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까짓것 만들어 먹지 (5)
청천각의 꼭대기에 위치한 가주전.
청가주의 집무실임과 동시에 침소이기도 한 장소였지만, 근래 꽤 오랜 시간 동안 주인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천마지회는 마교의 수해 예산과 인력이 한 곳에 집중되는 행사였다.
당연히, 이곳저곳에서 협의할 것이나 협상할 것들 또한 수없이 많았다.
가령 특정 상황에서의 군사 배치나, 그 상황에서의 지휘권 여부, 비상사태 발생 시의 책임 등.
실제로는 하잘것없는 것들이라도, 다른 가문들과의 신경전이나 주도권 싸움이 섞여들게 되면 한없이 귀찮아지는 것들 탓이었다.
대교두 악웅 또한 그것을 잘 알았다.
수십 년 전의, 기억도 안 날 어릴 적의 일이었지만, 당시의 마교가 얼마나 바쁘고 혼란하게 돌아갔는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악웅은 지금 눈앞의 사내에게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찾아온 자신의 근황이나, 제 아들의 안부 따위를 묻지 않아도 말이다.
“…….”
잠시간, 붓이 종이 위에서 스치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탁상에 쌓인 온갖 죽책과 서류가 반쯤 치워졌을 무렵, 사내는 고개를 들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한가한가 보군, 악웅.”
“아무렴, 이 늙은 몸이야 가주님께 비하면 한가한 편 아니겠습니까. 언제쯤 다시 출타하실 예정이십니까?”
“이 서류만 처리하면 또 지긋지긋한 적가(赤家) 놈들과 실랑이를 하러 가야겠지. 할 일이 빌어먹게도 많아. 그리고 자네는 그런 내 앞에서 괜히 신경을 쓰게 만드는군.”
“뭐, 죄송하게 됐습니다.”
퍽이나.
대충 대꾸하는 악웅에게 청가주, 청걸명(靑傑銘)은 그리 이죽거리며 붓을 놓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짐작 가는 일이 있는지, 넌지시 악웅에게 물었다.
“유백이의 일 때문에 왔는가?”
유백, 청유백.
과연 가주인가, 관심이 없는 듯 태도를 내비쳐도 상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단숨에 간파했다.
“역시 알고 계셨습니까?”
“내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어찌 모를까.”
“하기사 그렇겠지요. 가주께서 가문 내에 뿌려놓은 세작이 얼마나 많은지, 연무장에서도 그림자가 눈에 밟히덥디다.”
“농은 되었네. 자네가 그 아이에게 그리도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군그래.”
아무리 그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는 해도, 지금의 악웅과 같이 청걸명에게 소식을 알리는 인간은 한둘이 아니었다.
청유백의 팔이 부러졌다는 일 정도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을 테다.
악웅이 가전회의에서 청유백의 편을 든 것까지도 말이다.
그러나 악웅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놈 때문에 온 것은 맞으나, 제가 놈에게 무슨 관심을 가지겠습니까. 오히려 반대지요. 가주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그것을 물으러 왔습니다.”
“내 생각 말인가?”
“예.”
생각.
단순한 말인 만큼, 지금 악웅이 청걸명에게 묻는 것 또한 단순했다.
천마지회의 마지막 자리에, 결국 누구를 앉힐 것인가.
“후우….”
잠깐의 정적이 스쳐 가고, 청걸명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이 무어 중요하겠는가. 나 혼자 가문을 이끌던가? 장로들과 부인들이 잘 결정할 일이지.”
“글쎄요, 고작 반나절 전에도 결정을 내리지 못해 가주님의 의견을 기다리던 그들 말씀이십니까?”
“…….”
청걸명의 인상이 옅게 찌푸려지자, 악웅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지금껏 그리도 애지중지하셨던 아이가 아닙니까. 아무리 십 년이나 썩었다고는 한들, 천재는 썩어도 준치. 생각이 있으셔서 지금껏 방치해 둔 것이 아닙니까?”
“…내 유백이에게 건 기대가 여전하기는 하나, 청가를 욕보일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사지라도 멀쩡했다면 방법을 찾아보았을 것이다. 청유백을 천마지회에 내보낼 방법을.
오직 그것만을 위해 십 년이라는 세월 동안 청유백을 가두다시피 방치해 놓았었으니, 이제 와 포기한다 말하는 것도 심히 힘들었다.
하지만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팔이 부러져서야 어찌하겠는가.
천마지회에 나가도 변변찮은 것조차 보이지 못할 테고, 바깥에서는 청가에 인재가 그리도 없냐며 흉볼 것이 뻔했다.
요즘 평씨 일가가 패악을 부린다고는 하나 청궁우 또한 자신의 아들.
이 무리한 상황에서까지 청유백의 편을 들어 주기는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청걸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악웅, 나는 그 아이가 옛적에 보였던 재능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네. 자네도 봤으니 알겠지.”
“대단했지요. 검에 기운을 실었던 것이 네 살 때였던가요? 천고의 기재가 따로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이나 근래에 청가에 속하게 된 이들은 모를 일이었지만, 십수 년 이전부터 청가에서만 봉사한 이들은 청유백의 어릴 적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다들 각자의 이유로─주로 악평과 소문에 의한 것이었지만─ 청유백에 대한 호감은 말끔하게 사라진 후였으나, 개중 누구도 옛 청유백의 재능에 대해 의심하지는 않았다.
칭찬에 인색한 악웅조차도 말이다.
청걸명은 말을 이었다.
“…이 아이라면 청가를 이끌 재목이 되리라 믿었네. 서유가 내게 맡기고 간 마지막 선물과도 같았음이야.”
“그놈의 구마지체만 아니었다면 말이지요.”
“그래, 구마지체. 그 아이가 지닌 재능도 그것에서 비롯되었겠지만, 결국은 저주나 다름이 없었지.”
구마지체.
청걸명도, 악웅도 청유백의 그 비밀을 잘 알았다.
처음에는 몰랐으나, 여섯 살 즈음에는 심공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기맥이 막혀가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저 빠르게 기를 느끼고 기를 쌓아 올리는 천부적인 재능이라 생각했건만, 그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저희가 나태했던 탓이지요. 그 아이가 지닌 것이 그토록 무거운 것인지도 몰랐으니 말입니다.”
그들이라도 놀고 있지는 않았다.
명색이 청가제일기제, 미래의 마교를 이끌 법한 인재였다.
백방으로 구마지체를 치료할 방법을 찾았었으나, 겨우 구한 것이라고는 현실성 없는 방안뿐이었다.
가령, 못해도 일 갑자를 넘는 내공을 품은 영약을 취하여 기맥의 내공을 통째로 갈아내고, 그 기로써 신체를 바로잡아 계속해서 기를 흡수해도 버틸 수 있는 몸으로 만드는 것 따위의.
그야말로 허풍 같은 것이었다.
그런 영약은 대관절 어찌 구할 것이며, 그 어린아이가 그 기를 버틸 수 있을 것인지부터가 미지수.
결국 해결책은 마땅히 사용되지 못한 채 시간만이 흘렀다.
청유백은 좌절하여 방에 틀어박혔고, 그 누구도, 그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청걸명은 씁쓸히 중얼거렸다.
“하다못해 그 아이의 어미라도, 서유라도 살아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 그러나….”
“압니다. 알아요. 이미 십수 번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께서 청유백이를 낳고 죽으신 기일마다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지요. 그러나!!”
─쾅!!
악웅은 탁상을 내리찍었다.
홧김에 한 행동이었으나, 청걸명은 화내지 않았다.
자신의 뜻도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청걸명 자신은 차마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악웅은 분노하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십 년을 기다리신 것 아닙니까. 천마지회에서의 신마단(神魔丹)을 취하게 만들어, 구마지체를 고쳐 볼 요량이 아니셨습니까?”
“그래, 그랬었지. 그리 믿었었지.”
“…믿었었다 하심은?”
무슨 말을 할지는 충분히 예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악웅은 굳이 물어보았다.
굳이, 청걸명의 입으로 확언을 듣기 위함이었다.
“이제는 늦은 것 같네. 아무리 대단한 재능이었다고 한들, 벌써 십 년이나 지났어.”
“십 년, 그놈의 고작 십 년….”
“…다른 아이들이 멈춰 있었다면 몰라도, 그 아이들도 노력해오지 않았는가.”
청걸명은 괴로운 얼굴이었다.
제 입으로 그것을 결론지어 말한다는 사실 자체가 죄스럽다는 듯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곳에 오기 전에 아이들을 보았네. 내 자식들이나 수련생도들 할 것 없이, 전부 피땀 흘려 노력하는 것을 보았네.”
아직 정오가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으니, 연무장은 아직도 수련생들로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악웅이 매일같이 수련생들을 지켜보는 것은 아니었으니 정확히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아마 개중에는 청궁우도 포함되어 있었겠지.’
패악질을 부리는 놈이라고는 해도 평소에는 그놈도 그 나름대로의 수련을 쌓고 있을 테다.
패악질을 부리고, 망나니짓을 한다 해도 처벌받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악평을 잠재우는 나름대로의 실력이 있기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청유백에게는 없고, 청궁우에게는 있는 결정적인 차이였다.
하지만 더욱이 그랬기에 청걸명에게는 씁쓸하게 다가왔다.
“이 청가를 상징하는 것이 무엇이던가. 수백 년의 피땀이 배어든 저 대연무장이 아니던가.”
“그렇지요.”
“허면 내가 어찌해야 하겠는가. 유백이 그 아이에게 새 삶을 줄 수도 없고, 희망을 줄 수도 없으니, 내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불확실한 미래보다는 확실한 노력을 한 아이들에게 결과를 쥐여 주는 것이 옳지 않은가.
즉, 자신의 독단으로 청유백을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다.
청걸명은 그리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이 열흘일세. 다음 가전회의를 생각한다면 고작해야 이레겠지. 어떤가, 그 안에 그 아이의 팔을 고칠 방법이 있겠는가?”
악웅은 고민하지는 않았다.
그저 말하기를 주저했고, 머지않아 입을 열었다.
“…없습니다. 영약과 녹가의 지원이 있다면 또 모르겠으나, 대공자와 이공자의 폐관 수련 때에 여분의 영약을 전부 주었지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청걸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지회가 당장 코앞인 이 순간, 마교의 향후 100년 세력 구도가 정해지는 지금 영약 따위를 남겨놓은 가문이 있을 리가 없다.
“하면 어떤가. 유백이가 한 팔이 없어도 궁우를 꺾고 천마지회에 나갈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실력이 출중한가?”
악웅은 이번에는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
악웅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시선을 돌리자, 청걸명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무얼 그리 고민하는가. 감싸지 않아도 되네. 유백이의 수준은 잘 알지 않나.”
“그건…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니? 고작 아이들 수준일세. 자네가 무엇을 모른단 말인가?”
청가의 대교두.
그 자리는 마교 전체의 훈련 책임자라고 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가는 마교 무공의 중심이고, 그 우두머리가 바로 대교두였으니 말이다. 결코 사사로운 감정으로 누군가를 앉힐 자리가 아니었고, 악웅은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충분히 되는 이었다.
그런 그가 ‘모르겠다’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아이가 청률과의 대련에서 패하여 뼈가 부러지긴 했지만, 뭔가 기묘했습니다.”
“기묘?”
“제가 분명 잘못 본 것이겠지만… 마치, 청유백이가 청률을 한순간이나마 압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허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유백이가 요즘 의욕을 찾았다는 말은 들었네만, 그럴 리가 없네.”
“그렇지요. 해서 기분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움직임도 기세도 밀렸건만, 어째선지 기분이 묘하더군요.”
“기분 말이지.”
청걸명은 가볍게 웃었다.
결코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믿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아직도 그 아이에게 걸었던 기대를 거두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
대공자인 첫째도, 이공자인 청률도 멀쩡히 있던 시절에 청가제일기제라 칭송받던 청유백.
“그 아이가 어릴 적에는 실로, 다음 천마의 자리는 청가에서 나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었지.”
“그랬었지요. 과거의 일이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악웅은 그것은 에둘러 말했다.
청걸명 또한 그것을 알았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 해도, 일단은 기다리세. 앞으로 고작 칠주야. 무엇이 바뀌겠느냐마는….”
그야말로 무엇이 바뀔까.
고작 이레의 시간.
사람을 고치기는커녕, 칼 한 자루를 벼리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청걸명은 기다리고자 했다.
“…지금껏 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나, 마지막에 와서 시간마저 빼앗을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악웅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청유백을 옹호하러 온 것이 아니라 가주의 의견을 확인하러 온 악웅이었다.
더 이상 할 말 따위는 없이, 천천히 가주전을 걸어 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