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화. 그냥 싹 말아먹었네! (4)
천 년 마교?
불가능하다.
마교의 역사는 500년 전에 시작했을 따름이다.
‘시천마(始天麻)께서 당(唐)의 혼란을 타 중원 무림의 제패를 천명한 것이 천마신교의 시작일 터인데.’
헌데 1,000년 전이라고?
기록이 남고 안 남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 시절에는 마교라는 것이 존재하지를 않았다.
‘네 기억이 잘못된 것 아닌가? 전체가 온전히 돌아온 것은 아니지 않나.’
[물론 그렇지만… 본녀가 그리 간단한 것을 착각하겠느냐?]
천화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천 년 전이라는 이야기를 꺼낸 시점에서 그녀의 말을 믿기는 힘들지만, 지금까지 그녀가 보인 능력은 분명한 진실이었다.
천화는 천마혼으로서 강림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말 일부분은 진실이라 우길 수 있었다.
그녀가 천마든, 천마가 아니든 그에 준하는 실력자임은 분명한 사실.
실력이 있는 자의 말에는 언제나 신뢰가 담기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리 말해도….’
청유백은 책장을 훑으며 가장자리까지 걸어갔다.
조금 더 과거의 역사, 더욱 먼 과거로 돌아가─대략 520년 전의 과거까지.
그것이 기록의 처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 이전의 기록은, 최소한 이 책장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소실된 것도 아니겠지. 내 기억에도 없으니.’
[…….]
청유백의 감정을 읽은 천화 또한 그의 당혹감을 알았기에, 제 말만이 옳다고 고집하기도 힘들었다.
천화는 무거운 기분으로 입을 열었다.
[…본녀가 조금 더 기억을 찾으면 진실에 닿을 수 있을 것도 같구나.]
‘어떻게?’
[그 반지.]
천화는 아직 청유백의 손가락에 자리한 그을린 은반지를 가리켰다.
달리 처리하는 것도 귀찮아 계속 끼고 있던 것이었다.
청유백은 이 반지에서 어떤 기운도 느낄 수 없었지만, 천화에게는 다른 모양이었다.
[그것이 본녀를 인도하고 있다. 이 천산 어디에선가… 또 다른 기억의 파편이 본녀를 기다리고 있어.]
‘그리 말해도 와닿는 것은 없다만.’
[달리 방법이 있겠느냐?]
‘…빌어먹을.’
이제야 좀 무언가 드리워진 은막 뒤에 손이 닿을 것만 같았더니만, 알게 된 것은 짜증나는 종래의 상황과 더 큰 수수께끼뿐이다.
더욱 화가 나는 것은, 그녀의 말마따나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 있는데?’
[본녀도 모른다. 가까이 가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만….]
‘지금은 답이 없다는 소리군.’
후.
한숨이 비탄 사이로 섞여 새어 나온다.
아니, 방법의 편린이라도 남아 있는 시점에서 그리 절망적이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지금 해야 할 일은 단순하다.
그저, 일단 눈앞의 일들을 해치워가는 것.
그저 그뿐이었다.
* * *
“육 년 전까지의 기록입니다. 근 오 년의 장부는 아직 황가에서 보관하고 있을 겁니다.”
청유백이 가장 먼저 찾은 자료는 현 마교의 전체 거래 장부였다.
전체에서 통용되는 예산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사람의 수는 곧 세력 크기의 방증이며, 또한 사용하는 돈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해 준다.
때문에 청유백도 어느 정도는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크게 망했으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나가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군….’
삼분지 일.
제 대의 마교에 비해 통용되는 예산의 액수였다.
과연, 마교가 찢어졌어도 육대가가 멀쩡한 것을 보면 잠시 휘청했을 뿐, 세력을 잘 온존한 모양이다.
마교 부의 대부분은 황가에서 나오니, 황가가 온전하다면 예산은 멀쩡할 공산이 컸다.
세력은 십분지 일인 것에 비해 돈은 삼분지 일.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향후 십 년 정도를 잡고 마교를 다시 일통한다 하면, 이십 년 후에는 다시금 중원을 넘볼 수 있으리라.
‘물론 그 정도나 기다릴 생각은 없지만.’
청유백은 장부를 덮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저편의 창틀 너머로 햇살이 새어 들어오는 것을 보니, 이제 곧 시간이 된 듯 보였다.
아직 종은 울리지 않았지만 그도 머지않았으리라.
백소하는 책 읽는 청유백이 퍽 신기하게도 보이는지, 언뜻언뜻 책장 너머로 흘겨보며 물었다.
“한데 이걸 찾는 걸 보니… 귀아대의 아이들을 기르는 건 포기하신 겁니까?”
그리 자존심 세 보이더니.
포기를 모를 것만 같던 비밀에 싸인 인간도 현실의 벽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법인가!
백소하는 그리 중얼거리며 비웃듯 청유백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 새끼가 제가 목숨 빚이 두 개나 쌓여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있을지 의문이다.
청유백은 싸늘하게 대꾸했다.
“포기해? 내가 왜?”
“그야… 책의 제목을 찾으려 하는 것 아닙니까? 비급을 찾으려 하는 것 같지도 않고 말입니다.”
“그냥 궁금증에 찾을 수도 있지.”
“그걸 굳이 지금이요? 제목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역사서나 장부 따위를 들출 이유가 무어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는 확실히 그렇다.
동이 트면 곧바로 두 번째 시험의 내용이 공표될 테고, 그 이후로는 시간의 이점은 사라지게 된다.
즉, 지금 취하는 행동은 전부 무언가 이득이 있기 때문에 취하는 행동.
분명 이곳에 있는 다른 후계자들도 그리 움직이고 있으리라.
보통의 경우를 예상하면 두 가지.
제목을 찾거나, 비급을 찾거나.
하지만 어느 쪽이든 청유백에게 통용되는 경우는 아니었다.
청유백은 대충 대꾸했다.
“뭐, 그렇게 생각하던가.”
다만, 문득 궁금해진 청유백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다른 다섯 명은 뭘 하고 있지?”
“다섯 명이라니요?”
“나를 제외한 놈들 말이다. 이 위층에 있는 놈들.”
“아, 다른 후계자들 말씀이십니까? 다섯 명은 아닙니다. 여기 온 것은 네 명뿐이거든요. 뭔가 착각한 것 아닙니까?”
네 명이라고?
청유백은 인상을 찌푸리며 기감을 다시금 펼쳤다.
삼 층에 자신과 백소하.
사, 오, 육 층에 한 명씩.
그리고 팔 층에 가장 강렬한 게 하나.
그리고 칠 층에, 묘하게 옅은 기척이 하나 있었다.
기감을 감추는 게 익숙한 놈인지,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놓쳤을지도 모른다.
‘그렇군. 백소하 이놈이라면 놓쳤을 수도 있겠어.’
하기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백소하의 실력은 잘 쳐줘 봐야 마졸급 상위.
청유백이야 너무 당연하다는 듯 간파하고 다녔지만, 실제로 기감만으로 고수의 기척을 알아채는 것은 몹시 어려운 일이었다.
고수일수록 자신의 기척을 숨길 줄 아는 법이니 말이다.
그리고 칠 층에서 제 기척을 숨긴 저놈은 최소한 마사급 상위는 될 것이다.
무력으로 따진다면 청률의 수준과 비슷할까.
백소하에게 이 이상을 기대해봤자 대화가 진행되지 않을 테다.
“좋아. 그럼 그 네 명은 뭘 하고 있지?”
“대체로 같습니다. 두 번째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다들 제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겁니다. 적가의 적철진과 적영, 청가의 청명휘… 그리고 묵가의 묵초련이 왔지요.”
천마지회에 참가한 후계자는 총 열다섯.
그중에서도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것은 가장 정보 수집에 치열하고, 가장 유능한 다섯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상황이 어찌 되더라도 두 번째 문제의 대리전에서 상위권을 차지할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그저 참가에 의의를 두는 다른 열 명과는 달리, 진심으로 저가 천마가 될 수 있노라고 믿는 부류일 테다.
아니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매사에 철저하여 대충대충을 용납할 수 없는 성격이거나.
천화는 청유백의 기감을 공유하며 다시 주변을 훑었다.
그리고는 잠시 후, 무언가 기이한 것을 알아챘다.
[한데, 그 아이가 안 보이는구나?]
‘누구?’
[녹가의 아이 말이다.]
‘녹지연 말인가.’
확실히 기묘하기는 했다.
시험의 시작을 알려준 것이 그녀일진대,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정보를 미리 안 만큼 준비를 전부 끝내 이곳에 오는 것조차 불필요하다 생각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녀는 아직 책의 제목을 찾지 못했을 테다.
승리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면, 그 가능성이 아무리 적다고 해도 사소한 것 하나까지 매달림이 옳았다.
보통은,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목적이 뭔지 알 수가 없는 이상, 그녀를 ‘보통’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울 테다.
‘내게 방해가 되진 않겠지. 그러면 상관없다.’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그녀의 목적은, 그녀 자신이 소교주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녹지연의 목적이 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그것이 제 앞길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이기를 바랄 뿐이었다.
청유백이 홀로 눈알을 굴리는 것을 기이하게 바라보던 백소하는 참다못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걸 묻는 이유는 뭡니까? 나태하게 늦잠이라도 자고 있을 줄 알았습니까?”
“그 말은, 나는 늦잠이라도 자고 있었다는 것처럼 들리는군.”
“크게 다르지 않잖습니까. 귀아대를 가르칠 것이었다면 준비를 했어야지요. 뭐 지금부터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굳이 득이 되는 요소를 포기한 것과 다름이 없잖습니까?”
다른 놈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조금이라도 벌어놓은 시간을 유익하게 사용하려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귀아대를 가르칠 준비.
아마도 백소하가 말하는 것은 그들에게 가르칠 무공을 선별하는 과정을 이르는 것일 테다.
‘보통은 제가 알고 있는 무공을 가르치겠지만, 후계자들이 익힌 것은 저들 가문의 무공. 그것을 외부에 가르칠 수는 없겠지.’
때문에 궁여지책으로나마 비급을 찾는 것이다.
자신의 무공을 가르칠 수는 없고, 어차피 다른 것을 가르쳐야 한다면 이왕 좋은 교본이 있는 것이 좋으니 말이다.
하지만.
“필요 없는 일이니 하지 않은 것이다. 불필요한 걱정만큼 쓸데없는 것이 없지. 알고 있나?”
청유백은 굳이 무언가 비급을 찾아 이곳을 헤맬 여유도, 흥미도 없었다.
왜 그리하겠는가?
거짓말 조금 보태면, 이미 수백 가지의 무공이 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을 남에게 가르친 적은 없다지만─그 가르치는 실력의 고하가 고작 무공 비급 하나로 격렬하게 증감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천화는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백소하의 말에 동조했다.
[흐음, 그도 그렇구나. 저 아이의 말도 일리가 있어.]
‘뭐? 왜? 너도 알고 있는 무공이야 몇 개쯤 있지 않나.’
[그건 그렇다만, 어찌 가르쳤는지 추궁을 들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편찬서가 없어진 마당에 네가 아는 무공의 비급이라고 온전할까?]
확실히 그러했다.
이 거대한 석재 팔 층 건물은 다시금 만들 수 있다고 하지만, 소실된 책까지 다시 구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은 무공을 대뜸 가르쳤다가 그걸 어찌 아느냐고 추궁받는 날에는 꽤나 귀찮게 될 것이었다.
‘귀찮게 되어도 넘어갈 수야 있겠다만….’
그래도, 귀찮음은 적을수록 좋다.
어차피 얼마 걸리지도 않을 일.
청유백은 툴툴대며 돌아서는 백소하를 붙잡았다.
“또 뭡니까?”
“마음이 바뀌었다. 책을 좀 찾아 줘야겠어. 우선….”
한순간.
청유백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찰나를 가르고, 순간을 쪼개어─
저 건너편에서 나타난 작은 기척이 청유백을 향해 쇄도했다.
“!!”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