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맞는 말이야. 처맞는 말 (1)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책임자는 청유백과 아이들을 장원의 한적한 한켠에 위치한 작은 방으로 안내했다.
물건이 다니는 뒷길과도, 사람들이 다니는 앞길과도 동떨어진 장소.
생활감은 조금 있었지만, 잘 정돈된 손님방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명성이 좋긴 좋구나.]
‘아무렴. 뭣 때문에 무리해서 진문을 돌파했는데.’
물론 보상의 문제도 있지만, 그 거지같은 ‘쓰레기 공자’ 딱지를 떼기 위함도 있었다.
언제나 그렇지만, 따까리들을 닥치게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은 윗대가리를 족치는 것.
이번에는, 그 윗대가리도 하지 못한 일을 함으로써 자신을 입증한 셈이었다.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로군.’
녹가의 녹운각에 처음 찾아갔을 때 경비들에게조차 멸시받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그야말로 팔자가 폈다 말하기에 아쉬움이 없었다.
이 방만 해도 그렇다.
청가의 검소하기도 모자라 빈곤하기 짝이 없는 손님방을 생각해 보면, 이곳은 그야말로 진기한 물건들로 가득했다.
벽에 걸려 있는 영문 모를 보검이며, 탁자니 의자니 하는 것들 전부가 이를 데 없는 고급.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처음 보는지, 전부 어쩔 줄 모르고서 주변을 돌아보고 있었다.
신기한, 혹은 선망 어린 눈길.
청유백은 대충 자리를 잡아 벽에 기대앉고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무거나 만져도 된다. 다 깨부숴도 되니까, 궁금한 건 다 건드려 봐라.”
“그, 그래도 되나요?”
“곳간에 쌀이 미어터지는 놈들이다. 뭐 하나 깨져나간다 해도 신경 안 써.”
손님방의 물건은 본디 손님을 위해 준비된 것이고, 자신과 있는 한 이 아이들도 엄연한 적가의 손님이다.
설마 하니 뭐 하나 부순다 하더라도 책임을 묻지는 않으리라.
설령 책임을 묻는다 하더라도… 뭐, 황돈이 알아서 하겠지.
청유백은 시선을 돌려 생각을 환기했다.
적우각을 찾은 이유는 단순했다.
결투.
즉, 이 아이들에게 ‘진짜 싸움’이 뭔지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훈련에 불만이 생기는 이유는 그 훈련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 왜 필요한 것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평소라면 그냥 침묵시키고 명령했겠지만….’
강행도 괜찮은 방법이기는 하겠으나, 청유백은 어차피 한 번은 적우각을 찾아올 예정이었다.
적철진이나 청명휘를 포함한, 다른 강력한 후계자들의 실력을 가늠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더 좋은 선택지가 있다면 굳이 강행할 이유가 없다.’
청유백은 백월검을 무릎 위에 올리고, 그것에 손을 올리며 정신을 집중했다.
‘적우각 정도면 딱 적당한 실험대다.’
청유백의 몸은 최근에 이르러 첫 번째 균형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릇은 강건해져 더욱 큰 물살을 견뎌낼 수 있게 되었고, 단전에 깃든 마기는 곧 일 갑자가 채워진다.
일 갑자.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육도(六道), 여섯 길 중 하나의 길만 걸을 수 있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두 번째 길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것은 그저 나무막대를 휘적거리는 장난질과 진배없었다.
그만큼 싸울 상대를 골라 이길 승부에만 임했고, 질 싸움을 철저히 피했기에 그것으로 충분했다.
허나.
‘적철진과 청명휘는 어떨까.’
그들의 실력을 본 적은 없다.
깨어난 직후의 마교를 평가했을 때에 그랬듯이, 청유백이 지금 그들에게 과한 기대를 갖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크게 실망했던 그 청률 놈과 하등 다를 것 없을 수도 있고, 그저 운이 좋거나 입만 산 머저리일 수도 있다.
허나.
대비라는 것은, 결코 과하여 나쁠 일이 없는 행위였다.
‘백월검의 상태도… 나쁘지 않다.’
그간 아이들에게 뽑아낸 주화입마의 마기는 대부분 백월검에 때려 넣었다.
아직 완벽하다 말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제 문제없이 쓸 만한 정도는 되었다.
물론 이전에 자신이 쓰던 진천검에 비하면 아직 모자라기는 하나, 머지않아 그 수준이 되리라.
문득, 천화는 자연히 떠오른 의문을 입에 담았다.
[헌데, 그 아이가 안 오면 어찌할 것이냐? 무시할 수도 있지 않으냐.]
‘글쎄….’
[약속도 하지 않았으면서.]
책임자에게 숨 쉬듯 구라 치는 일이야 뭐 항상 하던 일이니 별말 안 했다만, 천화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약속?
약속은 무슨 약속.
그딴 건 없다.
그저 대충 대꾸한 것일 뿐이다.
청유백은 적우각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그저, 대충 약속이 있었다는 식으로 둘러대서 위치를 알아내고자 말한 것일 뿐이었다.
그게 운 좋게도 잘 흘러가 자신이 직접 찾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기는 했지만서도.
결국, 적우각이 만나지 않겠다 하면 하릴없이 돌아가야만 할 테다.
하지만 청유백은 태연히 대꾸했다.
‘올 거다.’
[그것을 어찌 아느냐?]
‘사나이의 육감.’
[…….]
결국 그냥 믿을 구석도 없이 쳐들어왔다는 말이지만, 청유백은 확신에 차 있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그야.
‘그것이 육감이니까.’
음!
청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일만 스물하나! 일만 스물둘!!”
그것을 굳이 표현한다면, 일종의 장관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수백 명의 장정이 땅바닥에 엎드려, 한 사내의 구령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일련의 과정.
그리고, 열 명의 아이들이 그 앞에서 악을 쓰며 어떻게든 따라가려 노력하는 모습은─
보는 어른의 얼굴에, 반쯤 걱정을 띤 웃음을 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일만 스물셋! 그래! 계속 몸을 움직여라! 근성이다! 근성을 보여라!!”
적우각은 그 가장 앞에서, 누구보다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고함을 내지르고 있었다.
책임자가 그의 옆으로 다가가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잘 듣지 못했던 것일까, 적우각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누가 왔다고?”
“그, 청유백이….”
“청유백…?”
‘청유백이 누구더라.’
뭔가 익숙한 이름이기는 하다.
그저께 주점에서 패 준 놈팡이인가?
아니다, 어제 직무 태만으로 만검각에서 내쫓은 멍청이인가?
적우각은 잠시 머리 한 움큼을 움켜쥐며 고민했다.
적우각이 이리 기억을 더듬는 것이 자주 있는 일인지, 총관은 익숙하게 말을 이었다.
“약속이 있었다 합니다.”
“아니, 그런 약속을 잡은 기억은 없다만….”
“그러십니까? 그러면 돌려보내겠습니다. 핑계는 알아서 대지요.”
가물가물하다.
분명 뭔가 중요한 게 있었던 것 같은 이름이다.
누구더라.
청…유백이면, 청가 사람인가?
적우각은 느릿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에서, 가까스로 무언가의 단서를 잡아내었다.
그리고는.
“잠깐.”
“예?”
책임자가 돌아선 사이, 한순간에─번뜩였다.
“아!! 청가의 청유백이!!”
청가의 쓰레기!
어쩐지, 생소한 이름이다 싶었다.
허구한 날 쓰레기, 쓰레기 하다 보니 이제는 이름이 더 생소할 지경이었다.
‘이제 그리 부르는 건 실례겠지!’
지난번, 만마서고에 만났을 때의 그는 결코 ‘쓰레기’라 일컬을 만한 사내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적우각은 얼굴 가득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래, 청유백이가 왔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약속이라!”
큭큭.
적우각은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서로 한마디 기약의 말조차 나누지 않았음에도, 이리 먼저 찾아와 주다니!
“있었지! 그래, 약속!! 크하하하!! 있었고말고!!”
한 번 나눈 주먹의 약속이라는, 낭만적이기 그지없는 약속이 있었다.
적우각은 아이들을 일으켜 세우며 저를 따르게 했다.
약속이 있었다면,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이 당연지사.
‘사나이로구나, 청유백!’
이것은 기회다.
아이들에게 진정한 ‘사나이’가 무엇인지 알려줄 수 있는 기회!
그저 훈련만으로는 새겨지지 않는, 진정한 투지와 우정을 보일 수 있는 기회!!
적우각은, 그리 확신했다!
* * *
…시간이 지났다.
어느 정도 지났느냐 묻는다면, 청유백은 벽에 기대다 못해 방바닥에 누워 정수리가 벽에 맞닿아 있었고,
아이들은 신기하다며 툭툭 쳐보다가 산산조각으로 깨부숴버린 꽃병을 ‘어떻게든 고칠 수 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조각을 맞춰보는─
그 정도의 시간.
간단히 표현하자면 반각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반각 만에 운명을 달리한 꽃병에 대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지던 청유백은, 멀리서 다가오는 몇 개의 기척을 느끼고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다시 벽에 기대었다.
[무인이구나. 허나….]
“…….”
적우각은 아니다.
그만큼 강하지도 않고, 발걸음도 가볍다.
‘경비 무인? 아냐. 발소리가 가벼워. 아직… 청년이다.’
정확히는 청년과 소년의 사이.
청유백의 또래 정도 되리라.
인원은 다섯.
흡사 지난날의 청궁우와 같이, 단체로 몰려다니는 친구들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조금 더 지나자, 목소리까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미친놈, 지가 할 수 있다고 다른 사람도 다 되는 줄 안다니까.”
“적혈도법(赤血刀法)도 똑바로 펼치지 못하는 반푼이 주제에 고작 힘 하나 센 걸로 천마지회의 자리를 차지하더니, 기세등등한 꼴이란.”
목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장로들이 미친 거라니까? 노망이 난 거야! 싸우면 내가 이긴다니까. 그렇지 않냐?”
“당연하지. 마지막 날 숙취만 아니었으면 네가 나갔을 게 당연했을 텐데. 그 새끼, 비겁하게 먼저 날짜를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어.”
“그렇고말고….”
그리고 이윽고, 문 앞까지 이르러서는.
─끼이익.
“…뭐야, 이건?”
“호오….”
작은 경첩음과 함께, 청유백과 사내의 눈이 마주쳤다.
옷에 새겨진 적색 범의 문양은 분명한 적가 후계자의 표식이었지만, 청유백이 아는 이는 아니었다.
천마지회의 참가자는 아니다.
‘후계 싸움에서 낙오된 떨거지들이라 봐도 무방한가.’
아무래도 인적이 드문 곳이니, 청궁우 놈마냥 땡땡이치러 온 것으로 보였다.
적가 사내는 눈알을 부라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니네 뭐냐? 청가?”
“아니, 잠깐… 이 새끼 이거, 청유백 아냐?”
“뭐? 청유백? 이놈이 그놈이야?”
“아, 그 운 한번 억세게 좋은 새끼? 뱀이 자는 동안 진문을 통과했다면서. 이봐, 진짜냐?”
계속 이어서 방 안으로 들어온 사내들은 쉴 새 없이 각자의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하나같이 어쩜 똥을 갈아 마셨나 의심될 정도의 멍청함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멍청한 놈이 한 명 있었다.
“이봐, 네 영웅담 한번 들려주지 그래? 청궁우 그 멍청이 면상을 박살냈다면서. 그리고 뭐랬더라… 아 그래, 진문을 통과했다던가? 운 한번 억세게 좋은 놈이야!!”
크하하하하!
가장 앞에 나선 놈이 몇 마디 지껄이자, 옆의 네 놈이 호응하듯 웃었다.
“그렇지, 그렇지. 청궁우 그 새끼 면상 봤어? 진짜 웃겼다니까? 이빨이 열댓 개는 빠져서는, 내가 진즉에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크하하하학!!”
무엇이 그리 웃긴지, 청유백은 이해가 되지 않을 따름이었지만, 그는 그리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내가 아니었다.
“으하하하하하하!!”
“뭐, 뭐야? 미친 새낀가?”
실로 아쉬운 일이다.
명성은 편리하지만, 때로 알아 처먹지 못하는 머리 나쁜 놈들은 꼭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빡대가리 새끼들을 빡대가리라는 이유로 안 그래도 나쁜 머리를 쪼개 버린다면, 열심히 관리한 명성도 바닥으로 추락할 뿐이다.
때문에, 이유가 중요하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자, 얘들아. 이르지만 첫 번째 야외수업 주제다.”
“웃었다가, 지랄했다가. 이 씨발 새끼는 대체 뭐야? 쓰레기라더니, 머리까지 쓰레기로 꽉 찬 거냐?”
사내들은 청유백의 광기 어린 웃음에 조금 주춤하는 듯했지만, 쪽수 때문인지 기세등등함은 여전했다.
이곳이 적가의 장원이라는 점 또한 크게 작용했을 테다.
적가의 안마당에서 적가의 후계를 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뭘 한다고 해도 청유백이 발악할 방법은 없다.
설령 한다고 해도, 결국 전부 청유백의 책임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그런 계산일 테다.
청유백은 오랜만에 제 목젖을 매만지며, 아이들의 귓가에 전음을 때려 넣었다.
{합의 없는 싸움을 할 때에는, 언제나 상대에게 선수를 양보해라.}
“……?!”
아이들의 귓가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청유백의 목소리가 울렸다.
수준이 되는, 최소한 마사급만 되는 무인들에게도 흔한 기술이지만, 아이들은 처음 겪는 것인지 한 순간 혼동이 인 듯 보였다.
{비무나 결투 따위와는 다르다. 사람 없는 곳에서 하는, 규칙 없는 암투 따위와도 다르다. 그럴 때는, 무조건 먼저 쳐라. 하지만….}
보는 눈은 많은데, 이 새끼는 꼭 족치고 싶다─라는 생각은 언젠가 한 번쯤은 꼭 들기 마련.
사람은 평판이라는 게 중요하고, 명성이라는 것은 평판에 의해 생겨난다.
때문에, 그것은 분명 관리할 필요가 있다.
평생 칼밥 먹고 살 칼잡이 놈들이라면 그런 것 신경 안 쓰고 꼴리는 대로 줘 패고 다녀도 실력이 받쳐주는 한 괜찮다.
하지만, 높은 자리에 설 이는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기에.
언제나 명분이 중요하다.
청유백은 뒤돌아 아이들을 감싸고는, 작게 속삭였다.
“쉿. 아무리 그래도 어찌 그런 말을 대놓고 하냐? 듣는 병신도 기분이라는 게 있다.”
“네?”
“뭣?”
작지만, 방 안에는 충분히 옅게 울릴 수 있는 정도의 소리.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 겁쟁이가 숨 쉬는 것조차 역겨워 차라리 돼지우리에서 숨을 돌리고 싶다는 네 마음도 잘 알겠다만, 그래도 공공연히 말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예?”
저희가 뭘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