러니까 이거 놓고….”

“누구 마음대로.”

─꽈악!

항복은 무슨 얼어 뒤질 항복.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아아악!! 이, 이런 망할….”

사내는 어떻게든 발악하려 팔을 뻗었다.

하지만 청유백의 몸에도, 바닥에 떨어진 칼에도 닿지는 못했다.

억지로 몸을 굽혀 박도에 손을 뻗었지만, 손이 칼에 닿으려는 찰나.

청유백이 빨랐다.

─챙그르르르….

박도는 한순간에 땅바닥을 굴러, 손이 닿지 않을 정도의 거리까지 밀려났다.

“빌어 처먹을 새끼가….”

“안 되지. 안 돼. 요즘 재미를 못 봤거든. 빌어먹을 보모 놀이 때문에 말이다.”

퍽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기실 천성에 맞는 일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필요하니 한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한다.

그저 그뿐.

청유백이 선호하는 것은 조금은 다른 일이었다.

어쩌면, 많이.

“네놈들이 모종의 방식으로 복수하러 오기를 기대하기는 했다만, 이런 방식일 줄은 솔직히 예상치 못했다. 허를 찔렸어.”

그 때문에 일부러 적우각의 제안을 받아들여 소문을 감춘 것이었는데, 생각보다도 더 큰 건수로 돌아왔다.

기껏해야 뒷골목에서의 습격 정도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청유백은 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부터 질문을 할 건데…. 부디 대답하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질릴 때까지만 말이야.”

청유백은 가장 먼저 팔의 혈도를 짚었다.

곡택혈(曲澤血).

팔의 움직임을 봉하는 혈이었다.

그 반증으로, 사내의 팔이 허리 아래로 축 늘어졌다.

옛날처럼 내공이 모자라 시간을 걱정해야 할 필요도, 신체가 나약하여 힘을 조절해야 할 필요도 없었다.

청유백은 머리채를 쥔 손을 벽에 가져다 박으며, 사내와 눈을 마주쳤다.

“지, 진정해. 뭐든 말해 줄게. 굳이 이런 짓 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슨 소리를 그렇게 섭섭하게 하나? 벌써부터 거짓말을 하다니.”

“아, 아냐. 거짓말이 아니라고! 정말, 뭐든 말만 하면… 아악!!”

청유백은 산뜻한 웃음을 지으며 아혈을 점했다.

한순간에 목을 찔린 사내가 비명을 질렀지만, 이내 그 목청에서는 어떠한 목소리도, 비명조차도 울리지 않게 되었다.

최소한─ 일각 정도는 어떠한 소리도 내지 못하리라.

청유백은 어깨와 주먹을 풀며 관절을 뚜둑였다.

약자를 핍박하는 것은 그리 선호하는 일이 아니지만, 정당방위는 말이 다르지 않던가.

전부 인과에 대한 응보이며, 권선(勸善)인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징악(懲惡) 정도는 이루는 일이었다.

또한─끝없는 삶에서, 몇 없는 본능적인 쾌락을 충족하는 일이기도 했다.

“부디, 진실을 말하고 싶어지면 손을 들도록. 내가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이왕이면 비명과 함께.”

청유백은 덧붙였다.

“아, 할 수 있다면 말이지.”

* * *

─뚝.

─뚝.

피와 땀이, 그리고 타액이 섞여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여전히 붙들려 있는 머리채는 군데군데가 뽑혀나가 이 이상 잡을 곳을 찾기 어려웠으며, 반듯했던 명문가 자제의 이목구비는 흉하게 뒤틀려 부어올라 있었다.

“그…그, 그게… 전부입니다… 정말… 정말 더는… 아는 게 없습니다…. 대인… 제발….”

이빨이 몇 개고 뽑혀나간 탓에 발음은 새고, 부르튼 입술 때문에 말조차 똑바로 꺼낼 수 없었다만.

사내는 직감했다.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혀까지 뽑힌 채 그저 기어서 적철민에게로 안내하게 될 것임을.

그리고 애원할 것이다.

이제 제발 죽여 달라고.

청유백은 고개를 까딱이며, 그제야 벽에 처박고 있던 손을 떼었다.

“흠, 이쯤 되면 진실인 것도 같고.”

그 말에, 한순간 사내의 눈에 희망의 빛이 서렸다.

이제 드디어 끝인가, 싶은 찰나의 희망 말이다.

청유백의 입장에서도 더 이상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었다.

고작 일각이기는 했으나, 적가의 무인들이 이만큼 깔린 지금이니 언제라도 적철민이 먼저 발각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니, 생각해 보니 지금껏 거짓말한 게 괘씸하군. 두 개만 더 부숴야겠어.”

“그, 그게 무슨… 아아아악!!”

손가락 한두 개 정도 부순다고 결과가 달라지진 않을 테지.

[…….]

청유백이 가차 없이 꺾은 손가락의 개수는, 이번 것으로 이제 일곱 개.

‘말 한대도 지랄이야’ 따위의 불손한 생각은, 이미 사내의 머릿속에서 떠난 지 오래였다.

오히려, 청유백이 ‘세 개 남은 게 불편하군. 짝을 맞춰 줘야겠어’라며 나머지 세 개를 꺾지 않는 것을 다행히 여기고 있었다.

[…다 되었으면 가자꾸나. 시간이 촉박하니라.]

천화는 청유백을 독촉하며 걸음을 옮기게 했다.

실제로 시간이 없다기보다는, 이 지나친 폭력의 현장에 질려버린 탓이었다.

비록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명제가 몹시 모순에 차 있는 단어라고는 하나, 청유백의 피 묻은 주먹을 보고 선이라 가리킬 인간은 좀처럼 없을 것이다.

다만, 즐거운 점은.

그 누구도 지금의 행태를 보지 못했으니─누구도 청유백을 악이라 손가락질할 수 없다는 것일 테다.

폭력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명분이다.

청궁우를 패 죽일 때가 그러했다.

결투라는 명분 앞에서는 그 어떤 손속이라도 책임을 묻지 못한다.

하지만 글쎄, 명분이 없다면야.

명분이 필요치 않는 상황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못하는, 지금처럼.

* * *

“소, 손님. 갑자기 이리 막무가내로 들어오시면─”

“잠깐이면 된다니까.”

─쾅!

격렬한 소리와 함께 삐그덕대는 문의 경첩이 강제로 경련했다.

잠금쇠는 채 두 번의 발길질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콜록. 콜록, 나라면 금을 쥐여 줘도 이딴 곳을 오지는 않을진대. 적가 놈들이 못 찾는 이유가 있었어.”

청유백은 일순간 이는 모래먼지를 손으로 흩으며 방 안의 상황을 살폈다.

반라의 여자 셋, 남자 셋이 진창 벌이고 있는 술판.

여자들은 대충 행색으로 보아하니 기녀로 보였고, 남정네 새끼들은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청유백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자 기녀들은 일순 당황한 눈치였지만, 예상 외로 적철민은 덤덤했다.

양 옆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적철민은 고개를 까딱여 청유백을 따라온 점소이를 돌려보냈다.

일순간 ‘괜찮으십니까?’ 따위의 질문이 오갔지만, 멍청한 문답으로 끝났다는 것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킥, 킥킥. 왔냐? 병신 새끼. 지 묫자리는 알아서 잘 찾아오네.”

아니, 어쩌면 술기운에 취해 정상적인 사고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적철민은 자신이 들고 있던 술병을 까딱이며 옆의 기녀에게 넘겼다.

“기분 잡쳤지만, 술이나 한잔 해. 이거 찾으러 온 거잖아?”

그리고는, 자신의 곁에 두었던 검을 들어 올려 흔들어 보였다.

“호오.”

처음 보는 검집에, 처음 보는 검병.

외견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본능이 알았다.

저것이 홍련검임을.

묵태곤 놈, 다행히도 뻗대는 성격만큼이나 실력도 있던 모양이었다.

‘그래, 천재는 오만할 자격이 있지.’

청유백은 무의식적으로 홍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어느새 다가온 기녀의 목소리가 청유백의 상념을 깨트렸다.

“저어, 잔을….”

“…….”

청유백의 앞에 놓여진 작은 술잔.

그리고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레 술병을 들고 있는 기녀.

퍽 대단한 직업정신이다.

하기사, 마교의 자제나 무인들이 찾는 주점이다.

청유백은 술잔을 받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이런 상황이 자주 있나?”

“자주는… 아닙니다. 보름에 한 번 즈음 있지요.”

[…그게 자주 아닌가?]

천화와 동일한 의문이 청유백도 일순 들었지만, 뭐 제가 기녀는 아니니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뭐, 저 병신들은 죄가 있지만 술에 무슨 죄가 있을까.

청유백은 자연스레 술잔을 기울였고, 그런 청유백을 바라보며 적철민이 비웃듯 코웃음 쳤다.

“그래. 여인의 술을 거절하는 건 도의가 아니지?”

“돼지새끼가 맞는 말 하는 꼴을 보는 것도 역하군.”

“뭣?”

술잔이 비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청유백은 깨끗이 비워진 술잔을 탁자에 대충 내던졌다.

“술은 좋지만, 보는 풍광이 영 아니야.”

현장을 본 순간, 한순간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 도둑질은 철저하게 계획된 일이 아니며, 철저는커녕 만취한 놈이 즉흥적으로 벌인 시시콜콜한 머저리 짓이라는 사실을.

이다음에 준비한 ‘치밀한 계획’ 따위도 존재하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뭐 상관없다.

청유백은 방긋, 산뜻하게 웃었다.

“자, 피차 바쁘지 않나? 이런 역한 공기를 맡는 것도 지겨워지는 참인데.”

“…병신새끼가 대체 뭘 믿고 깝치는 건지 모르겠군.”

적철민은 미간을 팍 찌푸리며 끼고 있던 기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그의 친구들은 퍽 아쉬운 눈치였지만, 그 아쉬움은 곧 청유백을 향한 짜증과 분노로 변했다.

저들이 무엇을 할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으슥한 공간과, 처음부터 자신에게 적철민의 위치를 알려주려 했던 적철민의 친구.

‘심지어 당황하지도 않았지. 내가 이리로 온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애초에, 청유백을 이리로 불러내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저놈들이 선택할 만한 수는 딱 하나밖에 없다.

“청유백.”

적철민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홍련검을 검집에서 뽑아들었다.

다른 친구들 또한, 벽에 기대었던 자신의 도를 집어 들고 청유백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쐐기를 박았다.

“마교의 율법에 의거하여, 너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너무나도 즐거운─정당방위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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