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천하의 명검이면 뭐 하나 (1)
범이 수놓아진 적색 장포.
적가의 후계자임이 분명해 보이는 그녀는 석문에서 손을 떼며 숨을 돌렸다.
석문을 연 장본인이 바로 그녀인 듯 보였다.
청유백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돌려, 발을 들인 공동 안을 돌아보았다.
[대단하구나. 이리 거대한 공동이라니. 훌륭한 기술력이야.]
야생의 동굴 그 자체였던 지금까지의 굴과는 달리, 이 공간은 다분히도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 있었다.
벽과 천장은 다듬어져 이 공동이 인위적으로 확장된 공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천장과 벽에 촘촘히 박힌 녹색 야명주가 어둠을 밝혔다.
‘기술력이라기보단, 돈지랄이지.’
이 대략 지름 이십 장은 되어 보이는 공간을 밝히기 위한 야명주가 수십 개.
야명주가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도 비싼 물건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곳 전체를 황금으로 도배한 것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볼 수 있으리라.
[무얼, 고작 이 정도 돈으로 마교가 망할 것도 아니지 않으냐.]
‘백 년 전이야 그랬겠다만, 지금은… 글쎄.’
아무튼, 그 야명주 빛의 아래에서 각자의 휴식을 취하는 이들이 몇 보였다.
청유백과 백소하, 문을 연 적가의 여인을 포함하여 도합 여섯 명.
누군가는 제 무기를 앞에 두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누군가는 무기를 휘두르며 땀을 흘렸다.
그리고 누군가는─적가의 여인에게 한심하다는 듯 언질했다.
“또 쓸데없는 연정을 베푸는군. 아가씨, 결국은 다 경쟁자라니까?”
“경쟁자는 무슨. 힘없는 사람을 보호하는 것도 강자의 의무야.”
그녀는 묵색 옷을 입은 사내에게 그리 대꾸하며, 아직도 넘어져 있는 백소하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적영? 네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백소하는 그녀와 면식이 있는지 스스럼없이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적영은 어려운 대답이 아니라는 듯, 제 뒤쪽을 가리켰다.
“우리는 다른 문으로 들어왔지.”
“다른 문?”
백소하는 그제야 방을 돌아보았고, 방 전체에 자신들이 들어온 문과 같은 것이 늘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수가, 총합 열두 개.
각 문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백소화와 청유백이 나온 문을 중심으로, 자(子), 축(丑), 인(寅), 묘(卯), 진(辰), 사(巳), 오(午), 미(未), 신(申), 유(酉), 술(戌), 해(亥)의 열 두 개의 문.
단, 몇몇 개는 문자에 거대하게 금이 가 반으로 부서져 있었다.
저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하게 떠오르는 것은 하나 있었다.
“처음부터 이곳이 목적지였군.”
“맞아. 오히려 우리가 묻고 싶은데?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길래 이리 늑장을 부렸는지 말이야.”
“…….”
[그래, 누구 탓일까?]
청유백은 말을 아꼈다.
차마 혀가 뽑혀도 길을 잃었다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다행히도, 대신 백소하가 대답을 이었다.
“너도 방금 보지 않았습니까. 그 끔찍한 쥐 떼들을요.”
“그렇겠지. 쥐문에서 나왔잖아.”
“쥐문?”
“그래. 뭐, 엄밀히 말하면 자문(子門)이지.”
적영은 그리 말하며 방금 그들이 나온 문의 위쪽을 가리켰다.
자(子)라는 한자가, 거대하게 음각된 바위가 있었다.
그 의미를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이 자리에 새겨진 한자들은 전부 십이지의 동물을 상징하는 한자이니, 이 문의 자(子)가 의미하는 것은 그 첫 번째인 쥐이리라.
그럼, 다른 문들도 그러한 동물이 준비되어 있단 소리인가?
허면, 저 인문(寅門) 너머에는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럼, 당신들도 저런 것들을 헤치고 예까지 온 겁니까?”
“아니, 그렇게 깊게까지는 안 갔지. 대놓고 이곳까지 오라고 식량 보따리들이 줄지어 놓여 있었잖아.”
“예…?”
그런 적은 없었는데.
기억을 되짚어 보면, 물론 식량 보따리를 이곳저곳에서 찾기는 했지만 그리 대놓고 뭔가를 유도하는 모양새는 아니었다.
‘아니, 아니면 내가 그런 단순한 것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했던 건가?’
“그거 없으면 엄청 헤맬 텐데. 여기 말도 안 되게 넓단 말야. 뭐, 그래도 결국엔 도착했으니 잘 해결됐네!”
혼이 빠져 있는 백소하를 뒤로하고, 적영은 말을 이었다.
“뭐, 아무튼. 보통은 다들 어제쯤에 도착했어. 심지어, 몇몇 잘나신 분들은 이미 빠져나가셨다고.”
“빠져나갔다고?”
적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동굴의 문을 서른 날 내로 열어라.’ 그게 지령이었잖아? 서른 날 내라면 뭐, 능력껏 하라는 소리지. 할 수만 있다면 바로 나와도 좋다는 소리잖아.”
“…확실히 그렇군.”
틀린 말은 아니다.
삼십 일 버티고 나오라는 게 아니라, 삼십 일 안에 나오라는 것이니.
능력이 된다면, 얼마나 빨리 해치우든 그것이 탓할 이유는 되지 못할 것이다.
청유백은 방금 들은 것을 확인하듯 물었다.
“그럼 저게 ‘문’이라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거겠지?”
청유백은 저들이 방금 들어온 문을 포함한, 이 방 가득한 문들을 가리켰다.
벌써 나간 이들이 있다는 것은 그 ‘문’이라는 것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지금 가장 그 단어에 가장 적합한 생김새를 지니고 있는 것은 바로 저 석문이었다.
적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일단은 그래.”
“일단은?”
“저건 출발선이야. 너희가 온 위쪽으로 향하는 길 외에 아래쪽으로 향하는 길이 있어.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면 너희가 만났던 것 같은 영물들이 득시글거리지.”
쥐의 문 뒤에는 쥐가, 소의 문 뒤에는 소가.
각자의 문자에 맞는 동물이 기다리고 있노라고, 적영은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 아래, 그 영물들을 잡고 더 나아가면 또 다른 문이 있어. ‘문’은 바로 그거야.”
“동물은 파수꾼이군.”
“바로 그렇지.”
적영과 청유백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백소하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럼 제일 만만한 문을 찾아서 나가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이 끔찍한 장소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을 게 무어 있다고?
물론, 극한의 상태에 몰아넣어 지는 만큼 수련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련은 밖에서도 할 수 있고, 이런 음산한 곳에서 계속 지내다가는 수련 이전에 미쳐버릴 것이 분명했다.
십이지의 동물은 다시 말해─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의 12마리.
방금 쥐는 끔찍하게 많은 숫자로 인해 고전했다고는 하나,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면 쓰러뜨릴 자신이 있었다.
애초에, 쥐까지 가지 않아도.
“닭 같은 것이라면, 수백 마리가 있어도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요?”
“푸하하!”
적영은 백소하의 말이 퍽 우스운 듯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음, 용감한 발언이야. 넌 꼭 그 ‘닭 같은 것’한테 도전해 보렴.”
“예?”
백소하의 표정이 한순간 싹 가라앉았다.
대체 뭐가 있길래?
‘봉황이라도 있나?’
본 적은 없지만, 뭔가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 같아서 더 두렵다.
적영은 그런 백소하의 반응을 잠시 깔깔대며 즐기고는,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뭐, 농담이야. 대답은 단순해. 간단하지. 일단, 이미 누가 나간 문으로는 나갈 수 없으니까야.”
청유백은 고개를 돌려 문 위에 새겨진 문자들을 돌아보았다.
아까 보았던, 금이 가 반으로 갈라진 문자들이 있었더랬다.
청유백은 그 갈라진 문자 아래의 문들을 가리켰다.
“저건가?”
“맞아.”
금이 가 갈라진 문자는 네 개.
소, 호랑이, 개, 양.
저 문들을 지키는 것들을 격파하고, 누군가가 빠져나갔다는 것이리라.
적영은 무언가 고민하는 듯하더니, 설명이 부족하다 판단했는지 말을 덧붙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나갈 수는 있어. 지키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스스로 그런 선택을 하는 놈은 없을걸?”
“어째서?”
“보상이 있잖아.”
보상이라.
거 참,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다.
하긴, 생각해 보면 천마지회는 각 시험을 통과할 때마다 막대한 보상을 쥐여준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천마지회의 참가자들이 향후 마교의 주축이 되는 데에 크게 일조하게 되는 것이리라.
‘검묘의 무기는 ‘보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쉬운 감이 있었지.’
딱히 무언가 시련도 없었고, 그저 거저 쥐여준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본 시험이 이것이라면 그 보상 또한 막대하리라.
첫 시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선심 쓰듯 쥐여주는 물건이 마교의 지보인 검묘의 무기다.
모두에게 쥐여주는 것이 그 수준일진데, 하물며 난이도에 차등이 있다면.
“다들 원하는 목표가 있겠군?”
“맞아. 제일 강한 것 둘은 잘나신 도련님들이 잽싸게 가져갔지만, 아직 남은 건 있으니까.”
“가장 강하다고? 범과 개가?”
호랑이, 인(寅)은 그렇다 치자.
개, 술(戌)도 보통 개가 아니라 늑대 영물이라도 끌어다 쳐 넣어 놨다면 이해 못 할 것은 없다.
하지만 그 두 문에 무엇이 있더라도, 십이지의 열두 동물에서 ‘가장’ 강한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절대로.’
십이지 중 진(辰).
무려 용(龍)이 있는데 가장 강한 둘을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적영은 태연히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건… 글쎄. 보면 알걸? 내 자존심 강한 오라비가 굳이 진문이 아니라 호문으로 나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은데.”
“포기했다. 그건가?”
“그걸 굳이 그렇게 입방정을 떠는 건 좋지 않아. 청가의 도련님. 오래 살다 가고 싶잖아?”
적영은 옅게 웃으며 경고했다.
하지만 무얼, 청유백은 굳이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코웃음 치는 대신 친절히도 대답했다.
“그리 말하니 더 보고 싶군.”
적영이 말하는 인물은 적철진, 적가의 장남이리라.
그리고 ‘잘나신 도련님’이라 지칭한 나머지 하나는 청가의 장남인 청명휘일 터.
현 천마지회의 참가자 중 실력으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으뜸일 터인 그 둘이 그리도 쉽게 포기하고 차선을 선택할 정도라니.
대체 뭐가 준비되어 있단 말인가?
청유백은 문득 든 의문을 입에 담았다.
“보상이 뭔지는 아나?”
“몰라. 하지만 예상은 할 수 있겠지. 어때, 백소하?”
백소하는 갑작스레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잠깐 고민의 신음을 흘리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다음 시험은 마교의 비급과 지식의 총체인 만마서고, 그리고 그곳에서 치르는 시험입니다.”
첫 번째에는 무기. 두 번째에는 새로운 무공.
그렇다면, 이번 보상으로는 그 두 번째의 진행을 원활히 해줄 물건을 제공해줄 가능성이 높다.
검묘의 무기가 그랬듯 말이다.
“자세한 건 말씀드릴 수 없지만…이번 시험의 보상은, 영약일 겁니다.”
마교의 영약은 만드는 세력과 분파에 따라 수많은 종류가 존재한다.
하지만 개중에서도 최고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것은 당연히 육대가의 소관이다.
황가가 재료를 조달하고, 녹가가 영약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급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한다.
가장 아래의 소마단(小魔丹)과 두 번째의 환마단(煥魔丹).
그리고 으뜸의 신마단(神魔丹).
“천마지회라면, 신마단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이십 년에 하나 꼴로 만든다지만… 천마지회니까요.”
차기 천마를 정하는 회합이니, 보상에 여유를 둘 이유 따위는 없을 것이다.
백소하의 말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었다. 하지만 적영은 영 부정적인 태도였다.
“포기해. 이미 인문과 술문은 끝났고, 그거랑 동급은 더는 없어.”
그리고 그 문의 보상이 신마단이었겠지.
적영은 그리 덧붙였다.
남은 것이라 하면 용의 진문이 있겠지만, 그것은 애초에 동급이 아니니 말이다.
청유백은 흥미롭다는 듯 신음을 흘리더니, 적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헌데, 너는 그 모든 정보를 어떻게 안 거지? 내 죽간에는 없었던 내용인데.”
만면귀의 장난질인가?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이야기기는 하다.
청유백도 백소하와 같이 보따리가 무언가의 길로 인도하는 것처럼 친절히 놓여 있지는 않았으니까.
만약 그것이 만면귀의 소소한 장난질이라면 이해하지 못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게요. 나도 궁금합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나도 모르는 이야기였습니다만.”
여기서 그녀가 ‘그건 너희가 알아서 해야지’ 따위의 대답을 한다면, 그들로서는 답할 말이 궁했다.
만면귀가 말했듯이 정보를 알아내는 것 또한 실력이니까.
하지만, 백가의 자제인 백소하가 모른다는 시점에서 외부의 정보는 아니다.
적영이 아는 것을 백소하가 모를 수는 없다.
마교 모든 정보의 집약체, 그것이 백가이니까.
그렇다면, 저 정보는 이 동굴 내에서 얻은 것이라는 소리가 된다.
적영은 예상 외로, 선선히 입을 열었다.
“아, 그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