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65화 (65/200)

제65화. 머리는 뜨겁게, 가슴은 차갑게 (5)

“…….”

“…….”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어쩔까 고민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실행에 옮기는 놈은 없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는 법이지만, 누가 봐도 처맞는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계획을 꺼내들고 싶지는 않은 법이다.

그나마 어린아이들이라 표정에 속마음이 드러나고는 있었다만─

‘네가 할래?’

‘누굴 보내버리려고? 네가 해.’

어쩜, 친구의 복수를 하겠다며 다 함께 염라대왕과 사자대면을 요청하는 아름다운 미래 따위는 애초부터 없는 모양이다.

‘깡이 없구만, 깡이.’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네놈이 손수 그 끔찍한 고통 속에 처박았으면서, 벌써부터 네놈에게 개기기를 바라더냐? 금붕어도 아니고.]

‘말을 잘 듣는다 해야 하나….’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고작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가, 그 끔찍한 고통을 맛본 지 고작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그 공포를 딛고 벌써부터 기어오르기에는, 눈앞의 청유백이라는 벽은 지나치게 높았다.

“뭐, 기회는 언제든 열려 있다. 도전해 보도록.”

청유백은 실소를 흘리며 백월검을 다시 주워 혁대에 패용했다.

그때까지도 놈들은 청유백의 행동 하나하나에 움츠릴 뿐, 다른 움직임은 보일 기미도 없었다.

천화는 그것참 꼴 좋게 되었다는 양, 코웃음 치며 말했다.

[어찌할 테냐? 첫 매듭부터 잘못 지어진 꼴이구나. 이래서 공포로 아이를 다그치면 안 되는 게야.]

‘상관없다. 그냥 생각이나 해보라고 던져준 정도였어.’

이뤄질 일 없는 희망.

뭐 가령 과거시험 전날에 신령님이 꿈에 나타나셔서 족보를 신들린 듯 찍어주시지 않을까 싶은, 그런 희망 같은 것이다.

지금 당장 안 덤비는 것도 나름 예상한 바다.

지금 저 아이들에게 이리 말해봤자 어차피 질 나쁜 농담 정도로만 들릴 터.

고통 탓에 생긴 원한과 공포 중 어떤 것이 더 크느냐 묻는다면, 아직은 단연 공포다.

‘…아직은 말이지.’

[아직은?]

‘시간은 많잖나?’

죽이려 들 깡이 없다고?

그럼 까짓것, 죽일 깡이 들게 만들어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 * *

우선, 이놈들을 굴려 기초 체력을 만들든, 무언가의 무학을 가르쳐 실력을 다지든 간에─

그것에 앞서 가르쳐야만 하는 것이 있었다.

청유백은 여전히 쭈뼛쭈뼛 어쩔 줄 모르는 세 놈들의 앞에 서서 손가락을 하나, 펼쳐 보였다.

“지금부터 말해주는 것은 하나의 마음가짐이다. 어떤 무기를 휘두르든, 어떤 무공을 배우든 간에, 이것 하나만 기억하고 움직여라.”

마음가짐.

심득(心得)이니 심결(心結)이니 어려운 말로 포장하곤 하지만, 결국 쉽게 말하면 마음가짐이다.

대충 명문 정파라는 놈들이─

‘태극은 하나이니 음양은 어쩌고’

라던가.

‘설중에 피어난 매화처럼 어쩌고’

따위를 지껄이며, 수련생들을 열렬하게 현혹시키는 말이 바로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물론 청유백에게도, 천마의 무학에도 그러한 원리가 있다.

하지만 지금 가르칠 것은 천마신공의 원리가 아니었다.

그런 것을 가르쳐봤자 알아먹지도 못할 테고, 써먹지도 못한다.

애들 눈높이에 맞는, 좀 더 실전적이고 단순하고 직관적인!

무언가가, 필요한 따름이다.

‘이게 또 완벽하지.’

이건 천마신공의 개념에도 결코 밀리지 않을 수준의 절대진리이면서도, 터득도 빠르고 응용도 쉽다.

알기만 하면, 누구든지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허, 그런 게 있단 말이냐?]

‘있고말고. 나도 상당히 오랜 세월을 들여 알아낸 거다.’

첫 발상은, 과연 옛 현인들 말씀은 싹 다 개소리라는 생각에서 착안한 것이다.

남녀소 누구나 마음에 품기만 하면, 생활의 어지간한 싸움에서는 지지 않을 마음가짐.

그것은 바로-

“머리는 뜨겁게, 가슴은 차갑게.”

[?]

─뭐라고?

순간, 그런 환청이 들린 것은 비단 천화만의 착각은 아닐 것이었다.

일귀, 이찬, 삼아도 하나같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잘 못 들었습니다?”

“복창한다! 머리는 뜨겁게! 가슴은 차갑게!”

“머, 머리는 뜨겁게, 가슴은 차갑게…?”

“소리가 작다!”

“머리는 뜨겁게! 가슴은 차갑게!”

[…….]

이것만 기억하면 질 수가 없지.

암. 질 수가 없어.

석가모니가 들으면 목탁을 두드리며 극락에서 내려와 두드리던 목탁 채로다가 청유백의 머리를 휘모리장단으로 두들길 말이었지만, 최소한 청유백은 그리 믿고 있었다.

참고로 노(老)는 제외한다.

그 인간들은 머리가 뜨거우면 죽는다. 고혈압으로.

애초에 무림의 노망난 늙은이들은 그런 마음가짐 없어도 충분히 강하기도 하고 말이다.

천화는 마지막 남은 희망으로, 청유백이 잘못 말한 것은 아닐까 싶어 넌지시 물어보았다.

[반대 아니더냐?]

‘아니, 이게 맞아. 애들이잖아.’

[아니, 하지만….]

쯧쯧.

왜 이걸 이해를 못 하지?

청유백은 몹시 아니꼽고도 시건방지기 그지없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마, ‘어휴 이런 우매한 놈들 같으니’라는 생각을 면상으로 표현하면 저딴 표정이 될 듯싶다.

“멍청한 놈들, 굳이 설명을 해야 하는군.”

팰 땐 패고 굴릴 땐 굴리더라도, 왜 맞고 왜 구르는지는 알고 패야 효과가 극대화되는 법이다.

청유백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어갔다.

“대체로, 분노면 대부분의 상황은 해결이 된다.”

머리를 뜨겁게!

목적이 명확한 분노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힘을 더해준다.

고수의 여유로운 웃음?

니네가 고수냐?

그딴 건 필요 없다!

그런 건 처맞고 나서 좀 더 비굴하게 되는, ‘아 그러지 말걸’이라고 생각하는 주요 원인이 될 뿐이다.

“냉철한 상황 판단? 전략적인 선택? 걱정 마라. 필요 없다. 그게 필요할 정도의 상대면, 애초에 너희로는 못 이기니까 맘 편하게 먹어라.”

“그다음은요? 죽음을 각오하고 달려듭니까?”

“아니. 어차피 달려들어도 못 이기니까, 안 아프게 죽기를 기도하면 된다. 그러면 불쌍해서 살려줄지도 모르지.”

“…….”

그게 맞나?

수없이 많은 의혹이 구름마냥 피어올랐지만, 누구도 용감하게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것도, 저 말이 ‘명령’이 아니라 ‘설명’이기 때문일 테다.

이의를 제기했다가 수틀리면 설명이고 나발이고 몸으로 체험하는 미래가 쉬이 보였다.

“그러니까, 머리에는 뜨겁게 분노를 유지하고, 가슴은 차갑게, 이딴 승부 따위 어찌 되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있거라.”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가슴까지 뜨거우면 만에 하나라도 졌을 때 골 아파진다. 하나는 차가워야지.”

[그럼 머리가 차가우면 되는 게….]

그럼 승부도 냉정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청유백은 천화의 사소하고 고루한 편견 따위는 상큼하게 씹어버리고는, 아이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쉽지?”

“…예!”

조금 벌어진 대답의 간격이 신경 쓰이긴 하지만, 놈들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므로.

청유백은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질문 있나?”

정적.

그 정적이 납득에서 온 것이든, 공포에서 온 것이든.

혹은 어이없음에서 온 것이든 간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 질문이라는 칼자루를 쥐고 싶어 하는 이가 없었다.

“없군. 아주 좋아.”

청유백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설명은 끝이다. 질문은 필요 없어. 그저 명령에 복종하면, 내가 전부 이루어 줄 것이다.”

또래 귀아대 놈들 따위는, 사뿐히 즈려밟을 수 있게 만들어주마.

즉, 강함을 주겠다.

그런 의미가 내포된 말이었다.

“자.”

─척.

청유백은 손을 들어 숙소의 바깥을 가리켰다.

자세히 뭘 어쩌라는 건지는 몰라도, 밖으로 나가라는 의미임은 확실했다.

“!!”

“이런…!”

“……!!”

눈치 빠른 일귀가 가장 먼저 바깥으로 내달렸고, 그 뒤를 이찬과 삼아가 쫓았다.

근육을 조이는 고통 탓에 누구 하나 빠른 놈은 없었지만, 그 표정 하나만큼은 악에 받치지 않는 놈이 없었다.

그들의 뒤에서부터 청유백의 목소리가 그들을 쫓듯 들려왔다.

─반 시진 주겠다!

만마서고까지 뛰어라.

가면, 백색 옷을 걸친 재수 없게 생겨먹은 놈이 있을 것이다.

그놈에게 제 이름을 말하면, 물건을 내줄 것이고─

그것을, 가져와라.

그리고 언제라도 두 시진 내로 가져오는 놈이 있다면.

여기서 잠시 말이 멈췄다.

뭔가 적당히 보상이 있어야겠는데, 적절한 것이 생각나지 않은 탓이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다시금 청유백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글쎄, 은원보 하나를 주겠다.

“…….”

─아, 못 알아 처먹는군. 너희가 좋아하는 돼지고기를 백 인분은 살 수 있는 돈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아이들은 그제야 함성을 내지르며 가열차게 숲속으로 질주했다.

하기사, 어릴 적부터 납치되어 마교에서 훈련만 받아온 아이들이다.

정상적인 금전 감각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터.

금세 멀어져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천화는 의외라는 듯 입을 열었다.

[네놈의 방식이 아니지 않더냐?]

‘내 방식?’

[그렇지 않으냐? 차라리 ‘시간 내로 도착하지 못한다면 발가락을 탁상 모서리에 찧게 해버리겠다!’ 같은 것 말이다.]

‘그건 좀…….’

[아무튼 간에!]

‘뭐, 채찍이 있다면 당근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계속 뭔가를 빼앗기만 하는 식의 훈육은 의욕 저하와 적개심 상승을 부를 뿐이다.

뭐가 되었든, 적절한 휴식과 보상은 필요한 법이다.

‘애초에, 지금껏 사흘간 살리려고 고생한 것도 나 아닌가?’

[그건… 그렇구나.]

딱히 죽어라고 굴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살려 보려고 귀하디귀한 환마단까지 쪼개서 먹였다.

지금까지는 오히려 채찍보다도 당근을 더 많이 준 셈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뭐, 까짓 은원보. 줄 수 있지.’

어려울 것 없다.

‘내가 말한 걸 지킨다면 말이야.’

지킨다면, 말이다.

* * *

“허억, 허억….”

“야, 하, 하나… 아니, 일귀…. 조금만 천천히 가자….”

“나도 죽을 것 같다.”

“끄으으으….”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숲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모르겠다.

시간을 세고, 걸음을 재는 것은 끝이 보이지 않는 이 길에 고통을 더할 뿐인 행위였다.

그렇게 끔찍한 고문을 자행해 놓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엄밀히 말하면 오히려 웃으면서-이런 강행군을 시키다니!

‘이 길이 이렇게 멀었던가?’

분명, 반대로 올 때는 얼마 되지 않았던 거리였던 것 같은데.

아무리 산을 내려가는 것과 올라가는 길이 다르기는 하다지만, 너무 정도가 다르다.

마치, 며칠 전이었으면 다섯 걸음이면 달려갔을 거리를 오십 걸음을 걸어도 닿지 않는 듯 보였다.

‘죽을 것 같아.’

일각이 지났을 때는 그래도 꽤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청유백 그 개자식이 행한 고문의 후유증인지 여전히 몸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그래도 견디고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이각이 지났을 무렵, 걸음걸이가 현저히 느려졌다.

‘차라리 죽여 줘!’

그나마 어깨너비로라도 보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이 언제였던지, 비참한 터덜거림만이 반복되었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정말, 진심으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반 시진 즈음에 문득 떠오른 생각 탓이었다.

‘아니, 그래도 시간을 못 맞추면 정말 죽는 게 나을지도 몰라.’

만약 시간도 못 맞추고, 살아서 청유백 그 인간을 다시 보면 어떤 상황을 맞게 될지는.

상상도 하기 싫다.

그 고통을 다시 겪는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사람이 정도가 있지, 어찌 인두겁을 쓰고 그런 만행을 저지른단 말인가!

“젠장….”

“빌어먹을….”

“으으….”

두 시진.

처음에는 왜 그리 많은 시간을 주는지,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그야 만마서고와 저들의 숙소는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까.

여유롭게 걷는다면 반 시진, 급하게 발을 놀린다면 저들의 발걸음으로 일각이면 충분히 다다를 수 있다.

헌데 두 시진이라니?

처음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모자라….’

‘도착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지?’

심지어, ‘만마서고에 도착하고’ 돌아와서 청유백에게 ‘물건을 건네기까지’ 두 시진이다.

왕복으로 두 시진이란 말이다.

헌데, 지금은 만마서고로 가는 길에만 두 시진을 전부 쓸 듯 보였다.

하지만, 불가능을 단숨에 가능으로 바꿀 수도 없는 노릇.

지금은 고통을 딛고, 열심히 발걸음을 옮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약 두 시진 뒤.

“도, 도착했어…!”

“삼아야, 봐! 만마서고야!”

“그러게….”

저 자신들과 평생 연관 없을 것 같던 석재 건물이 어찌 이토록 웅장하게 보이는 것일까.

돌아가는 길도, 돌아가서 청유백이 저들에게 지랄할 것도 두렵지만, 일단 지금 저들이 고난을 딛고 도착한 지금의 감정을 만끽하고 싶었다.

“후우, 후우….”

일귀를 필두로, 가쁜 숨을 내쉬며 만마서고의 문고리를 잡았다.

미리 언질이라도 되어 있었는지 주변을 지키는 경비들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힘겹게 문고리를 밀어 오래된 먼지의 향이 훅 느껴지는 바로 그 안에는.

“어서 와.”

그곳에는, 악마가 주둥아리를 떡 벌리고 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청유백과, 분명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일곱 명의 아이들이.

“이런… 씨….”

“씨?”

“…….”

“왜, 계속해 보거라.”

“…로 삼행시 지어보겠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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