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22화 (22/200)

제22화. 누가 결정했느냐 물었다 (2)

평 부인의 처소는 청가의 중심에 위치했다.

청천각에서 조금 떨어진, 청가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각.

본래 이곳은 대공자를 낳은 청가의 본부인이 기거하는 장소였지만, 청가의 본부인은 수년간이나 청가를 떠나 제 가문에 기거했다.

때문에, 주인 없는 집이 아니냐며 평 부인이 이곳을 제멋대로 차지한 것이 대략 이십 년 전.

평 부인은 이곳을 몹시 마음에 들어했다.

이곳의 경치가 좋아서도 하나의 이유지만, 이곳이 상징하는 권력과 신분은 그야말로 달콤한 것이었기에.

그야말로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을 개미와 같이 취급해도 용서받는 자리가 아니던가.

청가의 본부인.

그녀에게는 본디 허락되지 않을 그 신분의 상징이 바로 이 창운각(蒼雲閣)이었다.

허나 그러한 곳에 서서 손짓만으로 사람을 부려도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는 항상 존재했다.

지금의 난간 아래로 보이는 이 광경이 얼마나 좋을지는 몰라도, 언제까지고 이 치세를 지속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천마지회가 다가오는 하루하루가 불안하게만 느껴졌다.

무엇이든 끝이 오기 마련이고, 그 끝은 이제 그야말로 코앞에 다다랐으니까.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창운각 꼭대기의 문이 조용한 경첩음과 함께 열리고, 장신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평 총관, 평택이었다.

“퍽도 일찍 오는구나.”

평 부인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 ‘끝’을 미룰 방법을 십 년간이나 준비하며 이제 결실을 맺을 때가 되었건만, 그것에 방해가 되는 존재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분명 그놈을 죽이기 위해 철저한 살계를 마련했을진대!’

평 부인은 지금 이 순간조차도 그 쓰레기 공자의 존재가 언짢았다.

“청유백이 유씨 년을 만났다지?”

“예. 오전에 유 부인의 처소에 출입했다는 연통이 있었지요.”

평택은 담담히 대답했다.

‘별일 아닐 터인데.’

유 부인의 성정을 생각하면 기껏해야 사과나 보상 정도의 용건으로 불렀을 것이었다.

설령 다른 무언가였다 하더라도, 이제 와서 어떠한 변화를 만들기에는 늦은 시점이다.

그의 입장에서는, 왜 그깟 일로 저를 부르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따름이었다.

“걱정하실 만한 일은 아닙니다. 이미 그놈은 끝나지 않았습니까.”

신경 쓸 가치도 없다.

검을 쓴다는 놈이 팔이 부러져 버렸으니, 제가 어쩔 텐가?

부러진 팔을 고작 보름 만에 붙일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장소를 이 청가 내로 한정한다면, 존재하지 않는다 일러도 좋을 것이다.

‘천마지회의 마지막 자리는 궁우로 확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거늘.’

평택은 작게 혀를 찼다.

제 누이는, 평 부인은 대체 무엇이 불안한지 저리 신경질적이란 말인가.

“걱정하고 말고는 내가 정할 일이다, 택아. 이 누이가 그리도 미덥지 못하냐?”

“…그럴 리가요.”

사실이 어떻든 달리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당연한 질문에 당연한 대답일 뿐이었다. 평 부인은 말을 이었다.

“그놈이 청가의 옛 창고에서 무언가를 빼 갔다는 말을 들었다.”

“분명… 그랬지요.”

옛 창고라 함은 백 년 전, 정마전쟁의 사후에 물자들을 몇 곳에 박아 처넣은 창고였다.

당연히 백 년 동안 천천히 정리가 진행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정말 하잘것없는 쓰레기들만 남아 있을 터였다.

그런 창고가 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니 마교 어딘가의 창고에서 대단한 물건이 발견되었다는 말이 종종 들려오기는 했다.

하지만 정말 몇 년에 한 번씩, 잊을 만하면 들리는 소문에 불과했다.

고작 하루 몇 시간 만에 무언가 유의미한 것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장소가 아니란 말이다.

그곳에서 뭔가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다른 방법이 없어 발버둥이라도 친다는 것과 같았다.

“그곳에서 뭔가를 꺼내봤자 낡은 고철이나 삼류 비급 정도일 겁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어떻게 그리 단언할 수 있지?”

“예?”

“만에 하나조차도 용납할 수 없다. 혹여 그놈이 천운이 따라, 그곳에서 모종의 기연이라도 발견했다면 어쩔 생각이냐? 우리 궁우의 앞길에 차질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어쩔 생각이냔 말이다.”

“걱정이….”

걱정이 과하다.

평택은 그리 말하려다 애써 목구멍 뒤로 말을 넘겼다.

기연이 그리 흔하던가.

한평생 살며 기연은커녕 멀쩡한 사람 간의 인연 하나 맺지 못하는 무림인이 수두룩 빽빽이다.

‘하물며 백 보 양보해서, 그런 천운이 있다고 해도 아무 의미 없을 것이 뻔하건만.’

가령 뭐 그냥 기연이 아니라, 천고의 영약이라 불리는 공청석유를 바가지로 퍼먹었다고 해도 남은 시간이 이레뿐임을 생각하면 어찌할 도리가 없다.

‘뭐 죽은 천마라도 살아 돌아오면 또 모를까.’

쓸데없는 걱정임이 분명할 테지만, 계속 짜증을 부리며 이 상태로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원하는 바를 들어 주는 것이 좋을 터였다.

평택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하길 바라십니까?”

“가전회의 날이 오기 전에 처리해. 방법은 상관없어. 어떻게든 그놈을 병신으로 만들던, 그 쓰레기를 내 눈앞에서 치우던 해라!!”

이미 병신인데 대체 뭘 어떻게 만들라는 건지.

놈을 맹인이라도 만들라는 소리인가 싶다.

하지만 어쩌랴.

대답은 정해져 있고, 평택은 정해진 대답을 읊을 뿐이었다.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빌어먹을 유씨 년. 제가 무엇을 꾸며 봤자지. 언제부터 이 가문이 제 것이었느냔 말이다! 안 되지, 안 돼. 청가는 내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느냐?”

평택은 잠시 침묵했다.

동서고금, 언제나 과욕은 화를 부르기 마련이다.

선은 이미 오래 전에 넘었다.

하지만 제 누이는 이미 멈춰 서는 방법은 모른 채, 그저 계속 탐욕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이미 그것을 말릴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렇다면 그저, 계속 부추기며 결과를 이끌어 내야만 하지 않겠는가.

“…예. 물론이지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무엇이든 간에, 이제 와서 못 한다 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허면, 이런 것은 어떠십니까?”

그야말로, 어떤 것이든.

* * *

소혜는 청가의 하인 사이에서 태어나 평생을 청가에서 자란 아이였다.

한 번쯤은 제 또래처럼 놀고 싶다 투정부릴 법도 했지만, 그런 것도 없이 제 밥값을 하겠다며 아장아장 나서는 모습은 뭇 어른들에게 자연스레 미소를 짓게 했다.

어릴 적부터─물론 지금도 나이가 찼다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으나─활기차고 선한 마음씨로 집안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던 소혜였으니, 다른 하인들이 소혜의 부탁을 잘 들어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것은 주방의 책임자인 오 숙수에게도 적용되는 말이었다.

‘쯔쯔, 차라리 주방으로 오지 걸려도 하필 그런 미래도 불분명한 공자님 시중을 들게 되어서는.’

착한 성품 탓인지 불평 하나 없이 따르는 소혜가 가여워서 그랬던가.

가끔씩 화과를 쥐여 주기도 하고,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되도록 도와주려 노력했었다.

청유백의 식단에 관해서도 그랬다.

소혜와 얼굴 붉히며 언쟁하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 무엇을 말하든 대체로 챙겨 주는 편이었다.

그랬더랬다.

대략 보름쯤 전까지는 그리 생각했고, 닷새쯤 전까지도 그런 마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오 숙수도 한계가 다다랐는지, 오늘에 와서는 결국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허, 소혜야. 네가 어릴 적부터 똘똘했고, 넷째 도련님을 오랫동안 모셨다는 것은 알지만 말이다….”

‘차라리 주방에서 일하지 왜 그분 수발을 드는지 모르겠다만’ 같은 투덜거림은 목구멍 아래로 넘겼다.

“아무리 그래도, 보름 연속으로 삼시 세끼를 고기를 찾으시는 것은 너무하지 않더냐? 그것도 전부 다른 종류로 말이다. 채소는 하나도 안 드시고 고기만 쏙쏙 빼 드시는 것도 참.”

“하지만 그래야 빨리 낫는다고 도련님께서 말씀하셨는걸요,”

“내 요리 인생 30년 동안 그런 말은 또 처음… 아니, 됐다.”

오 숙수는 어차피 말해봤자 듣지도 않을 것을 예상했는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음양의 조화나 채식의 중시 따위의 이야기 따위를 설명하려 해봐야 이 아이가 얼마나 알아듣겠는가.

오 숙수는 자포자기하며 말했다.

“후, 됐다. 그분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래도 같이 내어 간 채소도 좀 드시라고 전해드려라. 오늘 반상은 곧 나오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네!”

소혜는 활기차게 대답하고는, 주방 입구 근처에 앉아 얌전히 기다렸다.

점심이나 저녁 즈음에는 누군가 당과를 쥐여 주거나 하는 일도 있었지만, 아침은 주방이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기였다. 그녀에게 신경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이것이 소혜의 하루 일과의 시작 중 하나였다.

아침에 청유백을 깨우는 것이 가장 먼저였지만, 근래에는 깨우지 않아도 먼저 일어나 계시니 아침 반상을 가지고 찾아가는 것이 일과가 된 것이다.

앞으로 반 각 정도나 남았을까.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소혜의 귓가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야, 얘야.”

“네?”

아니, 목소리라 하기에는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전음(傳音).

내공에 목소리를 담아 특정한 사람에게만 전달하는 무림의 기술.

무림인이었다면 대번에 그 목소리가 누군가의 전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겠지만 소혜는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어디선가 들려온 목소리에 소혜는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들려온 주변을 돌아보았다.

주방 바깥 구석에서 주저앉아 저를 쳐다보고 있는 사내 한 명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지만, 대충 복장을 보니 청가에서 일하는 사람 중 한 명인 듯했다.

소혜는 스스럼없이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이신가요?”

“이것 좀 부인께 가져다드릴 수 있겠니? 빨리 가져다드려야 하는 것인데, 내가 다리를 접질러서 말이다.”

사내는 품에서 작은 주머니를 꺼내어 소혜에게 내밀었다. 손바닥만 한 주머니, 향낭이라 불러도 좋을 크기였다.

“으음, 하지만 지금 도련님의 식사가….”

소혜는 주방과 사내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끝을 흐렸다.

저에게 내미는 손이 조금씩 떨리고,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정말로 곤란한 상황처럼 보였다.

곤란에 빠진 사람을 돕는 것은 사람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배웠다.

‘숙수님도 아직 시간이 있다고 했으니까.’

소혜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어느 분께 가져다드리면 될까요?”

“평 부인께 가져다드려라. 오 대인이 보낸 선물이라 하면 바로 알아채실 것이다.”

“으음… 알겠어요. 꼭 빨리 의약전에 가 보시구요!”

“그래, 그래. 아무렴.”

소혜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작은 보폭을 서둘러 움직여 평 부인의 침실을 향했다.

빨리 움직인다면 국이 식기 전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소혜는 그런 생각이었다.

사내는 다다다 달려가는 소혜의 뒷모습을 잠깐 응시하는가 싶더니,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뭐, 네 상전을 탓해라.”

사내는 한순간도 지나지 않아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잠시 후.

“어, 소혜 어디 갔어?”

“예? 숙수님이랑 같이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뭐? 너희랑 기다리는 줄 알았지.”

“예…?”

* * *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일곱 번의 밤과 일곱 번의 낮이 반복되는 동안, 어느덧 몇 시진 후면 청천각의 문이 열리는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현재 시각은 진시 초(약 7시).

이르다면 이르지만, 하루를 시작하기에는 적절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청유백에게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또 미묘했다.

하루의 시작이라 하면 당연히 잠을 자고 일어나는 시간을 일컫는 것일 테다.

하지만 지난 보름간 단 한 순간도 편히 잠을 청한 적이 없으니, 과연 지금을 하루의 시작이라 일컬을 수 있는지는 몹시 애매한 부분이었다.

마치 향시 응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에게 ‘오늘은 일찍 일어났네’라고 인사하는 격이다.

그리고 그는 이리 대답하리라.

‘아직 안 잔 거야, 개자식아.’

후우.

청유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 처먹을.”

언제부턴가 그는 조바심을 느끼고 있었다.

답지 않다는 것은 본인이 가장 잘 안다.

천하의 패도천마가 이깟 몸 하나를 다루지 못해 조바심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불성설이냔 말이다.

‘깨어날 때가 되었는데.’

하지만 벌써 이레나 지났는데도, 이 천마혼이라는 놈은 미동도 없이 계속 조용한 상태였다.

분명, 곧 깨어날 것만 같이 느껴진 천마혼이 죽은 것만 같이 조용했다.

자신의 기억과 기록 어느 곳에도, 천마혼이 각성 직전에 이만큼씩이나 오래 침묵한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두통은 분근연혼의 고통을 넘어설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머리가 울리는군….’

만약 이 상태가 더 계속된다면, 청유백은 분근연혼과 천마혼의 통제를 동시에 한 채로 청궁우와 싸움까지 치러야만 할 테다.

결코 좋은 소식은 아니다.

이기기야 당연히 이긴다.

하지만 저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유 부인에게 만족할 만한 광경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조금 더 만전의 상태가 필요하다.’

지금은 결코 만전이라고 말할 수는 없으리라.

일단 밥이라도 먹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할 판이다. 자지는 못해도, 먹는 것은 멀쩡히 먹어야 그나마 정신이 유지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오늘은 소혜가 늦는군. 무슨 일이지?’

평소라면 지금쯤 아침 반상을 들고 저를 찾아올 때였다.

만전의 상태라면 역시 배를 든든히 채우는 것도 중요하니 괜히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오늘은 왠지 소혜가 늦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쾅!!

여유로운 생각 따위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한 소음.

엿이나 먹어 봐라 싶은 심정이 가득 담긴 것 같은 폭발음이 청유백의 귓가를 때렸다.

“죄인 청유백은 순순히 나와 명을 받들어라!!”

…무슨 상황인지도 모를 대사를 내뱉으면서.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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