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누가 결정했느냐 물었다 (3)
“……?”
고개를 들어 눈앞을 보니, 어제까지만 해도 제 방과 바깥을 구별해주는 역할을 충실히 실행해 주었던 문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충 고개를 돌려보니, 방 한구석에 박살나서 처박혀 있는 문짝이 보였다.
머리가 돌아가질 않는다.
머리는 아프고, 온몸은 근육통에, 보름이나 자지를 못했으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다.
오늘은 분명 천마지회의 자리를 정하는, 가전회의 날이 아니었던가.
일제히 제 방으로 들어오는 졸병 나부랭이들을 앉아서 올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이건 또 뉘 나라 개가 짖는 소리인지 누군가 설명 좀 해보게.”
요즘 의성어 표현이 참 발달했다 싶다.
사람이면 대화가 통해야 하는데 대화가 안 통하는 걸로 봐선 개 짖는 소리가 맞다.
청유백의 정면에 선 무사가 그를 책망하듯이 이를 갈았다.
“아무리 부와 권력이 탐나기로서니, 명예를 저버릴 줄이야!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아니, 설명 좀 해보라니까.”
권력이고 나발이고 명예는 원래부터 없긴 했다.
아마 대충 다섯 번째 회귀쯤엔가 국밥에 얼큰하게 말아 먹었지 싶다.
어쨌든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인데.
“됐고, 죄목은 뭐냐? 들어나보자.”
가령 뭐 이제라도 ‘너무 잘난 죄’ 따위를 말하며 ‘특별히 긴장을 달래 드리기 위한 연극이었습니다~’
라고 지껄인다면, 당장 죽이지는 않을 정도의 자비는 남아 있다.
물론 저 흉흉한 기세를 보면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하지만 청유백을 잡으러 왔다는 듯, 그의 앞에 서 있는 무사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상상 이상으로 가당찮은 것이었다.
“평 부인을 독살하려 하고 그리도 뻔뻔한 태도라니. 네놈이 그러고도 청가의 사람이냐!”
독살?
“그래? 내가?”
“시치미를 떼는군. 이미 모든 정황과 증거가 완벽히 들어맞는 것을 모르는가!”
알면 질문을 하겠냐.
아니,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다.
뭔지는 몰라도, 이렇게 정성스럽게 자신을 엿 먹일 계획을 짜는 게 평씨 놈들 말고 또 누가 있겠는가.
단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에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구구절절해도 좋으니까 설명이나 좀 해봐라.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는데, 사연이라도 듣고 가자.”
“갈! 네놈은 당장 청천각으로 압송될 것이다. 장로님들께서 처우를 결정하시겠지. 무엇이 되었든, 다시는 태양빛을 보지 못할 테지만 말이다.”
안타깝게도 친절한 설명은 기대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 말과 동시에, 청유백의 양옆에 선 무사가 팔을 끌어당겨 청유백을 일으켜 세웠다.
관절이 삐걱대며, 일으키는 힘을 따라 억지로 억지로 움직였다.
근육은 굳은 채로 경련하며 고통을 전달했다.
이미 며칠간이나 고통 속에서 움직이질 않았기에, 청유백은 손가락을 조금씩 움직이며 감각을 되찾아야만 했다.
분명, 이 짓거리를 주모한 자는 평씨 놈들 중 하나임이 분명할 터.
‘허나, 무엇이 그리 불안하여 손모가지 부러진 놈을 이리도 경계하는지 모르겠군.’
청유백은 눈을 굴려 주변의 무사들을 살폈다.
하나, 둘, 그리고 셋.
‘날 잡으러 온 게 세 명이라.’
이들이 평 총관의 하수인인지, 공무를 집행하는 무사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대충 눈치를 보니 진실로 분노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상황이 평씨 놈들이 꾸민 자작극이라는 것은 모를 확률이 높다.
직접적인 하수인은 아니라는 것.
‘어떻게 할까….’
기껏 해봐야 가문의 경비들, 즉 하급무사들이다.
팔에 힘은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 정도라면 몸을 움직이는 데에 큰 문제는 없다.
조금만 시간을 벌면, 다 잡아 죽이는 것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망이라도 친다면 그때부터가 더 피곤한 일이 될 터.’
게다가 이리 대놓고 누명을 씌우는데, 이 정성스러운 함정을 쉽사리 무시해버리는 것도 예의가 아닌 법이다.
‘일단은 지켜볼까.’
청유백은 이윽고 무사들에 의해 일으켜 세워졌다.
일단은 상황을 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정면의 무사가 수갑을 꺼내 들자, 청유백의 눈빛이 바뀌었다.
“가만히 있어라. 반항하면 즉결 처형하라는 총관님의 명이다.”
“허.”
꺼내 든 것은 특별할 것 없는 강철 수갑.
하지만 그 의미는 특별했다.
마교에서 철 수갑을 채우는 것은 그 사람이 이유 없는 살인이나 상해, 혹은 그에 준하는 범죄를 저지른 자를 연행할 때뿐이었다.
마교의 처벌은 강력하지만, 그 기준이 높아 그리 많은 죄인이 나오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이 이 꼴은, 재판이고 뭐고 이미 저를 죄인으로 취급한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청유백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불쾌하군.’
당해 주는 건 당해 주는 거지만 이건 별개의 일이다.
감히 제게 이따위 대접이라니.
조금 더 지능적인 방법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가령 자신이었다면, 일부러 시치미를 떼고는 가문 밖으로 유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은 다른 곳에서 ‘저놈이 도주하려 한다’는 빼도 박도 못하는 올가미를 씌워, 그야말로 재판 없이 처형까지 몰고 갔을 터.
‘멍청한 놈.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그래, 이 ‘쓰레기 공자’ 따위에게 그리 복잡한 방법을 쓸 가치는 못 느꼈다 그것인가.
청유백은 한탄했다.
‘남을 경멸할지언정 괄시는 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안타깝군.’
청유백은 혀를 차며 수갑을 거부했다.
“치워라. 스스로 가겠다.”
“웃기지도 않는 소릴. 이것은 죄인의─”
“죄인? 재판도 없이 말인가?”
“재판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이미 모든 증거가 완벽하다. 네놈이 시비를 시켜 평 부인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만인이 안다!”
시비? 시비라.
“어쩜, 하나부터 열까지 모조리 모르는 이야기뿐이로군.”
청유백의 수발을 드는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 명뿐이었다.
시비라면 당연히 소혜를 이르는 것이 분명할 테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소혜가 오지 않는군.’
평소 같았으면 저 문이 터지면서 이 머저리들이 들어올 것이 아니라, 소혜가 문을 두드리며 고기반찬을 가져왔어야 함이 옳았다.
‘소혜를 끌어들인 건가.’
그 순진한 어린애를 꼬드겨 함정에 빠뜨릴 방법은 지금 생각할 수 있는 것만 일흔여덟 가지는 되니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지는 모른다.
방법과 경우는 다양하고, 지금 앉아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적다.
청유백이 지금 알 수 있는 사실은 딱 세 가지였다.
“저항하지 마라. 쓰레기 따위가.”
첫째, 저는 지금 온몸이 고통에 찌들어 삐걱대고.
“혹여라도 도망갈 생각은 버리는 게 좋다. 험한 꼴 보기 싫다면 말이지.”
둘째, 두통이 그 근육통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지끈거리고 있으며.
“큭, 그나저나 뇌옥에 떨어진 그 년은 불쌍하게 되었군. 이딴 쓰레기 자식의 명을 따랐을 뿐일 텐데.”
그리고 셋째.
그 이상으로, 드물게도 저가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철컥.
청유백의 손목에 육중한 수갑이 채워지는, 다음 순간.
─콰득!!
“컥… 헉.”
짧은 단말마와 함께, 수갑을 채우려던 무사는 단숨에 문 바깥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방금의 그의 위치에는 쭉 뻗은 청유백의 오른팔만이 조용히 자리할 뿐이었다.
다른 무사들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눈앞의 쓰레기 공자가 그것을 실행했다는 것을 납득하는 데에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미, 미친!”
“죽여라!!”
남은 무사 둘이 즉시 검을 뽑아 들며 달려들었다.
청유백은 두통 때문인지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검날이 제 어깨와 복부를 관통하려 할 즈음, 한순간에 신형을 감추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청유백은 삼 보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두 사내를 노려보았다.
마치 거짓말같이, 방금 전까지는 무엇도 느껴지지 않던 손에는 끔찍이 흉흉한 마기가 둘러져 있었다.
“대답할 놈은 한 놈만 있어도 충분하겠지.”
청유백은 급격히 마기를 끌어올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지금부터 셋을 세겠다. 제 목숨이 아깝다 생각하는 놈은 거수해라.”
어차피 오늘이 가전회의의 날이다.
더는 기만과 여흥을 위해 실력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한나절도 지나지 않아 모두가 알게 될 테니 말이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하나.”
“미친놈!”
“죽어라!!”
하지만 청유백의 권고가 무색하게, 무사들은 생각조차 거치지 않고 곧장 달려들었다.
제 동료가 저만치 날아간 것에 대한 충격보다, 지금껏 ‘청유백’이라는 사람에 대해 지니고 있던 틀에 박힌 생각이 더 큰 것일까.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관용을 베풀어도 듣지를 않는 세상이라니, 참 팍팍하다 싶다.
“둘.”
청유백은 숫자를 셈과 동시에 첫 번째 검격을 피했다.
운신과 동시에 분근연혼으로 인한 근육이 조여들어 왔다.
혈도에서 시작하여 근육이 찢겨 나가는 고통.
상당한 고통이 따르기는 했지만, 이미 보름 전과는 확연히 육체가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청유백은 물 흐르는 듯한 움직임으로 검을 휘두르는 팔의 바깥쪽으로 파고들었다.
왼팔은 움직일 수 없으니 쓸 수 있는 것은 오른팔뿐.
하지만 그것이면 충분했다.
“말도 안 돼, 쓰레기 공자 따위가 이런… 크학!!”
파고듦과 동시에 내지른 주먹은 곧장 인중을 강타했다.
곧장 무사의 상체가 뒤로 젖혀졌고, 다음 순간에는 쓰러지고 있는 사내의 뒤통수에 청유백의 뒤꿈치가 꽂혀 들어갔다.
“칵.”
단말마는 그리 길지 않았다.
나머지 남은 무사 하나는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벙벙한 채 청유백을 바라볼 뿐이었다.
청유백은 덤덤히 쓰러진 사내의 검을 주워들며 마지막으로 샘했다.
“셋.”
그리고 그제야 마지막 무사는 정신이 들었는지 곧장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검은 이미 형편없이 바닥에 떨그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청유백은 싸늘한 눈빛으로 사내를 돌아보았다.
“꿇어.”
“예, 예!”
사내는 방금의 검격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속도로 무릎을 처박았다.
용건은 길지 않았다.
“소혜는 어디에 있지?”
“그, 그 시녀 말씀이십니까?”
“내가 일일이 대답해야 할까?”
쓸데없는 대답으로 같은 말을 두 번 하게 하는 것만큼 하찮은 대답이 또 없다.
그는 그 대답의 대가를 아주 비싸게 치러야만 했다.
“크아아악!!”
비명에 묻힌 둔탁한 충격음이 작게 울렸다.
방금까지 바닥을 짚었던 손가락 중 하나가 순식간에 잘려나갔다.
왼손의 새끼손가락이었던 것은 어느새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대답.”
“지, 징벌방에!! 징벌방에 넣었습니다. 아니, 아마 곧 청문회가 시작되니 증인으로 꺼, 꺼내왔을 수도 있을 겁니다.”
징벌방이라.
가문 내에서 일어진 경범죄에 대해 책임을 물을 때 쓰는 장소, 일종의 감옥이었다.
하지만 그 뜻은 딱히 배려나 걱정은 아닐 테다.
단지, 마교 뇌옥(牢獄)에 집어넣기에는 가문 내부의 일이니 애매했을 뿐이다.
“아직 재판도 뭣도 진행되지 않았을 텐데, 왜지?”
“평 총관님의 독단입니다. 현행범이니 말할 것도 없다면서….”
소혜가 어째서 늦는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이런저런 상황이 계속 겹치니 짜증이 더해져만 갔다.
“평 총관이랑 평 부인. 그놈들 말고 이 일에 연루된 놈이 또 있나?”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평 총관님에게 명을 받아 온 것뿐입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도련님!”
─쾅! 쾅!
사내가 이마를 바닥에 박는 소리가 몇 번이고 울렸다.
오른팔은 이미 공허한 왼쪽 어깨를 지혈하느라 바닥에 닿지 못했지만, 그 정도면 봐줄 만했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가서 네 동료들에게 전해라. 내 기분을 거슬렸다가는 네놈들도 똑같은 꼴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예,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청유백은 대답을 확인하고는 곧장 자리를 떴다.
자신을 청천각으로 부른다는 것은, 재판이든 회의든 간에 이미 준비를 갖추었다는 뜻.
자신을 대우하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건방지게도 이리 함정을 파 주었으니 상대해 주어야 할 터다.
하지만, 지금은 웃음이 나오지는 않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