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2화. 농담이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2)
“쓰읍….”
청유백은 한껏 인상을 찌푸리며 몸 곳곳의 타박상에 고약을 발랐다.
복마동에서 나오자마자 녹운각으로 갈 수도 있었겠지만, 복마동을 지키던 마사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지금 밖으로 나돌았다간 어떤 시선을 받을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정말 크게 당한 상처는 별로 없고, 긁히거나 찢긴 타박상 정도뿐이니 방으로 돌아와 스스로 치료하는 것이 낫다 싶었다.
‘젠장, 고작 약관도 안 된 몸으로 삭신이 쑤신다는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몸 귀한 줄 모르고 마구 굴린 대가 아니겠느냐.]
실상 다친 곳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몸 곳곳이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동굴에 넘치는 귀기 덕에 고통을 느끼지 못했겠지만, 네 몸은 착실히 망가지는 중이었단 말이다.]
즉, 지금의 고통은 이미 몸이 많이 지쳤다는 방증이었다.
천화는 한심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어찌할 테냐? 쉴 시간이 얼마나 주어질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길지는 않을 게다. 더 움직일 테냐?]
‘아니, 일단은 쉬도록 하지. 윗선이 시끄러운 것을 보니 저쪽에서 날 부를 테고….’
청유백은 말끝을 끌었다.
제 보상을 받기 전까지,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기 전까지 몸을 조금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아마, 보상이 준비되면 윗선에서 저를 불러내리라.
게다가 바깥에서 가까워져 오는 육중한 기척을 느꼈으니, 더욱이 나갈 이유가 없었다.
‘…손님이 찾아온 것 같으니 말이야.’
쥐새끼인지 돼지 새끼인지는 몰라도, 바깥에 멀뚱히 세워두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었다.
청유백이 무어라 밖을 향해 언질하기도 전에, 밖에서 소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 도련님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는데요….”
─콰앙!
소혜의 눈물 어린 호소가 무색하게, 청유백의 방문이 터지듯 열어젖혀졌다.
터질 듯 보이는 육중한 체구와 꼴에 귀공자랍시고 이목구비는 기묘하게 뚜렷한 금색 돼지.
황돈은 사족 따위는 때려치우고 다짜고짜 물었다.
“귀인! 귀이이인!! 정녕, 그것이 정녕 사실이란 말이오?!”
사실? 무슨 사실?
그렇게 갑작스레 찾아와서, 마치 부인이 자신 몰래 만나는 여자가 있냐는 투의 질문을 던지면 청유백으로서는 할 말이 마땅찮았다.
청유백은 고약과 붕대로 대충 처치하던 것을 마무리한 뒤, 그제야 황돈을 돌아보며 물었다.
“뭣 말이냐?”
“지, 진문을 돌파하셨다 들었소. 정녕 그게 사실이오?”
무어 대단한 비밀을 취급하기라도 하듯이 숨 졸이며 물어보는 황돈이었지만, 청유백에게는 전혀 숨길 이유가 없는 질문이었다.
청유백은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사실이다.”
“역시! 역시 귀인!! 소인의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소!!”
황돈은 무엇이 그리 감격스러운지, 바닥에 엎드려 부복하며 몇 번이고 이마를 찧었다.
대단하십니다!
귀인! 적가의 장자 놈도, 귀인의 형님께서도 하시지 못한 대업을 이루셨습니다!
“대단하십니다, 귀인! 만세! 만세! 만만세!!”
…따위의, 낯간지러운 아부를 혀가 닳도록 내뱉는 황돈이었다.
아부라는 언어를 쓰는 나라의 원어민이 있다면 아마 이놈이 아닐까 싶을 지경이었다.
누가 본다면 황가의 자제로서 자존심도 없느냐고 일갈할 만한 장면이었지만, 황돈은 단언할 수 있었다.
자존심도 없냐고?
‘당연하지!’
전혀!
그딴 건 돌잡이 날 죽 쒀서 먹은 지 오래다.
‘기회다. 이건 기회야!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황금 동아줄!’
황돈은 그리 확신했다.
물론 적철진과 청명휘라는 보장된 동아줄이 있지만, 그 동아줄은 자신에게는 내려오지 않는다.
그들은 아쉬울 것이 없고, 황돈은 아쉬운 것만 가득하니 말이다.
하지만 청유백은 다르다.
완벽하지 않다.
대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쓰레기 공자라 불리던 청유백이 이리 훌륭하게 돌아왔다.
당연히 그에게 투자한 사람은 일절 없을 것이며, 지금 이 동아줄을 잡는다면 황돈은 그 누구보다도 가까운 관계로서 성립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 자가 교주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되지 않아도 좋다!
유문의 수호자를 일격에 죽이고, 진문을 돌파할 만한 그 실력.
교주가 되지 못하더라도 분명히 마교의 높은 자리 중 하나를 차지할 테다.
‘황가 내에서도 뒷배가 없어 멸시받는 나날도 끝이다. 청유백이라면, 이제 나도 어깨 펴고 살 수 있어.’
물론, 청유백이 천마지회에서 유의미한 위치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전제가 있지만.
문제없다.
제가 그리 만들 것이니까.
“이제 다른 놈들은 결코 귀인을 업신여길 생각조차…”
“그만.”
“옙.”
청유백의 단언에 황돈은 그대로 입을 뚝 닫았다.
아무리 청산유수같이 쏟아져 나오는 아부라지만, 과해지면 역시 듣기도 거북한 법이었다.
천화는 멍하니 듣고 있다가, 황돈의 아부가 그치고서야 정신을 차리고는 감탄했다.
[거 참, 혀 하나는 잘 놀리는 놈이로구나. 어디 가도 굶고 살지는 않겠어. 고관대작이 이래서 타락하는구나 싶구나.]
아직도 웃음을 흘리는 천화를 뒤로하고, 청유백은 턱을 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지?”
“아, 본론부터 말이오? 그런 걸 좋아하시는구려.”
청유백은 부정하지 않았다.
아부, 좋긴 하지만 사족이 너무 길어서 좋을 것도 없다.
청유백은 황돈의 입에서 나오는 것보다는, 저치가 들고 온 보따리의 내용물이 더 신경 쓰였다.
“그럼, 이것부터 봐주시오.”
“이건….”
황돈이 꺼내든 것은 검집이었다.
검은 들어 있지 않은, 빈 검집.
가죽으로 마감하고 백금과 은으로 장식된 일품이었다.
명품에 무지한 청유백으로서도 이 검집이 상당한 장인의 손에서 만들어진 일품이라는 것은 쉬이 알아볼 수 있었다.
[호오….]
“귀인께 드리기 위해 소인이 준비한 작은 선물이오.”
무엇인지는 명확했다.
청유백의 백월검은 아직 검집이 없는 채라 계속 모포로 감싸만 놓고 있었으니, 저 검집의 짝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잖아도 곧 마련해야겠다 싶은 물건이기는 했었는데.
─철컥
반신반의하며 꽂아 보던 청유백은 완벽하게 맞물리는 검집의 형태에 감탄했다.
“정확하게 들어맞는군.”
본디 검집이라는 물건은 검과 한 짝이어서, 미리 만들어두는 것 따위의 일이 불가능했다.
검의 형태와 길이, 폭 등의 형질을 전부 완벽하게 틀어 맞춰야 그 검의 검집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청유백의 의문이 뭔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황돈이 막힘없이 답변을 내놓았다.
“백월검에 대한 자료는 백가의 도움을 조금 받았소. 본래 외부인은 열람할 수 없게 되어 있지만, 돈을 좀 쓰면 안 될 것도 없는 법이지.”
즉, 매수했다는 소리다.
그것과는 별개로 검집을 만드는 데에도 어지간한 돈이 들어갔으리라.
즉, 이것은.
“뇌물인가?”
“어감이 좋지 않으니, 선물이라고 해주시오.”
능수능란하게 받아치는 황돈의 태도에, 과연 허접쓰레기 같은 모습을 보였어도 결국 황가의 자식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똥개도 제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간다 하지 않던가.
“이딴 뇌물로 나를 사려 한다라.”
“그, 그건….”
이것이 황가의 방식이라는 것일 테다.
그리고 청유백은, 이런 종자들을─
“아주 좋지. 물건과 별개로, 그 마음가짐은 아주 마음에 들어.”
─몹시도 좋아했다.
[음. 강자에 빌붙는 약자의 표본 같은 놈이로다. 오래 살 상이야.]
그리고 그것은 천화도 마찬가지였다.
뇌물? 선물?
뭐면 어떤가?
혹자는 권력에 빌붙는 기회주의자─심하게 말하면 기생충이라고까지 지껄이며 깎아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실상 뭐면 어떻단 말인가?
그들은 제 앞에 내려온 동아줄이 기회인 줄 잘 알아보았을 뿐이고, 힘 있는 자들은 노력에 대한 보상을 내려줄 뿐이다.
기회주의자라고?
뭐 어때?
그딴 하잘것없는 모욕은 그저 제 앞의 기회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머저리들의 변명일 뿐이었다.
제 주제를 파악하고, 제가 있는 위치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다.
청유백은 그런 눈치 빠른 자들을 혐오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청유백이 웃음을 감추지 않자, 황돈은 화색을 비치며 청유백의 의사를 확인했다.
“받아주시는 것이오?”
“아니.”
하지만, 그건 그거고.
청유백은 백월검을 검집에서 뽑아들고는, 검집은 도로 내려놓았다.
“어, 어째서…?”
어째서냐고?
아주 복합적인 이유다.
일단 검집이라는 게, 한 번 만들면 굳이 다시 만들 이유가 없다.
절차가 복잡하기도 하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귀찮기 때문이다.
때문에 굳이 갖출 것이라면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내 취향 아니다.’
청유백이 그 이유를 입 밖으로 내뱉으려는 찰나, 귓가에서 천화의 고함이 빼액 하고 들려왔다.
[무슨 짓이더냐! 이리 아름다운 장인의 명작을 앞에 두고!]
‘아니, 알 바야? 내 검이지 않나.’
일단 지나치게 화려하다.
어디 졸부집 도련님으로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청유백은 일단 검집을 황금으로 장식하는 것 자체가 몹시 낭비라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미묘하게 화려해. 기생오라비도 아니고, 저딴 걸 어디 쓰라고?’
화려할 거면 차라리 확 눈에 띄던가, 이건 화려하다 하기도, 수수하다 하기에도 미묘한 것이었다.
딱 어디의 기생오라비가 멋으로 차고 다닐 만한 검에 어울리는 물건 아닌가.
하지만 천화는 도리어 그게 좋은 것이라는 듯, 열정적이게도 역설했다.
[이 절제된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냐? 이래서 예술도 모르는 것들은….]
쫑알쫑알쫑알쫑알.
천화는 단 한 순간의 숨도 멈추지 않고 제 예술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내뱉었다.
물론, 청유백이 알고 싶은 내용은 아니었다.
‘아니, 예술 따위 알 게 뭔데?’
[뭐? 어떻게 그런 망발을!]
쫑알쫑알쫑알쫑알.
청유백은 천화의 인중을 후려치고 제 귓가를 막아버리고 싶은, 살의에 가까운 감정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차마 그러지 못하는 한이 뼈에 사무칠 지경이다.
“저어….”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지, 갑자기 제 귓가를 막고 침묵하는 청유백을 조용히 지켜보던 황돈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혹여 마음에 안 드신다면 다시 준비해 보겠소.”
“…아니, 되었다. 그거면 된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
돌아 버리겠네.
청유백은 미간을 턱 짚으며 말없이 백월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그제야 천화가 제 예술관과 천하 예술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을 멈춘 것에 손을 떨며 만족해야만 했다.
망할.
하지만 청유백의 기분은 채 한순간이 지나기 전에 풀렸다.
─턱.
황돈이 두 번째로 꺼내든 목함 덕이었다.
“그리고 이게, 약속했던 것이오.”
황돈은 지체 없이 청유백을 향해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살짝 씁쓸하면서도 어딘가 깊은 향기가 한순간에 방 안에 퍼졌다.
청유백은 곧바로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는 익숙한 냄새였으니 말이다.
“환마단이로군.”
청유백은 익숙한 손길로 목함을 받아들자, 천화는 기가 차다는 듯 개탄했다.
[너무 당연하게 받는 것 아니더냐?]
‘본래 내 것이라고 거래했지 않나. 내 물건을 내가 받는데 문제라도?’
천화도 그저 미운 놈 딴죽을 걸고 싶을 뿐이었는지 부러 두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지금 바로 취할 것은 아니었으니, 청유백은 목함을 구석으로 밀어 넣으며 물었다.
“이게 전부인가?”
“소인의 명예와 신의를 걸고, 그것이 전부요. 내 눈을 보시오. 이게 거짓말하는 사람의 눈으로 보이오?”
“…흐음.”
솔직히, 모르겠다.
내 눈을 바라봐 따위의 말을 하는 시점에서 이미 충분히 수상해서, 뭘 더 본다 한들 더 수상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천화는 푹 한숨을 내쉬었다.
[장사치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또 없기는 하느니라. 하지만….]
‘…뭐, 지금은 아니지.’
분명 장사치가 믿음 없고 신의를 개떡으로 아는 족속인 건 맞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보통은 윗선에 줄 대러 올 때부터 뒤통수 칠 궁리를 하지는 않을 테다.
황돈의 말은 진실일 것이다.
최소한 지금은.
“지금은 이것이 전부지만, 귀인께서 원하신다면! 제 능력이 닿는 한 어떤 것이든 구해 보이겠소.”
황돈은 그에 그치지 않고 말을 계속했다.
어떤 것이든.
상당히 오만해 보이는 말이지만, 그만큼 자신감을 엇비치는 말도 또 없을 테다.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어떤 것이든?”
“어떤 것이든.”
황돈의 태도는 명확했다.
굳이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필요도 없이, 그 무엇보다도 확실한 의견의 피력이었다.
너는 말해라.
내가 구해다 주겠다.
그리고, 내가 네 줄에 섰다는 것을 잊지 마라!
정확하게, 더도 덜도 말고 그것!
그리고 그것은, 청유백에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좋다. 언젠가 필요한 것이 생기면 말하도록 하지.”
“감사하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영약이라도 구해 오라고 말하고 싶지만, ‘어떤 것이든’에 영약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굳이 그 사실을 상기시켜서 무안을 줄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영약 좀 구해와라.’
‘아… 그건 좀….’
하는 상황을 생각해 봐라.
청유백이든 황돈이든, 누구에게든 결코 좋은 분위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황돈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귀인의 보상은 어찌 되셨소? 분명 가장 어려운 진문을 돌파했으니 그 보상도 막대할 것 아니오!!”
고작 유문, 그 닭대가리─엄밀히 말하면 솔개였지만─를 잡고 주어진 것이 환마단이라면, 진문의 돌파 보상은 무엇일지 감히 상상도 되지 않았다.
환마단의 윗 단계인 신마단(神麻丹)이 주어져도 결코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꼭 좀 알고 싶소만!”
“아, 그건.”
청유백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방으로 다가오는 작은 기척이 제 방의 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끼익.
작은 경첩음과 함께 문이 열리고, 소혜가 빼꼼 고개를 내밀어 저를 부를 때까지 말이다.
“도련님, 가주님께서 부르세요.”
“이제부터 받으러 가야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