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맞는 말이야, 처맞는 말 (4)
청유백과 적우각.
두 사람이 내뿜는 패도적인 마기가 대기를 휘감았다.
첫 번째 권격을 나눈 지금, 지금 택할 수 있는 수는 많으리라.
청유백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다. 몸이 저 적우각만큼 굳건하지는 않지만, 기술로서는 그 누구보다도 완벽한 날이 서 있으니까.
한 번 회피하여 상대방의 다음 움직임을 읽을 수도 있다.
혹은, 무모하게라도 몸을 깊숙이 찔러 넣어 빈틈을 유도해 볼 법도 하다.
또는 서로의 주먹을 피하고 역공을 꽂아 넣는, 그런 수도 있었겠으나─
“하아!!”
“흡!!”
─콰아앙!!
청유백은, 굳이 주먹을 다시금 맞부딪치는 것을 택했다.
‘그래, 저놈은 이럴 줄 알았지.’
이 싸움은 적우각을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다.
첫 만남이 건방지기는 했다만, 그것이 사지를 찢어 죽여버릴 죄라고 하기에는 모자람이 있다.
‘목표는 아이들에게 힘의 싸움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적우각의 실력을 가늠함으로써 저 위에 있을 적철진의 편린을 맛보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선은 주먹을 선택했다.
[한 번 더 온다!]
천화의 기함에 맞춰 청유백은 한 번 더 주먹을 허공에 꽂아 넣었다.
이미 한 번 확인된 마음이다.
적우각의 멍청할 정도의 신념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콰앙!!
몸이 아니라 마치 바위를 울리는 듯한 굉음.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막지도 않는다.
방어를 뚫어내려 허수를 섞어내지도 않는다.
그저 정직하게, 서로의 한 점만을 노리고 주먹을 내지른다.
몹시도 미련하고, 멍청한 수,
하지만 상대방 또한 그리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수 개의 굉음이 겹쳐 울리는 광경의 뒤편에서, 아이들 또한 제 귀를 막으며 청유백과 적우각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저게 대체 무슨… 얘들아, 보고 있어?”
“우리를 상대하는 건 장난 수준이었잖아. 제기랄, 미친 인간…. 죽여 보라니, 장난하는 거야?”
분하다.
‘청가의 쓰레기’라는 멸칭이 거짓인 것도, 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면목을 실제로 보니, 제 앞에 놓여 있는 산은 생각보다도 높았다는 것을 여실히 통감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떨까.
자신들의 마음 한구석에서 선망 어린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을 알아챈 것은, 조금 이후의 일이었다.
“크으…!! 좋군!!”
수십 번의 굉음이 터져나간 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뒤로 물러선 두 사람은 서로를 쏘아보았다.
한 차례의 주먹을 나눈 뒤에,
적우각은 주먹을 털어내며 웃었다.
“대단하군! 피부가 저릿저릿해!! 이런 마기를 숨겨두고 있었던가, 청유백!!”
“글쎄, 어떨는지.”
청유백 또한 주먹의 관절을 꺾고, 손목을 돌려대며 다음을 준비했다.
일견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당연했다.
감정과 속내를 숨기는 것은 고수의 기본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더욱이, 불리할 때라면 더 그러했다.
천화가 인상을 찌푸렸다.
[공포는커녕 즐거워하는구나. 어지간히도 미친놈이야.]
‘아무런 타격도 없는 것 같지?’
[아마도… 확실히.]
고작 한 번의 공방이었지만,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은 청유백의 장기가 아니었다.
마치 지난날 청궁우와 싸울 때와 같이 벌써부터 손목이 시큰거린다.
굳이 무리하여 보여주기식의 공방을 보인 대가였다.
‘적당히 해서는 힘들겠는데.’
압도적인 힘으로써 제압할 요량이었건만, 상대 또한 그에 관해서는 도가 튼 부류.
적우각에 대한 평가를 수정할 필요가 있을 듯 보였다.
[여유 부릴 틈이 있었더냐? 온다!]
“크아압!!”
─콰아앙!!
적우각은 높게 뛰어올라 청유백을 향해 내리찍듯 달려들었다.
공중에서 찍어 누르는 진각.
청유백은 간발의 차로 피해냈지만, 방금까지 서 있던 땅은 순식간에 으스러져 적우각의 몸뚱어리만 한 구덩이로 변했다.
[당장에야 피하기 쉽지. 하지만─]
일각만 이 공방이 오가도 목숨을 걸어야 하리라.
적우각이 청유백에 비해 월등한 것은 비단 힘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를 뒷받침할 체력 또한 청유백에 비할 수 없다.
[네놈이 지쳐도 저놈은 쌩쌩할 게야. 어찌할 테냐?]
‘그 전에 잡아야지.’
[그 알량한 주먹으로?]
천화의 질문에 청유백은 대답하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여유롭게 만담이나 나눌 정도로, 한가로운 공방이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무엇 하는가, 청유백! 더 이상의 맞승부는 두려운 것인가!!”
─쾅!
적우각이 한 걸음을 내딛으며, 주먹 한 번을 내지를 때마다 공기가 떨려왔다.
진각의 충격에 땅이 갈라지고, 내지르는 주먹의 풍압만으로도 저 주먹의 위력이 피부로 느껴졌다.
막기보다는, 피한다.
주먹으로써 주먹을 상대한 것은 그저 연출일 뿐이다.
적당히 할 법하다고 생각해서 해 본 연출.
‘애들한테 좀 더 보여주려 했는데, 이러다간 몸이 먼저 남아나질 않겠어.’
적우각의 공격이 계속해서 몰아쳤다. 속임수도, 허수도 없는 그저 폭력적인 힘의 연속.
청유백은 짐짓 결론지었던 적우각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만 했다.
기껏해야 청률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고 생각했건만, 그리 비교하면 적우각에게 실례가 될 정도였으므로.
권격은 별 것 없고, 그 주먹질 사이사이에 신묘한 묘리가 실려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청유백은 적우각이 상당한 실력자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청유백! 계속 도망만 다닐 텐가? 검을 뽑아라!”
“필요하다면 생각해 보지. 네놈이야말로 도를 들지 않아도 괜찮겠나?”
적가의 가전무공은 권법이 아닌 도법.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기로는 피차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적우각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글쎄, 그게 필요하겠나? 조금만 더 있어도 자네에게 실망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호오….”
말뜻은 명료하다.
너 따위는 칼을 들지 않고 이 주먹만으로 충분하다?
아주 흥미롭다.
몹시도 흥미로운 주제다.
주먹만 쓸 줄 아는 놈인 줄 알았더니, 혓바닥 놀림도 나쁘지 않다.
청유백의 얼굴에 살풋 미소가 드리웠다.
지금은 비어 있는 양손을 슬쩍 들어 올려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것 미안하군. 만족스럽지 못했나?”
“무척이나! 모르는 겐가? 불타는 우정의 교환이라면 모를까, 쥐새끼 쫓듯 하는 추격전은 전혀 즐겁지 않다는 걸 말이다!”
“불타는 우정?”
“뭣 모르는 놈들은 주먹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뭣 모르는 놈이라.
청유백은 백 년 동안 상식이 바뀌었나 싶은 고민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청유백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즐겁지 않다.
그것에 관해서는 동의했다.
상대하기 좀 미묘한 면이 없잖아 있었다.
주먹으로는 힘들다.
한데, 진검을 들면 그건 그것대로 또 목숨을 붙여놓을 수 있을지 가늠이 가지 않았다.
천화가 하품하며 대꾸했다.
[이 아이가 네 생각보다는 강한 모양이구나. 어쩜, 실망해야 하는 순간이더냐?]
‘마교의 흥복이니 좋아해야 할지도 모르지.’
어찌할까.
적당히 놈의 실력을 확인하면서도, 검을 뽑지 않고 해결할 만한 방법.
청유백은 몇 번 정도 더 뒷걸음질 치며 생각을 정리했다.
찰나, 적당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검을 뽑으라 했나?”
“그래! 어차피 지루한 술래잡기를 반복해 봤자 고양이 앞의 쥐새끼 꼴일 테지? 너의 모든 것을 보여 보란 말이다!”
“모든 것이라….”
적우각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적가의 무공도 물론 권법이 아니지만, 청가의 무공도 당연히 권법이 아니다.
권법은 오히려 묵가의 영역이다.
물론, 굳이 원한다면 전혀 다른 종류의 잊혀진 권법을 펼쳐 보일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목적은 그게 아니니.’
즉, 주먹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은 이미 밑천이 드러났다.
그리 말해도 좋으리라.
그건 사실이다.
사실이긴 한데….
“훈계질이라니, 퍽 오랜만에 듣는 소리로군.”
누군가가 제게 토를 다는 상황은 썩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어찌 생각하면 흥미로운 상황이라 볼 수도 있으리라.
그다지 겪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감히 누가 천마의 검에 대해 훈계를 하겠는가?
“쥐새끼라….”
청유백은 백월검의 검병에 손을 얹었다.
어찌할까.
그렇게 칼머리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결정을 내린 듯이 웃었다.
“그래, 맞는 말이긴 하지.”
정확한 말이다.
썩 보기 좋지는 않은 꼴이다.
기실,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이미 반쯤 보여줬다.
기술 따위 필요 없이, 그저 순수한 ‘힘’만 충만하다면 어떤 싸움을 이끌어 낼 수 있는가.
물론 적우각이 아무런 생각 없이 무식하게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은 아니었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그저 우직하게 돌진하는 것으로만 보일 테다.
그리 보이면 충분했다.
아이들이 이 싸움에서 큰 깨달음을 얻지 못하더라도, 하나의 확신만 얻는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충분한 힘이 있다면 기술은 필요가 없다.’
기술이란 힘의 격차를 메우기 위해 기르는 것이지, 아이와 어른만큼의 힘의 격차가 있다면 기술 따위는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다 맞는 말이다.
“처맞는 말.”
“뭐?”
청유백은 슬쩍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처음에는 선망으로 가득 찼던 눈빛이, 어느새 전전긍긍한 채 조금이나마 걱정하는 듯 물들어 있었다.
굳이 질 이유도, 공들여 이길 이유도 없으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이왕이면 승리하는 것이 나을 테다.
이왕이면, 완벽한 ‘힘’의 승리로.
─스르릉.
쟁반에 구슬이 굴러가는 듯, 청아한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
소리 없이 뽑혀 나온 백월검이 빛을 발했다.
동시에, 그것을 본 적우각의 눈 또한 반짝였다.
“하하! 멋진 검이군! 이제야 제대로 할 생각이 들었나?”
“네놈은 어떨까, 최선을 다할 수 있겠나?”
“그건 미안하게 되었군. 안타깝지만, 내 도는 항상 들고 다니는 물건은 아니라서 말일세. 무겁거든!”
뚜둑!
청유백이 검을 뽑아드는 것을 본 적우각은 목과 주먹을 꺾으며 관절을 풀었다.
“하지만, 나 또한 응당 마땅한 대접을 해야만 하겠지!”
천하의 명검, 절세의 명검이라 하면 무어 어떤가.
오히려 좋다!
맞서서 이겨내면 그뿐!
적우각은 제 아이들을 돌아보며, 그 중 하나에게 손짓했다.
“삼호야. 내 권갑을 가져와라.”
“도(刀)는….”
“굳이 갈 필요 없다. 권갑만.”
“복명.”
곧 아이가 가져온 것은 세월감이 느껴지는 강철의 권갑이었다.
검묘에서 나온 물건이라 보기에는 품질이 썩 뛰어나지는 않았으니, 적우각의 물건으로 보였다.
적우각은 그것을 주먹에 끼어 착용하고는, 한결 낫다는 듯 청유백을 돌아보았다.
“자, 가볍게 다시 시작해 볼까…?”
그러나 적우각이 청유백을 돌아본, 바로 그 순간.
청유백은 적우각의 눈앞에 없었다.
“무슨….”
일거에 사라져─기습을 가한 것은 아니었다.
비무를 중단한 것도 아니었으니, 설령 기습했다 하더라도 비겁타 하지는 못했을 테다.
하지만 청유백이 한 것은 기습이 아니었다.
기습이란 약자가 강자를 치기 위해 벌이는 수다.
청유백이 보여야 할 ‘힘’의 전투와는 가장 먼 대척점에 있는 수.
그렇기에 청유백은 달리 움직였다.
“…….”
반 순간 뒤, 적우각은 조금 떨어진 나무의 아래에서 줄기에 손을 얹은 청유백을 발견했다.
“뭘 하는….”
적우각은 인상을 찌푸리며 청유백을 주시했다.
뭘 하는 것인가.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청유백의 행동은 그 의미를 알기 힘들었다.
그저 행동 자체를 말하자면─
청유백이 한 것은, 그저 단순하게 가지 하나를 꺾어내는 일이었다.
“뭘 하는 거냐?”
끄트머리가 아이의 손목 정도 되어 보일 두께의 나뭇가지.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것을 베어낸 청유백은 몇 번 더 검을 휘둘러 잔가지를 쳐내었다.
“…….”
마지막으로 끄트머리를 잘라내어 뭉툭하게 했다.
그것은, 투박하지만 분명 완연한 검.
청유백이 당연하다는 듯 백월검을 제쳐두고 손에 쥔 것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대충 빚어낸 목검이었다.
“나쁘지 않군.”
청유백은 그것을 들어 슬쩍 휘둘러보고는, 겸연쩍게 웃으며 백월검을 검집에 넣었다.
그리고는, 웃으며 말했다.
“뭘 그리 보고만 있나? 어서 오지 않고.”
적우각이 그것을 그저 보고 있던 이유는 그 행위가 흥미로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황당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찌, 어찌 저런─
모욕을!
“어서.”
청유백의 한 마디에 적우각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마따나 주먹으로 화답했다.
─슈욱!
조금 더 과감하고 신속해진 움직임.
권갑을 낀 만큼, 주먹에서 내공을 분산시킬 수 있었다.
“청유백, 사나이라 생각했건만… 어찌 나를 이리 능멸하는 것인가!!”
“능멸이라.”
적우각의 움직임은 신속했지만, 이번에는 청유백에게 닿지 않았다.
더 강하게, 크게 휘두른 만큼 동작이 커지기 마련.
조금 더 커진 틈을 청유백은 놓치지 않았고, 그 작은 순간은 거리를 벌리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한순간에 넉 장은 되는 거리가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
검을 들었음에도, 거리를 좁히지 않고 도리어 더 벌리는 청유백의 의중을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직후 청유백의 행동은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
그것은 미려한 일련의 동작.
무릎, 어깨부터 팔꿈치로 이어져, 팔목에서 손가락까지 이어지는, 하나의 초식.
그 결과로서, 갓 만들어낸 목검이 한순간에 청유백의 손에서 벗어났다.
기껏 만든 목검을,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손에서 놓아 버린 것이다.
목검은 맹렬한 기세로 적우각에게 쇄도했다.
허나, 어차피 결국은 목검.
적우각은 그것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고작 저딴 장난질, 하수도 택하지 않을 멍청한 짓거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저것은 분명, 어떤 의미로든 자신을 도발하는 행위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래.
기꺼이 넘어가 주겠다.
적우각은 팔을 교차하며, 날아드는 목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을 들게 해 주마, 오만한 놈!”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