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천하의 명검이면 뭐 하나 (3)
“일곱? 그걸로 괜찮겠나?”
“우문.”
긴 설명도, 경고도 필요 없다.
상대방을 깔보며 방심하는 시답잖은 시간 따위는 낭비일 뿐.
“간다.”
신문호는 마치 감정이 없는 인형처럼, 청유백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하나.”
─콰앙!
‘큭.’
묵직하다.
신문호의 검격에 청유백은 공중에 붕 떠 꺾여서 밀려났다.
그리고 곧이어 날아 들어오는 제 이격.
─콰앙!!
전혀 다른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에 청유백은 다시금 속절없이 밀려났다.
[큰소리친 것에 비해서는, 너무 밀리는 것 아니더냐?]
‘허세지. 저걸 어떻게 이겨.’
[뭬야?]
당당하다 못해 당연하기까지 한 청유백의 궤변에, 천화는 제 몸이 있었다면 분명히 뒷목을 잡았으리라 확신했다.
청유백은 날아드는 검을 재차 막아내며 상황을 파악했다.
‘저놈은 높으신 분들이 시켜서 여기 있는 거다. 굳이 사람을 패 죽일 열정 따위는 없어.’
청유백은 애초에 이길 생각이 없었다.
이자는 못해도 마두 급의 고수.
다른 육대가의 자제들이 꺾지 못하고 이리 멀쩡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그 무위는 충분히 입증된 셈이다.
아무리 그래도 지난번의 만면귀보다야 못하겠지만 말이다.
[정말 너를 죽이고자 한다면?]
‘글쎄.’
물론, 그리되었다면 상당히 곤란해졌을 것이다.
멀쩡한 무기 하나 없는 지금, 만만한 상대도 아니고 완연한 실력의 차이가 있는 고수를 정공법으로 이길 방법은 전무하니까.
‘하지만 그랬다면 처음부터 공격했겠지.’
이성 없는 짐승들과는 다르다.
만약 그럴 생각이 있었다면, 이 공동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공격했을 터다.
그는 굳이 눈치를 보며 기회를 보아야 할 약자가 아니다.
언제나 찍어 누르기만 하면 되는 강자의 위치.
최소한 이 신문의 앞에서는 그러할 터였다.
“크윽!”
─콰앙!!
계속해서 두드려지는 검의 충격에 백월검을 감싼 모포가 찢겨져 나갔다.
녹슨 검의 검신과 그나마 아직은 멀쩡한, 미려한 검병이 드러났다.
검은 도저히 무언가를 벨 수 있는 상태로는 보이지 않았다.
“……!”
신문호는 그것을 보고는 흥이 떨어지는지, 조금 검에서 힘을 빼는 듯 보였다.
하긴, 이런 허접쓰레기 같은 무기를 지닌 자와 싸우는 것이 즐겁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그에게는 결국 임무에 불과한지, 아직 합이 남았다는 것을 강조하듯 강하게 밀고 들어왔다.
“다섯.”
─콰아앙!!
“여섯.”
─콰앙!!
검격 한 번 한 번을 섞을 때마다 청유백의 몸이 꺾여 밀려났다.
한 번, 한 번의 검격이 더해질 때마다 더욱 빠르고 강하게 휘몰아쳐 왔다.
먼저 한 수 앞을 읽고 검격을 막아낸다 해도, 검에 담기는 내공과 신체 능력의 차이는 기술로 메꿔지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이 더욱 강해지는 힘과 속도는, 그가 아직 전력을 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
“크윽!”
청유백의 몸이 넉 장 정도 밀려나고, 그 밀려난 흔적이 다시금 바닥에 새겨졌다.
“…일곱.”
일곱 합이 끝나자마자 신문호는 지금까지의 적대감이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양 살기를 거두었다.
그리고 살기 대신 입을 열었다.
“대답은, 충분하겠지.”
“대답이라니?”
신문호는 청유백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검극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청유백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검극을 따라 땅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인위적으로 끌린 흔적이 무언가의 모양을 형성하고 있었다.
조금은 투박하고, 조금은 비틀려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것은 분명한 하나의 문자였다.
진(辰).
용(龍)을 뜻하는 십이지의 다섯 번째 문자.
청유백과 신문호의 전투에서 생겨난 흔적이 그 문자를 그려내고 있었다.
[진. 진문. 용의 문이구나. 실로 그곳에 무언가 있기는 한 모양이야.]
적철진과 청명휘조차 넘지 않고 그저 우회한 무언가가 있는 장소.
그 녀석이 이 복마동에서 가장 강한 영물이라면, 그 장소가 귀기가 가장 짙은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놈을 잡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군.’
[허, 용을 말이더냐?]
‘용이 있는지, 이무기가 있는지는 가서 눈으로 보아야 알 일이지.’
애초에 보상 때문에라도 잡을 생각이었다.
마교의 최상급 영약.
신마단을 취한다면 대번에 일 갑자의 내공을 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된다면, 두 번째 검이 아니라 세 번째 검을 뽑아 들 수도 있을 테다.
신문호는 다시금 박도를 청유백에게로 향하며 축객령을 내렸다.
“이제 떠나라. 아니면, 도전을 바라는가?”
그러나 청유백은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조금 무언가를 고민한 뒤, 다른 질문을 던졌다.
“진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나?”
“열여섯 합.”
“됐다. 그만두지.”
청유백은 그 말을 듣자마자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천화가 의아한 듯 물었다.
[답지 않게 포기가 빠르구나?]
‘이미 답을 말해주지 않았나.’
신문호가 제시하는 합의 숫자는 곧, 땅에 글자를 새기는 획수의 숫자다.
일곱 획에 진(辰).
그렇다면 열여섯 획으로 신문호가 답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열여섯 획에 용(龍).
‘뻔하디뻔하고, 진위 여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대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싶지는 않군.’
그리고 무엇보다─
‘직접 가서 보면 되지, 굳이?’
[아하.]
너무나도 현실적인 대책이 있었다.
* * *
그 시각, 백소하는 먼저 나간 적영을 뒤쫓아 중앙 공동으로 돌아왔다.
‘몇 명이 보이지 않는군.’
아까까지만 해도 제 무기를 연마하거나 수련하는 사람들 중 몇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몇 석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면 문에 도전하러 간 것일지도 모른다.
‘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백소하는 구석에 앉아 몸의 상처를 살폈다.
고작 쥐 이빨에 뜯긴 상처 정도야 큰 치명상은 아니었지만, 고작 그것을 돌보지 않아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백소하가 옷자락을 뜯어 대충이나마 조치를 취할 무렵, 적영이 다가와 물었다.
“몸은 괜찮아?”
“보이시는 대로, 안 괜찮습니다.”
“엄살은.”
“아악!!”
가차 없이 후린 적영의 손바닥이 백소하의 등을 강타했다.
백소하는 허리를 활처럼 휘며 고통에 몸부림치고는, 비명인지 괴성인지 모를 소리를 내질렀다.
“왜 물어봤습니까?! 네놈 일이나 하러 가십쇼! 빨리 해치우고 꺼지기나 하란 말입니다!”
“못 하는 말이 없어 아주.”
적영과 백소하는 몇 번이고 옥신각신하다가, 적영이 건넨 금창약을 백소하가 받아들고 나서야 소란이 잦아들었다.
금창약을 환부에 바르면서도 이건 또 어디서 난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그냥 묵묵히 발랐다.
이 또한 어딘가의 보따리에 있었다 생각하면, 이상할 것은 없다.
‘아니, 아니지. 오히려 이상한가?’
백소하는 지금껏 문득문득 들어온 의문이 한순간에 뇌리를 스쳐가는 것을 느꼈다.
지나치게 편의주의적인 보따리와, 지나칠 정도로 대비되어 있지 않은 참가자들의 안전.
말도 안 되는 수의 영물….
하나하나는 ‘그럴 수도 있지’ 정도에 그쳤지만, 그 수많은 것이 조합되니 거대한 의문이 되었다.
“적영.”
“음?”
“이 동굴,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체 그 많은 영물이 어디서 왔단 말입니까? 쥐나 뱀은 그렇다 쳐도, 말이나 소 따위는….”
결코 동굴에 살 만한 동물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애초에 종을 불문하고, 저런 영물들이 이만치 모여 있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글쎄, 천마지회 때문에 일부러 마련한 거 아냐? 황가에서 돈을 좀 많이 쓴 모양이지.”
…정말 그것만으로 가능할까?
물론, 황가의 자본이 나선다면 웬만한 일은 전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저것들은 물론 평범한 동물은 아니지만, 진짜배기 영물(靈物)이라 부르기에는 모자란 것들이다.
천만금이 있다면, 구하지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 열두 개의 문을 채우는 동물 모두를.
나아가 그 수백 수천 마리의 쥐들이, 전부 돈으로 해결될 만한 숫자인가?
‘어떻게 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한두 마리면 모를까, 그리도 많은 숫자는 돈으로 해결될 만한 것이 아니다.
차라리 마교 내부에서 준비했다는 쪽이 더 현실성이 있었다.
‘만약 길러낸 것이라고 치면, 일단 우리 백가는 아니고, 묵가나 적가도 아닐 테니….’
…녹가.
그들의 이름이 자연히 떠올랐다.
백소하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확실히 기묘한 점이 있음을 알아챘다.
“그러고 보니 녹가의 사람이 보이지 않는군요. 그들은 어디 있습니까?”
“누구?”
“녹지연이라던가….”
누구를 묻냐고 특정하는 말에 백소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녹가의 후계 중 가장 강한 이는 그녀일 테니.
하지만, 이내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차.’
“망할, 그년 이야기 꺼내지 마!”
적영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더니, 더 없을 정도로 미간을 찌푸리며 백소하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빌어먹을, 힘하고는!
“그래요, 그녀가 어찌 되었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알겠다구요!”
애초에 문이 이미 여섯 개나 격파된 시점에서, 그녀는 이미 빠져나갔을 확률이 높다.
‘그녀라면 적철진과 청명휘에게도 뒤지지 않겠지.’
하지만 녹가의 다른 둘은 아니다.
그녀가 여기에 없는 것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지만, 다른 둘까지 전부 없는 것은 이상했다.
“그럼 녹지지와 녹지추는요?”
“몰라! 내 알 바야? 본 적 없어!”
그 성내는 와중에서도 대답은 꼬박꼬박 하는 것이, 참 그녀답다 말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 말이 거짓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적영보다도 빨리 이곳에 도착해서 빠져나갔다는 말인데?’
그런 게 가능한가?
녹지연이라면 몰라도 나머지 둘 전부가?
그들의 실력을 생각하면, 아직 이곳에 도달하지 못했을 리는 없다.
하지만, 아직 나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분명 무언가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증거도, 그것을 추궁할 사람도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백소하가 벽에 박힌 채 끙끙거리는 동안, 적영은 주변을 둘러보며 백소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사람?
아, 청유백 말인가.
백소하는 그녀가 그리 지칭할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청유백 말입니까? 그야 저 아래에 있지요. 뭔가 질문할 게 있던 모양이던데요.”
“뭐?! 아니, 목숨이 아깝지도 않아? 기껏 살려 줬더니!”
‘살려 주다’라는 말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본인들의 의견은 전혀 들어간 것 같지 않았지만서도.
아무튼 백소하는 그것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그자는….”
“무슨 소리야! 신문호는 마두라고! 마두! 마사급도 안 될 청유백이 무슨 싸움을 해!!”
백소하의 말이 채 끝맺어지기도 전에 적영은 성질 급하게 일어났다.
청유백도 최소한 마사급은 될 것이라고 변호하려 해 보았지만, 이미 발동이 걸린 적영에게는 전혀 듣지 않았다.
“안 되겠어, 구하러 가야…….”
─드드드드득!
적영이 자신의 도를 들고 일어나려는 찰나, 비동을 울리는 무거운 바위 소리가 들려왔다.
석문이 열림과 함께 들어온 것은 청유백이었다.
적영은 놀란 눈치로 다가가 물었다.
“뭐야 당신, 대답을 들은 거야?”
“글쎄…. 어떨는지.”
청유백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보통이라면 저것이 허세인지, 진심인지 간파할 수 있었을 터이나, 백소하로서도 그의 표정을 읽어낼 수 없었다.
적영도 마찬가지였다.
적영은 인상을 찌푸리고는, 조금 더 가능성이 높은 쪽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도망친 거구나? 뭐, 이해해. 어쩔 수 없었겠지. 나도 상당히 애먹었거든.”
신문호는 마두급의 강자.
아마도 지금 남아 있는 ‘문을 지키는 것들’ 중에서는 가장 강하다 보아도 무방할 것이었다.
고작 말이나 돼지 따위가 아무리 강해 봐야, 마두는 넘어설 수 없다.
‘나도 대답 한 번 듣겠다고 몇 번이나 다시 도전했었으니까.’
그래도 그는 사람인지라 손속에 자비가 있어, 싸울 의지가 없다면 돌려보내 주었다.
이번의 청유백도 분명 그리 빠져나온 것이겠지.
적영은 그리 받아들였다.
적영이 청유백에게도 금창약을 주려 품을 뒤적이는 사이, 청유백은 적영을 지나쳐 발걸음을 옮겼다.
“뭐야, 어디 가?”
“…….”
청유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한 발걸음 소리만이 울렸고, 그 발걸음 소리가 진(辰)의 문자 앞에 다다랐을 때에서야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용 구경 간다.”
“뭐어?!”
용 구경?
하!
적영은 숨기려는 내색도 없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탄했다.
대체 제가 뭐라고 용을 운운한단 말인가?
“이봐, 미쳤어? 그 잘나신 너희 형이나, 우리 오라버님도 때려치운 녀석이라고. 너 따위가 가서 뭘 할 수 있는 게 아냐!!”
“그래. 그러니 구경만 하겠다.”
구경, 구경이라니.
그 말에 적영의 눈매가 더욱 찌푸려졌다.
마치 제가 뭐든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강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아니, 하…. 저 안에 있는 건 짐승이라고. 짐승! 신문호마냥 적당적당히 봐주지 않아!”
“내가 알아서 할 일 아닌가?”
“이보셔요!”
하지만 적영이 무어라 말해도 청유백은 들을 기색이 없어 보였다.
적영 대신 청유백을 멈춰 세운 것은, 벽에서 가만히 무기를 연마하던 묵색 옷을 입은 사내였다.
“이봐, 청가의 머저리. 그런 검 들고 가 봤자 개죽음당할 뿐이라고.”
“…….”
“그런 검?”
적영은 그제야 청유백의 검이 모포가 벗겨졌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검집을 임시로나마 대신하고 있던 모포가 사라져 녹슨 검신이 대놓고 드러나 있었다.
“당신, 그건….”
녹슬고 볼품없는 백월검.
검병만큼은 아직 그 아름다웠던 흔적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검날은 도저히 멀쩡하다 말할 수 없는 그것.
신문호와의 전투에서 모포가 다 찢어져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이젠 감출 것도 없어 들고 다녀야만 했다.
하지만 그 검의 외견을 보고 쓰레기라며 폄훼할 수는 없었다.
저 추레하고 볼품없는 검신이 드러난 것만으로도 저 검이 품은 선기의 편린이 드러나고 있었으므로.
끔찍한 귀기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그 검의 기운은 몹시 이질적이어서, 알아채지 못하기도 힘들었다.
묵색 옷의 사내는 청유백을 비웃듯 검을 가리켰다.
“그게 무슨 물건인지 알고는 가져온 건가?”
“…….”
청유백은 사내의 말에 주변을 돌아보았다.
저 묵색 옷의 사내와 적영, 백소하, 그리고 다른 이름 모를 이곳의 참가자들까지.
그 검이 거슬린다는 듯 청유백의 검에 이목을 집중했다.
최소한, 이 자리의 다른 후계자들은 이 검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하긴, 백 년 전 마교에 큰 상처를 입혔던 무신 그 장본인의 검이다.
오히려 모르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은, 청유백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물론이지.”
“큭큭, 멍청한 건지, 용감한 건지. 아니면 둘 다인가?”
마기를 쓰는 무인이 선기로 정련된 무기를 사용할 수는 없다.
그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며, 하물며 저리 녹슬고 낡은 상태여서야 그저 쇠막대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본래의 모습이 얼마나 훌륭한 명검이었던 간에 말이다.
적영은 흠칫 몸을 떨며 청유백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니, 이봐! 그렇다면 더더욱 안 되지. 다루지도 못하는 무기를 가지고 들어가서 어쩔 셈이야?”
“내버려 둬.”
“뭐?”
적영은 다시 한번 말해 보라는 양, 눈을 희번덕이며 묵색 옷의 사내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지레 쫄고는 알아서 기어 나오겠지. 내버려 둬. 아가씨.”
멍청하면 용감하다잖나.
묵색 옷의 사내는 그리 덧붙이며 다시 제 무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말이지….”
‘왜 저리 무모한 거지?’
위험하다고 그리도 말을 하는데도 듣지도 않고.
고작 생쥐 떼에게 쫓기는 주제에, 무슨 용을 보겠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적영의 솔직한 심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기껏 살게 도와줬더니만, 스스로 사지를 찾아가는 꼴 아닌가.
적영이 고민하던 찰나, 이미 석문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밀려나고 있었다.
청유백은 적영에게는 관심 주지 않은 채로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 너머 뒤쪽에서 다시 석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적영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그래!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해! 목숨 어찌 쓰든 내 알 게 뭐야?”
─쿵.
이윽고 육중한 진동과 함께 석문이 닫히고, 조금이나마 새어나오던 녹색의 빛도 사라졌다.
청유백은 어깨를 으쓱이며 투덜거렸다.
“거 참, 오지랖도 넓군.”
[그래도 저 아이 딴에는 걱정하는 것 아니더냐.]
‘언제나 말하지 않나. 쓸데….’
[그래, 그래. 쓸데없는 걱정이시겠지. 잘나신 몸이시다.]
청유백의 말을 천화가 끊으며 대신 말해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지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사회인 마교에서 약자들을 향한 자비가 얼마나 하잘것없는 것인지.
적영은 언젠가 아주 큰 대가를 치르며 알게 될 터였다.
하지만 그 또한 그 아이가 알아서 할 일.
그녀가 쓰는 자신을 향한 자비에 의미가 없듯, 그 반대 또한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속된 말로 제 코가 석 자라지.
청유백은 사지가 저려오는 어둠 속을 응시하며, 저 너머의 존재에게 걸음을 내디뎠다.
‘어디 한 번, 견적이나 내러 가 보자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