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화. 농담이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3)
황돈은 곧장 황가의 장원으로 돌아갔고, 청유백은 청운각으로 향했다.
조금은 늦은 시각, 햇무리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굳이 내일이 아닌 이 시간에 다급하게 부른다는 것은, 상황이 꽤 급박하게 돌아간다는 것.
어지간히도 청유백의 보상에 대해 논란이 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대개, 논란의 끝에는 큰 보상이 따르는 법이었다.
‘큭큭, 못해도 신마단이겠지. 마교에 그 이상 가는 영약이 있다면, 어쩌면 그것을 줄지도 모른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구나.]
‘그간 한 고생이 얼만데, 당연한 것 아닌가?’
지금도 온몸이 쑤셔온다.
장담컨대, 지금 이 또래 아이들 중에 삭신이 어디인지 아는 놈은 없으리라고 자신할 수 있다.
녹지연쯤 되면 알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간에.
지금 저는 그 다른 놈들은 뭔지 알지도 못할 삭신이 쑤셔왔다.
온몸 관절 하나하나 골고루 아프다 이 말이다.
이만한 고생을 하면서 진문을 어거지로 넘었는데, 그 정도의 보상이야 당연히 합당한 것 아니겠는가!
‘어쩌면 두 개도 가능성 있다!’
[어유, 국물이 줄줄 흐르는구나. 흘리지 말고 마시거라 그래.]
김칫국은 무슨.
당연히 그 정도는 줘야지.
─끼이익!
청유백은 천화의 구박을 상큼하게 무시하며 청운각의 문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둘이었다.
청가주, 청걸명과 그 옆에 앉은 유 부인.
그 외에는 주변에 대기하고 있는 하인 정도를 제외하면 다른 이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왔구나. 이리 와 앉거라.”
청걸명은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청유백을 불렀다.
표정에서부터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결코 좋은 의미의 표정은 아닐 테다.
하지만, 뭐 그래.
‘설마 보상을 통째로 떼어 처먹기야 했겠어?’
청유백이 고개를 꾸벅이고 의자에 앉기 무섭게 청걸명이 먼저 운을 떼었다.
“나쁜 소식과 좋은 소식이 하나씩 있다. 뭣부터 들을 테냐?”
“좋은 소식부터 들어 보죠.”
“…이왕 듣는 거 매부터 맞는 게 좋지 않겠느냐?”
“이미 순서가 있는 거면 왜 물어 봤습니까?”
“그래야 분위기가 살지 않니.”
“…….”
골 때리는군.
청유백은 지끈거리는 미간을 짓누르며 대꾸했다.
“그래서, 나쁜 소식이 뭡니까?”
“이번에 네가 진문을 돌파했다는 사실이 가주들에게 전해지자마자 회의가 열렸다.”
회의씩이나?
청유백은 고개를 까딱였지만, 이내 대충 이유를 납득했다.
그 결과가 그만큼이나 이변이었다는 뜻이리라.
‘하긴, 누군가 성공하라고 만든 것 같지는 않았지.’
엿 먹으라고 만들었으면 모를까.
애초에, 그 누구도 진문을 열지 못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걸 만들었다면, 이 결과를 이변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테다.
대뜸 하지 말라고 만든 걸 기어코 해버리는 놈이 나왔으니, 비상이 걸릴 법도 했다.
“그런데요?”
“그걸 인정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로 말이 많았다. 너도 알다시피… 편법이 좀 있었지 않더냐.”
“편법이라뇨. 전략이라고 말해주십쇼.”
“단어가 뭐가 되었든 무에 중요하겠느냐. 아무튼 말이다.”
결과 지상주의로써 그것을 받아들이는 가주가 있는가 하면, 배가 아파서라도 온갖 이유를 대가며 통과를 부정하는 자도 있었다.
다른 놈 잘되는 꼴 못 보는 놈이야 어딜 가든 있지만, 이번의 ‘다른 놈’은 다름 아닌 청유백 본인이다.
“…그래서 어찌 되었습니까?”
청유백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설마….
“다행히도, 일단은 통과로 인정하기로 했단다. 적가주와 황가주가 부정하기는 했지만, 백가주와 묵가주의 다수결로 결정되었지. 한 놈은 기권이었고.”
“뭡니까,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표 수가 어찌 되었든 결국 통과 아닌가.
그렇다면, 다음 시험의 형평성을 위해서라도 보상의 지급은 있어야만 할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걸명의 표정은 밝을 날이 없었다.
“하지만….”
아, 제발.
그놈의 하지만.
청유백은 이마를 탁 치며 의자에 등을 던지듯 기대었다.
어디 말이나 해보라는 태도였다.
청걸명은 굳이 제지하지는 않고서, 대신 말을 이었다.
“당초에 고려하지 않았던 진문을 통과한 데다, 수단이 편법이었던 이상….”
“잠시만요, 아버지.”
“무엇이냐?”
“보상이 없다는 말만 아니면 다 좋을 것 같습니다. 다른 내용이죠?”
“…….”
“…….”
정적, 고요. 그리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청유백은 확인차 물었다.
“질 나쁜 농담은 싫어합니다.”
“농담이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
X발.
-쾅!
청유백은 머리를 탁자에 박으며 죽은 듯 고개를 떨궜다.
‘내가 뭣 땜에 그 고생을 했는데.’
제 사선을 넘은 노력과 고난은 대체 뭐가 된단 말인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신마단을 못 준다면 환마단, 정말 하다못해 소마단이라도 쥐여줘야 할 것 아닌가.
“참고 삼아 물어도 됩니까?”
“뭐든….”
“적철진이란 놈과 첫째 형님은 뭘 받았습니까?”
“…꼭 알아야 하겠느냐?”
뭐든이라며. 빌어먹을.
“…아뇨.”
청유백의 심정을 아는지, 청걸명도 연신 헛기침만을 반복할 뿐 무어라 위로를 건네지는 못했다.
무슨 할 말이 있을까.
다른 것도 아닌, 무려 천마지회의 보상.
그것도 마땅히 최고의 보상을 약속받았어야만 하는 것이 작금의 상황이었는데 말이다.
마음속으로 육두문자를 이백오십만 번쯤 되풀이한 청유백을, 천화가 어렵사리 위로하려 입을 열었다.
[그래도 좋은 소식이 남지 않았더냐. 왜, 이런 이야기를 보면, 좋은 소식으로 무마되는 경우가….]
‘신마단보다 좋은 소식?’
[음….]
야.
그런 거는… 있을 수가 없어.
물론 신마단이 아무리 좋은 영약이라고 한들, 얻지 못하면 가망이 없다거나 하는 수준의 물건은 아니다.
신마단이 없다 해도 천마의 자리는 언젠간 차지할 수 있다.
일 갑자나 되는 마기를 공으로 날리는 것은 심히 아깝지만, 그 시간을 메꿀 만한 방법과 능력이 청유백에게는 있었으니 말이다.
그것을 얻는다면 천마의 좌에 오른다는 목적이 근 십 년 즈음은 빨라질 것 같기는 하지만, 뭐.
‘이야, 신마단보다 좋은 소식이면 뭐가 나와야 할까?’
그 전설의 공청석유나 만년설삼쯤 되나?
[…….]
천화는 한순간에 입을 다물었다.
조금의 정적이 지난 다음에서야, 눈치를 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들어는 봐야지 않겠느냐?]
‘…그렇지. 들어는 봐야지.’
한숨만 나온다.
이미 최악이 나온 상황에서 좋은 소식이라 해봐야 뭐가 있겠는가.
차악조차 최악에 비하면 좋은 소식 아니던가?
청유백은 기대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태도로 물었다.
“좋은 소식은 뭡니까?”
“대신 천마께서 네게 합당한 보상을 내리셨다.”
“예?”
* * *
천마.
마교 교주.
마교의 지존.
전부 한 자리를 지칭하는 단어다.
한 사람이 아닌 이유는, 그 자리가 대물림되며 후대에게, 후대의 후대에게 이어지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마교가 존재하는 한 천마는 항상 존재하고, 그것이 어디의 누가 되든 간에 이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천마는 마교의 수장이다.
즉, 백 년 전의 전쟁으로 마교가 아무리 폭삭 내려앉았다고 한들 어쨌든 누군가는 천마의 위(位)를 이어받아야만 했을 테다.
육대가의 사람들이 천마지회를 통해 현재의 교주를 뽑았고, 지금의 교주는 두 번째 천마지회를 통해 뽑은 인간이라 했다.
아마, 적가의 인간이라 했던가.
청유백으로서도 이야기만 들었지, 실제로 본 적은 없었다.
‘어딘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적인 자리를 간 적이 없으니….’
천화가 기억하는 이 청유백의 몸의 기억에조차 천마의 정보는 없었다.
하지만 제 가문의 아이도 아닌 청유백의 편의를 봐 준 것을 보면, 꽤나 형평성이라는 것을 아는 인간인 듯 보였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양심은 있는 놈이군. 나중에 죽이더라도 고통 없이 죽여 줘야겠어.’
[음. 기특한 놈이로고.]
이미 현 대의 천마 정도는 언젠가 발깔개로 쓸 미래를 확신하고 있는 시점에서 어딘가 뒤틀린 것 같았지만, 그것을 정정해 줄 인간은 안타깝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재는 게 편이라고, 천화 또한 천가도 아닌 적가의 천마 따위는 인정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아무튼, 현 천마란 놈이 ‘합당한 보상’이랍시고 내린 물건이라면 분명 대단한 것임이 분명할 터.
청유백은 어둠 속을 내달리며 청걸명이 언질했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오늘 축시 초(오전 1시). 호법당으로 가거라. 너를 맞이하는 사람이 있을 게야.’
호법당(護法堂)은 교주가 기거하는 천인전(千仞殿)에서 앞으로 이백 보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했다.
교주의 주변에서 신변을 보호하고 수족과도 같이 행동하는 것이 바로 호법.
교주인 천마가 가장 강한데 대체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는 건지, 생각해 보면 호법의 존재란 참 웃긴다는 생각이 종종 들기는 했었다만─
그것도 지금은 과거의 일이었다.
‘위치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청유백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호법당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잠시가 지나도 문이 열리거나, 안쪽에서의 인기척이 들려오지는 않았다.
대신, 달빛에 비친 그림자 하나가 처마 아래에서 솟아올랐다.
솟아오른 그림자는 청유백과 눈이 마주치더니, 청유백의 이목구비를 확인한 후에야 입술을 달싹였다.
“왔군.”
그림자는 조금의 지체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이미 달은 높이 떠 길을 다니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음에도,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하는 움직임이었다.
“이쪽으로.”
청유백은 말없이 그림자의 뒤를 쫓아 달렸다.
가도에서 벗어나 담을 넘고, 숲을 헤쳐 달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풀잎 스치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먼저 입을 연 것은 그림자 쪽이었다.
“질문이 없군. 그분께서 내린 게 무엇인지 궁금하지는 않은가? 혹은, 지금 네가 어디로 향하는지 따위의 것은?”
“곧 알게 될 텐데, 궁금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재밌는 놈이로군.”
그림자는 입꼬리를 올리는 듯하더니 다시 숲길을 내달렸다.
실상, 청유백이 굳이 질문하지 않는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말이다.
[흐음, 헷갈리게 하려 이리저리 꼬고는 있지만… 이 길, 보물고로 가는 길목이로구나.]
청유백과 천화에게 마교의 비밀이란 큰 의미가 없었다.
그것이 먼 옛날부터 내려오는 비밀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지금 향하는 마교의 보물고는 마교의 태곳적부터 있던 장소.
모르려야 모르기도 힘든 곳이었다.
어느덧 숲길을 헤맨 지 일각이 다 되어 가자, 그림자는 멈춰 서고는 무언가를 청유백에게 내밀었다.
제 두건에서 뜯어낸 것만 같은 칠흑색 안대였다.
“이곳부터는 눈을 가려야만 한다. 혈도를 제압할 수도 있지만, 험하게 대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으니.”
“알겠습니다.”
청유백은 저항 없이 안대를 둘러맸다.
곧이어 그림자의 인도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고, 주변의 소리는 나뭇잎의 사부작거리는 소리에서 어느새 작은 울림의 발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복마동에서 백소하가 만든 것과 비슷한 종류의 진법이었다.
“오늘 이곳에서의 일은, 전부 불문에 부쳐야만 할 것이다.”
육대가의 자제라고 한들, 보물고의 소재는 엄중히 통제되는 정보였다.
대충의 위치나 입구의 진법, 안쪽의 함정 따위까지 말이다.
견물생심이라고, 아무리 풍족한 자라고 한들 보물 앞에서는 욕심이 생기는 법이다.
─팍!
그림자는 청유백의 등을 떠밀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청유백의 안대를 잡아당겼다.
청유백이 발을 헛디디며 몇 발자국 앞으로 떠밀어지는 순간, 안대가 풀리며 보물고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여긴….”
그리 넓지는 않았다.
가장 멀리 떨어진 벽과 벽의 폭이 열 장 정도 되어 보이는 공간.
크기가 협소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장엄함이나 위대함 같은 감정이 들게 만들기에는 어려워 보였지만, 보물고란 무릇 그런 것이다.
휘황찬란한 외견보다는, 안에 잠든 지보의 가치가 보물고의 가치를 결정하지 않던가.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빛나는, 수만의 황금색 광채는 자신의 가치를 온몸으로 뽐내고 있었다.
벽에 틈틈이 하나씩 박힌 창색의 야명주는 물론이요, 그 빛을 반사하여 빛나는 산더미처럼 쌓인 금원보와 은원보는 그 액수를 쉬이 짐작하지 못하게 했다.
그 누가 이곳을 태양빛이 들지 않는 장소라고 생각할까.
보물고를 가득 채운 황금색의 빛은 태양의 그것보다도 더욱 찬란하게 빛났다.
[호오, 마교의 재보가… 이리되었구나.]
천화는 흥미롭다는 듯 목을 울렸다.
벽에는 마교가 수집한 아직 주인 없는 신검들이 줄지어 놓여 있기도 했고, 선반에 놓인 장신구 따위는 전부 말할 필요도 없는 일급품.
‘헌데….’
청유백이 그것들을 제대로 돌아보기도 전에, 청유백의 뒤편에서 다시금 그림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주께서 이곳의 물건들 중 단 한 가지를 네게 허락하셨다.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가지고 나오거라.”
마치 안개로 만들어진 벽으로 가로막힌 듯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인기척과 목소리는 분명 저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환영을 만들어내는 진법이었다.
“저만 들어가는 겁니까?”
“보물고에는 교주께 허락받은 자만 출입할 수 있다.”
하긴, 청유백 자신의 대에도 보물고의 관리는 온전한 교주의 권한이었다.
마교의 전체적인 재산은 황가가 전담하지만, 보물고에 들어온 재보는 교주의 것.
교주 본인과 미래에 그 자리를 이어받을 소교주만이 보물고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었다.
그 외의 사람은, 설령 교주의 곁을 직접 지키는 호법원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허면, 몰래 물건을 더 들고 나가면 어찌 되는 겁니까?”
청유백은 이미 그 대답을 안다.
하지만, 그림자가 대답하는 태도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그림자는 그것까지도 간파하고 있다는 듯이 덤덤히 말했다.
“이곳의 물건은 전부 장부로써 엄중히 관리되고 있으니, 내가 없다 하더라도 혹여나 하는 마음 따위는 일찌감치 접는 게 좋을 것이다.”
아무리 교주만이 출입을 허가할 수 있는 보물고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 정도는 있기 마련.
저를 속이고 물건을 더 가져간다 해도, 결국은 들통난다는 소리였다.
보통이라면 어설픈 짓 하지 말라는 등의 한마디 경고는 오갈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림자는 더 이상의 말은 없이 물러났다.
“일각의 시간을 주겠다. 서둘러 골라서 나오도록.”
발걸음 소리 없이, 조용히 인기척이 멀어져 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