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귀무곡의 검묘 (2)
“뭐, 이럴 줄 알았어요.”
영문 모를 말과 함께 접근한 복면인은 한숨을 내쉬며 복면을 내렸다.
그녀, 녹지연은 어이가 없다는 듯 청유백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지만, 되려 어이없는 쪽은 청유백 쪽이었다.
“이게 무슨 짓인지 설명부터 해주는 게 좋지 않나?”
녹지연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서 두 뼘 정도 길이의 단도를 뽑아들었다.
칼날에서 무언가 방울져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면, 이미 모종의 독이 발라져 있는 물건.
녹지연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뭐… 개인적인 원한은 없어요? 시키니까 하는 거지.”
“농담하지 말고.”
하지만 청유백은 눈도 껌뻑 않으며 대충 대꾸했다.
이게 무슨 상황, 무슨 용건인지는 몰라도 그 용건이 암살은 아니라고 확신했다.
멍청한 적가 놈들이면 모를까, 녹가의 인간이 독연무 하나 통하지 않았다고 접근전을 택하는 것은 너무 비상식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그 예상이 맞아떨어졌는가.
녹지연은 씁쓸하게 단도를 다시 집어넣으며 투덜거렸다.
“속아주는 척이라도 하면 안 되나요? 재미없는 남자는 인기 없어요.”
“…고려해보지.”
천화도 그녀의 의견에 거들었다.
[너는 진짜 고려해보는 게 좋다.]
‘…알겠다니까.’
청유백이 한숨을 내쉼과 동시에, 저 멀리 보였던 또 다른 인영이 다가왔다.
복면 사내는 멀쩡히 깨어 있는 청유백과 눈이 마주치고는, 복면을 벗은 녹지연에게 따지듯 물었다.
“뭐야, 이자는 왜 멀쩡한 거야?”
“글쎄. 비밀이 많으신 분이거든.”
녹지연의 말에 사내는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비밀은 무슨 비밀. 누님, 이거 누님이 실수한 거면 장로님들이 가만히 있지 않으실걸?”
“신경 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지만….”
“신경 끄라고.”
녹지연의 말 한 마디에 사내는 금세 꼬리를 내리며 뒤로 물러섰다.
녹지연은 청유백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바쁘니까 움직이면서 설명하죠.”
“하! 선녀 나셨네. 누님이 언제부터 그리 친절했다고. 기절 안 시켜? 진짜로 그냥 데려가?”
“음….”
사내가 계속 딴지를 걸자, 녹지연은 인상을 찌푸리며 사내와 청유백을 한순간 번갈아 쳐다보았다.
위, 아래, 오른쪽, 왼쪽으로.
그리고 한 번 눈을 껌뻑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냥 가는 게 낫겠다.”
“뭐? 방금 그 눈빛은 뭔데? 장로님들이 아시면….”
“네가 기절하던가.”
“…장로님들도 이해하실 거야.”
청유백은 일단 두 사람을 따라 빠르게 발을 놀렸다.
대충 정황만 보아도 어디론가 데려간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수면독으로 잠재우고, 어딘가로 납치하는…아니, 데려가는 건가.’
[어디로 가는지조차 비밀이라는 게로구나. 준비할 시간도 주지 않겠노라. 그건가?]
하지만 독은 청유백에게 통하지 않는다.
음약(淫藥)이나 춘약(春藥) 따위의 독이라면 독이 아니라 약에 가까우니 또 모르겠으나, 수면향은 일종의 마비제.
즉, 독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짙은 수면 안개 탓에, 지금 청유백은 정신을 잃기는커녕 평소의 그 여느 때보다도 또렷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니, 의문 또한 막히지 않고 떠올랐다.
‘곧바로 다른 시험을 시작하나?’
일단 녹지연이 저에게 적의가 없다는 것은 알겠으나, 그건 그거고 의문은 의문.
청유백이 뚱한 표정으로 녹지연을 계속 응시하자, 녹지연은 알겠다는 듯 다른 복면인의 복면을 잡아 벗겼다.
“뭐, 뭐야!”
“일단 소개할게요. 제 동생 녹지지. 녹가의 차남이에요.”
“무슨 미친 짓이야! 그냥 데려가는 걸로 모자라서 정체까지 까발려?!”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누님은 장로님들께 혼난 적 없어서 모르겠지! 뭘 멋대로… 아, 누님. 설마….”
“?”
“저 남자한테 반했….”
─빠악!
“아악!”
“미친 소리 하지 말고.”
한 번의 공허한 타격음이 울린 뒤, 그대로 입을 닥친 녹지지의 눈에서 찔끔 눈물이 흘러나왔다.
저 누나에게 잡혀 사는 동생에게 위로의 묵념을 잠시 가져준 뒤.
“만담은 적당히들 하고,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 좀 해주지?”
“뭐, 단순한 일이에요. 육대가의 후계가 치르는 천마지회지만, 그 회합을 진행하는 인력도 결국은 육대가 사람이라는 말이죠. 마교에서 가장 우수한 인원이 저희인데 뭐 어쩌겠어요?”
조금은 자만 섞인 말.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인원이나, 날 때부터 재능을 타고난 아이들도 마교에 얼마든지 있기는 하다.
가령 이전의 만면귀가 그러한 존재일 테다.
하지만, 고작 십 대의 나이로 마교의 이런저런 정사에 관여할 수 인간은 오직 육대가의 자제뿐이었다.
그리고 천마지회는 바로 그 육대가끼리만의 회합.
“그렇군. 결국은 우리의 일이니 다들 관련되어 있다는 건가.”
“바로 그렇죠.”
청유백은 대충 납득했다.
천마지회가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지든, 대부분의 책임과 관리에 있어 거진 반수 이상은 육대가의 소관이었다.
무기가 관련되었다면 묵가가, 독이 관련되었다면 녹가가.
그리고 아마, 향후 있을 만마서고(萬魔書庫)의 출입권과 관련된 제 2시험은 백가와 관련이 있으리라.
“아마 묵가 녀석들은 검묘에 들어가는 게 선착순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걸요? 저희가 검묘에서 나온 후의 일을 알고 있듯이요.”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불공평? 음, 글쎄요… 묵가 놈들은 몰라도. …저희는 오히려 노력을 칭찬해줘야 할걸요?”
청유백이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던 찰나, 녹지지가 녹지연의 입을 막으며 경고하듯 뇌까렸다.
“…누님.”
“아, 실언할 뻔했네. 잊어주세요.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어요. 어차피 곧 알게 될 테고요. 그건 그렇고….”
녹지연은 대놓고 대화의 주제를 돌렸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다행이게도, 머지않아 눈앞에 거대한 절벽과 수십 개의 동굴 입구가 보여 왔다.
어찌 보면 장엄한 광경.
한눈에 압도되는 절벽의 정경에, 청유백은 흥미롭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아, 도착했네요.”
귀무곡의 한 절벽에 위치한 수많은 동굴들. 청유백도 이 장소의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다.
옛 고수들이 수련을 위해 찾는 장소로, 저 많은 동굴들이 하나로 이어져 아래쪽에는 깊은 공동이 존재한다고 했다.
명칭이 복마동이라 했던가.
‘실제로 와 보는 것은 처음이군.’
왜 이곳으로 부른 것일까.
청유백이 그것을 고민할 즈음 안개 너머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다가왔다.
“뭐야, 이 아이는 왜 깨워서 데려왔느냐?”
이번에는 만면귀는 아니었다.
대놓고 풍기는 기세가 달랐으며 그 기세의 크기 또한 확연하게 차이가 있었다.
그의 정체는 머지않아 녹지연이 입에 담았다.
“죄송합니다. 대주님. 제가 미숙하여… 하독을 잘못하는 바람에.”
만면귀가 소속된 백귀대의 대주.
적가주가 보낸 두 사람 중 하나인, 귀살마(鬼殺魔)였다
“흠, 네가? 지지 녀석이 아니라?”
“예.”
녹지연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살마는 조금은 의심스러워하는 기색을 표했으나, 이내 수긍하며 시선을 돌렸다.
“…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날이 있는 법이지. 심려치 마라. 한 놈 정도야 상관없으니.”
귀살마는 그리 말하며 청유백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받고 보니, 이번에도 또 무언가의 죽간과 작은 보따리였다.
“네놈은 행운아로군. 네놈은 원하는 곳으로 들어가라. 어차피 안은 하나로 이어져 있으니,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그냥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까?”
“일단 지금은요.”
청유백의 질문에 녹지연이 대신 대답했다.
아마 먼저 들어간 열넷, 아니 이 장소의 둘을 제외하면 나머지 열둘은 이미 저곳에 들어가 있을 것이었다.
“죽간은 안에 들어가서 확인하면 될 거예요. 그리고 그에 적힌 것을 준수하시고요.”
청유백은 동굴 앞에 서서 안력을 돋워 안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조금 가까운 곳이 비쳐 보일 뿐, 안개와 어둠 때문에 뭔가 명확히 보이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추천 사항은, 들어가자마자 달리라는 거?”
“뭐?”
“이 이상은 말해줄 수 없어요. 어차피 저희도 다른 입구로 들어갈 거고, 운이 좋으면 만날 수도 있겠죠.”
“이해를 못 하겠는데─”
시간은 많이 없었다.
귀살마는 자비가 다한 듯 내공을 담아 일갈했다.
“빨리 들어가지 않고 뭣 하느냐!”
녹지연도 더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됐어요. 원로님 인내심도 무한은 아니거든요. 빨리 들어가기나 하세요!”
─빡!
찰진 타격음과 함께 녹지연은 청유백을 동굴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청유백은 저항 없이 안쪽으로 미끄러졌고, 어이가 없다는 듯 녹지연을 돌아보았다.
“아, 그리고 한마디 덧붙이자면.”
“?”
“부디, 무기에 취해서 멋모르고 설치다 제 수고를 무용으로 만들지는 말아 주시길.”
“신경 끄….”
청유백이 무어라 한마디 쏘아붙이려 했을 때에는, 그녀는 이미 어딘가로 쏜살같이 튄 이후였다.
“…….”
[큭큭, 재밌는 아이로구나.]
‘건방진 거지. 무슨.’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며 귀살마가 던졌던 죽간을 펼쳐보았다.
그나마 빛이 조금이나마 닿는 이곳에서 읽는 게 나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쓰여 있는 것은 두 가지.
‘동굴의 문을 서른 날 내로 열어라’ 그리고 ‘비동 깊은 곳으로 갈수록 식량과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간단한 지령이었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문이 열린다니?’
청유백은 녹지연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입구를 돌아보았다.
문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바위로 입구를 막는다거나, 진법 따위로 밖으로 못 나오게 봉한 흔적도 없다.
청유백이 의문에 입구로 다시 다가가려던 찰나, 천화가 언질했다.
[흐음, 헌데… 들어가자마자 달리라고 하지 않았더냐?]
녹지연의 추천 사항?
아, 분명히 그랬더랬다.
청유백은 그제야 그것을 깨달았지만, 그것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문’이든, ‘달려라’든 굳이 설명도 필요 없이 단 한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이해했다.
─고오오오오!!
주위의 공기가 진동하고, 안개가 휘몰아쳐 사라져 간다.
동굴 바깥, 절벽 아래에서 휘몰아치는 흉포한 기가 절절하게도 느껴져 왔다.
“이, 이런 미친─!”
청유백은 그것을 감지하자마자 동굴 안쪽으로 냅다 달렸다.
그래, 문이 무슨 역할인가.
통행하는 것을 차단하고, 언젠가 열리기만 한다면 그게 문 아닌가.
설령, 동굴 입구를 통째로 무너뜨려서 길을 막는다고 해도, 언젠가 열 수만 있다면 그것도 문이라 할 수 있으리라.
─콰광!!!!
지금의 청유백조차 감당할 수 없는 기의 폭풍이 동굴 입구를 강타했다.
직격으로 맞았으면 저항할 새도 없이 먼지로 화해 사라질 일격.
한순간에 동굴의 입구는 무너져 새어나오는 빛 하나 없이 사라져갔고, 청유백은 가까스로 제 발치까지 밀려온 돌덩이들을 밀어내며 숨을 골라야만 했다.
“…허억, 허억, 그래. 그럼 그렇지. 벽력탄도 아무렇지 않게 던지는 놈들이, 정상적으로 뭔가를 벌일 리가 없지.”
죽으면 뭐 그게 네 운명이고, 어쩔 수 없지! 정도의 사고방식이다.
청유백은 그래도 자신이 이성적으로 살릴 놈 죽일 놈 정도는 구분하면서 산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으로서는 저 폭력의 화신과도 같은 고수들에게는 대들 방법조차 없다.
[뭐, 살았으면 되었지. 이제부터 어찌할 테냐?]
천화는 골똘히 신음했다.
입구를 막는 것도 저 따위로 막는 놈들이다.
이 동굴 안쪽이 마냥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비동 깊은 곳으로 갈수록 식량과 생존에 도움이 되는 것이 있다?’
설마 네들끼리 죽고 죽여라 따위의 생각은 아닐 테고, 그 안쪽에 무언가 위험한 것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청유백은 일단 보따리부터 확인하기로 했다.
내공을 눈에 집중하여 안력을 돋우자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각쯤 지나자, 대충 대부분의 것들은 파악할 수 있었다.
청유백은 보따리의 내용물을 만지작거리며 확인했다.
‘벽곡단 세 개에 물 한 통. 그리고 이건… 나뭇조각? 아, 장작인가.’
그래도 내용물은 꽤나 필요한 것들이었다. 부싯돌이야 근처에서 수급한다고 쳐도, 나무는 동굴 안에서 구하기 극히 힘들 테니까.
“일단 안쪽으로 들어가지.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으음. 검을 먼저 정련해야지 않겠느냐?]
“그것도 방법이지만… 조금 더 귀기가 짙은 곳에서 하고 싶군. 그쪽이 더 효율이 좋겠지.”
청유백은 지금 온몸에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마기로 물든 선천진기 탓에, 귀기어린 이 장소가 그 어떤 곳보다도 체질에 맞는 탓이었다.
그리고 이 동굴은 깊은 곳으로 갈수록 귀기가 강해지는 성질을 띤다.
이왕 하는 것이라면, 만전의 상태, 만전의 장소에서 하는 것이 혹시 모를 실수를 방지할 수 있을 터.
“그럼, 가 볼까.”
청유백은 어두운 동굴 속을 꿰뚫으며 안쪽으로 나아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