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화. 그냥 싹 말아먹었네! (3)
할 일은 정해져 있다.
그런데.
“일단 너는 필요 없다. 내 알아서 찾아볼 테니, 네 할 일 해라.”
“자, 잠시만요. 무슨 의밉니까?”
“너 쓸모없다고.”
“그 무슨….”
만마서고는 청유백에게도 익숙한 장소였다.
그리 발걸음 할 일 없었던 청가와는 다르게, 곤란한 것이 생기면 줄곧 찾았던 장소가 만마서고였으니 말이다.
백 년 전의 전쟁 때 화재가 조금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긴 한다만, 이리 다시 지은 것을 보니 구조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 하기도 귀찮은 일.
마치 당연하기라도 하다는 듯 등을 돌리는 청유백에게 백소하는 당황하며 다가섰다.
“어, 어찌 책을 찾으려고 그러는 겁니까? 이곳은 넓습니다. 팔 층이나 되는 장서각이 이 천하에 흔한 줄 아십니까?”
“나도 글 읽을 줄 안다. 책 찾기 따위야 편찬서만 있으면 할 수 있을 텐데, 굳이 너에게 부탁할 이유가 있나?”
편찬서.
기만에 이르는 만마서고의 책을 관리하기 위한 일종의 도서 일람이었다.
책의 제목과 구획, 입수 경로 따위를 망라한 서적으로, 만마서고에서도 가장 엄중히 보관하는 물건 중 하나였다.
본래라면 백가의 주요 인원 이외에는 열람이 금지되어 있겠지만─
‘만마서고 전체의 개방이 약속된 지금이라면 그것도 들여다볼 수 있겠지.’
그것만 있다면 딱히 남의 도움을 받을 필요도 없었다.
굳이 누군가의 이목을 끌고 싶지도 않았고 말이다.
허나.
백소하는 무슨 말을 하냐는 양, 인상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편찬서라니요. 만마서고에 편찬서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뭐라고?”
“만마서고의 편찬서는 백 년 전의 대전에서 소실되었습니다. 대체 언제의 일을 말하시는 겁니까?”
“아니, 뭐 그딴….”
“백가가 뭣 땜에 지금껏 구르고 있는데요. 백 년 동안이나 진행하고 있는 대 가업이 새 편찬서의 발행입니다.”
편찬서가 없다?
백소하는 마치, 당연한 사실을 언급하기라도 하는 듯 내뱉었다.
백 년 전의 일이니 저와 관련이 없다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유백에게는, 결코 쉬이 흘려 넘길 수 없는 말이었다.
마교의 피해가 생각보다 큰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청유백의 뇌리에 스쳐 지나갔다.
‘…전쟁 때 얼마나 털린 거지?’
편찬서가 무슨 저잣거리에 굴러다니는 삼류 민담 소설인 줄 아는가.
편찬서는 만마서고의 심장이다.
다른 문파에서 털어온 신공의 비급이나, 마교의 최고 기밀 작전 문서 따위와 동급의 보안을 지닌 책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 더하면 더하다 일컬어도 모자라지 않으리라.
그것이 소실되었다는 말은 곧, 마교의 심처인 이곳이 직접적으로 타격당했다는 소리.
청유백이 상정하는 것보다도, 전쟁 이후의 상처가 클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뭐, 보물고에서부터 어느 정도는 예감하지 않았더냐.]
‘그거야 그렇다만….’
하기사, 보물고조차도 상태가 엉망이었는데 다른 곳이라고 멀쩡하다는 보장이 있겠는가.
청유백은 감출 수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 어차피 진실의 코앞까지 온 상황이 아니던가.
지금 바로, 직접 확인하면 되는 일이었다.
“마교의 기록. 백 년 전 정마전쟁 이후의 역사는 어디에 있지?”
* * *
“어휴, 보십시오. 나 없으면 이걸 어찌 찾았겠습니까? 너는 나한테 감사해야 합니다. 알기나 합니까?”
“그때 그냥 뒤지라고 내버려 둘 걸 그랬나?”
“…말이 그렇다는 거죠.”
만마서고 삼 층의 한 구획에서 가지런히 꽂힌 책들을 꺼내든 백소하는 그것을 청유백에게 건네었다.
한 눈에도 보기에도 오래된 것이 느껴지는 한 질의 서책.
백소하는 계속해서 그것들을 분류해가며 말을 이었다.
“이쪽이 전쟁 직후의 십 년이고, 이쪽은 첫 천마지회 이후의 치세로군요. 각 년의 세부 작전 기록이나 보고서 따위는 따로 보관되어 있을 겁니다. 찾아볼까요?”
“아니. 이거면 됐다.”
자세한 내용은 필요 없다.
알아야 하는 것은 마교 전체의 정세와 현재의 상황.
단적으로 말해서─마교가 얼마나 거지같은 상황에 처했는가다.
청률의 태청심법에 관해서는 자세한 사료가 있으면 좋겠다만.
‘그것도 전체적인 줄기만 알면, 대강의 사정은 가늠할 수 있겠지.’
청유백은 호롱을 옆에 두고, 곧바로 바닥에 앉아 책장을 넘겼다.
“흠….”
백소하는 말없이 떠나갔다.
팔랑이는 책장 넘기는 소리만이 고요 한가운데에서 울려왔다.
흥미로 시작한 감정이 장을 넘길 때마다 격해지고, 책장을 넘기는 손이 파르르 떨려온다.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허?”
[으음, 이건….]
어느 새부터인가 책장 넘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덧 호롱이 비추는 불빛보다도 벽의 창틀 너머로 흘러오는 빛이 더 밝아졌을 무렵에야─
“…….”
[…….]
청유백은 책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지금 저에게 기분이 어떻느냐고 묻는다면, 아주 성심성의껏 대답해 줄 자신이 있었다.
아주 짧고 굵게, 지금껏 본 백 년 역사의 강렬함만큼 말이다.
‘X됐다!’
이야!
큰일 났다!
아주 그냥 싹 말아먹었네!
무어 다른 말이 필요할까.
다른 어떤 말도 제 심정을 이 이상 정확하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백 년.
정확하게 백 년이다.
저 중원에서는 마지막으로 청유백이 기억하던 대원(大元)이 망하고, 대명(大明)이라는 국호를 쓰는 새 황실이 세워질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동안.
마교는 어찌 되었는가?
단순했다.
딱 세 글자로 표현할 수 있었다.
“망했네….”
아주 그냥 시원시원하게 말아 처먹었다.
거진 십만에 이르던 마교의 군단은 한없이 축소되어 일만을 가까스로 유지하고 있지를 않나.
중원에 진출했던 세력은 전부 패퇴하여 신강과 청해 일대의 이권을 전부 포기하지를 않나.
패도천마 시절의 마교에 비하면, 그 세가 거의 십분지 일 수준으로 몰락해 있었다.
한 마디로 줄여서,
‘좆됐다!’
더욱 골 때리는 건, 이게 정파 놈들 때문이 아니라 마교의 내분 탓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다.
‘이상하다 싶기는 했지. 마지막 회전에서 내가 정파 놈들을 싹 다 잡아 족쳤는데, 만마서고까지 들이칠 병력이 남아 있을 리가 없잖나.’
천마신교라고도 불리우는 이 마교는, 육대가가 수뇌부로 있는 마교 하나만이 전체를 이루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머리인 것은 맞지만, 아래로 갈수록 마교의 수족을 맡는 작은 분파나 세력들이 존재했다.
마교의 세력권은 넓으니 그 전부를 직접 관리할 수는 없었고, 위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면 그들이 실행하는 식이었다.
‘마교에 괜히 강자존의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닐진대….’
그 수많은 인간을, 국가라는 울타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인간들을 한 데에 묶는 것은 극히 어렵다.
그들을 강제로 묶을 만한 법률을 만들자니 집행할 방법이 없으며, 도덕과 양심에 맡기자니 굶주린 범 앞에 토끼를 던져놓은 것과 같았다.
때문에 권력과 의무를 동시에 부과하는 강자존의 법칙이 있는 것이고,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육대가였다.
[육대가가 흔들리면 강자존의 법칙 또한 흔들린다. 당연하지 않겠느냐.]
‘…물론 그렇겠지.’
전쟁 탓에 마교는 안쪽부터 흔들렸다.
육대가가 전쟁의 사후 처리로 크게 휘청이는 사이, 하부 분파들이 그것을 기회로 삼아 하극상을 노린 것이었다.
강자존의 법칙은 굳건하다.
군림하는 자가 온전한 동안에는.
허나, 그 강자가 휘청이는 순간─
누구라도 그 뒤통수를 찌르고 권력을 얻고자 하는 법이었다.
‘보물들은 그놈들이 전부 갖고 튀었고… 만마서고도 그 꼴이 난 건가.’
[그게 다가 아니지. 세력도 나뉜 모양이다. 우리가 있는 이곳의 세력이 마교의 전부가 아닌 모양이야.]
보물을 먹고 나른 놈들은 그대로 독립해서 저들이 진짜라고 주장하고 있는 중이고, 마교의 비호를 받는 백성들은 힘센 놈을 따를 뿐이고….
퍽 심각한 상황이다.
천화는 한탄하며 상황을 정리했다.
[그 상황을 방치하고 그저 묵인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단 소리겠구나.]
‘잘 모르겠다.’
[무얼?]
‘백 년 동안 이 만큼이나 말아 처먹은 걸 욕해야 할지, 그나마 이 만큼이라도 남겨놓은 걸 잘했다 해야 할지….’
물론 마음 같아서는 쌍욕이다.
이 개자식들아.
지금이라면 체통이고 체면이고 뭐고 멱살잡이할 자신이 있다.
‘청률 놈의 태청심법도 그래. 아니, 인원이 모자라다고 전통을 버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느냐. 상황에 맞춰 수단은 바꾸는 법이지.]
청률이 태청심법을 익힌 경위는 단순했다.
마교의 표준 무공이 그것으로 지정되었던 것이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전쟁 이후, 줄어든 인구를 채우는 방법으로 마교는 가장 단순한 방법을 선택했다.
전쟁에서 사망자가 많다.
즉, 인구가 모자라다.
그러므로 사람이 많이 필요하다.
이 일련의 상황에서, 마교가 택한 것은 몹시도 단순한 방법이었다.
바로, ‘무인들의 사망률을 낮춘다.’
마교가 어쩌다 인명 걱정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마교 무인들의 사망률 중 가장 높은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마공의 부작용’이었다.
[마공의 가장 큰 단점은 위험하다는 것 자체인 게지. 수명을 갉아먹고, 주화입마의 가능성도 높아 생명을 짧고 굵게 불태우는 게다.]
과거의 마교는 그것을 감당할 힘이 있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것을 대체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고, 하나의 숨을 불태워 적 둘을 죽인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팽배했다.
[하지만 그를 할 수 없다면, 변화하는 것이 옳은 게 아니겠더냐.]
때문에 예전이었으면 별것 아니었을 수의 고수들조차 다급해졌고, 전통과 힘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라도 더 많은 목숨을 살려놓아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선택한 것이 태청심법이었다.
곤륜의 태청심법은 다른 단점이 어찌 되더라도, 일단 안정성 하나는 강호에서도 최고로 치는 무공이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이 제정이 비교적 최근이라 아직 익히고 있는 것이 청률을 위시한 몇몇뿐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뭐 어쩌라고.
‘그 지경까지 가지를 말았어야지!’
근본적으로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무능한 새끼들이 문제다.
뭐? 반역?
역모?
반역의 반자만 꺼내도 모가지를 쳐야 할진대, 그 역할을 할 놈도 없었다는 것 아닌가.
[그래도 희망도 있지 않더냐? 신마단을 만들 수 있는 것을 보면, 최소한의 여력은 남아 있는 게다.]
‘최소한, 최소한이라.’
사실, 정말 기둥뿌리가 들썩일 정도로 마교의 세가 기운 것은 아니다.
먹고사는 것도 힘들 정도로 기울었다면 신마단의 제조나 천마지회의 개최 따위도 불가능했을 테다.
하지만 천마신교가, 천하 무림인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서 수백 년간 군림했던 천마신교가 ‘최소한’으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는 안 돼.’
중원 무림 바깥의 세력을 하나로 규합하여, 중원 무림의 숨통을 조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었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저 중원 당의 단물을 빼앗아 취하겠다는 그 의지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더 이상 그것을 하지 못하는 이상, 마교는 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의 세력으로는 고작 이 천산 내외의 세력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일 터.
‘내분이 일어나 마교가 갈라졌다는 건, 마교 보호하의 백성들도 갈라졌다는 소리겠군.’
[그렇겠지. 하지만 그들이 천산의 원조 없이 얼마나 갈 수 있었을는지….]
대외적인 마교의 모습은 그야말로 인외마경, 갓난아기도 씹어 먹을 것 같은 악귀들의 모임이라지만─
마교도 결국은 사람 사는 곳이다.
물론 그런 모양새의 마인이 아예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무림과는 전혀 연이 없는 일반 세외의 백성들이 대다수였다.
평범하게 척박한 땅을 개간하고, 평범하게 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이들.
정파 무림맹 놈들이 마교타도를 외치며 일어났을 때, 그들의 처우를 생각하며 싸웠을 것 같지는 않다.
‘…할 일이 많겠어.’
다행인 점이라면, 마교의 세력이 분할되며 백성의 비호를 그들이 그대로 이어받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려울 것 없이 그 세력들을 다시금 통합하면 그만인 일이었다.
‘무림맹이나 사도련의 개입이 우려되긴 하지만, 큰 문제는 아닐 터.’
마교의 세력이 다시 부흥한다 하면 눈에 불을 켜고 방해하려 들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때 가서 대처 방법을 찾으면 될 일이었다.
아직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할 시간이다.
‘그럼 다음은….’
동이 트고 있었지만, 아직 책 한 권 정도 살필 시간은 있을 듯했다.
청유백은 책장으로 다가가 손으로 책장을 한 번 훑었다.
백 년, 이백 년….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사백 년 전의 기록에 손을 얹었다.
천화가 말했던 시대.
오대십국(五大十國)대의 진나라가 있던 시절의 기록이다.
하지만 청유백이 그것을 뽑아 들자, 천화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400년 전? 뭘 찾는 게냐?]
‘당연히 네 기록이지. 난 본 기억이 없지만, 사료를 찾아보면 뭐라도 나오지 않겠나.’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400년 전에서 찾느냔 말이니라.]
‘…무슨 소리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이미 한 번 했던 이야기지 않은가.
굳이 대화가 필요할 정도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만마서고를 찾은 이유 중 첫째는 마교의 지난 백 년을 알기 위함이요, 둘째는 천화의 과거를 알기 위함이었으니.
하지만, 천화가 말한 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사실이었다.
[본녀가 살던 때는 400년 전이 아니다. 본녀는 진(秦)나라 사람이라지 않았느냐.]
‘진(秦)?’
진…?
진(晉)이 아니라, 진(秦)?
모르는 것은 아니다.
청유백은 당대의 천마로서 각종 교육을 받아왔으며, 개중에는 단순한 무공만이 아닌 학식을 위한 사기(事機)나 한서(漢書) 따위의 역사서도 존재했다.
그러므로 안다.
그녀가 말하는 진나라가 어느 시대의 나라이며, 어떠한 나라인지, 어떤 역사를 살았는지도 안다.
하지만 청유백은 능청스레 고개를 내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럴 리가 없지 않나.’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냐고?
당연한 일이다.
진나라.
천 년 전, 그 먼 옛날 춘추시대를 종결시키고,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나라가 아니던가.
그래, 천 년 전이다.
‘천 년 전의 마교라고?’
그런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마교의 역사란─
지난 500년이 전부였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