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화. 누가 결정했느냐 물었다 (7)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구나?]
들려온 것은 여인의 목소리.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내공에 소리를 담아 목소리를 전하는 전음도, 의지로서 뜻을 전하는 전설의 어기전성(語氣傳聲)과도 다른 무언가.
마치 자신의 뇌리에서 곧장 속삭이는 듯 들려온다.
처음 듣는 목소리였음에도, 청유백은 그것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망할, 이제껏 뭘 하다 이제야 깨어났나.’
천마혼. 선대 천마의 혼백.
무려 이레나 되는 침묵을 깨고, 드디어 상단전과 함께 깨어난 것이었다.
[세상에, 고놈 참 말본새 보게나. 본녀가 누군 줄 알고 그런 망발을 하느냐? 본녀의 때에는 말이다….]
한순간 선대의 천마 중에 여인이 있었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청유백은 표독스럽게 뇌까렸다.
‘도울 수 있다면 빨리 해라.’
[거 참. 여흥을 모르는 놈이로세.]
청유백은 지금 이 몸의 고통을 다스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한계였다.
열닷새를 자지 않고, 이레를 고통 속에서 견뎌내며 여기까지 왔다.
이 천마의 혼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다만, 상단전을 깨우기 위해 사용하고 있던 마기를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게 된 것 만으로도 상황은 크게 변한다.
‘지금이라도 이 향낭은 태워 없앨 수 있다.’
의심이야 사겠지만 증거가 남지 않으면 무엇도 할 수 없을 터.
하지만 청유백은, 이왕 이렇게 된 것 천마혼인 그녀를 지켜봤다.
[네 몸을 조금 빌리겠느니라.]
천마혼은 강림한 몸의 기억을 읽을 수 있을뿐더러, 한정적으로나마 그 몸을 움직일 수도 있었다.
이를 통해 전대 천마의 심득을 몸에 새기는, 이른바 ‘계승’의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하지만 글쎄,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항상 만들어진 이유대로 쓰이지는 않는 법.
얼마든지, 다른 편법으로서 이용할 수도 있었다.
청유백은 제 의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천마혼인 그녀가 제 손에 마기를 집중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뭘 하려는 거지?’
[이왕 네놈이 재밌는 몸을 지니고 있지 않으냐. 제대로 쓰지 않으면 실례인 일이지.]
청유백의 몸이 멋대로 움직였다. 향낭을 가슴팍에 가져다 대어, 그것을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아직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였기 때문에, 조금의 기묘함은 있을지언정 의심을 사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찻잎이 듬뿍 머금었던 독기는 청유백의 심장으로 스며들어 왔다.
‘이건….’
한순간에 일어난 일.
찰나조차 되지 않는 시간이 지나고, 청유백은 어느덧 제가 쥔 향낭의 독기가 거짓말같이 사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허, 재밌군. 주변의 기를 흡수하는 구마지체의 성질을 증폭한 건가?’
청유백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마공이 아니었다.
마교의 마공은 패도적이어서, 무언가와 상생과 조화를 추구하기보다는 강제로 결과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사용한다.
가령, 상대방의 내공을 빼앗는 흡성대법(吸星大法)이라는 무공은 상대방의 기맥을 특수하게 뒤틀어, 강제로 내공을 강탈해 오는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그녀가 행하고 있는 것은 조금 다른 무언가다.
본래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이 몸의 특질을 최대한 발휘하도록 흐름을 만들었다.
혈도를 자극하고 독기를 수월히 빨아들일 수 있도록 마치 마중물처럼 마기를 끌어올리곤, 마치 그것이 원래 있었던 자리라는 양 자연스럽게 독기를 빨아들였다.
‘훌륭하군. 마기를 이 정도까지 고요하게 통제하다니.’
역시 천마혼은 천마혼. 전대 천마의 혼백이라는 것은 그저 멋으로 부르는 칭호는 아닐 테다.
[흐흠, 조금 더 본녀를 우러르는 것이 좋다. 애송아.]
가만히 있으면 대단타 해 줬을 텐데, 굳이 입을 놀려 평가를 깎아먹는 천마혼을 뒤로 하고.
청유백은 열심히 열변을 토하는 녹운표를 쏘아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녹운표는 무릎을 꿇은 청유백을 향해 삿대질하며,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장로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멀쩡할 리가 없지! 보시오, 독이지 않습니까!”
“시끄럽습니다. 멀쩡하니 조용히 좀 하십시오.”
“하! 무슨 수를 쓴 것인지는 모르나, 어차피 이번에도 견디고 있는 것일 터. 만용 부리지 마시오!”
“글쎄요. 만용인지 아닐지는.”
청유백은 지금 여느 때보다도 맑은 정신이었다.
청유백은 두통이 깨끗이 사라진 지금의 감각을 만끽하며, 숨을 한껏 들이쉬었다.
“시험해 보면 알 테지.”
그리 말하며 청유백은 평 부인이 든 은그릇에 친히 향낭을 기울였다.
거진 향낭에 든 찻잎이 반 정도는 쏟아질 정도였다.
“…나를 능멸하는 것인가?”
평 부인은 당장에라도 찢어죽일 듯 청유백을 노려보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능멸이라니요. 말씀이 심하십니다, 평 부인.”
“뭐라?”
대답한 것은 유 부인이었다.
산뜻하게 웃으며 말을 이어가는 그녀는, 한순간에 소란스러웠던 장내를 조용히 만들었다.
“방금 전, 저 아이가 차에 독이 없음을 증명하지 않았습니까? 차 맛은 좀 쓰기야 하겠지만, 못 마실 정도는 아닐 테지요.”
쐐기를 박는 듯한 유 부인의 말에, 청유백은 호응하듯 은그릇을 잡아 삼매진화를 발동했다.
그릇의 물은 순식간에 끓어올라 뒤섞인 찻잎은 금빛으로 물들었고, 한순간, 청유백과 평 부인의 눈빛이 교차했다.
“허, 방금 쓰러진 것은 무어라 변명할 생각이지? 그것이 독기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무어란 말이냐.”
청유백은 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잠을 통 못 자서 요즘 두통이 골머리를 썩이는군요. 심려를 끼쳐드릴 생각은 없었습니다.”
“…좋다. 네놈이 끝까지 발뺌한다면, 내가 증명해 주겠다.”
더 이상의 기싸움은 무의미했다.
의견은 이미 갈렸고, 청유백은 한순간 쓰러지나 싶었지만 어떠한 외상의 증세도 보이지 않았으니 더 이상 추궁하기도 어려울 터.
평 부인은 단숨에 그릇을 기울였다.
“부, 부인! 안 됩니다!”
녹운표는 기겁하며 평 부인을 말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평 부인의 목울대는 이미 몇 번이고 울렁이며 방금 우린 차를 목구멍 뒤로 넘기고 있었다.
“……!”
─쩔그렁.
다시금, 바닥과 금속이 부딪치는 조용히 울리고.
평 부인은 똑똑히 보라는 듯 가주와 장로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나.
“……?”
“멀쩡하지 않소?”
그리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잘 보라는 듯 팔을 뻗어도 무언가 변화는 없었다.
칠공독은 섭취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극독.
어떤 형태로든 그 증세가 피부 위로 나타나야 할 테지만, 평 부인은 겉으로 보이는 어떤 부분에서도 특이점을 찾을 수 없었다.
급기야 녹운표조차도 당황하여 눈을 부릅떴다.
“허, 허어…? 이, 이럴 리가….”
그는 진실로 당황했다.
분명, 자신이 직접 저 주머니에 용독을 하고, 그 주머니를 소혜에게 쥐여주기까지 했거늘.
대체 어찌 된 노릇이란 말인가.
‘이 재판이 열리고, 저것을 쥐고 있을 때에도 분명한 독이었는데!’
분명, 분명 저 청유백이라는 자가 무언가 조치를 취한 것이 분명했다.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인지조차 모르지만 그렇게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어찌 증명할까.
당황한 것은 평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돼. 이럴 리가….”
가슴의 격통도, 쥐어짜는 듯한 두통도 없다.
‘저 쓰레기가 무릎 꿇은 것이, 정말 독 때문이 아니었다고?’
대체 어떻게!
모두의 상념이 당혹으로 가득 찼다.
혹자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또 혹자에게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두 부류가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저 단 하나.
‘정녕 저것이 쓰레기 공자라 불리던 청유백이란 말인가?’
모두의 뇌리에 그 생각이 스쳐지나감과 동시에, 청걸명의 입가에도 미소가 내걸렸다.
“흐음.”
작은 탄식.
하지만 그 소리가 뜻하는 바는 이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더 이상, 누구의 변론도 듣지 않겠다는 선고.
즉, 결정을 내렸다는 신호였다.
“결론은 지어진 것 같군.”
청걸명의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그의 뒤에서 묵묵히 대기하던 악웅이 앞으로 나섰다.
물론 그 또한 청유백을 보는 시선은 경탄에 물들어 있었지만, 그것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뭣들 하느냐. 부인을 창운각으로 모시거라.”
“말도 안 돼. 이럴, 이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평가가 청가에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요! 이리 저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저가 청가를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했던가.
평가, 평천상단이 지금껏 청가를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데!
‘내가, 내가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데!’
“가주, 당신이 어찌 제게 이러신단 말입니까!”
“주었지. 그랬었지. 해서… 나도 주지 않았소.”
청걸명은 작게 자조했다.
그리고, 조용히 팔을 들어 청천각의 입구를 가리켰다.
“저 아이를 말이오.”
그곳에는 급하게 달려온 듯 이제 막 문을 열고 모습을 보이는 청궁우가 있었다.
“그대가 이리 선을 넘지만 않았더라면, 궁우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었을 것을.”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청궁우는 급히 달려와 일갈했지만, 주변의 시선은 싸늘할 뿐 어떤 말도 듣지 못했다.
당연했다.
장로들은 이미 누구의 편에 서야 할지 모든 계산을 끝난 이후였고, 아까까지만 해도 평 부인의 편을 들던 장로조차도 함구한 채 분위기를 볼 뿐이었으니.
청걸명이 결론을 내렸다.
“이 자리는 지금 이 시간부로 파한다. 지금은 다른 안건이 있으니 넘어가나, 곧 이 일의 진상을 똑똑히 밝힐 것이다. 이 일이, 누군가의 착각인지.”
청걸명은 평택을 스윽 돌아보았다.
아까까지 멀쩡히 주장을 설파하던 평택은 무슨 연유인지, 공황에 빠져서는, 아직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분명 이 모든 일이 그가 꾸민 것이 분명할 터임에도 말이다.
“혹은, 음모인지.”
이번 일의 전말?
청걸명은 바보가 아니었다.
청가를 이끄는 수장이라는 것은, 단순히 칼 좀 쓸 줄 안다고 앉을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청궁우의 자리가 확고한 것이 아님을 걱정한 평 부인이, 청유백을 이 자리싸움에서 좌절시키기 위해 이 판을 벌인 것이 분명할 터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다.
그는 청가의 가주다.
모두의 말을 듣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사람이지 스스로 말하며 변호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침묵했다.’
모든 것이 제 마음대로 돌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청유백이에게, 지난 잃어버린 십 년간의 재능을 보상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없건만─.
‘너는, 언제 이리도 훌륭히 자라 주었더냐.’
직접 저 아이를 변호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네가 그리 훌륭히 언변을 토하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지금 이 상황에 호응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청걸명은 내공을 담아, 심후한 외침으로써 선포했다.
“천마지회의 세 번째 자리는 청유백에게 돌아갈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동시에, 장로들의 대답이 울려 퍼졌다.
“예?!”
하지만 청궁우는 이 상황을 이해조차 하지 못한 채 발악할 뿐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아버지, 이번 천마지회는 청가의 권세를 다시 드높일 기회라, 그리 말씀하셨잖습니까. 허면, 더욱이 제가 나가야지요!!”
순수한 분노가 모두에게 전해져 왔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지 해명을 요구했지만, 제게 불똥이 튈까 침묵하는 자들뿐. 결국, 유 부인이 살풋 웃어 보였다.
“안타깝게도, 네 어미가 지은 죄가 크단다.”
“무슨… 무슨 죄 말입니까?”
“글쎄다….”
그녀는 방긋 웃을 뿐, 명확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아직 그에 대한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것이 의도적인 수작인지, 혹은 오해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의 누구도 그것이 단순한 오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그것을 죄라 불러도 제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청궁우는 이를 악물며 청걸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 어머니와 저 여자가 사이가 안 좋던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다. 내게 친절히 설명해 주지는 않겠지.’
하지만 괜찮다.
저를 놔두고 어딜 저 쓰레기 놈이 가문을 대표하는 자리에 선단 말인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교의 첫 번째 전통은 강자존.
지금 이곳에서 피를 보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피를 본다면 더더욱 좋다 생각하지만─ 자신은 반드시 천마지회에 나가야만 했다.
“아버지,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더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하겠습니다.”
“허나….”
청걸명이 말꼬리를 흐리며 청궁우에게 냉혹한 대답을 내놓으려는 순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답이 다른 이에게서 들려왔다.
“뜻대로 해주시지요.”
“뭐라?”
장내를 가로지르는 그 발언에, 모두가 그 말의 발언자를 바라보았다.
이 분위기에, 가주의 의견에 정면으로 발하는 그 행위를 대체 누가 한단 말인가.
“진심이더냐?”
“예.”
청유백이 입가가, 호선을 그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