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천하의 명검이면 뭐 하나 (5)
백월(白月).
몹시 단순하면서도 한스러운 그 검의 이름은, 청유백의 뇌리에 가장 강하게 각인되어 있는 검 중 하나였다.
백 년 전, 호적수였던 무신의 검.
자신의 검, 진천(振天)을 제외한다면, 청유백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검이리라.
백 년 전에 마교의 영역에서 동귀어진한 것이 마지막 기억이니 이 검이 마교의 검묘에 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특이하지만 ‘그렇구나’ 하고 한 번 보고 넘어가면 전부인, 그런 검이 될 수도 있었다.
굳이 이 검을 뽑을 이유가,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야 검묘에 있던 무기들은 전부 최고의 대장장이가 자신의 혼을 불어넣어 만든 역작들이다.
전부 보검이며 신검이라 불러도 모자람이 없는 것들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청유백이 그 숱한 보검들을 마다하고 이 백월검을 뽑아 든 이유는 단순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내가 살면서 남을 부러워한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없다.
그리 단언할 수 있다.
일흔여섯 번의 삶 전부, 탐나는 것이 있으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으니.
패도천마에게 남을 부러워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탐나는 것이 생기는 것도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헌데.
이 검, 단 하나만큼은 달랐다.
수십 번, 수백 번, 수천 번을 부딪쳤던가.
아니, 이 검과 칼등을 맞댄 횟수는 이미 숫자로 세기에는 무의미하다.
그렇기에 청유백은 이 검의 가치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무신 놈이 얼마나, 수 갑자, 수십 갑자의 내공을 쏟아 부어 검에 담아도 굳건히 버텨내던 그 칼날!
결코 부러지지도, 무뎌지지도 않던 그 지고의 칼날.
패도천마가 무신을 부러워했던 유일한 물건이 바로 이 백월검이었다.
‘진천검도 뒤떨어지지는 않지만, 역시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지.’
한 번쯤 무신 놈을 죽이고, 이 검을 제 손에 쥐어 보는 것을 꿈꿨더랬다.
물론, 지금은 약간의 하자가 있었지만 말이다.
‘자, 시작해볼까.’
청유백은 백월검의 칼날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흉측하게 녹슬어 그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된 칼날은 이제 어떤 가치도 없어 보였으나, 이제 곧 제 빛을 다시 찾게 될 터였다.
‘필요한 것은 두 가지.’
백월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선기를 제거하는 것.
그리고, 그 자리를 자신의 마기로 다시 채우는 것.
말로는 쉽지만, 실질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검에 담긴 선기는 이미 수백 년 동안 검과 하나가 되어 녹아들어 있었고, 녹아든 선기는 검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으니까.
시간이 별로 지나지 않은 물건이라면 그저 선기를 끌어당기듯 흡수하여 벗겨내면 그만일 터다.
하지만, 이 검의 선기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선기를 끌어당기는 것 외에 껍데기인 검을 밀어내는 것 또한 동시에 필요하다.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검의 주인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보통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쉽게도 말하지만, 하나가 된 물체에서 특정한 기운만을 감지하여 뽑아낼 수 있는 고수가 둘 필요하다는 소리니까.
그러한 경지에 오른 무인은 중원과 세외를 포함해도 몇 없다.
일류, 절정을 넘어서 천하제일을 논하는 수준은 되어야 그런 기예를 부릴 수 있을 터.
마교로 따진다면 천마.
무림맹으로 따지자면 무림맹주.
사파에서 따진다면 야황(夜皇)정도가 그러한 실력자다.
즉, 한 세력의 수장이 둘 이상은 모여야 어거지로 작업할 수 있는 방법이니, 이것을 불가능이라 말해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해서.
그러한 자가 둘 이상 있다면, 능히 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준비됐나?’
[빌어먹을, 왜 그리 당연하게 본녀를 부려먹는 게냐? 무어 그리 당당한 게야?]
‘귀여운 후손 밥상 차려준다고 생각해.’
[퍽이나! 양심이 있기는 하냐?!]
‘엿새쯤 전에 국밥에 말아 먹었다.’
천화는 계속해서 투덜거렸지만, 능숙하게 청유백의 기맥을 사용하여 마기를 조정하기 시작했다.
천화는 천마혼, 즉 전대 천마의 일인.
청유백이 할 수 있는 일의 대부분은 천화 또한 할 수 있었다.
이번 일 또한 그러했다.
‘시작한다.’
청유백이 끌어내는 것은 검의 내부를 채우는 선기였다.
그리고 천화가 붙잡는 것은 검의 외부를 이루는 칼날이었다.
본래 하나였어야 할 두 요소의 연결을 강제로 끊어내는 과정.
그것이 먼저였다.
전신의 마기를 끌어올려 검의 선기를 강제로 끌어당겼다.
마치 마중물처럼, 선기와 맞닿은 마기는 반발하여 선기를 검 바깥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되는 일은 아니었다.
검과 하나 되어 녹아 있는 것을 억지로 뜯어내는 과정이니.
그 과정 하나하나를 수행하는 동안 극한의 정신력을 필요로 했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청유백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온몸에 흐르는 고양감과 전능감 덕에 피로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이 없을 뿐, 한계에 이른 몸은 머지않아 버티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만둘 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분산시키는 순간, 지금껏 진행했던 일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고 선기는 다시금 검에 자리 잡을 것이었다.
한 번 뽑아 든 칼은, 그야말로 끝장을 보아야만 한다.
다시금 시간이 흘렀다.
손끝과 맞닿은 칼날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청유백의 찌푸린 미간과 비 오듯 흐르는 식은땀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짐작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청유백의 땀이 구슬져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툭.
한 방울.
─툭.
두 방울.
─투툭.
그리고 세 방울이 바닥에 닿아 바스러지는 그 순간.
“됐다!”
칼날의 아주 작은 일부, 정말 조그마한 조각에서 터질 듯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한순간, 찰나도 되지 않는 순간 반짝이고 사라진 기운.
하지만 그것으로, 검에 가득 차 조금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았던 선기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칼날에 깊게 녹아들어 있던 기운의 선기에 빈자리가 생겨난 것이다.
물론, 아직 끝은 아니었다.
이 검의 십 할이 선기로 차 있었다면, 이제는 구 할 구 푼 구 리가 선기로 차 있는 것으로 변했을 뿐이니까.
조금의 균열이 생겼다고 해도, 그 티 없는 맑음은 바깥의 무언가를 거부했다.
지금의 상태로도, 마기를 운용한 검기는 사용할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남은 과정은 지금까지의 일에 비하면 몹시 단순했다.
천화는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청유백에게 떠넘기듯 말했다.
[남은 것은 네가 할 수 있겠지?]
‘물론.’
청유백은 한 차례 공정이 끝난 검을 집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저 멀리 어둠 속의 뱀은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고, 근처의 그 무언가에도 변화는 없다.
배가 조금 고픈 것 같기는 했지만, 여전히 충만한 귀기가 굶주림을 잊게 해 주었다.
지금 이 순간, 청유백은 손에 든 검 하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순수한 선기. 하지만 이제는 순수하지 않지.’
십 할과 구 할 구 푼 구 리는 다르다.
아주 작은, 티끌만 한 조각이라고 하더라도.
조금의 이물질이 있다는 소리니까.
티 없는 맑음.
완벽한 순수함.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백지.
듣기에는 좋은 말이다.
아주 맑고, 청아하고, 세상에서 이만한 선기를 찾는 것은 더없이 어려우리라.
또한, 이 검이 올바른 주인을 찾는 것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티 없는 맑음이라는 것은.
달리 말한다면, 그 어떤 것에도 더럽혀지기 쉽다는 말과도 같다.
‘우선 일 할.’
─고오오오오!
청유백의 손에서 흉측한 마기가 피어올랐다.
환마단을 얻고 취한 30년의 마기와 구마지체를 취하며 얻은 10년의 마기.
그 일 할이 손에서부터 피어올라 검 전체를 감싸갔다.
검에 깃든 선기가 반발하여 마기를 흩어버리는 듯했지만, 검신에 생겨난 아주 작은 기운의 틈.
그 틈 사이로 마기가 흘러 들어가고, 결국 순수하기만 했던 선기는 마기에 잠식되어 갔다.
‘완벽함’이 아주 작은 흠이 생기는 순간, 그것은 이제 완벽하지 않게 된다.
구 할 구 푼의 완벽함 따위는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한다.
그리고 그 가치만큼, 마기에 대한 방비 또한 나약했다.
새하얀 백지에 작은 먹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먹 한 방울은, 그것을 막을 새도 없이 백지 전체를 물들여 나갔다.
이 할, 삼 할, 오 할….
청유백의 마기 전체를 끌어올려 검을 틀어쥐었을 때에는.
본래의 새하얌 따위,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이후였다.
“흐읍!”
─콰드득!
한 손으로는 검병을, 한 손으로는 검신을 붙잡았다.
이제 더 이상 선기라 부를 수 없는 기운이 담긴 검에 마기가 가득 담겼고, 계속해서 주입되는 마기에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검은 광채가 검을 휘감았다.
흉하게 녹슬었던 칼날이 진동하고, 그 진동으로부터 녹슬었던 겉표면이 서서히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청유백이 칼날의 겉을 뜯어내듯 훑었고, 녹슨 표면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성공이다.”
찬란했던 옛 온전한 칼날.
그것이 품은 기운은 이전과 전혀 달랐고, 아직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상태였으나─
분명히, 이제 그것은 충분히 명검이라 부를 수 있는 물건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직 모자라군.’
검이 머금은 기운이 이제 선기는 아니었지만, 완벽한 마기라 하기에도 모자람이 있었다.
일 갑자에도 미치지 못하는 마기로는 고작 이것이 한계일 테다.
하지만 그 또한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
청유백은 팔꿈치로 검의 표면을 훑어 조금 남아 있는 녹의 파편을 닦아내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반사할 빛이 없을 터인데도 한순간 검신이 반짝이는 것만 같은 감각을 느꼈다.
‘…….’
귀기로 인한 전능감의 부작용일까.
아니면 몸을 혹사한 탓에 느끼는 환각일까.
청유백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혹시나.
실로, 혹시나.
이 검이 있다면, 저놈을 벨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청유백은 어둠 너머의 흑사를 바라보았다.
똬리를 튼 자리의 뒤에는 철저하게 사슬로 봉인된 문이 보였다.
어쩌면, 이 검이라면.
“…….”
‘…아니, 만용이다.’
하지만 곧 이성은 돌아왔다.
목숨을 건 도박의 앞에서 도망치지 않을 자신은 있지만, 이건 무조건 잃는 도박이다.
목숨을 거는 것은 백이십 할, 자신이 이기는 경우뿐.
무기가 천하의 명검이면 뭐하나?
이 몸은 저놈에게 한 번 물리는 것만으로 갈가리 찢겨나갈 텐데.
지금 저것을 쓰러뜨리고 문을 여는 것은 어떤 수를 쓰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청유백은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며칠은 훌쩍 지났을 수도 있다.
허기나 신체의 상태로 가늠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몸이 허해졌다는 것 정도는 직감적으로 느꼈지만, 귀기 탓에 공복감도 피로도 느끼고 있지 않았다.
‘뭐, 올라가서 물어보면 되겠지.’
만약 서른 날이 전부 지났으면 어찌해야 하나─라는 고민이 잠시 들었지만, 몸의 살이 그리 많이 빠지지는 않았다.
그토록 많은 시간이 흐르지는 않았으리라.
“…허.”
하지만, 야명주로 가득 찬 공동에 발을 들인 순간.
자신의 생각보다도, 꽤나 긴 시간이 지나고 말았다는 사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열두 개의 문 중, 자신이 나온 진문과 유(酉, 닭)문을 제외한 모든 문자가 갈라져 있었으니.
[생각보다도 늦은 것 같구나.]
“쯧….”
주변에 사람의 기척은 없다.
자문, 쥐의 문도 갈라져 있는 것으로 보아 백소하 또한 어찌어찌 돌파하고 나간 듯 보였다.
‘서른 날이 지나지 않은 이상, 시간이 얼마나 지났던지 그건 별로 상관없지만….’
아직 문이 하나 남아 있다.
저 유문으로 나가면 적당한 보상을 얻으며 끝낼 수 있으리라.
‘하지만 역시 선택지가 줄어든 건 아쉽군.’
십이지 중 열째, 유.
즉 닭이다.
자문의 쥐처럼 수백 수천 마리가 들어차 있지 않은 다음에야, 고작 닭대가리가 얼마나 강하겠는가.
이왕이면 강한 것을 잡고 좋은 보상을 얻으려 한 청유백으로서는, 그야말로 아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청유백은 보따리에 들었던 육포를 질겅질겅 씹어대며 유문으로 다가갔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 이상, 이곳에서 더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다.
보상이 어찌 되었든 간에 서른 날이 전부 지나면 밥도 죽도 되지 않고, 전부 허사로 돌아갈 뿐이었다.
─쿠구구구궁!
육중한 소리와 함께 유의 석문이 밀려났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석문이 밀려나 어둠을 야명주의 빛으로 채우자마자, 청유백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공동에 다다르지 못하고 석문의 바로 앞에 쓰러져 있는 무언가.
“이건 뭐야?”
황금색….
…돼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