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9화 (19/200)

제19화. 내가 방법을 줄 수 있다 (4)

청유백의 물음에 유 부인은 고개를 까딱였다.

의뭉스러운 표정과 계속 말해 보라는 듯한 손짓.

‘계속해 봐’라 말하는 그 행동에 청유백은 대답했다.

“청궁우를 죽이는 것은 부차적인 일입니다. 결국, 평 부인이 울부짖으며 죽거나 쫓겨나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것이 아닙니까?”

“결과를 보자면 그리되겠지. 그놈을 죽이는 것은 그저 과정일 뿐이고 말이야.”

“허면 이건 어떠십니까?”

청유백에게 있어서는 청궁우가 죽고 살고는 크게 상관이 없다.

감히 저에게 덤벼든 괘씸한 놈이긴 하지만, 고작 그런 애송이가 도발한 것 정도로 분노할만한 수련을 쌓아 온 것이 아니었다.

그저 중요한 것은, 지금의 자신에게 사실상 가장 도움이 될 만한 이 여자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뜯어낼 수 있는가였다.

“아무리 시국이 시국이라고 하나, 부인께서는 만약을 위해 준비해 둔 영약 하나쯤은 있으시겠지요.”

유 부인은 살짝 뜸을 들이는가 하더니 옅게 웃었다.

부정하지는 않았다.

곧, 그렇다는 뜻이었다.

“흐음, 그래서?”

“그것을 제게 주시지요. 이 팔이 다 낫는다면, 훨씬 더 재미있는 광경을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칠주야.

이미 치료는 어느 정도 가속화되었고, 다른 영약이 있다면 확실하게 치료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유 부인은 그리 신뢰가 안 가는지 회의적인 눈치였다.

“어떤 광경 말이지? 독을 준비한 것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지금의 자네에게 그리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네. 그 작은 기대를 멋지게 배신할 수 있을 정도의 일인가?”

“후회하진 않으실 겁니다. 장담하지요. 동서고금을 통틀어, 언제고 이야기의 줄거리를 미리 듣는 것은 여흥이 떨어지는 일 아니겠습니까?”

본디 이야기의 절정이라는 것은 미리 알고 보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그러니까 말해 줄 수는 없지만, 그냥 한번 믿고 맡겨 보라는 소리였다.

평소라면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허접한 이야기.

근거도 담보도 없는 그저 말뿐인 이야기였지만, 그 어처구니없을 정도의 자신감이 유 부인의 마음에 걸렸다.

“하! 정말로 몰라보겠군. 그 시체나 다름없던 아이가 감히 나와 협상을 하려 들 정도의 사람이 되었어.”

“과찬이십니다.”

“좋아, 재밌구나. 무슨 바람인지는 몰라도 십 년간이나 두문불출한 자네가, 팔만 멀쩡하다면 청궁우를 이길 수 있다는 것인가?”

청유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기지 못한다고?

유 부인이 그리 알아들으며 미간을 찌푸리자, 청유백은 맑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알 만한 분께서 어찌 그리 재미없는 단어를 쓰십니까. 이긴다니요.”

이기는 것이 아니다.

그런 말은 생사를 건 혈투 끝에, 고난과 역경을 넘은 전투에서나 사용하는 말이다.

아마, 이 정도 표현이 옳을 것이었다.

“어찌 사람이 버러지를 밟아 죽이는 일을 이긴다 말할 수 있습니까.”

“허.”

유 부인은 허탈하게 숨을 내뱉으면서도 입꼬리는 묘하게 올라가 있었다.

이것을 멍청하다 화를 내야 할까, 오만하다 질책해야 할까.

어느 쪽도 괜찮았겠지만, 저 확신에 찬 눈빛과 말투는 그녀로 하여금 말려든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입을 열게 만들었다.

“자네가 어딘가 확실히 바뀌었다는 것은 알겠다. 그냥 미쳐버렸다고 해도 그냥저냥 믿을 수 있겠구나. 허나 그래, 대관절 자네의 그 말이 만용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어찌 믿어야 하겠나?”

“믿지 마십시오.”

“뭐라?”

고민조차 하지 않고 즉시 대답한 청유백의 대답에 유 부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저만 믿어 주십시오’라고 사정을 해도 모자랄 판에, 믿지 말라니 무슨 소리인가?

“저 같은 허접쓰레기의 무엇에 담보 삼을 것이 있어서 믿음을 준답니까. 그건 청률 놈을 위해 아껴 두시지요.”

“허면? 나더러 어쩌라는 말인가. 그 말을 믿을 수도 없는데 그저 속는 샘 치고 걸어 보라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냥 걸어 보라니,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법한 사기 아닌가.

만약 그렇다 한다면 유 부인은 사람을 잘못 보았다 할 것이었다.

하지만 청유백은 당당히 대답했다.

“아뇨. 이놈 말고, 부인 자신을 믿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를 믿지 말고, 당신 자신의 안목을 믿으라고.

“오늘날 청률의 말 한마디만을 듣고 이 저를 부를 생각을 한, 부인의 운과 사람 보는 눈을 믿으십시오.”

“허, 실로 오만하구나.”

“이왕 하시는 거, 자신감 넘친다 말해 주시죠.”

청유백의 거의 안하무인에 가까운 태도에 유 부인은 잠시 벙쪄 고민했다.

그제야 자신이 이 어린 사내놈의 말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저 어린놈의 치기라 생각하여 웃으며 즐겨 주었더니, 어느새 머리 꼭대기에 들어앉아 있었다.

보기 좋게 한 방 먹었지만, 그렇다 하여 역정을 낼 수도 없는 상황.

결국 그냥 한번 해보라는 사기와 다름이 없는 말이었지만, 차마 여기서 꺼지라 말하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았다.

유 부인은 결국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 내 한 번은 속아 주기로 하지. 내 안목과, 자네 어미와의 옛정을 생각해서 말이야.”

“감사드립니다.”

청유백의 모친은 이미 고인이라 저로서는 본 적도, 그에 관한 기억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에게 감사했다.

저런 미친 여자에게도 옛정이라 할 만한 것을 남겨놓은 인간이면 어지간한 인격자가 아니었겠는가.

청유백은 영약을 기다리며 웃음 지었지만, 유 부인은 전혀 상상도 못 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안타깝구나. 내게도 영약은 없다.”

“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청유백이 감출 생각도 없이 인상을 찌푸리자, 유 부인은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대답했다.

“무얼, 내가 ‘있다’라고 말한 적은 없지 않은가. 애초에 열흘 뒤면 천마지회다. 그런 것을 아낄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아낄 겨를이 없다, 라.’

틀린 말은 아니다.

청률은 명실상부한 청가의 최고 후기지수 중 하나였지만, 마교 전체를 통틀어 최고냐고 묻는다면 미묘한 감이 있다.

‘녹가의 녹지연. 그 아이와 비교해도… 글쎄.’

지난번 보았던 녹가의 여식 말고는 다른 가문의 후기지수를 본 적이 없어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청유백이 보기에, 과거를 기준으로도 청률은 결코 마교 전체의 최고 수준은 아니었다.

청궁우를 없앤다고 해도, 청률이 유의미한 결과를 내지 못한다면 결국 모두 헛수고.

그렇다면 영약을 남겨 둘 바에야 그냥 청률에게 줘 버리는 것이 나았으리라.

“하지만 그러면 대체….”

그럼 대체 그 당연히 꿍쳐놓은 게 있다는 듯한 표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유 부인은 청유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의문에 답했다.

“하지만 영약이 있을 법한 장소는 알고 있지.”

“있을 법한 장소?”

그건 대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야.

영약이 있을 법한 장소 따위야 저도 안다.

가령 뭐 마교 교주의 보물전이나,강호 무림 어딘가에 있다는 신개(神丐)의 무덤 같은 데 가면 그야 영약이 있을 것이다.

못 가니까 그렇지.

“별로 신뢰가지는 않는 말이군요.”

“미안하지만 그게 최선이다. 정말로, 정녕 없느냐고 묻는다면, 없지는 않으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청유백의 닦달에 유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꺼내 보이려던 물건이 아니었는지, 유 부인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자네 눈으로 확인하는 게 좋겠지.”

유 부인이 그리 말하며 방 안쪽에서 꺼내 온 물건은 작은 목함이었다.

반 뼘 정도 되는 작은 묵빛의 목함. 한눈에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것이, 범상치 않은 빛을 머금고 있었다.

고작 상자가 그러한 정도였다.

그럼 안에 머금고 있는 내용물은 어느 정도의 것이란 말인가.

유 부인은 천천히 목함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찰나, 긴 시간 봉인되었던 목함 안의 향기가 방안에 가득 퍼졌고, 청유백은 목함 안에 들어 있던 영약의 대번에 알아챘다.

…저건.

“…환마단이군요.”

“알아보는군?”

청유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환마단은 마교가 자체적으로 생산해내는 영약 중에서도 충분히 중상급이라 부를 수 있는 수준의 물건이었다.

한 알을 취하면 얻는 내공이 장장 삼십 년 치.

전성기의 마교에서도 그리 많은 양을 양산하지는 못해 큰 공을 세운 자에게나 내려지는 물건이었다.

역시, 누가 청가주의 부인 아니랄까 봐 내놓는 영약도 씀씀이가 크다.

청유백이 저도 모르게 환마단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작은 마찰음과 함께 유 부인의 손에 있던 뚜껑이 다시 닫혔다.

청유백이 무슨 짓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이, 유 부인이 선수를 치며 말했다.

“글쎄, 이걸 선불로 냉큼 줘 버릴 만큼, 나는 인물이 좋지 못해서 말일세.”

“보기보다 속이 좁으시군요.”

“아무렴 자네만 할까.”

회귀를 반복하던 시절에서야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영약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저만큼 귀한 것이 또 없다.

마교에서 환마단보다 윗단계라 말할 수 있는 영약은 차기 천마, 소교주를 위한 신마단 하나뿐이다.

즉, 지금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충분히 큰 값어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혼수로 받았던 물건이지. 아직까지 아껴 두었던 물건이야. 냉큼 내놓기에는 아깝지 않겠나?”

당연히 아깝고말고.

목함의 위에 얹은 손에는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지만, 그녀의 말에는 한 가지 뜻이 더 덧붙여져 있었다.

“하지만 이걸 보여 주신다는 말은 즉….”

“그래. 자네가 나를 만족시킨다면 그때에는 이것을 아끼지 않을 수도 있겠지. 자네의 말대로 나를 만족시킬 만한 광경을 보여 준다면, 기꺼이 내어주도록 하겠네.”

유 부인은 흔쾌히 그리 말했다.

그만큼이나 평 부인을 증오하고 있다는 말의 반증일 테다.

“하지만 뭐, 우선 천운이 따라야 할 걸세.”

“무슨 뜻입니까?”

“난 이것을 내어 주지 않을 것이고, 자네는 팔을 고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한다는 소리지.”

다른 방법이야 이미 찾았다.

지금도 비산독의 독기가 사지의 말단에서부터 녹아들어 치료를 가속하는 중이었다.

‘시간만이 문제될 뿐이지.’

하지만, 그녀는 분명 다른 영약의 소재를 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영약이 있을 법한 장소를 아신다면서요?”

“말 그대로 ‘있을 법한’ 이다. 진짜 있을지, 없을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야. 뭐, 자네가 근성이 있다면 하나쯤은 주워 먹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냥 들으면 농담 따먹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말이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유 부인씩이나 되는 인물이 거짓을 입에 담을 리는 없다.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천운이 따른다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 말하는 것인가.

갑자기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래, 여기서 때려치우겠다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잡고 보는 것이 옳았다.

“어딥니까?”

“백 년 전의 정마대전이 끝나고, 전쟁의 사후처리를 하면서 많은 물품들이 도난당하거나 실종되어 정리에 큰 곤욕을 치렀었다 한다. 알고 있나?”

“큰 전쟁이었으니까요.”

확실히, 당시 마교의 본산이 습격당하면서 이것저것 건물이 많이 불타고, 급하게 귀중품들 옮긴다 뭐다 하면서 소란스러웠었다.

그 탓에 서고 몇 개는 통째로 불타 버리거나 하기도 했더랬다.

십수만 명이나 사는 이 땅에서 일거에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난장판도 그런 난장판이 따로 없었으리라는 것은 쉬이 예상할 수 있다.

한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 당시, 더 이상의 물건의 유출을 막기 위해 물건들을 어떠한 창고에 쑤셔 박아 도난을 일시적으로 방지했고, 그 물건들을 천천히 정리하기로 했었다는 계획이 있었었다.”

있었‘었’다. 라는 말인즉, 없어졌거나 폐기되었다. 혹은, ‘아직까지도’ 정리가 되지 않았다, 라는 뜻.

그리고 그중 후자임을 알았다.

“그 창고에 영약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군요.”

“뭐라 해도 패도천마의 시대였으니, 전쟁 물자로 쓰다 남은 영약이 한둘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실제로, 지금껏 영약이나 비급이 몇 개고 발견되었으니 말이다.”

“그런 곳에 마음대로 들어가도 됩니까?”

“그런 창고가 한둘이 아니다. 그리고 개중 하나는 청가의 가문 내에 있고 말이다. 내 땅 안에 있는 것을 쓰겠다는데, 누가 무어라 하겠느냐?”

‘청가의 가문 내에 있는 창고라.’

확실히 구미가 당긴다.

생전에 준비했던 정마전쟁은 정파 측의 침입으로 순식간에 끝나 쓰지 못한 물자가 산더미였을 테고, 창고에 쑤셔 박힌 것들 중에 후예들이 알아보지 못한 영약이 한둘 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라면.

“백 년이나 지났는데 그게 아직도 다 정리가 안 됐습니까?”

“글쎄 말이다. 그건 백가 먹물 놈들 일이지 우리 일은 아니지 않느냐. 그놈들이 태만한가 보지.”

“…이를 호재라 여겨야 할지.”

백가가 맡은 역할은 마교 내의 총의와 군략의 결정, 이 외 정보 처리 및 기타 내무 잡무 등이다.

허구한 날 무림맹의 제갈세가 놈들에게 경쟁심을 불태우긴 하는데, 지금껏 정리가 안 된 작금의 꼴을 보아하니 역시 백가가 제갈세가만큼은 되지 못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기회로 여겨야 할 때였다.

청유백은 눈을 반짝였다.

“허면, 그곳이 어딥니까?”

“미리 말해 두지만, 어차피 큰 의미는 없을 게야. 그곳은 애초에 쓸만해 보이는 것들은 몇 번이고 들어낸 이후니, 애초에 뭔가 있으리라 기대하지 마시게나.”

“아, 물론이지요.”

웃는 청유백의 머릿속 한켠에서 또다시 환청이 울려왔다.

[기대……극히…충만…….]

기대를 하기는 누가 기대를 하나?

천마쯤 되면 간절히 바라면 당연히 우주가 나서서 하나쯤은 뭔가 쥐여 주기 마련이다. 아마도.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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