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54화 (54/200)

제54화. 농담이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4)

‘간 것 같군.’

청유백은 숨을 돌리며 보물고의 내부를 살폈다.

그리 넓지는 않았지만, 더미로 쌓여 있는 금은보화와 재보들은 보는 것만으로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듯 보였다.

하지만 청유백이 곧이어 지은 표정은 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정색한 채, 보물고에서 시선을 돌려 제 뒤편의 벽을 바라봤다.

“…….”

그림자가 사라진 안개의 벽 너머.

인기척은 이미 멀어져 있었고,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정말로 감시는 없는 모양이군.’

저 바깥에서는 이 안쪽을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 정말로 한두 개쯤 더 가져간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들키진 않을 것이다.

[하루도 되지 않아 끌려가겠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겠지.’

아마 저가 이 보물고를 나가고 나면 곧장 보물고의 관리인이 들어와 모든 재보를 대조해 볼 것이다.

정말 가치 있는 것들은 몇 없으니 그런 것들을 건드리면 곧장 티가 날 테고, 이 궤짝 가득한 금원보조차도 전부 숫자가 맞추어져 있으니 금방 들통 날 게 뻔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도 엄중히 관리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곳에 있는 물건들이 귀한 것이라는 반증이리라.

청유백은 하찮다는 듯이 자조했다.

“…하나같이 금은보화뿐이군.”

[왜, 탐나더냐?]

“아니.”

청유백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하기에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청유백은 직접 생각하기로, 저는 자기 객관화가 꽤 확실한 사람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저는 분명 조금 남아 있는 양심은 국밥에 말아 먹고, 인성은 지난번에 숲길에서 잃어버렸던 것을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안목만큼은 높은 편이라 확신했다.

“이딴 쓰레기는….”

청유백은 발치에까지 흘러내린 금화를 툭 차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줘도 안 가진다.”

[흐음, 하긴. 예까지 와서 고작 황금 따위에 만족할 수는 없지.]

황금? 필요 없다.

청유백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당장의 무력을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수단이었다.

황금 따위는 소교주가 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고, 정 지금 필요하다면 황돈 놈을 부려먹으면 된다.

“오히려 화가 나는군.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지?”

청유백과 천화가 이 보물의 산을 보고 든 감정은 감탄이 아니었다.

또는 탄복이나, 매혹적이라 할 만한 다른 감정도 아니었다.

굳이 따진다면, 상실.

“고작 백 년 지났을 뿐인데….”

백 년.

결코 짧다고 할 만한 시간은 아니지만, 그 거대하고 강성하던 마교가 몰락하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다.

청유백은 한탄했다.

‘고작 이깟 것들을 교주의 보물고에 넣어 놓았다고?’

이깟 것들.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는 명백했다.

고작 궤짝을 채우는 정도의 은원보와, 찬란히 빛나는 것에 불과한 보석으로 만든 반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이 장소의 구석을 채우고 있는 최고급의 비단 따위가 그러했다.

비싸다고?

가치가 있어?

물론 그럴 테다.

하지만 이곳은 마교의 보물고다.

이곳에 있을 자격이 있는 물건에는 가격이 따라붙지 않아야만 했다.

부르는 것이 곧 가격이고, 그 물건의 존재 자체에 가격을 매기는 것이 불경할 정도의 지보(至寶).

‘그 지보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고작 백 년 지났을 뿐인데!

청유백은 확신했다.

청률의 검기를 처음 보았을 때, 마교가 어딘가 뒤틀렸다는 직감이 이제는 확신으로 바뀌었다.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마교는 분명히─

‘몰락하고 있다.’

마교의 재보 중 가장 귀중한 것들이 모이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러나, 바꿔 말하면.

고작 이딴 재화 따위를 마교 제일의 지보라 여길 정도로, 마교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얘기했다.

‘네 때에는 여기 뭐가 있었지?’

[기억이 흐려서 잘 기억은 없다만, 황금이 들어올 자리는 없던 것은 확실하니라. 대체로 영약류였던 것 같다만… 천년하수오(千年何首烏)나 만년설삼(萬年雪蔘) 따위도 몇 뿌리는 있었겠지.]

‘내 때도 그랬다.’

황금 천만 근을 줘도 살 수 없는 지보로 가득했다.

영약뿐이랴?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신물(神物)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법한 무구들과 도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의 어디를 바라보아도 영약 따위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으며,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무구들은 고작 황금 따위가 자리를 대신했다.

값을 헤아릴 수 있는 물건인 시점에서 이 보물고에 있어서는 안 됨이 분명함에도!

‘그동안 청가 내부에만 있는 탓에 마교 전체를 본 적이 없었지.’

생각보다 마교가 심각한 상태일지도 모른다.

백 년간의 사라진 시간.

그동안 마교가 어찌 바뀌었는지 이제는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청률의 검기나 이곳 보물고의 상황 등을 보면, 결코 좋은 상황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다음 시험에 만마서고가 열린다 하지 않았더냐. 그곳에서 기록을 찾아보면 되겠지.]

‘그래야만 하겠어.’

보물고의 재보들은 다 어쨌는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마교에서 곤륜의 무공을 익히고 있는지.

나아가 마교의 현 상황은 어떤지!

“하지만 지금은, 눈앞에 집중해야만 하겠군.”

지금은 남은 일각 내로 이곳에서 쓸 만한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더 급한 일이었다.

만마서고가 열린다고 해도, 그곳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결국 말짱 꽝으로 돌아갈 테니 말이다.

청유백은 황금과 장신구들 사이를 돌아보며 궤짝들을 열어 보았다.

‘영약은 하나도 없나?’

[없는 것 같구나. 이 공간에서 느껴지는 건 전부 금속뿐이야. 일절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느니라.]

영약은 다 저마다의 신묘한 기운을 품고 있다.

그것이 선기든, 마기든 간에.

저가 농익은 세월만큼, 저가 살아온 세월만큼의 기운이 곧 영약이 품은 내공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 돈이면 차라리 신마단을 만들 수도 있을 텐데. 굳이 쌓아만 두고 있다라….’

영약은 무엇으로 만드는가?

막대한 시간?

인력?

들어도 뭔지 감도 잡히지 않을 수많은 영초들?

물론 그 답도 그리 틀리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디서 구하는가.

땅에서 솟지도 않고, 하늘에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구하는 것부터가 영약을 만들기 위한 일이며, 결국 궁극적으로 답을 도출하면 영약의 재료는 단순했다.

돈이다.

‘저 궤짝에 들어 있는 금원보를 전부 때려 박으면 하나 정도는 만들 수 있겠군. 이곳에 있는 보물을 전부 사용한다면…열 개나 될까.’

설마 후예들이라고 영약의 가치를 모를 리는 없을 테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곳 고작해야 금뿐이고, 그것이 뜻하는 바는 명료했다.

만들 수는 있으나, 그러지 않았다.

‘마교에 여력이 없는가.’

굳이 영약 대신 보물고의 선택권을 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영약이라는 것은, 한 문파에 있어서 고수의 양성과도 직결되는 문제였다.

마교로 따지면, 환마단 하나와 십 년의 시간이면 마두급의 고수를 한 명 길러낼 수 있다.

그리고 그리 만들어지는 고수는 세력의 영역과 이권 확장을 위해 움직이고, 이것이 또다시 돈을 벌어 또 다른 고수를 만드는 순환을 만드는 것이 기본적인 구조.

하지만 굳이 신마단을 만들지 않고 황금으로 쟁여둔다는 것은, 단순한 계산으로 인해 도출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고수 한둘이 늘어난다고 해도, 마교의 성세가 크게 뒤바뀌지 않는다 여겼다는 것이다.

천화는 계속해서 흘러만 가는 시간에 답답해하며 물었다.

[허면 어쩔 테냐? 이곳에서 그저 발이나 구른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네놈이 장신구에 눈을 돌릴 리는 없을 테고… 허면 검이냐?]

‘검이라… 슬슬 하나쯤 더 필요하기는 하지.’

본래라면 검묘에서 얻은 백월검이 있으니 다른 무장은 필요 없었다.

보통의─평범한 검수라면 응당 그래야만 할 터다.

그만한 신검이 있는데 어찌 다른 검에 눈이 돌아가겠는가.

그 검 한 자루만으로도, 마땅히 평생을 함께할 애검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청유백의 무공, 육도홍련신공은 특별했다.

‘옛 나의 애검 중 남은 것은 진천검 하나. 무신의 백월검을 내가 취했으니… 네 자루가 더 필요하군.’

육도홍련신공은 여섯 개의 검을 동시에 다루는 무공.

지금까지는 두 번째의 검을 다룰 마기가 모자라 굳이 사용하지 않았지만, 이번에 황돈에게 받은 환마단을 취한다면, 두 번째 검의 사용을 생각해 볼 법도 했다.

‘하지만 마음에 드는 녀석은 없어.’

황금이 들어차 있는 것이 실망스러운 것과 마찬가지인 맥락이었다.

검묘에 있던 것들은 좀 참고 쓸 만한 것들이 몇 있었지만, 이곳에 있는 녀석들은 수준 미달이었다.

‘두 번째 검’으로서 마기를 담는다면 얼마 가지 못해 부서지고 말 것이다.

[이상할 것도 없지 않더냐. 검이 제 역할을 하지도 못하고 처박혀 있는 시점에서, 멀쩡한 물건은 아닐 테지.]

검묘에 있던 것들은 선대의 고수가 사용했었던 일종의 유품이었다.

못해도 십수 년간 강호를 주유하고, 그 위용을 증명한 신기(神器)들.

그에 반해, 이곳 보물고에 있는 것들은 아직 마땅히 주인을 찾지 못한 물건들이었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진 주제에, 아직 피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일단 근본적으로 하자가 있다는 소리다.

멋도 모르는 기연을 얻는 놈이 쥐고 가기에는 나쁘지 않겠지만, 청유백 자신이 직접 고르기에는 상당히 아쉬웠다.

[시간은 가고만 있느니라. 반각쯤 남았으려나?]

‘골 때리는군….’

청유백은 재보들을 뒤적여가며 쓸 만한 것을 찾기 시작했다.

‘이왕이면 두 번째 시험에 도움이 되는 종류면 좋겠는데.’

어떤 것이 출제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첫 보상으로 영약을 주는 것으로 봐서는 무공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으리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무공의 성취에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기물 따위가 있다면 좋을 테다.

하지만 아무리 뒤져도 그런 물건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청유백이 기억하는 과거의 보물고에는 그런 기물들이 즐비하게 있었건만, 지금은 아니었다.

‘양의분반(兩儀分半)이라도 있었다면 골랐을 터인데….’

양의분반은 착용자의 정신을 온전히 뚜렷하게 하여, 전신의 감각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을 도와주는 신물이었다.

오른손잡이 검수가 왼손으로도 검을 휘두르게 하고, 왼편의 책을 읽으면서도 오른편의 시를 동시에 읊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나중에 절정 고수가 되어 마군의 경지까지 오른다면 필요 없게 될 물건이지만, 지금으로서는 그 무엇보다도 도움이 되리라.

…뭐, 있어야 도움이 되든 말든 하겠지만 말이다.

[헌데, 안쪽은 찾아보지 않는 것이냐?]

계속 무의미하게 뒤적거리기만을 반복하는 청유백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천화의 질문이었다.

청유백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안쪽?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안쪽이라니?

보물고는 이것이 전부였다.

직경과 십 장 정도의 작은 공간.

다른 창고가 따로 있을지는 모르나, 마교의 가장 진귀한 보배를 모아 놓는 공간은 이 정도의 크기면 족했다.

그만큼 이 장소에 들어올 만한 물건이 적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천화는, 도리어 무슨 말을 하냐는 양 대꾸했다.

[그야 당연히 교주의…]

교주의.

교주의….

[교주의…?]

뭐였지?

교주의, 교주의, 교주의, 교주의?

[교주의, 교주는, 나는….]

교주?

[큭…!!]

천화는 갑작스레 고통을 호소했다.

본디 정신체일 터인 혼백은 몸의 주인이 느끼는 감각, 그것도 극히 일부의 감각만을 느낄 뿐일 터였다.

그렇기에 어떤 상황에서도 온전히 방관자로서, 그저 조언자로서 남을 수 있는 것이다.

청유백의 그 어떤 생에서도, 다른 천마혼이 고통을 호소했던 적은 존재하지 않았다.

‘괜찮나? 대체 무슨 일이야?’

천화는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고통 어린 신음과 함께, 정신을 옥죄여 오는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러기를 잠시, 천화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무언가가…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아. 교주의… 동굴? 비고? 어떻게… 야명주?]

천화는 머리를 쥐어짜며 알 수 없는 단어들을 내뱉었다.

청유백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답답할 뿐이었지만, 상황이 기묘하게 돌아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녀 자체가 의문이 많지 않았던가.

이름도 들어본 적 없을뿐더러, 기록에도 없는 여성 교주.

하물며 기억까지 흐리다고 하니, 의심이 가지 않으면 더 이상한 상황이었다.

허나 지금 그녀가 언뜻언뜻 내뱉는 단어들은, 마치 그녀가 조금이나마 기억을 되찾고 있는 듯이 보였다.

잠시의 시간과 조금의 신음이 흐르고, 정적의 다음 순간에 청유백이 입을 열었다.

‘괜찮은가?’

천화는 대답 대신 청유백의 몸을 움직였다.

마치 실에 매달린 꼭두각시처럼 들어 올려진 청유백의 손이 구석의 금 궤짝을 가리켰다.

[저것… 저 궤짝을 치워 보거라.]

‘뭐? 시간도 없는데….’

[어서!]

청유백은 투덜거리면서도 그녀의 직감을 따랐다.

벽에 붙어 있는 궤짝들을 치워 들어내자, 그곳에는.

‘……?’

다듬어지지 않은, 다른 벽들과 같은 동굴의 거친 석벽과.

오래간 놓여 있던 궤짝 탓에 네모나게 흔적이 남은 먼지 더미.

그리고 자그마한 돌멩이 몇 개가 있었다.

즉.

아무것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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