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57화 (57/200)

제57화. 그냥 싹 말아먹었네! (2)

요즘 유행인가?

골 때리네.

어차피 뭐라 대답하든, 그녀의 성정상 제멋대로 대답할 것이 뻔하다.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며 대꾸했다.

“…아무거나.”

“그럼 좋은 소식부터.”

저저, 기다렸다는 듯이 웃는 거 보게나.

녹지연은 꺼내들었던 서책을 청유백에게 건네었다.

제목이 있어야 할 공간이 텅 비어 있는, 무제(無題)의 책.

내용이 있는 책이라면 응당 그에 맞는 제목이 있어야 할 테다.

하지만 기묘한 점은, 안쪽의 내용이 반쯤만 채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중요한 부분의 문자만 빠져 있군. 이해할 수가 없어.’

[그야말로 반절짜리 책이구나.]

서책 지면의 반절이 쓰여져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서책의 지면은 전부 채워져 있다.

하지만, 중요한 단어나 조사가 필요한 공간에 문자 대신 공백이 자리했다.

‘뭉개지거나 지워진 것도 아니야.’

[그래, 종이의 상태도 보아하니…새로 쓴 책이구나.]

마치 일부러 읽지 말라고 만든 듯한 책.

청유백은 녹지연에게 그것을 다시 돌려주며 물었다.

“이건?”

“두 번째 시험의 문제예요.”

“두 번째 시험이라면….”

어찌 녹지연이 그 사실을 벌써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닐 테다.

두 번째 시험에는 분명 만마서고의 개방이 이루어진다 했다.

만마서고는 마교의 장서각 중에서도 가장 그 규모가 거대했고, 실상 마교의 모든 기록이 모여 있는 장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내용과 제목에 구멍이 뚫린 책과 함께 조합해 보면, 시험의 내용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을 알아내야 하는 거로군.”

“정확해요.”

이게 뭔지는 모른다.

얼핏 보면 무공서일수도 있고, 철학적인 내용을 담은 연공서일수도, 혹은 단순히 누군가의 일기일 수도 있다.

허나 만마서고에 있는 장서의 숫자가 기만에 이름을 생각한다면, 이 책의 제목을 알아내는 것이 그 동굴의 영물을 잡아 죽이는 것보다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그걸 내게 알려주는 이유는? 네가 얻을 것이 하등 없을 텐데.”

“얻을 것이라… 없지는 않죠.”

녹지연은 책을 받아들며 완벽하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여 마루 밑을 살피거나, 뛰어올라 처마 아래를 뒤지는 등 대답하다 말고 뭘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뭐 하는 거야?’

[본녀라고 알겠느냐? 무언가를 찾는 것 같은데….]

그리고 그러기를 잠시.

녹지연은 이윽고 주춧돌의 뒤편에 손을 집어넣어 무언가를 찾아냈다.

그녀는 그것을 붙잡고는 단숨에 꺼내들었다.

“휴, 안 그래도 당신 오기 전까지 찾고 있었거든요.”

“그건….”

“척 봐도 알겠죠?”

그것은 무제의 서책.

녹지연이 건넸던 책과 똑같은 물건으로 보였다.

다만, 그것이 청유백의 방 근처에 있었다는 것은─

방금 보여준 것과는 달리, 저것은 청유백의 것이라는 소리겠고.

녹지연은 책을 펼쳐 몇 장을 훑어보더니, 아쉬운 표정으로 책장을 덮었다.

“으음… 역시, 너무 날로 먹기를 바란 걸까요. 다른 내용이군요.”

“협력을 원했나?”

굳이 둘 사이에 무언가 환담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녹지연의 의도는 명백했다.

저 서책을 확인하러 온 것이다.

과연, 지급된 저것은 모두에게 동일한 내용일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 점을 이용해서 서로의 이익을 위한 협력 또한 가능할 것이었다.

말하자면, 보상을 위한 보험.

하지만,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녀의 희망찬 예상은 빗나간 듯 보였다.

“뭐, 그렇다고 해 두죠. 한 명이라도 이게 뭔지 알아낸다면, 다른 쪽에서는 또 다른 문제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요.”

“또 다른 문제?”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저 책의 제목을 찾는 것 말고도 다른 시험이 있다는 건가?

청유백이 인상을 찌푸리자, 녹지연은 부러 설명할 것도 없이 대꾸했다.

“이상할 건 없잖아요? 높으신 분들이 하하 호호 하며 책이나 들썩이는 걸 바랄 리도 없고.”

‘하긴, 너무 평화롭기는 하지.’

고작 서책을 뒤적이는 것 정도로 소교주의 자격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굳이 두 가지의 문제를 준비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

반드시 두 가지가 있어야만 판단할 수 있는, 몹시도 번거로운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가령─

─선택과 집중, 같은 것 말이다.

“선택을 강요하는 건가. 보통의 방법으로는 두 가지 시험을 전부 통과할 수는 없다?”

“이해가 빨라 좋네요.”

이어진 녹지연의 설명은 단순했다.

두 번째 시험은 두 가지의 문제를 해결하여 그 결과를 합산하는 식으로 순위를 결정한다.

첫 번째 문제는 안전한 길이다.

만마서고의 어딘가에 있는 책의 원본을 찾아, 이름도 모를 책의 제목을 알아내는 것.

각자에게 주어진 책의 제목을 알아내면 오(五)점을 획득한다.

두 번째 문제를 아예 차치하고서라도, 이 오 점을 따낼 수 있다면 두 번째 시험의 중위권 정도는 차지할 수 있는 수단이라 했다.

반면, 두 번째 문제는 완벽하게 수행한다면 능히 상위권을 노릴 수 있다.

두 번째 문제의 전체에 걸쳐 얻을 수 있는 점수는 십(十) 점.

하지만 최저가 존재하지 않으니, 어중간할 경우 아예 두 번째 문제를 포기하고 첫 번째 문제만 바라본 이들에게도 뒤처지게 된다.

두 번째 문제는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녹지연의 설명을 듣고는, 청유백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두 번째 문제는 그만큼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제자?”

“말이 제자지, 허울뿐인 이야기죠. 귀아대(鬼牙隊)의 아이들 열을 맡기고 세 달 동안 수련시키는 거예요.”

“귀아대라….”

귀아대라면 마교에서 기르는 어린아이들 중에서도 거르고 거른 나름대로의 상등품들.

정신 상태는 종종 좋지 않을 때가 있지만, 그 재능과 자질만큼은 의심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그것들을 세 달 동안 수련시켜,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라.

녹지연은 그리 설명했다.

“방식은 자유. 무엇을 가르칠지도 자유. 가르침의 유무도 자유….”

그야말로 어떻게, 어떤 식으로 기르든 상관치 않겠다.

이는 세 달이라는 시간을 어찌 사용하겠느냐를 묻는 것과 같았다.

“만마서고의 사용도 자유. 그리고 세 달 후, 그 아이들을 사용한 대리 결투.”

무엇을 사용하든, 무엇을 선택하든 간에.

누군가를 이끌어야만 할 것이다.

그 대상이 자신이 될지, 귀아대의 아이들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일명, 훈(訓)의 시험이에요.”

가르칠 훈.

녹지연의 설명에 청유백은 숨을 들이쉬며 대꾸했다.

“그렇군. 책의 제목을 찾는다면 아이들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겠고, 아이들에게 신경을 쓴다면 책의 제목을 찾을 시간이 없겠어.”

“맞아요. 귀아대의 아이들은 지금껏 단체 교육만 받아왔으니, 직접 이끌어주면 고작 세 달이라도 일취월장하는 아이들이 얼마든지 나오겠죠. 다만….”

“…다른 후계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뿐이다?”

“저만 해도 그러니까요. 가장 좋은 방법은 두 가지 전부를 해내는 것이겠지만, 혼자서는 무리겠죠.”

“그래서 나를 찾아왔군.”

그런데 왜 하필 나지?

청유백은 그런 시선을 보냈다.

녹지연은 그것에 호응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제 마음이라는 양 코웃음 칠뿐이었다.

뭐, 이제서는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하지만 책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몇몇 책들만 같을 가능성은?”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가치가 있겠어요?”

이러한 협력은, 본래 이기지 못할 상대를 이기기 위해 하는 것이 이상적이다.

가령 적철진이나 청명휘 같은 자들.

본래 1, 2위를 차지할 그들을 끌어내리기 위함일진대─설령 그들과 같은 책을 받았다고 한들 그들과 협력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도 그렇군.”

청유백은 가볍게 수긍했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건지.

당초의 목적이 사라진 지금, 그녀가 이곳에 있을 이유도, 그것이 좋은 소식일 이유도 없다.

청유백은 불만스레 책상을 두드렸다.

“…그래서. 그 시험의 정보들을 알려주는 게 좋은 소식이었나?”

“하, 그래서 불만이에요?”

“아니. 생각보다는 별 것 아니어서. 어차피 미리 안다고 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귀아대의 아이들을 어찌 가르치는가 정도는 생각해 둘 수 있겠지만, 어차피 그 계획의 수립도 한나절 정도면 충분할 일이다.

아니면 뭐, 시험의 시작 전에 만마서고를 미리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녹지연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당연히 못 하죠. 미리 안 게 아니니까.”

“뭐?”

“방금까지 말한 것들은 덤이에요. 나쁜 소식이 아직 안 나왔잖아요?”

“뭔데.”

“두 번째 시험, 이미 시작했어요.”

“……?”

그건 또 뭔….

* * *

“골 때리는군….”

만마서고로 향하는 길은 어두웠다.

달빛 닿지 않는 곳의 새벽.

경비를 도는 마졸급 무인들이 경례하며 지나가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져 오는 저 팔 층 높이의 거대한 전각.

만마서고(萬魔書庫)에 걸음이 가까워질수록, 저 안에서 언뜻언뜻 느껴지는 존재감에 청유백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아이가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닌 게로구나.]

‘일단 그렇게 되겠다만.’

왜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을 하는 것인지는 모를 일이었다.

청유백이 시험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는 것이 그녀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면 어떤가.

‘당장은 이득뿐인 일이니, 받아들이는 것이 낫겠지.’

분명 그녀가 전달한 것은 유용한 정보였다.

두 번째 시험이 이미 시작한 것이 나쁜 소식이라 말했지만, 아마 그 시작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조차 극히 한정되어 있었으리라.

‘다섯… 아니, 여섯인가?’

지금 시각은 축시 말(새벽 3시).

모두가 시험의 시작을 알았다면 열다섯 전부가 모여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다.

하지만 저곳에 있는, 꽤 큰 존재감의 기척은 여섯 정도.

후계자들 중에서도 정보 수집 능력이 탁월한 몇몇만이 저곳을 선점한 것이리라.

조금 늦기는 했으나, 청유백 또한 저들과 같은 이득을 누리게 되었으니 손해라고는 전혀 없는 셈이다.

“충(忠)! 청가의 후계를 뵙습니다!”

만마서고를 지키는 경비들을 지나치며, 청유백은 만마서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이이익!

그 크기만큼이나 격렬한 경첩음이 장내에 울리고, 들이치는 달빛과 일렁이는 호롱불의 불빛이 부딪쳤다.

일 층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하나.

기척의 주인공은 입구의 맞은편에서 청유백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허, 네가 여길 어떻게 온 겁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투였다.

백소하는 뒤적이던 책을 덮어 쌓아두고는, 호롱불을 들고 청유백에게로 다가왔다.

“내가 못 올 곳을 온 건가?”

“아뇨, 당연히 그건 아니지만….”

백소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끝을 끌었다.

당연히 당당하지는 못할 테다.

마교의 정보 및 기록은 전부 백가의 담당이니, 만마서고 또한 백가의 소관.

만마서고에서 어떠한 일이 예정되어 있다면, 백가의 후계자인 백소하는 당연히 그 사실을 알 터였다.

그 방증으로, 지금 이 자리에 있고 말이다.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오히려 섭섭하군. 우리 사이가 고작 이 정도 정보 하나 알려주지 못할 수준이었나?”

“…….”

“미물도 이보다는 은혜의 중함을 알진대.”

“…….”

백소하는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청유백에게 빚이, 그것도 큰 빚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기에 무어라 항변할 말도 없었다.

하지만 할 말 정도는 있다는 듯, 백소하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번 시험에 관해서는 백가는 입을 열 수 없어요. 복마동의 시험을 녹가가 준비했듯, 이 만마서고의 시험은 우리 백가가 준비했으니 말입니다.”

하기사, 내부인이─그것도 대부분의 내사를 알고 있을 백소하가 그것에 관해 직접 입을 열게 되면 큰 문제가 되었으리라.

저에게 묘하게 자비로운 녹지연조차도 복마동의 시험에 관해서는 가벼운 언질 정도밖에 주지 않았었으니 말이다.

‘뭐, 좋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이미 지나간 일이고, 결국은 이곳에 도달했다.

어쩌면, 백소하가 녹지연에게 언질하여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뒷일에는 관심 가질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그저 지금의 최선.

“그럼, 넌 뭘 할 수 있지?”

“글쎄요. 네가 자력으로 이곳을 찾아왔으니… 내가 정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뭐든지 가능합니다. 가령, 책의 제목을 안다면 그것을 찾아 줄 수도 있겠지요.”

“뭐든지, 라….”

이미 시험의 내용도 안다.

만마서고에 도착하여 선점한 시점에서, 이번 시험을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지를 미리 설계할 수 있었다.

‘동이 틀 무렵까지 거진 반나절.’

책의 내용을 살핀다면, 어느 구획에 있는 책인지나마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귀아대의 아이들을 키운다면 그들을 위한 비급을 찾아볼 수도 있으리라.

그것뿐이랴?

시험은 두 가지뿐이지만, 굳이 그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만마서고는 마교 최고의 장서각.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굳이 두 번째 시험에 매달릴 필요가 있는가?

그저 전부 내려놓고, 본인의 수행에만 힘쓴다는 방법 또한 존재한다.

만마서고에는 마교 역사 수백 년간 쌓아온 신공의 비급들이 있고, 두 번째 시험의 보상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결코 그것에 뒤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 있는 나머지 다섯 명의 후계자들.

그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을지는 청유백으로선 알 도리가 없었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청유백에게는 이미 결정했던 계획이 있었으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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