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56화 (56/200)

제56화. 그냥 싹 말아먹었네! (1)

청유백을 보물고로 들여보내고 난 뒤, 안내해준 그림자가 생각한 첫 마디는 바로 이것이었다.

‘불쌍한 녀석.’

본래 청유백이 받아야만 했을 물건은 정해져 있었다.

마교에서도 극상의 지보인 신마단.

적가의 적철진과 청가의 청명휘가 가져간 그것들과 같은 물건을 받아야만 했다.

십이문의 시험 중, 사실상 불합의 의도로 만든 문인 진문을 통과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교는 이미 여분의 영약까지 싹싹 긁어모아 쓴 이후였고, 체면치레로나마 진문의 보상이랍시고 들이밀 물건이 있어야만 했으니.

‘그게 저 보물고의 물건이지.’

쯧쯧.

좋다고 보물을 구경하고 있을 저치의 표정을 생각하니 한숨만 나온다.

저 안에는 영약이 없다.

그림자도 그 사실은 알고 있었다.

보물고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고는 해도, 장부 정도는 열람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음 시험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영약의 존재가 필요 불가결이다.

청유백이 저 안에서 무엇을 가지고 나오든, 두 번째 시험에서 큰 도움은 되지 못할 것이었다.

‘그냥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인 셈이군. 황금 덩어리 따위야, 천마지회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을진대….’

뭐 상관없는 일인가.

안쓰럽긴 하지만, 그는 그저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다.

일각이 지나고 청유백이 나오자 그림자는 가장 먼저 청유백이 들고 나온 물건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검문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청유백이 허리춤에 보란 듯이 자랑스레 매단 칼을 보고는 그럴 생각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고작 저런 것에 기뻐하다니, 역시 애송이일 뿐인가.’

저것의 가치는 그림자도 알고 있었다.

검을 제하고, 저 칼집에 박힌 보석과 황금만 하더라도 어마무시한 가격을 자랑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뭐 하는가?

검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그저 장식용의, 멋모르는 졸부 놈들이나 들고 다닐 법한 물건이었다.

심지어는 검묘에서 들고 나왔을 터인 저 검은 손에 들고, 저 검을 허리에 매달고 있었으니─ 검의 가치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리라.

‘멍청한 놈.’

그리 생각하던 그림자는 언젠가 들었던 청유백에 대한 소문을 떠올렸다.

뭐라 했더라.

청가의 쓰레기 공자, 라 하였던가.

‘하긴,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면 금덩이 따위에도 만족할 만할지도 모르겠군.’

어쩌면 진문을 돌파했다는 것도 정말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르겠다.

“후회는 없겠지?”

“없습니다.”

없기는.

머지않아 땅을 치며 후회하게 될 거다.

그림자는 그리 생각하며 청유백에게 안대를 씌웠다.

번거롭기는 하지만, 아무리 육대가의 자제라고 해도 보물고의 위치를 쉬이 노출시킬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청유백의 손가락에서 옅게 반짝이는 낡은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본래 지니고 있던 것입니다.”

슥 보기에도 낡고, 마치 무언가에 그을린 듯한 상태가 영 좋지 않은 물건이었다.

그림자는 별 의심 없이 넘어갔다.

“흠. 그런가.”

하긴, 저런 낡은 반지가 보물고에 있을 리는 없었을 테다.

얼핏 본 장부에서도 저런 물건은 없었고, 나중에 뭔가 문제가 된다면 그때 바로잡으면 될 일이었다.

그림자는 청유백의 손을 잡아끌며 다시금 숲속을 내달렸다.

* * *

‘운이 좋군.’

다시금 호위전에 도착해 시야에서 빠져나온 청유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검을 뽑아 살펴보기라도 했다면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다.

굳이 허리에 매단 것은, 이미 매단 검을 끌러 확인하려고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잘 먹힌 듯했다.

청유백은 걸음을 늦추며, 어느덧 신음이 잦아든 천화에게 말문을 터 보았다.

‘좀 괜찮나?’

[…약간이나마 낫구나.]

‘이 반지가 원인이었나? 이게 대체 뭐길래?’

특별할 것 없는 반지였다.

재료는 은.

심을 꼬아 만든 단순한 형태의, 예술적 가치조차 전무한 물건이었다.

‘특정한 누군가가 남긴 유산이라 치기에도 볼품없는데.’

[본녀도 모른다. 다만… 그게 언제 만들어진 물건인지는 기억이 나는구나.]

‘네가 살았던 과거가 기억이 났다는 건가?’

[전부는 아니다. 시기뿐이야.]

천화의 말에 청유백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 말인즉, 천화가 살았던 때의 기억이 돌아왔다는 것 아닌가.

언제, 어느 때의 교주인지만 알아도 그녀에 대한 단서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었다.

현재, 중원이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머저리들이 쓰는 국호(國號)는 대명(大明).

천류하가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나라는 대원(大元)이었고, 그 이전에도 송(宋), 당(唐)이라는 국호를 쓰는 족속들이 저 중원을 차지했다.

청유백이 마교의 시작부터 지금까지의 흐름을 생각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어떤 대일까.

그녀의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도 당대가 혼란스러웠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것으로 보자면, 아마도 당(唐)이 멸망한 직후의 오대십국(五大十國) 때가 가장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싶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년 전.

‘그때는 중원의 혼란을 틈타 마교가 전쟁에 개입하던 때라고 했지.’

때문에 온갖 기록에도 혼란이 생겼고, 누락되거나 잃어버린 기록도 수없이 많았다고 했다.

그때의 교주라면 확실히 기록이 소실되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그리고 청유백의 생각대로, 그녀의 입에서 나온 나라의 이름은 충분히 상정한 범위 이내의 것이었다.

[…진(秦)이니라.]

진(晉)?

흠, 진이라.

‘오대(五大)의 하나였던 진나라를 말하는 건가?’

그렇다면 시기도 대략적으로 설명이 된다.

청유백이 예상했던 바로 그 시기.

아마 만마서고에 그에 관련한 기록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터였다.

청유백의 대답에 천화는 화색을 띠며 대답했다.

[오대? 아, 확실히 그러했지! 그때 중원을 나누던 다섯 패자가 있었다. 너희 아이들은 그리 부르는 모양이구나. 분명 그러한 시대였다. 전란이 끊이질 않는 시기였지.]

‘그렇군. 조금은 앞이 보이는 느낌이야.’

직접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전후의 기록을 대조해가며 찾아보다 보면, 뭔가 하나는 걸릴 것이다.

그리 진중하게도 계획을 세우는 청유백을 바라보며, 천화는 기이하다는 듯 물었다.

[한데, 네놈은 왜 내 과거를 궁금해하느냐? 네게는 이득될 것도 없지 않더냐.]

확실히 그렇다.

딱히 과거의 유산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기억을 되찾은 천화의 도움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청유백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면, 그것을 대답하기는 심히 난처했다.

굳이 대답하자면, ‘기분’ 정도의 변덕일 것이었다.

‘찜찜한 것을 그저 모르는 채로 있어도 짜증만 치밀 뿐이지. 어차피 즐길 것도 부족한 인생, 호기심이라도 채워야 하지 않겠나.’

[…그러하더냐.]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 없다곤 해도, 천화의 과거에 대해서는 궁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성 교주라고 하면 분명히 주목성이 있어 기록이 남았을 것이었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하지만 청유백은 그녀가 직접 강림하기 전까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도 들어보지 못했다.

풍문으로든, 기록으로든 말이다.

미지에 대한 궁금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청유백은 제 방과 가까운 청가의 담벽을 가뿐히 넘으며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바빠지겠어.”

천화의 기록.

마교의 지난 백 년.

그 외의, 다른 현재에 대한 지식들까지.

정보는, 지식은 언제나 힘이 된다.

만마서고에서 알아보아야 할 것이 실로 많았다.

‘하지만, 그 전에.’

청유백은 담을 넘자마자 느껴지는 누군가의 인기척을 찾았다.

자신이 누군가를 초대한 기억은 없으니, 필경 불청객.

하지만 어둠 속에 숨은 그는 자신을 숨기려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당했다.

청유백이 그 어둠 너머를 응시하자, 누군가가 못 속이겠다는 듯 웃으며 걸어 나왔다.

녹지연이었다.

“늦었네요. 어딜 다녀온 건가요?”

“…….”

그렇게 장을 보던 부인이 바깥양반의 외도를 목격하고 집에 와서 칼을 갈며 기다리는 듯한 대사를 해도, 청유백으로서는 할 말이 미묘했다.

애초에, 왜 여기 있는 거냐?

“한밤의 밀회를 즐기고 왔지. 왜, 나를 독점하고 싶은가?”

“뭐, 어느 정도는요?”

“…퍽 재밌는 농담이군 그래.”

그건 예상외의 대답인데.

청유백은 한 발짝 물러서며 그녀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유추했다.

‘나를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그녀는 똑똑하다.

최소한, 제가 환생한 이 청가의 머저리 후계자 놈들을 합친 것보다는 똑똑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행동에 이유가 있다.

제 실력을 알고, 위협을 알고, 주변의 상황을 알고.

나아가, 그 모든 것들을 이해하며 저가 직접 조정하기 위해 움직인다.

그렇기에 그녀의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난번에는 경고였지.’

지난번에야 적절한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청유백을 무엇인지 모를 제 목적에 이용하고자 했고, 그에 관해 ‘함부로 깝치지 말라’라고 경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리 심하게 말했더냐?]

‘어쨌든 간에.’

그 경고를 정면으로 엿 먹이고 온 마교에 제 소문으로 떠들썩하게 만든 지금, 청유백은 녹지연에게 있어 더 이상의 필요가 없을 터였다.

하지만 녹지연은 무슨 생각인지, 피식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받았다.

“축하드려요. 진문 돌파, 정말 해낼 줄은 몰랐는데… 마냥 허풍선이는 아닌 모양이죠?”

“허풍이라니,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천마가 될 거라는 말도요?”

당연한 질문을 하는군.

청유백이 코웃음 치자, 녹지연은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짓이라며 멸시하지도 않았다.

지난번과는 확연히 다른 태도.

그녀가 지난번처럼 ‘나서지 말라’며 경고하러 온 것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오히려, 해볼 테면 해보라는 투.

그녀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 검, 못 보던 거네요. 하나는 귀무곡에서 봤던 거고…. 아하, 보물고에 다녀오시는 길인가?”

“…….”

과연, 청유백이 영약 대신 무엇을 받기로 되어 있는지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생각을 알 수가 없군.’

제 말에 순순히 대답이나 하라는 건방진 태도.

대답해주지 않으면 밤새 이곳에 서 있을 기세였다.

청유백은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날 싫어할 줄 알았는데.”

“싫어해요? 제가 왜?”

“무얼, 제가 똑똑하다 생각하는 놈들의 지병이지. 제 조언을 무시하는 것을 끔찍하리만큼 싫어하지 않나.”

“흐음, 글쎄요….”

녹지연은 지긋이 웃으며 청유백의 반응을 살폈다.

먼저 속내를 내비치지는 않겠다는 양, 제 표정을 감추며 청유백에게 다가섰다.

‘…성가시군.’

녹지연 같은 인간이 청유백에게 있어 가장 귀찮은 부류였다.

청궁우 같은, 적대심으로 가득한 인간은 사뿐히 지르밟으면 된다.

황돈처럼 저를 이용하겠다는 목적이 명확한 놈은, 적당히 어울려주며 이득만 뽑아 먹으면 되고.

적영이나 청률 같은 정의로운 바보들은, 그야말로 등골까지 빨아 먹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녹지연은 그런 눈에 띄는 부류에 들지 않았다.

처음에는 저를 이용하겠다는 무언가의─그마저도 명확하게 알 수 없었지만─목적이라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표정, 움직임, 목소리, 박동…. 어떤 것도 거짓을 말하지 않는군. 그렇다고 초조해하지도 않아.’

그녀는, 지금 청유백에게 바라는 것이 일절 존재하지 않았다.

허면, 도대체 왜 이곳에 있는가?

청유백의 경계하는 반응에, 녹지연은 정말로 저는 화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솔직히, 오히려 저는 화내기보다는 감탄하고 있어요.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알았다니….”

“…….”

“농담도 못 하겠네. 그렇게 경계하지 마세요. 진짜 상관없어졌으니까.”

“무슨 의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청유백이 묻자, 녹지연은 태연히 대꾸했다.

“어차피 수많은 계획 중 하나일 뿐이었다는 소리예요. 게다가, 아무리 괜찮은 패라도 제 뜻대로 쓸 수 없으면 쓸모없는 장식일 뿐이죠.”

“괜찮은 패라.”

아주 흥미로운 단어다.

그녀에게, ‘쓰레기 공자’라는 호칭을 달고 있는 ‘청유백’은 쓸모가 있었다는 소리였으며─

동시에, 지금의 ‘청유백’은 그녀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으니 쓸모가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그 뜻은 곧, 지금의 청유백은 그녀의 계획에 포함될 수 없는 존재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녹지연의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허나, 이곳은 마교다.

어떤 계획, 어떤 암수를 꾸미든 간에, ‘누군가를 천마로 세운다’라는 계획보다 궁극적인 것은 없었다.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마교에서 할 수 있는 어떤 간계든 간에 전부 사사로운 것으로 전락할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녀의 말뜻은, ‘지금의 청유백도 교주가 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은유하는 것과 같았다.

“그럼 날 찾아온 이유가 뭐지?”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조금의 기대? 아니면, 허무하게 죽지 말라는 일말의 걱정?”

“흐음.”

‘실로 재밌군. 아주 흥미로워.’

그리 판단을 내리고 있으면서, 저를 찾아온 것.

이 상황이야말로 즐겁기 그지없는 꼴이었다.

하늘이 저 아이를 돕기라도 하는 건가, 아니면 직감이 좋은 건가.

그녀의 이성은 저를 빌붙지 못할 개패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의 본능은 지금 자신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가 원한다면, 그 선택의 보상을 받을 것이다.

언제가 되었든 말이다.

“그래?”

청유백이 흥미롭다는 듯 목청을 울리자, 녹지연은 질색하며 손사래 쳤다.

“아, 알아요. 알아요. 쓸데없는 걱정이라구요? 당신 대단한 것 알고 있으니까, 굳이 말하지 마세요.”

그리 말하면서도, 어투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말 그대로 빈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가 청유백을 그리 대단치 않게 생각한다는 방증이었다.

녹지연은 허탈하게 말을 이었다.

“그냥, 기분이에요. 확인할 것도 있었고요.”

“확인?”

“아니, 선물이라고 하죠. 그쪽이 좀 더 어감이 좋네요.”

녹지연은 품에서 제목이 적히지 않은 서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 어떤 것부터 들을래요?”

…너도 그거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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