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46화 (46/200)

제46화. 열 살에 용을 잡은? (1)

“끄으으….”

자세히 보니, 돼지가 아니라 사람인 것 같다.

조금씩 꿈틀거리는 것을 보면, 안타깝게도(?) 숨도 붙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세상에, 저게 육대가의 자식이란 말이냐?]

천화가 기함할 정도로 그것은 믿을 수가 없는 체형을 지니고 있었다.

도저히 무공을 배웠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육체.

배는 투실투실하여 제 발가락을 볼 수는 있는 것인지 의심될 정도로 부풀어 있고, 팔과 다리는 도저히 무언가를 휘두른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살이 붙어 있었다.

그야말로, 돼지.

황가의 돼지니, 황돈(黃豚)이라 부르기에 위화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녹지연이 황돈이라는 놈을 언급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이놈인가?

청유백은 미간을 찌푸리며 발끝으로 황돈의 어깨로 추측되는 부위를 툭툭 쳐 보았다.

왜 추측인가 하면, 살에 다 파묻혀서 저게 팔인지 목인지 어깨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 비계도 아니고….

“어억….”

일단 살아는 있는 것 같다.

이리 있는 이유라면 뻔하리라.

유문에 도전했다가 처참하게 깨지고, 헐레벌떡 도망쳐 온 것일 터.

청유백은 황돈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안쪽으로 끌어 들여왔다.

‘일단 깨워볼까.’

[세상에, 드디어 남을 돕고 살 의지가 생긴 게냐? 그렇지. 아무리 우리가 천자마를 섬긴다고 한들, 결국 전부 백성을 위한 일. 평소부터 그를 실천해 둔다면….]

평소의 청유백과는 전혀 다른 행동에 천화는 기뻐서 떠들었지만, 청유백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무슨 헛소리야. 내가 공짜 노동을 왜 해?’

[…허면?]

‘황가의 가장 큰 특징이 뭐지?’

황(黃)가.

그 색이 상징하는 것만큼이나, 하는 일도 뚜렷한 가문이다.

마교의 수많은 업 중 황가가 지탱하는 것은 바로 금전.

경제와 대외 유통 활동에 관한 대부분의 것을 황가가 통솔한다.

즉.

돈이 많다.

[설마?]

‘돈 많은 놈이 빚도 착실하게 갚아.’

[…….]

그럼 그렇지.

손해 보고는 못 살 인간이 무료로 남을 도울 리가 없지.

이건 뭐 물에서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놓아라도 아니고, 물에서 건져줄 테니 네 보따리 내놓아라인 격이다.

뭐라 불러야 하지?

창조 수금쟁이?

어찌 되었든 좋다.

천화는 한순간의 희망이 날아가 급격히 우울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시간은? 시간이 모자라진 않겠느냐?]

정말 만에 하나의 경우지만, 혹시라도 서른 날까지 며칠 남지 않았고, 저놈이 며칠이고 일어나지 않는다면 공연히 시간만 날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물론 청유백도 알고 있었다.

‘바로 깨울 거니까 상관없어.’

황돈을 벽에 뉘인 청유백은 검지에 내공을 끌어올려 황돈의 기맥 몇 군데를 가격했다.

보통은 사람의 정신을 각성시켜 고통을 잊게 하거나, 잠시 동안 의식을 뚜렷하게 하는 정도지만.

청유백 정도의 수준이라면 내공을 직접적으로 조작하여 기절한 사람을 깨우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당연히 강제로 각성시키는 것이니 결코 건강에 좋지 않다.

‘일단 깨워는 주는데, 당연히 뒷감당은 당사자 몫이지.’

[깨워달라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조만간 상습적인 요통으로 고생할 황돈에게 잠깐의 묵념을 하기도 전에, 황돈이 침음성을 흘리며 깨어났다.

“으음…. 여, 여긴….”

“깨어났나?”

“어, 어떻게 된 일이오. 나는 분명 닭 괴물과 싸우다가….”

황돈은 게슴츠레 눈을 끔뻑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야명주 빛에 눈이 부신지 눈앞을 손으로 가리다가, 그제야 청유백을 발견하고는 헛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너는…,”

‘어라, 이거 잘만 하면….’

빛보다도 재빠르게 돌아간 청유백의 머리는, 순식간에 할 말을 바꾸었다.

“넌 위기에 처했었다. 그리고 내가 구했지. 기억나지 않나?”

“잘 모르겠소. 기억이….”

황돈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무슨 소리냐며 성내지는 않았다.

즉, 충분히 등쳐먹을 수 있다!

청유백은 때를 놓칠세라 잽싸게 말을 받았다.

“주변을 둘러봐라. 여기가 어디지?”

아명주의 빛이 어둠을 밝히는 공동. 황돈의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앙 공동이구려.”

“그래. 그럼 네가 그 괴물한테서 도망쳐서 자력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그건….”

“네 실력으로?”

“…….”

솔직히, 청유백은 황돈의 실력이 어떤지는 모른다.

당연한 일이다.

생전 처음 보는 인간, 아는 것이라고는 옷에 수놓아진 황색 거북이로 말미암은 황가의 자식이라는 정보뿐이다.

하지만, 무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나?

‘몸이 저 따위인데 실력이 좋을 턱이 없지.’

청유백은 세상 진지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황돈을 응시했다.

청유백의 거짓 한 조각 섞이지 않은 표정을 의심할 수 없었던지, 황돈은 이내 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하오. 충격 탓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기억이 안 난다고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물론 반대는 가능하다.

없던 일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미친놈.]

‘과찬 감사합니다.’

천화의 일침을 가볍게 무시하고, 청유백은 태연히도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저 우리 마교의 도리를 행했을 뿐이지만, 황가의 공자님이 은혜를 덤덤히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싶군.”

“옳은 말씀이오. 이 은혜, 황가 황도식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갚도록 하겠소.”

“그래, 잊지 말고.”

청유백은 황돈… 아니, 황도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황돈이 이름 아니었나?”

“분명 그리 부르는 무리가 있기는 하지만, 본인도 엄연한 이름이 있소.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 이름을 돼지라 짓겠소?”

그건 맞는 말이군.

하지만 그건 그거고, 솔직히 전자가 좀 더 입에 착착 감기지 않나?

청유백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황도식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럼 그냥 황돈으로 부르지. 괜찮지?”

“예? 아, 뭐… 다들 그리 부르긴 하오만….”

“그럼 상관없겠군.”

상관이야 없겠는가.

생명의 은인-미심쩍긴 하지만-에게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 수 없을 뿐이지.

물론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청유백은 황돈을 깨운 첫 번째 용건을 바로 물었다.

“그럼 황돈. 오늘이 며칠째인지 아나?”

[기절했던 놈인데, 그걸 어찌 알겠느냐?]

‘혹시 모르잖나.’

솔직히 기대는 않는다.

번갈아 가면서 불침번을 세거나, 단 한 순간도 자지 않는 이상에야 동굴 안에서 시간을 가늠할 방법은 없다.

더군다나 기절을 한 번이라도 하면,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방법이 없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무리였는지, 황돈은 두툼한 턱살을 문지르며 고민했다.

“음….”

“아니, 됐다. 무리한 질문이었군.”

[당연한 게지. 어찌 알겠느냐?]

천화까지도 그리 말하며 신경을 덮으려던 찰나, 황돈은 고개를 들며 물었다.

“혹시, 내가 기절한 이후 시간이 오래 지났소?”

“뭐?”

“하루 이상 지났는지 묻고 있소.”

“그건… 아니다.”

확실하지는 않다.

하지만 황돈의 몸에 생긴 상처를 보면, 저것이 하루 이상 된 상처는 아니었다.

그 말에 황돈은 제 뱃살을 몇 번인가 주무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오늘은 이 동굴에 들어온 지 열흘 되는 날이오. 열흘이나 육포 따위를 먹고 사니, 본인의 살도 많이 빠지긴 했구려.”

그게 빠진 거였냐?

아니, 그건 둘째 치고.

청유백은 자기가 물었으면서도, 믿을 수 없는 정보라는 듯 추궁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근거는?”

청유백이야 천화가 함께 있다.

자신이 기절하거나 수면을 취하더라도 천화가 대신 시간을 가늠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시간을 잰단 말인가.

황돈은 단순하게도 제 투실투실한 배를 자랑스레 디밀었다.

“진시 초, 오시 말, 유시 말에 정확하게 울리오. 내 자랑이지.”

“뭐가?”

-꾸르륵!

청유백의 질문과 동시에, 마치 기다렸다는 양 기괴한 소리가 울려왔다.

“배꼽시계. 아, 지금이 유시 말이오. 배고플 때지.”

청유백이 잃어버린 어처구니를 찾아 뇌 속을 헤매는 사이, 황돈이 쉴 새 없이 말을 이었다.

“아무리 무언가를 먹건, 얼마나 굶건, 얼마나 자건 바뀌지 않소. 내 장담하오.”

“그것…참, 대단한 능력이군.”

“과분한 말씀이오.”

어… 그래, 과분하겠지.

그런 표정을, 찰나의 차이로 청유백은 거죽 뒤로 감추는 데 성공했다.

어이없는 일이기는 해도, 청유백은 일단은 그의 말을 믿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황가의 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황가는 근본적으로 마교 내에서도 이질적인, 장사치의 집단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몸을 지킬 무공 정도는 배우지만, 근간이 그렇다는 소리다.

‘그렇기에 확실한 근거가 없는 말은 하지 않지.’

장사치는 신용이 생명이니.

거짓말을 하려 한다 해도, 진실을 왜곡하여 말하지는 않는다.

일부러 감추거나, 무언가를 빼놓고 말하는 정도에 그친다.

저만치도 당당히 말하는 일이라면, 사실이라 봐도 좋으리라.

‘…일단은 말이지.’

청유백은 황돈을 뒤로하고 공동을 돌아보았다.

열흘이 흘렀다.

백월검을 정련하는 데에 쓴 시간이 이레라는 소리다.

남은 시간은 스무날.

넉넉히 잡는다면 열아흐레.

정말 만약의 상황을 고려한다고 해도, 보름의 시간이 있다.

천화는 그리도 철저하게 시간을 가늠하려 하는 청유백이 기이한지 주저 없이 물었다.

[남은 시간을 재서 무에 쓸 생각이냐? 검이 완벽하지는 않으나 쓰기에 문제는 없을 터. 곧장 나가면 되지 않더냐.]

‘안 나갈 건데?’

[음?]

‘최대한 여기 있을 수 있는 만큼 머무를 거다.’

청유백의 말은 언뜻 보기에 미친 사람이나 지껄일 발상이었다.

귀기가 끊임없이 넘쳐흐르는 이 동굴.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 몸에 오한이 들고, 발걸음을 내딛는 것에 공포가 새겨지는 공간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하룻밤만 이곳에서 보낸다고 해도 광인이 되어 뛰쳐나올 수도 있으리라.

굳이 서른 날을 주었음에도, 이레도 되지 않는 시간에 이 공동이 텅 비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조금의 무리를 해서라도 이 동굴을 빠져나가 휴양하는 것이 이득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만큼 이 동굴의 귀기는 치명적이었다.

물론.

청유백을 제외하고 말이다.

[확실히, 네 몸이라면 무리는 없겠구나. 아니, 오히려 좋은 생각이다.]

독을 약으로 받고, 귀기를 용기로 듣는 청유백의 구마지체.

아무리 몸을 혹사해도 피로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힘이 샘솟는다.

마기를 마구 남발한다 해도 곧장 다시 차오를 것이며, 마기를 연공하기에도 이만큼 좋은 환경이 드무리라.

게다가, 곧장 나간다면 천마지회가 곧바로 시작될 터.

청유백이 이 동굴에 머무르는 동안, 그토록 찾아 헤매던 ‘강해지는 시간’을 확보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셈이었다.

[하지만 변수가 있느니라. 저 아이는 어쩔 셈이냐?]

천화가 가리킨 것은 황돈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가 기어 나온 유문(酉門), 닭의 문이 문제다.

이 복마동에 머무르는 것은 좋지만, 그 사이에 황돈이 유문을 돌파하고 나가 버리면 말짱 헛수고다.

진문도 아니고 유문의 보상이라 봐야 얼마나 크겠냐마는, 그래도 영약을 포기하는 것은 심히 아까웠다.

아무리 이곳에서의 보름이라 해도 영약 하나만 못한 것은 사실일 테니까.

지금에야 도전했다가 깨지고 쓰러져 있었다지만, 언제 돌파할 방법을 생각해 낼지 모르는 일.

‘지금부터 생각해 봐야지.’

저런 것도 아이로 쳐주는 천화의 아량(?)에 감탄하며 청유백은 황돈에게 다가갔다.

한순간 떠오르는 방법은 여럿 있었다.

가령 보름 동안 감금해서 나가지 못하게 만든다거나, 훈혈을 점하고 기절시켜 보름 후에 풀어준다거나, 생명의 은인이랍시고 보름만 기다려 달라고 호소한다거나….

하지만 청유백이 그 많은 방법들 중 하나를 택하기도 전에, 황돈이 고개를 조아리며 선수를 쳤다.

“귀인, 염치없지만 한 가지 부탁을 더 해도 되겠소?”

청유백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부탁이 먼저다’라 말하려 했으나, 워낙 생각이 많았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뭐 얼마나 큰 부탁이겠나 싶어, 청유백은 대충 고개를 까딱였다.

“뭐지?”

“유문을… 제게 양보해 주시오.”

호오, 요즘 돼지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우는군.

청유백은 이번에야말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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