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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44화 (44/200)

제44화. 천하의 명검이면 뭐 하나 (4)

‘젠장, 왜 하필 나야?’

녹지지는 화가 잔뜩 난 상태였다.

빌어 처먹을, 빌어 처먹을.

빌어 처먹을!!

문의 시험을 진행하는 동안 부상자가 많이 나왔다고?

좋다. 그렇겠지!

한 달이나 시간을 처줬는데도, 그런 음산한 데 있기 싫다고 고작 사흘이 지나기 전에 억지로 억지로 기어 나오려 하면 당연히 많이 다치겠지!

아니, 좋다!

뭐 어떤가?

일단 죽지는 않았으니, 마교 전체의 입장에서는 그것만으로도 큰 호재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래, 백만 보쯤 양보해서, 그들을 치료하는 데에 녹가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까지도 좋다.

녹가의 의술은 마교 전체에서 비견할 자가 없고, 그 실력을 인정해준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래! 하지만!

‘왜 그게 하필 나냐고!’

녹지지 자신도 분명 천마지회의 참가자건만, 대체 왜 자신만 이런 꼴이란 말인가.

‘백급에 소목, 감초….’

하지만 그리 화를 내면서도 손은 부지런히 약재를 찾아 담았다.

화를 내는 건 내더라도, 할 일을 하지 않으면 녹가의 명예에 먹칠하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하, 누님이 하면 훨씬 빨리 끝날 일을, 굳이….’

녹지지가 맡은 일은 천마지회의 참가자 중 한 명이 먹을 탕약을 지어내는 것이었다.

이 사람의 경우에는 외상보다도 내상을 극심하게 입어 그 회복을 보조할 탕약이 필요했다.

녹지지는 침상에 누운 그자의 안색을 보며 제 처지에 대해 자조했다.

‘아니, 그래도 이자보다는 내 처지가 나은가.’

“끄으….”

겉으로 보기에는 이렇다 할 외상은 없다.

하지만 피부 위로 도드라지는 붉고 푸른 혈관이 결코 그의 상태가 좋지만은 않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었다.

뭐, 일단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으니 뒤지든지 살든지 하는 것은 본인의 재량이지만 말이다.

“후우.”

약이 달여지고, 다음 처방을 할 때까지는 나름의 시간이 있다.

약 달이는 것쯤은 그냥 하인을 부려도 될 일이니, 지금부터는 조금이나마 주어지는 자유시간.

녹지지는 머리를 감싸던 흰 두건을 벗어 던지고는 밖으로 나갔다.

녹운각의 5층은 조용했다.

복마동에서 빠져나온 천마지회의 다른 참가자들도 이 녹운각의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나, 5층에서 전담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상태가 위중한 자는 저자밖에 없었다.

어둑한 5층의 복도에서 불이 밝혀진 방은 단 둘.

하나는 녹지지 자신의 것이었고, 하나는 복도 가장 안쪽의 끝 방이었다.

녹지지는 망설임 없이 방으로 다가가 기척을 내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방 안쪽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녹지지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걸음을 옮겼다.

애초에 이런 형식적인 절차를 거칠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기척을 내는 것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열어젖히면 인사 대신 쌍욕부터 날아올 것을 익히 알기 때문이었다.

“흐음….”

녹지연은 문에서 등을 돌린 채, 무엇인지 모를 액체를 달이며 손을 바쁘게 놀리고 있었다.

녹지연은 등을 돌려 녹지지를 바라보는 대신, 무언가 푸른 꽃의 즙을 냄비에 짜 넣으며 입을 열었다.

“상태는 어때?”

“나아지고는 있어. 뭐, 결국은 그 사람 나름이지만.”

내상도 내상 나름이다.

약으로 치료할 수 있는 종류가 있고, 없는 종류의 것이 있다.

그리고 이번의 경우는, 명백한 후자였다.

“청률이라고 했던가?”

다른 육대가의 후계들처럼, 대다수가 마공인 가문의 비전무공을 익힌 것이 아니라, 선기를 띈 태청심법을 익힌 자.

몸에 가득한 선기가 귀무곡에 가득한 귀기에 잠식되어 몸에 악영향을 미친 것이었다.

물론 의원의 실력에 따라 그 차도가 다를 수는 있을 테다.

가령, 녹지연같은 의원 말이다.

“누님이 했으면 지금쯤 나았을 수도 있잖아. 굳이 내가 했어야 할 이유가 있어?”

“있지.”

“뭔데?”

“내가 귀찮잖아.”

“이런 씹…….”

“나쁜 말.”

녹지연은 녹지지의 입을 찰싹 때리고는, 녹지지가 짜증난다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자 어쩔 수 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내 토끼를 죽인 게 청률이잖아. 혹시 알아? 내가 우리 토끼의 원수를 갚으려고 독이라도 탈지?”

토끼? 토끼라고?

녹지지는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잠깐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청률이 돌파하고 나온 것이 바로 묘문(卯門), 토끼를 잡고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웃기시네. 처음부터 끝까지 도구 취급이었으면서.”

“애초에 그러려고 기른 거였으니.”

녹지연은 감출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저 어깨를 으쓱이며 하던 일에 열중했다.

“뭐, 이해는 해. 그 몸으로 하루라도 빨리 나오려면 만만한 묘문(卯門)이 최선이었겠지. 다른 보상을 포기하고서라도 말이야.”

다른 육대가의 자제들─녹지지와 녹지연을 포함하여─은 마공을 수련했든, 다른 무언가를 익혔든 간에 선공을 익힌 자는 없었다.

다른 이에게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그 안에서 지내며 도전을 반복할 기회가 있지만, 청률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기분이 나쁜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 한 순간 한 순간이 숨이 옥죄어오는 감각이었을 터.

‘뭐, 토끼라도 잡은 걸 대단하다고 해야 하나.’

녹지지는 그런 상념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 버리고는 녹지연을 찾은 목적을 떠올렸다.

토끼니, 생쥐니 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천마지회의 참가들 중 누구도, 그 영물들의 일부를 녹가가 인위적으로 길러낸 짐승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단 하나.

황가가 조달해 온 것도, 녹가가 길러낸 것도 아닌─정말 진짜배기 영물이 하나 있었다.

“누님, 첫 번째 시험에서 한 명은 떨어지겠지?”

“…아마 그렇겠지. 그건 잡으라고 만들어 둔 게 아니니까.”

잡기는커녕, 어둠 속에서 그것과 눈이 마주치기만 하더라도 공포심에 몸을 움직이지 못하리라.

녹지연은 계속해서 손을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적철진과 청명휘가 이미 나왔으니, 딱히 그걸 잡을만한 인재도 없을 테지.”

“누가 떨어질 거라고 생각해?”

“글쎄….”

복마동 안의 공간은 철저히 지니고 있는 신체능력만을 사용할 수 있는 구조다.

물론, 그 신체능력에 두뇌가 포함되기는 하겠지만, 그리 큰 효용은 없으리라.

“역시 무력으로 생각하면 백가의 백소하, 아니면 황가의 황돈 녀석이겠지.”

“청유백이 아니라?”

“뭐?”

“청유백 말이야. 왜 그놈을 내버려 두고 그 둘이 나오는 거야?”

청가의 쓰레기 공자.

감히 육대가의 사람을 쓰레기라 일컫는 것이 얼마나 큰 중죄인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도 그의 별칭은 그것으로 굳어져 있다.

굳이 실력을 의심해 보지 않아도, 예상이 가는 것이다.

누구라도 그리 평가할 것이었다.

그를 직접 만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건… 글쎄.”

그리고 녹지연은,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그의 모습을 꽤 잘 안다고 자신하는 편이었다.

녹지연은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그의 진면목에 대해서는 녹지연조차도 예측이 가지 않았지만, 최소한 첫 시험에서 떨어질 만한 남자는 아니리라.

오히려─

“그래, 혹시 모르지. 오히려 우리 녹가 인원 셋을 뺀 나머지 열둘. 전부 통과할 수도 있잖아?”

“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녹지지는 그런 표정이었다.

첫 번째 시험은 녹가 인원을 사실상 제외하고 치러지는 시험이었다.

때문에 준비된 문도 열두 개.

이유라 함은, 당연히 ‘그들이 기른 동물이 주인을 물리가 없으니까’다.

때문에 애당초 녹가 인원은 문을 열지 않아도 되었고, 문과 복마동의 인원수는 정확히 맞춰지게 되었다.

헌데, 그런 상황에서 열두 명이 열두 개의 문을 전부 열고 나온다는 소리는 곧.

“진문을 누군가 열 거라고?”

용(龍)을, 누군가가 잡아야만 한다는 소리였다.

녹지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뚱딴지같은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소리지. 혹시 모르잖아?”

“…싱겁긴.”

정말 만에 하나, 혹시.

그런 말이야 누가 못할까.

하지만 세상 대부분의 기대는 당연하다는 듯 배신당하고, 이변 따위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솔직히 녹지연으로서는, 이변이 없는 쪽이 나았다.

그녀가 그에게 ‘나서지 말라’라고 권고했듯, 청유백이 여전히 나약하다고 소문이 퍼져 있는 것이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청유백은 만만한 문 하나를 골라 돌파하고, 다른 머저리 하나가 불합하는 것.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그것이 가장 옳은 수다.

‘하지만, 그래.’

자신만 알고 있는 사실을, 남이 폄훼하며 무시한다면 은연중에 응원하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기대심 정도는, 조금은 가져 보아도 좋을 것이었다.

손익을 배제하고서라도, 다른 이들이 어떠한 반응을 보일지는 꽤나 궁금한 주제였으니.

‘혹시 알아?’

그 사람이라면, 정말로 용이라도 잡을지도 모르지.

녹지연은 여전히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그리 생각했다.

* * *

그리고 그 시각, 청유백.

그게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청유백은 눈앞의 거대한 물체를 올려다보며,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저걸 잡으라고 둔 거라고?’

[대단한 영물이로다.]

용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을 뱀이라 부르기에는 분명한 실례가 될 것이다.

허면 달리 이것을 무어라 부를까.

뱀이되, 뱀이 아니고, 아직 용이 되지 못하였으니.

아직 제 여의주를 찾지 못한 이무기라 부름에 손색이 없으리라.

그것이, 용(龍).

진문의 주인을 처음 보았을 때의, 청유백의 감상이었다.

─일각 전.

청유백은 어둠 속을 걸어 가장 아래의 공동에 다다랐다.

이미 몇 명이나 청유백과 같이, ‘뭐 얼마나 대단하겠어.’ 따위의 생각을 했었는지, 수많은 흔적이 남아 있었기에 길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아래로, 더욱 아래로.

한 발짝을 내디딜 때마다 귀기가 짙어졌다.

누군가에게는 끔찍하기 그지없는 기운이겠지만, 청유백에게는 깊은 숲속의 맑은 공기와 다를 바 없는 환경.

‘지금이라면 뭐가 나와도 이길 수 있을 것 같군.’

물론 그것이 그저 기분에 그친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조금 정도는 그 오만을 즐겨도 나쁠 것 없으리라.

천화는 탄식하며 물었다.

[용이 두렵지는 않더냐?]

용?

용이라.

청유백은 잠깐 고민했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생을 반복하며 온갖 것을 보았다고 생각하지만, 솔직히 용을 본 적은 없다.

머리 둘 달린 쌍두각사(雙頭角蛇)까지는 봤는데….

‘알지도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 봐야 무엇에 쓰겠나.’

청유백은 태연히 대꾸했다.

어쩌면, 이 전능감 때문에 나온 대답일지도 모른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기껏해야 뱀, 지렁이 새끼겠지. 으레 과장이 심한 것들이니 말이야.”

[호오.]

“뱀 따위, 어차피 칼질 한 방이면 끝난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

[호오….]

여기서 다시 한번 유명한 격언을 되짚고 갈 필요가 있어 보인다.

청유백도 애용하는, 바로 그 말말이다.

‘…….’

[호오….]

청유백이 거대한 공동에 첫발을 내디디고, 처음으로 그 동공의 크기를 시야에 담는 그 순간.

그리고 그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듯 보이는, 거대한 흑색 뱀의 꼬리를 발견한 순간─

청유백이 그녀가 부디 입 좀 다물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그 순간, 바로 떠올려진 그 말.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느니라. 그렇지?]

처맞기 전까지는 말이야.

능글거리는 웃음과 함께 그리 약 올리는 천화에게 청유백은 짜증스레 대꾸했다.

‘아직 안 맞았다.’

[그래? 이제 한 방에 처리할 자신은 있고?]

‘…….’

[지렁이 새끼라며?]

‘…닥쳐.’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지금, 일각 후.

청유백은 계속 ‘사내가 한 입으로 두말을 하는구나, 비겁한 놈!’ 따위의 말을 속삭여대고 있는 천화의 비꼼을 무시하며, 본래 하려던 일이나 하기로 했다.

그래, 애초에 진문을 찾은 이유가 무엇이던가.

저 용새끼(진)를 잡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잠이 깊게 든 것 같으니, 자극하지 않으면 깨지 않겠지.’

청유백은 대충 쥐고 있던 백월검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혹시 모르니, 청유백은 공동 안에 발을 들이지는 않고 그 직전에 멈춰 앉았다.

잠깐 기세가 죽기는 했지만, 온몸을 휘감는 전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성적으로 ‘지금은 못 한다’라는 생각으로 붙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당장에 저 뱀에게 달려들었을지도 모를 정도로 힘이 넘쳐흘렀다.

아니, 혹시 모른다.

이 검을 멀쩡히 만든다면….

‘아니, 빌어먹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느샌가 생각조차도 무모하게 바뀌어 가고 있다.

분근연혼의 고통조차 잊을 정도의 전능감은 확실히 훌륭하지만, 사고조차 마비되는 것은 좋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백월검을 자신이 쓸 수 있는 검으로 바꿔내는 것.

청유백은 제 목표를 명확하게 확정지으며, 녹슨 검의 검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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