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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35화 (35/200)

제35화. 천마지회, 개시 (5)

“무기의 주인이 되라니, 그건 무슨 뜻입니까?”

“굳이 말해줄 의무가 있나?”

“그게 무슨….”

“가볍게 소풍이라도 나온 기분인 모양이군.”

만면귀는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질문한 황의의 사내는 얼굴을 붉히며 미간을 와락 찌푸렸지만, 그것에 대해 무어라 항변할 힘은 없었다.

만면귀는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너희는 작은 ‘선물’과 함께 죽간을 받았겠지. 그곳에 무어라 적혀 있었지?”

만면귀의 말에 그들은 일제히 생각을 되짚었다.

굳이 죽간을 다시 꺼내어 확인해볼 필요도 없었다. 정말 간단한 내용이었으니까.

“장소와 시간뿐이었습니다.”

“어째서라고 생각하나?”

“예?”

“어째서 그것만 적혀 있었겠느냐 묻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구구절절하게 수십 가지의 지문을 적을 수도 있었을 터다. 허나 너희에게 전달한 것은 그 하잘것없는 글자 몇 개가 전부.”

만면귀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째서일까?”

장소, 시간, 실패 시 탈락.

그야말로, 간단하다 못해 성의 없게까지 느껴지는 문구.

하지만 그 간단한 규칙이 의미하는 바는 따로 있었다.

“그것이, 네놈들이 지킬 규칙의 전부이기 때문이다.”

반칙?

뒷수작?

더러운 밑 작업?

알 게 뭔가.

만면귀는 코웃음 쳤다.

“네놈들은 전쟁터에서도 이것저것 규칙을 따져 가며 싸우나? 똑똑히 인지해라. 천마지회는 전쟁이다.”

차기 천마를 정한다는 것.

그것은 향후 수십 년간의 육대가 간의 판도를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각 가문들은 비축해둔 모든 재화와 역량을 쏟아부어 천마지회를 준비하고, 어떻게든 그 성과를 얻고자 노력한다.

물론, 일종의 예외도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그것이 특수한 경우.

“전쟁에서는 누구도 네 편의를 봐주지 않는다. 모든 정보, 모든 단서를 예상하고 받아들이는 것까지 전부 네놈들의 능력이다.”

그 방법은 각자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사람을 매수하여 미리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겠고, 누군가는 맞닥뜨린 후에 몸으로 경험하며 알아차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기억에 쌓인 수많은 경험으로 대략적인 미래를 예측하든가.

각자에게 가능한 방법이 있고 불가능한 방법이 있겠지만, 결국 요지는 같은 말이었다.

“무슨 방법을 쓰든 좋다. 결과에 닿는 방법이 무엇이든, 결과만 손에 넣으면 그걸로 족하다. 가령, 이 근처에는 너희를 감시하고 감독하기 위해 잠복한 마사급 무인들이 몇몇 있지.”

만면귀는 즐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을 ‘설득’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도 좋겠고, 다른 모종의 방법으로 대화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마치, 앞으로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가 기대되기라도 한다는 듯이.

“영 여의치 않다면, 이 나를 쓰러뜨리고 고문해 보아라. 안 될 게 뭐냐? 어차피 너희는 천마지회가 끝나면 나와는 비교도 안 될 높은 자리에 올라갈 텐데, 뒤탈도 없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만면귀는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즉, 그 저의는 단순했다.

무슨 수를 쓰든 상관없다. 그저, 어떠한 것이든 동원하여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라는 것.

전쟁이란 그러한 것이니까.

“예를 들어볼까. 너희가 그 죽간을 받기도 전에, 이 장소와 시간, 심지어는 중간의 시련까지도 알고 있는 자가 있었다.”

다시 말해, 사전에 모든 정보를 미리 입수했었다는 소리.

“몇 명이나 될 것 같나?”

그 말에 청년들은 서로를 돌아보았다. 유난히 차림이 엉망이 되어 딱 봐도 풍파를 뚫고 온 이가 있는가 하면, 기이할 정도로 멀쩡하여 산길이 아니라 관도로 걸어온 것만 같은 이들도 있다.

만면귀는 정답을 말했다.

“일곱이다. 거진 반수가 앞을 내다보고 제 할 일을 알았다는 것이지.”

그 말에 몇몇의 눈이 크게 떠졌다.

아까 녹지연과 살벌한 인사를 나누었던 적영이 특히 그러했다.

‘……! 어쩐지, 몇 명만 차림이 깨끗하더라니! 특히 녹지연, 저년!’

이상하다 싶었다.

저는 귀살마를 만나 죽을 고생을 하며 도망쳐 왔는데─심지어 사실상 그가 보내준 것에 불과했다─ 녹지연은 이상하리만치 멀쩡한 모습이 아니었던가.

‘비겁하게 수작을 부렸단 말이지!’

과연 비열한 녹가의 핏줄이라 그건가. 적영은 이를 갈며 앙심을 불태웠다.

하지만 적영의 생각이 이 자리의 모두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영처럼 어떻게 그런 비겁한 짓을! 이라고 생각하는 자─말을 죽도록 안 쳐 듣는 건지, 잘 듣는 건지 모를 놈들─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만면귀의 말을 뼈에 새겨 심기일전하는 자도 있었다.

같은 말을 들어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서로의 재량인 법.

청유백과 천화의 경우는─

아쉬움이었다.

[시간이 이레만 더 있었다면 확실한 준비를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저딴 잡설을 가만히 들어줘야 한다니, 실로 개탄스럽기 그지없구나.]

‘없는 걸 아쉬워해 봤자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잖나.’

청유백에게 오늘에 대한 정보가 없던 이유는 단순했다.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사람, 돈, 시간.

정보라는 것은, 최소한 이 셋 중 둘은 충족되어야 그 속살을 보여주는 요물이다.

헌데 지금으로서는 그 셋 중 단 하나조차도 수중에 없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이 시간.

하지만 그 시간마저 모자란 지금으로서는, 정보를 얻으려는 시도는 그저 발버둥에 그친다.

그렇기에 그냥 포기했다.

상황을 스스로 조정할 방법이 없다면, 차라리 그것에 빠르게 적응하여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는 것이 나으니 말이다.

청유백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만면귀는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이쯤 말했으면 알아 처먹었겠지. 네놈들은 규칙 따위는 엿 먹으라 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네놈들의 권리요, 의무다. 어떻게 해야 정해진 규칙을 비틀고, 엿 먹일 수 있을지를 생각해라.”

편법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위험할지언정, 결국 더욱 새롭고 더욱 강한 것은 편법 중에 나오기 마련이니.

머리가 편한 길로 갈수록, 그 머리를 따르는 꼬리들도 편한 길로 가게 된다.

그리고, 이 장소에 있는 모든 이들은 미래의 머리가 될 것을 약속받은 자들이다.

“미리 알아낼 수 있다면 알아내라. 포섭할 수 있다면 포섭해라. 죽일 수 있다면 죽여라. 무슨 짓을 하건, 그 뒷감당을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벌여도 좋다.”

다른 후계를 해쳐서는 안 된다, 라는 규칙이 있는 이유?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 가문과 씻을 수 없는 적대 관계를 만들게 되니까.

한 가문의 멸문지화를 보고 육대가의 한 자리를 비울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수는 결코 좋지 못하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을 감내하고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에 책임을 질 수 있다면.

해 보아라.

서로 죽여도 좋다!

만면귀는 그리 말하며 웃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너희를 옥죄는 규칙 따위는 없다. 그저 죽간에 새겨진 목표. 그것 하나만을 완수한다면, 수단과 방법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살아남아라!

그리고 승리를 쟁취해라!

그것이 이곳에 모인 너희들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목적이다.

만면귀는, 그리 말을 끝맺었다.

* * *

태양은 어느덧 뉘엿뉘엿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져 갔다.

모닥불은 옅은 어둠 속에서 잔불을 애잔히도 불태웠다.

그곳에서 둘러앉은 아이들은 아무 말 없이 저들의 무기를 손보거나, 행낭을 뒤적거리거나 하는 등의 정비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곳에 흐르는 것이 긴장으로 인한 적막일까, 혹은 견제로 인한 침묵일까.

혹은, 둘 다일까.

핏자국이 굳어 녹슨 검을 조금이라도 손질하려 손을 바삐 움직이는 청유백의 위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너, 다친 곳은 없습니까?”

“빨리도 묻는다 생각하지 않나?”

청유백은 코웃음 치며 대답했다.

백소하.

그는 다소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으나, 조금은 경황을 수습했는지 차분하게 반응했다.

“빚지고 시치미 떼는 것도 성정에 맞지 않으니, 그냥 형식적인 질문을 했을 뿐입니다. 싫으시면 그만두지요.”

“필요 없는 걱정을 사는 것만큼 무의미한 일도 없다.”

허, 퍽 대단한 인물이시군.

백소하는 씹어 먹듯 대답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모습이, 그도 지체 높은 육대가의 자식임을 표표하게 나타냈다.

청유백이 입 발린 소리로 대답하지 못하는 이 행동이, 그에게는 자존심을 굽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그럼 나도 간단한 질문 하나 하지.”

“뭡니까?”

“너는 백가의 자식 아닌가? 충분히 오늘의 일정을 알고 있었을 텐데, 거기서 멍청하게 뻗어 있던 이유가 뭐냐?”

만면귀가 말했던 일곱.

그 안에 백소하는 무조건 들어갈 것이다.

이 녀석뿐만 아니라 저기의 다른 백가 후계─백소상이라 했던가─도 다르지 않을 터다.

백가는 정보와 기록의 가문.

이러한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모른다 말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경우일 것이다.

‘기껏해야 소문 정도를 집약하는 녹가와는 질이 다르지.’

하지만 백소하 놈은 분명 처음부터 그곳에 쓰러져 있지 않았던가.

모든 걸 아는 자라고 하기엔, 너무나 조촐한 행보였다.

백소하는 짜증스레 대답했다.

“어찌 나라고 모든 걸 알겠습니까? 대략적인 걸 알아도,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까지 알지는 못합니다. 그냥 운이 없었던 거죠.”

“말은 청산유수로군.”

“사실이 그렇습니다.”

‘흐음.’

어쩌면 이놈에게는 무언가 받아내기를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청유백은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차라리 이놈보다는, 다른 백가 자제─ 녹지연이 말하기도 했던 백소상 쪽을 구슬려 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너무 인간관계를 손익으로만 계산하는 것 아니냐?]

‘오래 살다 보면 그리된다.’

보다 못한 천화가 한마디 쏘아붙여 주었지만, 청유백은 간단하게 일축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흐음.”

단연, 가장 기대하고 있던 것은 단연 어른들이 그리 일컫던 적철진과 청명휘였다.

적가와 청가의 자제이니만큼 일신상의 무력은 증명된 수준이리라.

청명휘는 청가에서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저기서 졸고 있는 얼빵한 청률 놈보다는 훨씬 강하다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면귀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디론가 불려가 제대로 얼굴도 보지 못했다.

아마 해가 지기 시작했으니, 곧장 귀무곡의 시험을 진행하기 시작한 것일 터.

청유백은 아쉬운 대로 다른 녀석들에게 눈을 돌리며 역량을 가늠했다.

“뭘 그리 꼬나보냐?”

대개는 시선을 알아채고 적대감을 표하거나.

“…….”

혹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시선으로 서로를 가늠하거나.

“뭐, 뭡니까. 그리 쳐다보셔도 내가 지금 줄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바라지도 않는다.”

아니면, 찔리는 것이라도 있는지 제 발 저리며 반응하거나.

십인십색의 반응이라, 청유백은 그 사실에 안심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무엇이?]

‘청률 놈같이 뻘짓하면서 허송세월 보낸 녀석이 없어서.’

[아아, 그래. 청률 녀석 말고는 전부 마기를 품고 있구나. 급의 차이는 있지만, 결코 정도는 아니야.]

지난날 느꼈던 청률의 태청심법, 그것은 마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맑은 선기를 품는 무공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이질적으로 느껴질 만큼 마교의 무공과는 결 자체가 어긋나 있다.

‘마교 전체가 그 꼴은 아닌 것 같으니, 그것만으로도 안심이군.’

청률에 대한 것은 조만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백가의 녀석이라면 지난 백 년의 기록에도 접근할 수 있을 테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곧 천마지회의 순서상 그 기록에 접근할 기회가 한 번 즈음은 생길 터.

하지만 천화는 그런 청유백의 태도가 짐짓 맘에 들지 않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터 이상했다만, 네놈은 왜 그리 마공에 집착하느냐? 정파의 무공이라 하여 나쁠 것은 없다.]

마교가 세상의 변두리에서, 정파에게 탄압받으며 그들만의 마공을 연성한 것은 사실이다.

지나치게 사이하고, 피와 잔혹함을 대가로 힘을 얻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힘을 얻는다’라는 결론은 정파든 사파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마교는 정파의 것을 배우고 빼앗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정파는 마교의 것을 사악하다며 꺼려했지만, 마교는 힘만 얻을 수 있다면 방법은 상관없다는 주의니까.

하지만, 그런 면에서 청유백의 정파 무공 혐오는 기이할 정도였다.

[그저 길을 걷는 방법의 차이일 뿐이야. 그 방향은 같단 말이다.]

하지만 청유백은 차갑게 단언했다.

‘그 속도와 성취의 정도는 분명하게 달라지지 않나.’

마공과 정파 무공의 차이.

그것은 사악함과 무자비함, 다루는 기운의 사이함 따위로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단코, 가장 눈에 띄고 직관적인 차이를 고르라면.

무엇보다도, 그 무공을 익히고 성취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이었다.

마공은 같은 시간을 들이는 정파의 무공보다 수배에서 수십 배는 빨리 강해질 수 있다.

물론 마냥 좋지는 않다.

명확하게,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용납할 수 없는 부작용도 있다.

[그 성취가 목숨을 불태워서 얻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알 터인데도? 그 불태워지는 목숨이 네놈의 것이라도 그리 말할 수 있느냐?]

위험함이라는 것은, 곧 생명을 담보로 잡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담보로 잡힌 목숨이 날아가는 일이 수시로 발생한다.

아이 천 명을 키우면 구백 명은 죽고, 구십 명은 그럭저럭의 무사가 되며, 아홉 명은 고수가 되고, 한 명이 비로소 절정의 경지에 오른다.

그것이 바로 마공이 세외마도(世外魔道)라 배척받는 이유였다.

그 수많은 목숨을 밟고, 당연하다는 듯이 목숨과 피를 취하는 것이 바로 마공을 연마하는 길이니까.

그리고 그것은, 천마라 하여 그다지 다를 것도 없다.

어찌 강함에 귀천이 있으며, 그 길에 차도가 있을 수 있을까.

‘필요하다면, 당연히.’

청유백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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