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55화 (55/200)

제55화. 농담이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5)

무언가 있을 여지가 없다.

저잣거리의 환담 소설을 보면 이런 곳에 비밀스러운 통로가 있는 장면이 꽤 있지만, 그런 게 있더라도 일단 흔적은 보여야 의심이라도 해보는 것이다.

문이 있다면 그 모양이 있을 것이고, 비밀 통로가 있다면 흔적이라도 남는 것이 인지상정.

설령 진법으로 무언가 감추어져 있다고 해도 그 기운만큼은 느껴져야만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았다.

청유백이 어찌 된 일이냐고 추궁하기도 전에 천화가 말을 이었다.

[오른쪽 천장의… 세 번째 야명주.]

‘이건가?’

[그걸 오른쪽으로 한 번 돌리고, 그 건너 다섯 번째의 야명주를 왼쪽으로 두 번 돌리거라.]

청유백은 천화의 말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천화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하잘것없는 남 탓을 하는 것보다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것이 더 효율적인 일임은 명백했다.

[그리고 다음은 저것….]

야명주는 매끄럽게 돌아갔다.

마치 처음부터 그리 돌리는 것이 존재의 이유라는 것처럼, 오랜 기다림 속에서 제 존재의 이유를 다시금 발하는 듯 보였다.

곧바로 눈에 띄는 변화는 없었다.

야명주의 빛이 밝아지거나, 무언가 다른 통로가 생겨나지도 않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청유백이 아는 한, 이 보물고에 비밀스러운 공간 따위는 없었다.

그 또한 마교의 교주로서, 심지어 전례 없던 전성기를 만든 천마로서 군림했던 인간이다.

이 보물고를 극상의 지보로 가득 채울 때까지 비밀 공간 따위는 본 적도 없다.

그러나 천화는 이게 끝이 아니라는 듯 말을 이었다.

[이제 몸을 내게 다오. 잠시면 된다.]

‘…흐음.’

청유백은 거부하지 않았다.

어차피 시작한 것이고, 천화의 상태에 조금이나마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밑져야 본전, 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힘을 조금 쓰겠느니라. …조금만.]

천화는 힘이 빠진 청유백의 몸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손끝에서 힘이 풀려오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실이 몸을 휘감는다.

기맥 하나하나, 혈도 하나하나에 익숙하지 않은 기운이 내달렸다.

단전에서 치달은 한 움큼의 마기가 손가락 끝에 맺혔다.

그러나 청유백의 것처럼 맹렬하지도, 폭력적이지도 않다.

그저 한 송이 꽃망울처럼 잔잔하게, 그 끝에 맺혀 있을 뿐이었다.

천화는 손끝을 들어 가장 처음의 야명주에 그것을 가져다 대었다.

검은빛의 꽃망울이 야명주와 부딪혀 명멸하고, 한순간 동굴 전체에 검은 기운이 요동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쿠구구구궁!

육중한, 하지만 그럼에도 매끄러운 소리가 벽 한켠에서 들려왔다.

마치 바위의 균열이 벌어져 열리듯이, 결코 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작은 틈새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위의 균열은 서로를 밀어내며 그 크기를 넓혀갔다.

조각나지는 않는다.

그저, 요술처럼 회전하고, 밀리며, 서로의 몸을 휘감은 끝에.

비로소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을 법한 공간이 그 자리에 위치했다.

‘위장 기관?’

이런 것이 있었다고?

청유백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공간을 내려다보았다.

어둠으로 가득한, 어디론가 이어지는 계단.

천마였던 청유백조차도 알지 못하는 공간이었다.

[…머리가 아프구나. 어서 들어가 보거라.]

‘이런 곳이 있었다니….’

청유백은 천화의 말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석벽을 훑으며 이곳의 구조를 가늠했다.

도대체 어떤 기술과 설계를 만들어야 이런 완벽한 은폐를 할 수 있을까.

진법이 아니어서 기감으로 탐지할 수도 없고, 육안으로 찾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은폐되어 있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들 수 있는 거지?’

저는 모르고, 천화가 아는 것이라면 분명한 과거의 것.

그것도 몇백 년일지 모를 머나먼 과거의 물건이었다.

하지만, 이 기술과 구조는 지금의 청유백으로서도 이해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천화는 고통을 참는 듯 신음하며 대꾸했다.

[저 아래에 답이 있지 않겠느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나?’

[…모른다. 하지만, 저곳에서 무언가가 본녀를 부르고 있느니라.]

아마, 그것이 네게 대답을 줄 수 있겠지.

천화는 그리 자조했다.

저조차도 알 수 없는 자신의 기억에 무력감을 느끼는 것일까.

그녀 또한 한 명의 천마였으니, 미지 앞에서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력함에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청유백은 침묵하며 그저 발걸음을 재빨리 놀렸다.

굳이 야명주를 빼 들고 오지 않더라도, 이 정도 어둠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 통로의 끝에서, 청유백은 탄식했다.

“젠장, 이건….”

[…말도 안 돼.]

그곳에 있던 것은, 누군가의 시신.

정확히 말하면, 이미 살은 스러져 없어져버린 누군가의 백골이었다.

무릎을 꿇고 쓰러져 있는 백골의 팔은 벽에 사슬로 결박되어 있었으며, 뼈의 상태도 부러지고 깨지는 등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핍박받는 죄인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

천화가 그 백골을 살펴보는 동안, 청유백은 방 안의 다른 것들을 수색했다.

말이 수색이지, 이렇다 할 것은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말이다.

‘불을 지른 모양이군.’

바닥에 수북이 쌓인 것은 무언가가 타고 남은 재와 검댕이었다.

간혹, 그 사이를 뒹구는 썩은 나무 따위가 있기도 했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방의 구조와 타버린 재의 양을 볼 때, 이곳에 보관되었던 것은 금 따위의 재보는 아니었다.

차라리 불경이나 기록 따위의 문서 보관소였다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기록을?

대관절 천마인 자신도 모를 만한 비밀을 이리 보관한다면, 대체 그것은 어떤 기록이란 말인가.

‘짐작가는 것조차 없다.’

모든 것이 이리 불에 타버렸으니 단서조차 찾을 수 없는 셈이었다.

그나마 남은 단서라고 한다면, 저 썩어 문드러진 백골 하나뿐이었다.

아마 정황을 볼 때, 묶인 채로 불에 태워져 죽은 저 백골.

청유백은 넌지시 떠오르는 가능성 하나를 던지듯 물어보았다.

‘혹시, 네 시신인가?’

[…아니, 그것은 아니다. 본녀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곳 천산은 아니니라.]

본녀는 불에 타 죽지도 않았고.

천화는 그리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 아이가 본녀를 부른 것은 확실하다. 정확히는, 저기 있는 무엇인가가….]

청유백은 백골에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살펴보았다.

둔부의 파열과 양다리의 골절, 늑골은 심하게 나가 있었다.

뼈의 형태를 보면 여성.

조금만 쳐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상태는, 이 백골이 최소한 수백 년은 잠들어 있었다는 뜻이었다.

‘정말로 네가 아닌가?’

[그 질문은 마치 본녀였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들린다만?]

‘일이 조금 편해지기는 하겠지. 대충 얼마나 옛날 사람인지는 짐작할 수 있을 테니까.’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뼈의 상태를 보면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으리라.

청유백이 계속 백골을 관찰하던 찰나, 백골이 묶인 곳의 발치에 무언가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재 속에 파묻힌, 회백색의 무언가.

청유백은 그것을 주워들었다.

‘반지…인가?’

은빛이었을 터인 반지는 불에 그을려서 거진 흑색으로 화해 있었지만, 그것은 분명 고리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재질은, 아마도 은.

불에 녹아내리지 않은 것을 보면 주철 따위를 섞었을지도 모른다.

‘이봐, 천화. 이게 뭔지….’

[끄으….]

젠장, 또인가?

끄윽, 끅,

천화는 거진 흐느끼듯이 머리를 쥐어짰다.

‘이 반지가 원인인가.’

그것은 명명백백했다.

이곳이 어떠한 장소인지, 무엇을 위한 장소인지는 몰라도 그녀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 또한, 확실했다.

하지만, 그 연관이 어떤 것인지 청유백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아악!! 아냐, 나는, 나는….]

언뜻언뜻 내뱉는 일방적인 단말마와 단서의 편린으로써는, 그녀가 떠올리고 있는 잃어버린 기억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웠다.

때문에 청유백은 반지를 놓지 않았다.

이 반지가 원인인 이상, 이것을 놓아 버린다면 귓가에 맴도는 그녀의 비명이 그칠지도 모른다.

하지만 구태여 그럴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녀 또한 과거의 천마고, 고통에는 익숙한 부류의 인간이다.

이 찰나의 고통을 견뎌내어 미지를 향한 실낱을 쥐어낼 수 있다면, 그깟 두통 따위 견뎌내지 못할 것도 없으리라.

[나는… 나는 하지 않았어. 나는….]

청유백은 귓가에 계속 메아리치는 그녀의 비명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우선 주변의 다른 재들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언급한 시간은 단지 일각뿐.

이제는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손에 반지를 쥔 채 주변을 훑던 청유백은, 재에 파묻혀 응어리진 무언가를 발견했다.

‘…검날?’

꺼내 들어 재와 검댕을 털어낸 그것은 분명한 철로 만들어진 칼날이었다.

하지만 손잡이는 삭아 스러진 것인지, 검신만이 남은 채 녹슬어가고 있었다.

청유백은 손가락으로 검신의 끝자락에 새겨진 문자를 닦았다.

홍련紅蓮.

본래 이 검의 주인의 이름이었을까, 혹은 벼린 장인의 이름이었을까.

단순한 의문이 뇌리를 스쳤지만, 그것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렬한 인상이 청유백의 생각을 관통했다.

녹이 슬었음에도 여전히 그 날은 살아 있었고, 시체의 옷과 이곳의 모든 것이 불타 없어질 동안에도 칼날은 전혀 변형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손끝에 전해져 오는 이 강렬함.

단지 이 녹슨 칼날을 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명검이다.’

이 검을 다시금 벼려내어 옛 모습을 되찾는다면, 무신의 백월이나 옛 저의 애검이었던 진천에 비해 밀리지 않게 될 것임을 확신했다.

그 먼 과거, 기술도 재료도 현재보다 모자랄 것임이 분명함에도 이러한 칼날이라니.

수수께끼는 더욱 미궁에 빠졌다.

이 장소.

이 검.

그리고 이것들의 주인인, 이 백골의 정체.

무엇 하나 알아낸 것이 없는 채로, 청유백은 통로 밖으로 등을 돌렸다.

이제 저 잿더미 속에는 무엇도 남아 있지 않기도 했거니와─시간이 다 되었으니까.

일각.

그것이 지나면 안내해 준 자가 다시 돌아올 테고, 그 전에 이 통로를 다시 폐쇄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천화, 이 통로는 어떻게 닫지?’

[끄윽… 흑….]

‘젠장, 상태가 말이 아니군.’

고통 속에서도 무어라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있을 줄 알았더니, 천화는 고통을 견디는 것만으로 한계인 듯 보였다.

하긴, 영체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부터가 금시초문일진대─그 크기가 어떤 것인지는 감히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청유백은 궁여지책으로 천화가 시켰던 행동들을 반대로 반복했다.

마지막에 그녀가 보여 줬던 흑빛의 꽃봉오리를 빚어내는 것은 무리였지만, 야명주의 순서를 돌리는 정도는 쉬운 일이었다.

‘이것으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궁여지책이었다.

이것으로 되지 않는다면, 벽을 부수기라도 해서 잠시만이라도 저 통로를 감춰야 할 테다.

하지만 다행히도.

직후, 육중한 진동음이 다시금 들려왔다.

─쿠구구구궁!

조용한 기관음과 함께 틈새는 다시 메꿔지기 시작했다.

다시금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감탄만이 목울대 위로 치솟았다.

청유백은 다시금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멍하니 감상할 시간은 없겠군.’

청유백은 아까 보았던 검들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명검이라 부르기에는 아까운, 그저 치장용 예식 장검에 가까운 물건.

청유백은 그것을 뽑아 들고는 통로를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는, 단전에서 마기를 끌어올려 검에 집약시켰다.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청유백의 단전에 깃든 마기가 혈도를 타고 내달렸다.

팔을 타고 검으로 흘러간 마기는 검신을 가득 채웠고.

변화는, 눈에 띄게 일어났다.

─우우웅!

마치 천화가 저 통로를 열 때의 꽃망울과 비슷한 모습의 빛이 검을 휘감았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오히려 패도적이고, 강렬하여─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만 같은 기운이 되어 검신을 내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쩌적, 콰광!!

찰나의 순간, 검신에 일어난 균열은 한순간에 전체로 퍼져나갔고, 제 몸에 담긴 마기를 견디지 못하고 산산이 깨져나갔다.

쩔그렁.

깨져나간 검의 파편은 어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이제, 검은 이제 그 검병만이 남아 볼품없는 모양새로 남았다.

더 이상 무기로써의 역할은 다하지 못하리라.

‘크기는… 조금 크군. 다행이야.’

청유백은 녹슨 칼날을 검집에 밀어넣고, 그 위에 부러진 검병을 꽂아 넣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멀쩡한 보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속은 완전히 엉망진창인 채였지만 말이다.

“청유백! 시간이 다 되었다!!”

안개의 벽 너머에서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서서히 잦아드는 진동음과 함께 통로는 작은 구멍이 되어 사라졌다.

궤짝을 다시 옮겨놓자, 그곳에 통로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청유백조차 알지 못한 사실이었으니, 그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림자의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이 이상의 시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곧바로 나오지 않는다면 규율로써 처벌할 것이다!”

“…지금 가겠습니다.”

청유백은 백월검을 손에 들고, 녹슨 칼날을 담은 검집을 허리춤에 매달았다.

더 이상, 이곳에 볼일은 없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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