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중요한 건 명분이야 (1)
종소리가 산등성이 사이로 붉게 물든 여명을 가로질렀다.
총 열한 번, 술시 말(戌時 : 약 오후 9시)을 알리는 종이었다.
홍등가의 불빛이 붉게 타오르고, 야간 순찰을 도는 무사들의 유등에 불을 붙이는 시간.
기녀의 검무가 한껏 흥을 돋우고, 빈 술잔에 늦은 풍류가 차오르는 시간.
혹은─방탕한 망나니들이, 부모가 두려워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기도 했다.
취기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이 청년, 적철민 또한 그러했다.
“빌어먹을… 그 미련한 새끼 하나 때문에….”
대체 이게 다 뭐란 말인가.
천마지회의 참가도, 차기 가주의 자리도 본래 전부 자신의 것이어야만 했다.
현 교주, 자신의 큰아버지가 그러했듯, 그리고 현 적가주인 자신의 아버지가 그러하듯.
‘철진 형님께서 천마의 좌에 오르면, 당연히 공석인 가주의 자리는 내가 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분명 그러했을 테다.
권력도, 영광도, 전부 자신의 차지.
적우각 따위의, 힘밖에 모르는 머저리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은 것이 당연하지 않던가.
“이제는… 씨발, 그 씹새끼들마저도 나를 무시하는군.”
적우각의 애새끼들도, 이번에는 종자도 알 수 없는 청가의 쓰레기 놈조차도.
이 적철민을 무시하는 꼴이라니.
적철민은 떨리는 손으로 병나발을 불었다.
하지만 목은 여전히 뜨거웠다.
바닥을 보인 술은 그저 조금이나마 방울져 혓바닥을 적실뿐이었다.
“하… 씨이발.”
─쨍그랑!
한탄과 함께 울리는 깨지는 소리.
적철민은 던져버린 술병을 뒤로 하고 계속 걸었다.
‘내가… 내가 천마지회에 참가했다면, 훨씬 강해졌을 텐데.’
자신이 적우각에게 지금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이유도 단순했다.
놈은 지금껏 천마지회에 참가하여, 이미 온갖 재보를 다 받아 처먹지 않았던가.
‘그래, 당연한 것이다. 내가 참가했다면… 당연히 내가 더 강했을 터.’
분명 그랬을 것이다.
당장 첫 번째 시험의 보상으로, 적우각 놈은 무려 환마단을 받았으니까.
적철민은 계속해서 구시렁대는 것을 반복하며 제집의 문을 넘었다.
적가를 찾았던 객들도 이미 다 떠나가고, 집안에서는 물품들을 정리하느라 바쁜 하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상황을 지휘하는 듯한 한 중년인이 적철민을 발견하고는 터벅터벅 다가왔다.
“대체 어딜 다녀오는 게냐! 정신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어른들이 얼마나 찾았는지 알기나 해!”
“…숙부님.”
“이런, 이놈 냄새 좀 보게나. 민가에 내려갔다 온 게냐? …아니, 분 냄새를 보아하니 기루에 갔구나!”
“킥, 뭐… 어떻습니까. 다들 제게는 관심도 없는데.”
“허, 이놈이 정말…!”
중년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놈이 술 취해서 집에 기어들어오는 것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기도 했으니, 무어라 다그쳐 봐야 귓구멍에 들어가지도 않을 테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눈 감고 그저 넘어가 줄 수도 없는 노릇.
중년인은 적철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청가의 후계와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본 객이 있었다. …결코 좋지 않아. 좋지 않고말고.”
지금은 중요한 시기였다.
마교 전체로 보아도 그렇고, 적가에 한정해서 보아도 그렇다.
결코, 구설수에 오를 만한 행동을 하여 좋을 것이 없었다.
“네 아비 성정을 알지 않으냐. 지금 당장에라도 너를 찾으려고….”
“빌어먹을!!”
“!!”
“그놈의 평판!! 그놈의 가문!! 저한테 관심이 있기는 한 겁니까?! 그럼 제가, 청가 놈에게 무릎이라도 꿇어야 했겠느냔 말입니다!!”
─파악!
적철민은 중년인의 손을 떨쳐내며 무의식적으로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방울져 떨어질 것조차도 없었다.
그제야, 아까 술병은 던져서 깨 버렸다는 것이 떠올랐다.
“씨발!! 씨바아알!!”
“…….”
취하기도 어지간한 정도가 아니다.
이 상태로 들여보내 봐야 상황이 좋아질 리가 없을 터.
그래도 그나마 발걸음은 멀쩡한 것을 보니, 길 가다 쓰러지지는 않을 듯 보였다.
어쩌겠는가. 술이라도 좀 깨게 만들어야지.
고수라면 내공으로 취기를 일거에 날려 버리는 기예도 가능하겠지만, 그런 것을 바라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 아니던가.
“후, 일단… 술 좀 깨고 오려무나. 지금 가 봐야 좋을 일 하나 없을 듯하니…. 그래, 이게 좋겠군.”
중년인은 자신이 들고 있던 서류와 장부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내었다.
모종의, 계약서처럼 생겨먹은 물건이었다.
중년인은 말을 이었다.
“철웅각에 다녀오거라. 그냥 문지기에게 전달만 해도 되는 일이니, 숨 돌리는 셈 치고 천천히 걸어 다녀오려무나.”
“…제가 왜….”
“어서.”
“…….”
적철민은 입으로는 씨발, 씨발을 반복하면서도 종이를 받아들었다.
숙부의 말마따나, 지금 이 상태로 아버지를 뵌다면 무슨 사달이 날지, 이만큼 취한 상태에서도 짐작이 갔기 때문이었다.
‘적우각, 청유백… 씹새끼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저가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단 말인가.
잘못한 것은 감히 저에게 기어오른 그 머저리들인데!
입이 벌려질 때마다 상소리가 반복되었다.
그놈의 책임, 그놈의 평판.
‘청가 따위가 뭐가 두렵다고.’
적철민의 무거운 발걸음이 터덜터덜 옮겨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반복될 때마다 짜증은 증오로 변하고, 증오는 용기로 변해갔다.
증오에서 비롯된 용기는, 근거조차 모를 확신을 불어넣었다.
‘청유백, 그 머저리 새끼도 제대로 붙으면 반드시 이길 수 있는데.’
하지만 붙을 일이 없다.
그놈의 빌어먹을 ‘평판’ 때문에.
저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아니고서야, 싸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청유백 그 겁쟁이가 질 싸움을 걸어올 것 같지도 않았고 말이다.
적철민은, 어떻게든 그놈의 명분을 찾고자 머리를 굴렸다.
* * *
한편, 철웅각.
작업은 진즉에 전부 마무리되고, 장작 대신 굳이 이유가 없는 열정을 불태우며 작업하는 장인들 정도만이 자리를 지켰다.
물론 그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인들을 보조하는 도제들 역시, 스승이 그만두기 전까지는 계속 그 옆을 지켜야만 했으니 말이다.
묵태곤 또한 그러했다.
도제들의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어두워져 이제는 반쯤 죽어가고 있었지만, 그것도 이제 금방이다.
묵태곤은, 방금 막 마무리한 홍련검의 검집을 어루만지며 지금껏 작업한 과정을 복기했다.
의뢰받은 것은 검의 복구뿐이었지만, 이 완벽한 예술품에 마침표를 찍는 일이 탐났기 때문이다.
이왕 여기까지 한 것, 마무리까지 제 손으로 끝마친 것이다.
…물론, 그 옆에서 사흘 밤낮을 샌, 딱히 무공을 배운 것도 아닌 도제들은 실시간으로 죽여달라 울부짖는 노릇이었지만.
아무튼 간에.
묵태곤이 홀린 듯 홍련검을 쓰다듬을 무렵, 수염이 덥수룩한 장인 한 명이 다가와 묵태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 태곤이. 밤을 새서 만지던 그 아가씨는 다 완성된 건가? 얼굴이 폈구만그래.”
아가씨.
이따금씩, 검장들이 혼을 불어 만드는 명품들을 그들끼리 이르는 말이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그것에만 미쳐 있으니, 그야말로 숫총각이 여자 대하듯 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동료들이 그 꼴을 그리 이르곤 했다.
묵태곤은 피식 웃었다.
“아, 뭐… 그렇죠. 나쁘지 않습니다. 한편으론 막막하기도 하지만서도, 벽을 넘은 기분이네요.”
“큭큭큭, 모양 잡지 마라. 벽은 무슨. 됐다. 고된 작업 끝냈으니 술이나 한잔하지! 중가 놈이랑 구가 놈도 마침 날이었거든.”
“그것 좋지요.”
묵태곤은 준비해 두었던 목함을 꺼내와 홍련검을 담았다.
이것 또한 특별히 준비한 물건이었다.
약속한 것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리긴 했지만, 내일 청유백을 부른다면 그 송장 같은 놈이라도 실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을 테다.
“뒷정리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먼저 들어가십시오. 스승님.”
묵태곤이 상자를 닫는 것을 본 도제들은 눈을 반짝이며 묵태곤에게 다가왔다.
언제 힘들었냐는 듯이, 순식간에 기운을 차린 모습이었다.
묵태곤은 신음과 함께 대꾸했다.
“아… 그래. 부탁하마. 너희도 푹 쉬고. 내일은 나오지 마라.”
“예! 들어가십시오!! 스승님!!”
묵태곤은 제 어깨를 두드리며 수염 난 장인을 따라 나섰다.
내일 하루 정도는, 이 검을 건네주는 데에 통째로 할애해도 괜찮으리라.
…어차피, 두 번째 시험 따위야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으니.
교주 자리에 미련도 없는 묵태곤 입장에서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보다 저 도제들을 가르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었다.
‘실로 내일이 기대되는군.’
묵태곤이 공방을 나서고 머지않아 철웅각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화로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불씨가 남아 그 재를 밤새 한껏 불태우겠지만, 그것이 충분한 빛을 발하지는 못하리라.
어둠이 드리웠고, 이 층을 향하는 계단을 제외하면 어디에도 빛이 닿지 않았다.
어두운 공방은 퍽 으스스한 분위기였다.
인기척이라고는 입구를 지키는 무인들뿐이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다, 문득.
─척!
무인 둘이, 들고 있는 창을 교차하여 입구를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조금 떨어진 곳에서 비척이며 걸어오는 인영에게 말을 건네었다.
“어떤 용무로 오셨습니까?”
수상한 자였지만, 건네는 말은 존칭이었다.
유등에 언뜻 비춰지는 옷자락에 붉은 범의 자수가 수놓아져 있었으니, 경계의 대상은 아니었다.
허나─돌아온 대답이란.
“씨이발, 너도 내가 만만하냐?”
“예, 예?”
“꺼져. 뭣 좀 전하러 왔으니까. 내가 네놈 따위와 대화를 해야겠나?”
전신에서 풍겨오는 술 냄새는 결코 반가운 것이 아니었지만, 경비는 인상을 찌푸리며 창을 내렸다.
“그… 예,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병신이, 진즉에 그럴 것이지.”
사내는 욕지거리와 함께 침을 바닥에 퉤, 내뱉으며 철웅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의 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멀어지자, 뒤늦게 동료 경비가 불안한 듯 입을 열었다.
“이봐, 보내도 괜찮은 건가?”
굳이 신분의 확인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저 호랑이 자수가 가장 확실한 신분패이기도 했고, 그의 면면은 경비 무인들 자신도 알고 있는 바였다.
하지만 문제되는 것은, 지금 저 취객을 이대로 들여보내면 문책받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경비는 대충 대꾸했다.
“놔두게. 저 종자 성질 더러운 거 유명하지 않나.”
“하기사, 별것도 아닌 일로 막으려다 싸워 봐야….”
“그래. 뭐 상여급이라도 나오겠는가. 그냥 쉬쉬하며 사는 게지. 이 층의 먹물쟁이 놈들은 좀 고생하겠지만 말이야. 하하!”
“큭큭, 그것도 맞는 말이구먼.”
* * *
숙소로 돌아온 후, 일귀와 이찬, 삼아는 평소와 같은 일과를 반복했다.
마치, 어제 보았던 것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청유백이 저는 피곤하다며 불구대천심공의 연공만은 생략했지만, 신체 단련은 굳이 그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이 알아서 할 정도가 되었다.
근육이 찢어질 것 같던 고통은 어느덧 익숙해졌고, 몸은 강인해져 그 고통도 상당 부분 덜어졌으니까.
더하여─청유백의 무력을 보고, 적잖이 자극받은 것 또한 하나의 이유였다.
문득, 땀을 닦아내던 삼아가 입을 열었다.
“…슬슬, 우리도 때가 아닐까?”
“무슨 때?”
“스승님이라고 부를 때.”
“…….”
굳이 ‘누구를?’이라고 반문하지는 않았다.
몇 달까지 함께했던 그 인간 말종 교관들을 스승이라 부를 리는 없을 테니, 당연히 청유백을 이르는 말일 테다.
일귀는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스승이라 부르지 말랬잖아.”
“무슨 소리야? 그런 적 없어. 그냥 ‘대협’이라고 부르랬지. 스승이라고 부르지 말라고는 안 했잖아?”
“으음….”
그게 굳이 스승이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을 돌려 말한 것 아닌가, 싶기는 했지만, 일단 일귀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 본 광경이 여전히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일귀 또한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사실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더라도, 그것을 확신하는 것과 그저 의심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지금이라면, 청유백이 뭘 시킨다고 해도 강해지기 위해서, 라는 명목하에 뭐든 따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고통에도 익숙해지지 않았던가.
“솔직히… 아직도 무섭긴 하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가르쳐 주셨잖아. 확실히 세졌고….”
“웃기지 마. 그게 가르친 거냐? 그냥 죽도록 굴린 거지. 단련이 안 되면 그게 더 신기하겠다.”
삼아의 말에 이찬이 코웃음 쳤다.
하긴, 강해진 것은 이찬도 통감하고 있는 바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그것이고, 가장 많이 처맞은 것 또한─물론 가장 많이 깝친 대가였다─ 이찬이었으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스승이라….’
일귀로서도 본능적으로 혹하는 단어였다.
지금껏, 고작 십여 년 밖에 먹지 않은 나이지만 누군가의 품에 안겨본 적이 몇 번이나 있는지 세어 볼 수도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단어에 끌리는 것은, 어쩌면 본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문득.
“이찬 녀석 말이 맞다.”
어깨 너머에서 청유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마루에 앉아 저들을 지켜보는 청유백의 모습이 보였다.
“난 너희 스승이 아니다. 그런 것 할 여유도, 책임도 없어. 그저 한 때의 기연, 그 뿐이다.”
“네에….”
청유백의 말에 삼아는 눈에 띄게 서운해했고, 이찬은 코웃음 치며 헹, 하고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일귀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표정이 앞머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기도 했고, 어차피 다음의 기회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청유백은 무심히도 마루에 앉아 바깥을 가만히 응시했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슬슬 올 시기가 되었는데….”
과연, 뭔가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어쩌면, ‘뭔가’가 아니라 ‘누구’인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청유백이 사람을 기다린다는 그림이 쉬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잠시가 지나,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져 오는 투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무공을 배우지 않은, 일개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은 달리기 소리.
“청 공자님! 전언입니다!!”
허나, 기묘하게도 급박한 발걸음이었다.
전언을 전하러 온 사내는 손에 쥔 편지를 청유백에게 다급히 건네었다.
“급히… 급히 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