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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31화 (31/200)

제31화. 천마지회, 개시 (1)

손님? 무슨 손님?

청유백은 고개를 갸웃하며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저를 찾아올 만한 손님이 있던가?

사흘 전까지는 그나마 청궁우─손님이라 할지 손놈이라 할지 미묘하겠지만─ 정도가 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전혀 모르겠다.

게다가 오늘은 천마지회의 당일.

아닌 게 아니라, 당장 몇 각 후면 미시(未時 : 약 1시)를 알리는 종이 울릴 것이고, 청유백은 당장 그때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의문은 금방 풀렸다.

“…당신, 저한테 할 말 있지 않나요?”

대뜸 자신을 찾아와서는 뚱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는 여자.

녹지연을 마주 보며, 청유백은 이 여자가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지 생각했다.

“음, 전혀 모르겠는데.”

“아니 뭐, 가령 고맙다든가! 그런 말 있잖아요?”

고맙다?

감사 인사 말인가.

“아, 그런 걸 좋아하나?”

녹지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하느냐, 아니냐로 묻는다면 좋아하긴 하지만… 아니,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어려워요?”

“아니, 전혀 어렵지 않지.”

세상에는 가끔 그런 부류가 있다.

물질보다 마음의 양식을 중요시하고,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 있다 생각하는 부류.

딱히 무언가 대가가 없어도 마음 움직이는 대로 사람을 돕는 부류지만, 감사 인사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가끔씩 있다.

그리고 청유백은 그런 이들을 꽤 좋아하는 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부려먹기 간편했으니까.

고작해야 자존심을 굽히지 않으려고 그 말 한마디를 아끼는 것은, 그야말로 심한 낭비였다.

“그래, 고맙다.”

청유백이 대충 고개를 꾸벅이자, 녹지연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웃었다.

“지난번도 빚, 이번 일도 빚. 이것저것 진 게 많으시네요?”

“말은 바로 해야지. 지난번은 공정한 거래였지 않나?”

“혼자 할 말만 하고 가버렸으면서요? 세상에, 철면피가 따로 없군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그건 네가─”

청유백과 녹지연은 방문 앞에서 의미 없는 말싸움을 몇 번이고 주고받았다.

녹지연이 ‘어쩐지 당신 시비가 엄청 고달픈 낯빛이더라니 이유를 알 것 같네요’라는 이야기를 꺼낼 즈음, 청유백은 슬슬 이야기가 산으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천화가 언질을 주었다.

[저 아이, 따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농담 따먹기만 계속하고 있을 게냐?]

‘그건 무슨… 그걸 어떻게 아나?’

[여인의 마음도 모르는 눈치 없는 놈. 네가 하고 싶은 말 있냐고 물어본 적은 있느냐? 남이 먼저 화두를 꺼내야 할 수 있는 말도 있느니라.]

‘…….’

…그런가?

솔직히 자신은 없다.

청유백은 상대방을 열 뻗치고 짜증 나게 하는 화법에 대해서 말한다면 책으로 열 권짜리 대서사시를 짜낼 수 있을 정도로 통달했다 자신한다.

하지만 반대로 상대방의 환심을 사는 화법에 대해서는….

…영 글쎄올시다?

‘아니, 칼쟁이가 칼질만 잘하면 됐지 무얼.’

환심 같은 거 사서 뭐하나?

비슷한 거─보통 공포라고 한다─ 칼질 몇 번이면 살 수 있는데.

지금껏 살면서 그런 거 몰라도 멀쩡히 잘 살았다.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멀쩡히’인지에 대해서는 조금 회의감이 들기는 했지만, 하지만 그래, 나름 선조의 조언 아닌가.

청유백은 천마혼의 의견을 수용하여 근엄하게 내뱉었다.

“그만. 농은 여기까지 하지.”

솔직한 마음으로는, 농이 아니라 나름 진심으로 대했던 것이었지만.

“하고 싶은 말이 뭐냐? 다른 용건이 있을 텐데.”

청유백의 말에, 녹지연은 지금껏 없던 밝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티 나나요?”

“…조금?”

[많이.]

“아니, 많이.”

…아무튼 그런 걸로 치자.

녹지연은 숨을 후욱 들이켜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털어놓았다.

“있죠, 말 안 하려 했는데…. 당신이 제 생각과는 많이 달라서요.”

“어떤 의미에서?”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가 필요한 건 ‘쓰레기 공자’ 청유백이지, ‘청가의 후계자’ 청유백이 아니에요.”

“이해가 힘들군, 나서지 말고 살라, 이 소리인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어려운 걸 바라는구나.”

청유백은 제 실력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청궁우를 죽도록 팬 것도 어느 정도는 과시의 목적이었다.

실력을 감춤으로써 얻는 이득이 대체 뭐가 있겠는가.

‘뭐, 저보다 강한 자들로부터의 압박을 덜 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

[멍청한 소리를. 어떤 할 일 없는 종자들이 그런 짓을 하더냐?]

청유백이 하고 싶은 말을 그녀가 대신해 주었다.

그 말대로, 마교의 인간들은 저보다 약한 자를 업신여기고 무시할지언정 견제는 하지 않는다.

차라리 그럴 시간에 자신을 더 수양하여, 저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놈을 제칠 생각을 한다.

약자에 대한 견제라?

‘권력에 집착하는 비겁한 정파 나부랭이 새끼들이나 할 법한 발상이지.’

물론 저 위의 높으신 분들─

벽에 막혀 더 이상 정진을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면 또 모른다만.

‘최소한, 이 나이대의 아이들이 할 일은 아닐 테지.’

힘을 숨길 바에는 차라리 지금 있는 것보다 더 커보이게 과시해서 무시 받는 시선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낫다.

그런 그에게 굳이 ‘쓰레기 공자’라는 머저리 같은 호칭을 달고 살라는 것은 심히 어려운 부탁임이 분명했다.

대체 힘이 있는데 왜 과시하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그러게요. 왜 이렇게 어려운 일이 됐을까요? 분명 반년 전의 신년회 때 봤던 청유백은 이런 능구렁이가 아니었는데요.”

“그간 몸에 좋은 걸 많이 먹었는가 보지. 가령 네가 준 독 같은 거.”

“…농담이 많이 늘었네요.”

녹지연은 청유백의 말을 그저 웃어넘겼다.

그녀는 분명히 그가 어떤 영약의 독성을 중화시키기 위해 천주혈독을 섭취했다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 이외에는 현실적으로 그 극독을 먹고서 무사할 방법이 있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좋아요. 당신이 보름 동안 무슨 수작을 부렸든, 뭔가 달라졌다는 건 인정할게요. 천주혈독을 망설임 없이 삼킨다 했더니, 어지간히도 좋은 걸 먹었나 보죠?”

“대충 그렇지.”

“완전히 속았네요. 영락없이 누굴 죽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흐음.’

그녀가 뭔가 잘못 알고 있는 듯했지만─물론 그녀가 알 수 있는 정보로는 최대한 정답에 근접한 것이었다─ 굳이 그 사실을 정정해 줄 필요는 없으리라.

청유백은 히죽이며 대꾸했다.

“그래서, 손해라고 생각하나?”

“됐어요. 어차피 준 것은 준 것이고, 어떻게 쓰든 그건 당신의 몫이죠. 강해졌다는 것도 인정할게요.”

녹지연은 뜻밖에도 선선히 인정했다. 청궁우를 쥐어 팬 그 광경을 보고서도 청유백을 ‘쓰레기 공자’라 칭할 수 있는 놈은 많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녹지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보름. ‘얌전히 살라’라는 것은 괜히 나서다 죽지 말라는 소리예요.”

“호오?”

청궁우를 잡았는데도?

청유백은 당연한 의문을 표했다.

물론 청궁우가 백 년 전에 비해 평균 이하의 수준인 것은 인정한다.

차라리, 빌어 처먹을 곤륜의 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그 청률 놈이 실력은 더 나았다.

하지만 그것이 청궁우가 쓰레기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청가의 훈련생들 중에서 그래도 그만큼이나 뻗댄다는 소리는, 나름의 뒷받침되는 실력이 있었다는 소리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녹지연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청궁우는 그냥 망나니예요. 제 엄마 그림자를 못 벗어나는 망나니.”

“그래도 한자리 뻗대지 않았나?”

“정말 그랬나요? 애초에 청궁우가 그리 훌륭했으면 진작에 청가의 후계자 셋이 전부 정해졌겠죠. 십 년 전에 방에 틀어박힌 당신이랑 아직까지 비교됐는데, 그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그리 생각하면 또 맞는 말이긴 하다.

확실한 후계자로 결정하기에는 그 실력이 미진했다는 건가.

“그럼, 진짜배기 후기지수들의 수준은 어떤지 들어나 볼까?”

질문의 뜻은 명확했다.

말이나 해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어떨지 한번 보자.

녹지연은 순간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지만, 결국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뭐, 돈이나 밝히는 황가 놈들은 그렇다 치고, 적가의 적철진이나, 묵가의 묵초련, 백가의 백소상….”

녹지연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의도는 다분히도 보였다.

청유백이 대답해주길 바란 것이다.

그를 알아차린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며 그 기대에 호응했다.

“…그리고 너로군?”

“후후, 확언은 하지 않을게요.”

녹가의 장녀, 녹지연.

그래. 자만할 거라면 일단 자신부터 이기고 하라, 그 소리인가.

‘그리 먼 미래가 아니겠다만.’

일단 청유백은 침묵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튼 그래요. 당장 당신의 형들만 하더라도, 특히 대공자인 청명휘는 벌써 절정 고수와 비견해도 밀리지 않는다고 명성이 자자하던데요. 마두급의 한 자리를 차지할 거라던데….”

청명휘라.

드디어 그 이름이 거론되는가.

소혜에게 이름만 들었을 뿐이지, 얼굴조차 보지 못한 인간이다.

[본녀도 본 적이 없는 것 같구나.]

천마혼이 그리 말한다는 것은, 아예 시야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소리. 뭐,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폐관수련 중이라고 했던가? 슬슬 나올 때가 되었겠지.’

청유백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기대되는군.”

“아니, 기대가 아니라 긴장을… 어휴, 됐어요. 그럼 그렇죠.”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청가는 한때 줄곧 육대가의 필두를 차지했었다.

당연한 일이다. 강자존의 세계인 마교에서, 무공의 중심을 세우는 것이 바로 청가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청가의 대공자라 함은 즉, 마교 후기지수를 대표하는 기대주의 하나.

어찌 기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있겠는가.

‘설마 그놈까지 청률처럼 곤륜의 무공을 배우지는 않았어야 할 텐데.’

만에 하나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그건 정말 끔찍한 일일 테다.

백 년 사이에 마교에 일도 보통 일이 생긴 게 아닐 테니 말이다.

‘너는 아는 것 없나?’

[본녀가 아는 것은 네 몸에 새겨진 기억뿐이니라. 내 사후부터 네가 태어나기 전까지의 일은 알 턱이 없지.]

맞는 말이었다. 청유백은 쉽게 수긍했다.

그것은 다음에 알아보기로 하고, 우선은 눈앞의 녹지연을 돌려보내야 할 터.

청유백은 대충 대꾸했다.

“어차피 천마지회까지는 사흘. 그사이 무슨 일이 터지기라도 하겠나? 난 그리 적이 많은 사람이 아니야.”

…아마도?

[아마도.]

그렇단다.

지금의 저는 본래 청유백에 대해 모르지만, 본래 청유백의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천마혼이 그리 말했다.

녹지연은 미심쩍은 눈치로 청유백을 째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뭐 좋아요. 기대는 않겠지만, 뭔가 사고는 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가급적으로 노력은 해보지.”

“알겠다 한 마디가 안 나오는군요…. 난 왜 이런 사람을….”

녹지연은 짐짓 눈물을 훔치는 척하며 등을 돌렸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그녀의 말은 전부 전한 것일 테니, 굳이 더 한담을 나눌 이유는 없었으리라.

“아, 맞다.”

“뭐냐.”

“조심하세요? 목숨 간수 잘 하시구요. 빚 갚기도 전에 죽어버리면 말짱 꽝이니까.”

조심? 뭘?

청유백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물으려던 찰나, 녹지연은 질문할 틈도 주지 않고 나가 버렸다.

‘쯧, 괜한 걱정을.’

쓸데없는 걱정만큼 불필요한 것이 또 없다.

청유백이 그런 독백을 속으로 뇌까리는 한편.

[어휴.]

천화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뭐가 그리 불만이야.’

[네놈이 불만이다. 네놈이! 걱정을 해 줘도 한다는 말이 ‘필요 없다’인 게 말이나 되냐!]

‘네 할 일이나 좀 하지 그러나?’

[흥, 걱정 마라. 네 멍청한 주문대로 잘 해주고 있느니라.]

사사건건 시비를 틀며 싸워대는 둘이지만, 청유백은 그녀를 깨운 것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좀 오지랖이 넓은 것이 단점이기는 하다만, 그녀가 이 몸에 있음으로써 얻는 이득도 명확했으니까.

[본녀를 어중이떠중이와 같이 취급하면 곤란하지. 고작 이 정도 행공은 말하면서도 할 수 있느니라.]

좌선, 그리고 운기행공.

본디 체내의 내공을 쌓기 위해 가장 많이 반복하는 행위다.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대자연과 접촉하여 그 기를 흡수하고, 신체의 기맥을 한 바퀴 돌아 자신의 단전에 내공을 쌓아 나가는 것이다.

이를 대주천(大周天)이라 한다.

당연히 그중에는 필연적으로 큰 집중력이 요구되고, 움직일 수도, 말할 수도 없이 계속 몇 시진이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천마혼이 깃든 천마는 경우가 다르다.

운기행공을 천마혼에게 맡긴 채, 자신은 다른 행위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살아 숨 쉬는 그 어떤 때에도 계속해서 내공이 쌓여가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물며 지금의 몸은 주변의 기운을 자연적으로 흡수하는 구마지체.

청유백은 지금 남들의 수배는 되는 효율로 내공을 쌓아가고 있었다.

분근연혼으로 몸을 연마하고, 천화의 운기행공으로 내공을 쌓는다.

뭐가 어찌 됐든 결국은 효율 좋은 수련일 뿐인지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은 변치 않았지만, 고작 보름 전의 그 쓰레기 같은 몸뚱어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변모하여 있었다.

‘청률쯤 되는 녀석이 지구전으로 끌고 가면 조금 힘들겠지만….’

정면으로 맞붙는다면, 웬만하면 승리를 장담할 수 있으리라.

─데엥 ─데엥.

저 멀리에서 미시(未時 : 약 1시) 초를 알리는 종이 울려왔다.

천마지회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

‘이제 나가야겠군.’

[빨리빨리 움직이거라.]

청유백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방구석에 던져둔 칼을 둘러맸다.

지난번에 살수 놈에게 빼앗은 그 칼이었다.

천마지회에서 새 무기를 얻을 수 있다고 들은 터라 관리를 안 했더니, 영 모양새가 좋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별수 없다. 이것 하나라도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결과는 전혀 다를 테니까.

청유백은 혀를 차며 아쉬운 대로 낡은 칼을 들었다.

‘쯧, 어쩔 수 없지.’

[그러게 본녀가 진작에….]

‘어유, 알겠습니다. 마님.’

땍땍거리는 천화의 잔소리를 사전에 차단하고, 청유백이 방문을 여는 그 순간.

─툭, 데구르르.

심지가 타오르는 흑색의 구가 청유백의 발치로 날아 들어왔다.

어딘가 묘하게 익숙하고, 위협적으로 타들어가는 심지가 인상적인─

─폭탄.

“이런, X발.”

천마지회의 시작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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