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누가 결정했느냐 물었다 (1)
백 년 전은 전란의 시대였다.
이유가 어떠했던, 각자만의 사정과 각자만의 긍지를 가지고서 아무렇지 않게 다른 이들의 것을 빼앗던 시절이 있었다.
때로는 그것이 생명이기도 했고, 다른 이의 긍지일 때도 있었으며, 혹여는 단순하게 재화일 때도 있었다.
무언가가 제 손에서 떠나간다.
전쟁의 본질이 본디 그러한 것 아니겠는가.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고, 죽은 사람의 명예는 되찾을 수 없다.’
죽으면 그걸로 끝, 무언가에 영향을 미치지도, 무언가에 새로운 가능성을 주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전쟁에서 죽은 사람을 추모하는 행위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쓸데없는 감정과 체력의 낭비였으니 말이다.
굳이 패전의 상황 속에서 무언가를 걱정해야만 한다면, 이번의 패전으로 상대가 얻은 것들이 무엇인지 걱정하는 것이 유익했다.
검이든, 창이든, 서적이든, 영약이든 간에, 어떠한 형태로든 우군의 것이었던 그것이 이제 자신들의 목을 겨눌 것은 자명한 일이었으므로.
때문에 무림의 사람들은 죽음에 애통해할 시간에 비밀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깊숙이 숨길 수 있는 것은 숨기고, 비밀에 감출 수 있는 것은 감추었다.
빼앗길 것 같은 물건은 미리 파괴하거나, 기록 같은 것들은 애초에 알아볼 수 없는 저들만의 암호로 적어내는 일도 적지 않았다.
‘각 문파는 각자의 성격에 맞는 선택을 했고, 그중에서도 영약의 취급은 문파마다 그 방식이 상이하게 갈렸지.’
화산의 경우에는 어떠한 경우에도 자문의 영약을 문파 밖으로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
무당의 경우에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비축해둔 모든 영약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전부 소모했다.
그리고 다른 문파들의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그중 소림이 선택한 것은,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는 물건에 영약을 숨기는 방법이었다.
그 비밀을 아는 자는 소림의 내부에조차 몇 되지 않았으니, 그 물건을 빼앗긴다 해도 그저 볼품없는 목불로서의 취급을 할 뿐이었다.
누가 예상했겠는가?
이음새 하나 없이, 통나무를 조각하여 만든 것 같은 목불 안에 천고의 영약이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전생의 패도천마조차도 그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우연의 산물이었다.
더욱이 백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누구도 이 물건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했으리라.
“나쁘지 않군.”
방으로 돌아온 청유백은 제 손안에서 구르는 붉은 환단을 보며 웃었다.
전쟁 속에서도 특급의 지보 중 하나로 불리었던 소환단.
여벌의 목숨이라고까지 불리었던 대환단(大還丹)만큼의 보물은 아니지만, 소환단도 어지간히 뛰어난 물건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것만으로도, 앞으로 이레는커녕 닷새가 지나기 전에 팔을 붙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곤란하게도 문제가 있었다.
‘소환단은 선단에 가까운 물건이다. 이것으로는 내 팔을 치료할 수 없어.’
소환단은 다른 영약들보다도 생기를 훨씬 많이 품는 선단(仙丹)이었고, 그러한 특질 때문에 지보로까지 여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지금의 청유백에게는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소환단을 손에 쥐어 들자마자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불길하고, 기분 나쁘군. 역겹기까지 해. 이게 선천진기를 마기로 물들인 대가인가?’
전생에서는 아무리 마공을 쓰는 인간이었더라도 본질은 변하지 않았었기에, 선기에 큰 반감을 지니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 더부룩하고, 불편한 정도에 그쳤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소환단을 손에 들고 굴리는 것만으로도, 그것의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올라와 토할 것만 같았다.
이것을 쥐고 있는 것은, 그저 이것이 지닌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지, 이것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자, 그러면 이것을 어찌할까.’
어찌 되었든 취하기는 할 것이다.
몸에 독이 된다?
그런 건 이미 지독하게 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오히려 청유백이 바라는 바였다.
어쩌면, 짙은 마기를 띈 마단(麻丹)보다도 청유백이 바라 마지않던 물건이 바로 이 소환단이었다.
당초에 이것을 얻으리라 생각하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이미 소환단을 발견한 시점에서 정해 두었다.
‘분근연혼(分筋燃魂)을 시행한다.’
자신의 마기와 부딪힐 대량의 선기가 동시에 있어야만 펼칠 수 있는 대법.
그리고 이 소환단이라면 그 선기 역할을 충실히 해 줄 수 있었다.
“좋아.”
청유백은 냉큼 소환단을 입에 넣고 삼켰다.
끔찍하게 맛없는 떫은맛이 입안에 퍼졌다. 분명 목구멍 뒤로 사라졌는데도 그 잔향이 사라지지 않아 혀와 이 사이에서 뒤틀렸다.
‘…분명 이런 맛이 아니었는데.’
선기에 반발하니 맛도 변질되어 느끼게 된 듯했다.
대충 달팽이를 으깨서 삶은 다음, 그것을 굳혀 만든 육전을 씹는 느낌 …정도면 적절한 표현이 될까.
청유백은 씁쓸한 표정으로 맛을 무시하며 기의 운행을 시작했다.
녹아내린 소환단의 선기는 즉시 온몸에 뻗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이 호재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몸에 자리하던 마기가 선기와 충돌하여 반발했다.
이대로 조금만 방치했다가는 날뛰는 기운으로 인해 기맥이 끊어지고 단전이 부서질 것이 뻔한 일.
청유백은 전력을 다해 선기와 마기를 통제했다.
“크윽!”
충돌은 그만큼이나 격렬했다.
청유백의 피부 위로 울긋불긋한 핏줄이 도드라져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당연히,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충격 또한 청유백의 몸을 휘감았다.
억지로 이를 악물고 호흡을 가다듬었지만, 절로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만큼은 통제할 수 없었다.
분근연혼(分筋燃魂).
근육을 찢고 영혼을 태운다는 이름을 농으로 지은 것이 아니다.
끔찍한 고통이 온몸을 내달렸다.
‘분근연혼은 천마의 몸을 만드는 대법이자 수련의 과정.’
어차피 언젠가는 겪어야 하는 고통이었고, 이미 일흔여섯 번 겪은 고통이다.
아득한 고통에 정신을 놓을 것 같지만, 이제 와 못 견딜 것도 없다.
‘선기를 먼저 다스린다.’
청유백은 정신을 차리고는 전신의 기맥을 샅샅이 훑어 선기를 한 가닥으로 모아냈다.
그리고 몸을 순환하는 마기의 기맥과는 다른 경로로, 혈도의 순서를 달리하여 그것을 흐르게 했다.
거궐혈, 찬중혈, 중부혈, 천정혈….
‘마기와 엮이지 않게만 하면 돼.’
선기를 천천히 인도하며 기맥을 조정하기 시작한다.
섞여든 선기와 마기를 분리하여, 서로 다른 길에 흐르게 했다.
평소라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리 어렵다지만 이미 수십 번이나 반복했던 작업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과는 별개로, 빌어먹을 두통의 원인인 천마혼 또한 통제해야만 했다.
다행히도 중요한 순간임을 아는지, 지금은 아무 말 없이 잠잠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청유백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히던 식은땀이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좋아, 거의 안정되었다.’
선기와 마기가 분리되어감에 따라 서서히 고통도 잦아들었다.
여전히 불타는 듯한 고통이 온몸을 지배했지만, 어디까지나 비교적 잦아들었다는 소리다.
그리고 이제, 둑을 터뜨려야만 했다.
청유백은 이를 각오하며 악물고는, 선기와 마기가 만나는 혈도를 개방하여 그 둘이 서로 부딪히게 했다.
“크아아아악!!”
망할, 망할, 빌어먹을.
몇 번을 반복해도 이 고통만큼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칼에 베이고 불에 타는 감각에 익숙해져도, 제 근육을 제 손으로 찢어발기는 느낌에 어찌 익숙해질까.
신체의 상반된 기를 일정한 지점에서 스스로 충돌시켜, 몸에 극도의 부하를 가하는 대법.
그리고 그 고통을 이겨내고 몸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면 수백, 수천 배는 빨리 정련된 몸을 얻게 만들 수 있는 대법이 바로 분근연혼이다.
‘정파 버러지들은 시도도 못 할 방법이지.’
청유백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계속해서 기맥을 조정했다.
이 고통을 감수하고, 혈도에서 부딪히는 기운들의 강세를 조정하는 것까지가 이 대법의 마무리였다.
선과 마의 끝없는 싸움.
승자 따위는 없이, 그저 시체로서 땅을 적시고 그 땅을 굳건하게 만드는 싸움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이다.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 방식 자체가 정파의 본질과는 동떨어져 있다.
그러나 아마, 청유백의 기억상으로 분근연혼과 비슷한 결과를 내는 대법이 정파에도 존재하기는 했다.
‘소림의 나한세수경(羅漢洗髓經)이었던가?’
오랜 시간 몸에 쌓아온 선기와 식습관의 조절을 통해 몸 안의 음양이 어쩌고, 건곤이 어쩌고 하며 더 몸을 강건하게 만드는 대법.
아니 식이요법에 가까운 무언가다.
멍청해 보이기는 해도 나름 소림의 것이니, 효과 자체는 있다.
기골을 튼튼하게 만들고 기맥을 넓혀 천천히 몸을 무골(武骨)로 바꾸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청유백은 그것을 앎에도, 시행은커녕 고려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없다 같은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음양의 조화?
건곤의 통일?
‘개나 주라지.’
마공이 왜 마공이라 불리는가.
계속해서 피를 탐하게 만들어서?
뭐, 옳다.
강자가 약자의 것을 취하는 것은 동서고금 당연한 힘의 논리니까.
약하면 피를 흘릴 기회조차 없다.
하지만, 더 바른 정답이 있다.
허면 조화롭지 못하고 사이한 기운을 띠어서일까?
뭐 그것도 옳다.
마공의 근간인 마기가 그러한 기운인 것을 어찌하랴.
조금 더 효율을 추구해서 질보다는 양을 선택했기에 혼탁한 기운이 된 것이니, 부정의 여지는 없다.
‘뭐, 이 외에도 정파 놈들이 주장하는 이유는 많지만.’
정말로 정확한 정답은,
‘그것을 시도할 수 있는 사람보다, 지레 겁을 집어먹고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배가 아프다 그거지.’
자신은 두려워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데, 웬 미친놈들이 목숨을 서슴없이 내놓으며 아무렇지 않게 위험한 길을 간다.
그리고 그 미친놈들은, 그것을 성공하면 정파 놈들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지고 몇 배는 더 빠른 성취를 얻는다.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은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제 자리를 위협하는 것 말이다.
‘정공과 마공을 대관절 누가, 어떤 기준으로 나눈단 말인가.’
결국 나누는 것은 사람이다.
저들의 공포와 그 와중의 이득을 저울질하며, 어떠한 것을 악으로 치부해야 할지 거론한 행위의 결과다.
검의 본질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것이다. 선한 검으로 죽이든, 악한 검으로 죽이든 결과는 같다.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검?
허,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베는 것은 옳다더냐?
‘웃기지도 않는 위선.’
어차피 무공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 있다.
그렇다면, 강해질 것이라면 더욱 확실하게.
살생으로서 이득을 취할 것이라면 더욱 확실하게 취하는 것이 도리어 옳은 길이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몸의 고통은 그대로였다.
팔을 조금만 굽혀도, 허리를 조금만 펴려 해도 몸 전체로 고통이 퍼져나가 쑤셔댔다.
근육이 뒤틀리며 움직일 때마다 부하를 가했으며, 전신이 찢어질 것 같은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후우.”
청유백은 숨을 내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힘을 준 경맥을 따라, 불타는 듯한 고통이 내달렸다.
청유백은 직감했다.
‘대법이 완성되었군.’
본래가 이러한 대법이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이 온몸에 가해지지만 죽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언제나 그를 강하게 만든다.
근육을 찢어발기고 영혼을 불태우면서 말이다.
…이번에는, 그 고통이 여느 때보다도 큰 듯했지만.
‘그래도 걱정한 것보다는 낫다.’
청유백은 뻐근하게 천천히 움직이는 손가락을 굽혀 보았다.
한마디 한마디가 굽혀질 때마다 팔이 경련한다.
이는 대법의 고통도 있지만, 이 몸이 지극히 나약해서인 이유도 있다.
몸이 완성될 때까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 고통을 감수해야만 했다.
계속 움직이기만 해도 근육은 단련된다. 이 상태로 훈련할 수 있는 몸 상태를 만들게 된다면 육체는 더더욱 빨리 성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것도 있었지.”
청유백의 눈에 들어온 것은 남은 비산독 술이었다.
독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이번 한 병을 마실 정도는 되었다.
청유백은 유 부인에게서 받아온 천주혈독을 술에 남김없이 부어버리고는, 곧장 벌컥벌컥 들이켰다.
“크으, 맛대가리 없군.”
뭐, 독을 맛으로 먹겠느냐마는.
화주의 타는 듯한 감각이 목을 덥히고, 한순간에 오른 취기가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었다.
비산독과 천주혈독의 독기는 몸에 서서히 침투하여, 대법으로 인해 고통받는 부위들을 조금씩 치유하기 시작했다.
‘왼팔은… 이레 뒤까지 나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분근연혼은 육체를 본질적으로 강하게 만들지만, 방법론상으로는 수련의 효율을 높이는 것이니 시간이 필요하다.
보름쯤 있다면 완벽히 낫는다 확신했겠지만, 이레 가지고는 어찌 될지 그로서도 확신하기 힘들었다.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인가.’
청유백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고통으로 요동치는 육체와 달리, 천마혼은 언제부턴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머리의 두통도 전신의 두통과 함께 무마되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곧 상단전이 열리고, 천마혼이 부화하는 때가 올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 이레까지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