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내가 방법을 줄 수 있다 (2)
‘어머니?’
청률의 어머니라.
청유백은 다시금 소혜가 말해 준 청가의 계보를 되새겨 보았다.
청가주의 직계 아들이 넷.
그리고 그 모두가 다른 여인의 배에서 났다.
네 명의 부인과 네 명의 아들.
청유백의 어미는 일찍 세상을 떠나고, 대공자라는 놈의 어미는 가문 밖에 있다 했으니 가문에 남아 있는 부인은 둘 뿐이었다.
‘개중 하나가 감히 날 은 백 냥에 팔아 쳐 넘긴 평 부인이고.’
청궁우의 어미, 평 부인.
몹시 허영심이 많고, 자만이 심하여 사람을 험하게 부린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심지어는 제 권력을 알고 그것을 휘두를 줄도 아는 여인이었다.
그것을 이용해 청유백의 숨통을 조이려 온갖 수작을 부렸으니 말이다.
‘그리고 청률의 어미… 유 부인이라 했던가.’
평 부인과는 반대로,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예의와 인품을 중시한다 하였다.
청가가 마교에서도 알아주는 세력가인 육대가임을 생각하면, 허영이 없는 것이 도리어 특이했다.
하지만 뭐, 눈앞에 있는 청률의 모친이라면 기묘하게도 그럴 법하게 느껴졌다.
‘하긴 자식이 저 모양인데, 호부 밑에 견자 날 수는 없는 법이지.’
아니, 이 경우엔 교주 후보가 될 놈임에도 저리 쓸데없는 인의예지를 가르쳤으니 견부 밑에 견자라 해야 하는가.
하지만 뭐가 되었든, 중요한 점은 그것이 아니었다.
청유백은 말을 이었다.
“왜 유 부인께서 저를 보고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인간이 갑자기 저를 보자고 할 이유가 없다.
차라리 가주가 저를 불렀다면, 팔이 부러진 것에 대해 뭐라도 조치를 취하려고 불렀다 예상이라도 할 텐데, 그녀는 도무지 예상가는 바가 없었다.
청률은 이미 천마지회의 참가가 확정되어 있고, 청유백은 알 바 아닌 남의 자식일 뿐이다.
청유백에게 개입할 여지가 없다.
청률은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건?”
“나도 모른다.”
‘미친놈인가?’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청유백은 가출한 어처구니를 찾아 헤매는 것과 고개를 끄덕이는 것 중 어떤 것을 우선해야 할까 고민하다, 우선은 후자를 택했다.
“몹시 수상하기 그지없다는 걸 알고는 있으신지?”
“알다마다. 그걸 아니 이리 힘들게 말하는 것 아니냐.”
힘들게인지는 잘 모르겠고.
“뭐 예상이 가는 것이라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 말에 청률은 심히 고민하며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잠시 뒤, 청률은 정말로 모르겠다며 말을 이었다.
“정말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한 게 있다면, 요즈음 네가 어딘가 달라진 것 같다고 이른 것뿐이야.”
“…어찌 보아도 그게 원인 아닙니까?”
“글쎄다. 나는 그 외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뭐, 나 외에 누군가에게서 다른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머님께서 너를 불러 무엇을 하겠나? 그저 말이나 몇 마디 나누고 말겠지.”
“제가 그분과 그리 친분이 있었던가요? 요즘은 아닐 테고, 십 년 전쯤엔?”
“아니. 그건 아닐 게다. 최소한 나는 어머님과 네가 어울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흐음.”
쉬이 예상할 수가 없었다.
너무 뜬금없기도 했고, 마땅히 떠오르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다과나 들자고 부르지는 않을 터. 뭔가 목적이 있음이 분명했다.
어쩌면, 저도 청률도 모르는 과거의 약속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지금 그것을 알 방법은 없다.
그런 것을 알기 위해 천마혼을 깨우고 있지만, 지금 천마혼이 제게 줄 수 있는 것이라곤 빌어먹을 두통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에도 찌를 듯한 두통이 머리를 조여 왔다.
어찌 되었든 간에, 지금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
청유백은 결심한 듯 숨을 들이쉬었다. 청률은 말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듯 입을 열었다.
“어찌할 테냐, 가겠느냐? 지금 바로가 좋을 것 같은데.”
“…까짓것, 가도록 하죠.”
“시원시원해서 좋구나.”
어차피 가기 싫다 해도 청률이라면 온갖 미사여구를 준비해 왔을 것이다. 굳이 말싸움을 하며 두통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유 부인이 나를 부른다면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청률이 사과를 하면서 말을 시작한 것을 보면, 어쩌면 어떠한 형태로든 물질적인 보상을 주려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청률은 이야기가 빨리 끝나 기분이 좋아 보였다.
“헌데 그리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구나. 데려가고자 생각한 말들이 전부 쓸모없어졌어.”
“좋은 게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유백아, 지금 내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사람을 조금은 의심하는 것이 좋다.”
“정말로 지금 할 말은 아니군요.”
도둑이 남의 집 담장을 넘어와서 집주인에게 ‘도둑질은 나쁜 겁니다’라고 훈계하는 꼴 아닌가?
하지만, 굳이 대답을 돌려주자면.
청유백은 무덤덤하게 청률을 돌아보았다.
“사람은 때로 행위에 이유를 붙여가며 살지요.”
어떤 것이든, 왜 해야 하는가, 왜 하지 말아야 하는가.
이 경우에는, 어째서 저가 유 부인을 만나야만 하는가.
“헌데?”
“하지만 반대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는데, 어찌 행위에 대한 고민을 한단 말입니까?”
만날 이유가 없다.
그녀가 저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하지만 그렇듯, 만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마찬가지로 그녀를 만나 무엇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 * *
“이곳입니까?”
“그래. 평소에는 이곳에 기거하시지.”
“‘평소에는’?”
“뭐, 워낙에 바쁜 분이시니.”
유 부인의 처소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어차피 가문의 안이니 어디든 별로 큰 차이는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청유백의 방에서 확실히 가까웠다.
이 부근은 인적이 드문 감이 있었으니, 유 부인의 알려진 성정을 생각하면 일부러 이 근처에 처소를 가진 것 같기도 했다.
청률이 먼저 무어라 고하기도 전에, 방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었구나.”
낮게 내려앉았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싸늘한 기운이 느껴지는 목소리.
고작 한마디 말임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 실린 내공은 그녀가 보통의 여인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목소리에 내공을 실어 소리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양을 세밀히 조정하여, 이리 잔잔하게 압박을 가하는 것은 일류 무사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을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고 있었다.
청유백의 머리 한켠에서 고통과 함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
‘안다. 조용히 해.’
계속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했지만, 아직 견딜 정도는 되었다.
표정에 나타날 정도는 아니었다.
청유백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얻을 수 있는 건 얻고, 빨리 끝내고 돌아간다.’
그것이 정보든, 사과의 보상이든 간에.
그리고 마치 청유백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그녀가 말을 이었다.
“안으로 들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테지.”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청률이 앞서가 방의 문을 열자 청유백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겨 안으로 몸을 들였다.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불혹의 여인이었다.
청률의 나이를 생각해 본다면, 이제 마흔 줄 근처의 나이일까.
순진해 빠진 청률과는 다르게 냉철한 눈빛이 곧바로 자신을 응시했다.
유 부인은 손짓하여 앉으라 지시했고,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청유백은 유 부인의 앞에서 마주 앉았다.
“흐음.”
유 부인의 시선은 자리에 앉는 청유백의 상태를 슬쩍 훑었다.
그리고 청유백의 외견에서 무엇을 파악한 것인지, 가볍게 물었다.
“뭣 좀 들겠나?”
“…나쁘지 않지요.”
청유백의 대답에 미소 지은 유 부인은 청률을 돌아보았다.
“율아.”
“예, 어머니.”
청률은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선반 위에 놓여 있던 다기들을 가져와 늘어놓았다.
아직 김이 조금이나마 피어오르는 것이, 저가 올 줄 알고 미리 준비해놓은 것으로 보였다.
“조금 더 일찍 올 줄 알아서 차가 조금 식었네만, 상관없겠지?”
“식은 차도 나름의 풍미가 있는 법이지요.”
“…자네의 모친과 똑같은 말을 하는군그래.”
“그렇습니까?”
청유백은 유 부인이 따라준 찻잔을 만지며 그녀와 눈빛을 마주했다.
청유백은 망설임 없이 그녀가 따라준 차를 입가로 가져갔다.
‘독은 없나.’
이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녀가 저를 생각하는 감정이 악의는 아닌 것 같으니, 그리 생각해도 좋을지도 모른다.
“율이에게 들었다. 자네가 조금은 달라진 것 같다 했지.”
그리 말하는 유 부인은 청유백의 전신을 다시금 훑으며 시선을 마주했다.
청유백은 그녀의 시선에 무엇이 보였을지는 알지 못했다.
지난 일주일간 조금이나마 부풀려진 체구일까, 혹은 부러진 팔에 대한 연민일까.
그도 아니면 꼭꼭 숨겨 갈무리한 마기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일까.
그중 무엇인지, 혹은 또 다른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최소한 그녀가 본 것이 나쁜 것은 아닌 듯했다.
그녀는 웃었다.
“솔직히 말하면 믿지 않았어. 자네를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아마… 반년쯤 전이었던가?”
반년.
청유백이 이 몸으로 깨어난 것은 이제 채 열흘이 되지 않았으니 그때의 기억이 있을 턱이 없었다.
청유백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최소한, 그때의 아이는 어릴 적의 영특함 따윈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어. 마치 움직이는 시체 같았지. 고작 반년 만에 그것이 돌아왔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고 말이야.”
당연한 생각이다.
물건은 고쳐 써도 사람은 고쳐 쓰지 않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그리 쉬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유 부인은 눈앞에 있는 이상하리만치 뒤바뀐 소년이 마음에 들었다.
청유백은 맑게 웃었다.
“그래서, 직접 보니 어떠시덥니까? 만족스러운 변화이신지?”
“무척이나.”
“다행이군요.”
“그때는 미처 몰랐네. 이토록 멋들어진 눈빛을 가진 아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던 것일까?”
“혹은, 고작 반년 만에 사람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지요.”
바뀌다, 라는 게 정말로 인격이 뒤바뀌었다는 소리였지만.
아무튼 간에.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유 부인은 기분 좋게 청유백의 변화를 긍정했다.
그녀에게 세세한 사정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 그가 어떠한 상태인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율아!”
“예, 어머니.”
“나가 있거라. 이 아이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어머니, 허나….”
“어서.”
유 부인은 더 말할 것 없이 밖을 향해 턱짓했다.
“…예.”
청률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야 상대가 청유백이니 무어라 위협이 될 것도 없을 테고, 걱정할 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굳이 청률이 이 자리에 있을 이유가 없었지만, 발걸음이 무거운 이유는 그저 자신이 소외받는 기분이 섭섭한 것 정도일 테다.
청률이 떠나가고 기척마저 없어진 후에야, 청유백은 즐거운 웃음을 지었다.
“얼마나 재밌는 제안을 하려 하시기에 굳이 청률을 내보내는 겁니까?”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투로군?”
그 말에 청유백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야 당연히 모르지요.”
“그렇다면?”
“모르지만, 어떤 이야기를 하시든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청률이 너무 순해 빠졌다는 것만큼은 압니다.”
잠시 간의 정적.
유 부인은 청유백은 기묘한 표정으로 쳐다보는가 싶더니 피식, 웃고는 결국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
처음의 차가운 인상과는 다른 미소가 얼마간이나 이어진 후에야 그녀는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는 청유백에게 물었다.
“그래. 자네는 이 내가 자네를 불러다 고작 뒷수작 따위를 하고자 불렀다 말하는 것인가?”
말 속에서 자신에 대한 자신감과 청유백을 시험하는 어조가 느껴졌다.
하지만 혐오는 없이, 즐거이 궁금증으로서 묻는 얼굴을 한 그녀였다.
“아니라면, 부인과 다르게 저는 사람 보는 안목이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럴 턱이 있다.
유 부인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정확하다. 아주 마음에 드는구나. 공자.”
그녀는 거의 다 식어버린 차에 약지를 넣고는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더니 잠시 후, 차에서 다시금 연기가 피어오르다니 부글부글 물이 끓어올랐다.
‘삼매진화. 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군.’
내공을 이용하여 물건에 불을 붙이는 기술.
적당히 고수라 불리는 부류들이라면 어렵잖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지만, 저리 당연하듯 기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았다.
유 부인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이키며 그 너머로 청유백을 바라보았다.
“이야기가 빠를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지는군. 만약의 상황에는… 조금 거친 수단을 썼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어.”
“하하, 물론이지요.”
청유백은 차갑게 웃어 보였다.
그녀의 말은 ‘지금부터라도 수틀리면 좋게 끝나진 않을 것이다’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과 다르지 않았다.
방금의 차 데우기는 그녀가 가진 내공의 편린에 지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대체 이런 인간이 어찌 조용하고, 나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알려진 것인지 알 수가 없군.’
머리가 지끈거렸다.
천마혼이 계속해서 위험을 외쳤다.
유 부인은 팔을 뻗어 청유백의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그 눈, 나는 자네의 지금 같은 눈을 아주 좋아해. 욕망으로 가득 찬 눈이지. 포기 따윈 모르고,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원하는 것을 쟁취해야만 하는 사람의 눈이야.”
“하고 싶으신 말이 뭡니까?”
“천마지회에 나가고 싶지 않은가?”
당연한 질문이다.
그것은 지금의 청유백이 아니라 다른 누구더라도, 고민조차 않고 고개를 끄덕일 질문이었다.
청유백은 얼굴을 찌푸렸다.
“굳이 물어보시는 의도를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방법을 줄 수 있다.”
팔이 그 모양이 되도록 부러져도.
다른 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생각한다고 해도.
자신은 저를 천마지회에 내보내 줄 수 있다.
그녀는 그리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청유백에 대한 선의로 이루어진 제안이 아님은 그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말입니까?”
“죽일 것이다.”
“누구를?”
“청궁우, 그 아이를.”
아주 간단하게, 마치 길가의 꽃을 꺾는 정도의 단순한 일을 말하듯이.
유 부인은 산뜻하게 내뱉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