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4화 (14/200)

제14화. 까짓것 만들어 먹지 (4)

녹지연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처음은 의심으로 시작하여, 그녀의 눈빛은 어느덧 당혹으로 변해갔다.

“대체 뭘 한 거죠?”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나?”

그 말에 녹지연의 인상이 확 찌푸려졌다.

말마따나 굳이 말해 줄 이유는 없다.

그는 증명하겠다고 말했지, 그것으로 뭘 할지 말해 준다 하지는 않았으니. 하지만 어찌 저리 오만방자한 태도란 말인가!

“…그렇다면.”

녹지연은 급격히 내공을 끌어올리며 기수식을 취했다.

몸을 낮추고 손을 펴 장(掌)의 형태를 취하고, 끌어올린 내공은 전신의 기맥을 순환하여 손바닥에 강렬한 독기의 기운을 맺어냈다.

살인적이라 말할 정도의 악의에 다리가 떨려올 정도였지만, 영문 모를 상황을 보고 아무 말 없이 그저 보내줄 정도의 머저리는 아니었다.

녹지연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말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겠다 말한다면?”

“흥미로운 발언이군.”

─쿠웅!!

“큭!”

청유백은 그저 낮게 목소리를 내었다. 발을 구르거나, 주먹을 쥐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짓누르는 것만 같은 압박이 공간을 지배했다.

‘싸우면 이길 수 있어. 분명히 내가 이긴다. 하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이성은 분명히 명확한 판단을 내리고 있으면서도, 뭔지 모를 감각이 저 사내에게 다가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청유백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애당초 너는 너의 목적이 있었고, 나는 나의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난 지금, 내가 굳이 너에게 사실을 말할 필요가 있는가?”

“…없지요.”

“허면 그냥 그런 것이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지. 언제나 그렇듯, 과한 욕심은 독이 된다. 그렇지 않나?”

청유백은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어하는 기색이었지만, 녹지연은 여기서 물러날 수 없었다.

“아까 제가 부탁을 하나 하겠다 했지요, 지금 쓰면 안 되겠습니까?”

“내게 손해가 되는 일이다. 싫어.”

청유백은 일체의 고민도 없이 단언했다.

“너는 내 비밀을 모르고, 나 또한 네 속셈을 모르니 피장파장으로 치지.”

녹지연은 청유백의 미소가 이제는 섬뜩하게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 손만으로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던 사내는 결코 손을 댈 수 없을 것 같은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그 크기는 크게 대단할 것이 없었지만, 그와 눈을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살의를 비롯한 악의가 전해져 왔다.

분명 싸우면 이긴다.

자신의 이 독수(毒手)에 스치기라도 한다면 고작 저런 나약한 몸은 한순간에 생기를 잃을 터다.

하지만 그것을 머리로 인지하고 있음에도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청유백은 탁자에 놓인 또 다른 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비산독은 가져가겠다.”

청유백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가 떠난 후, 자리에 주저앉은 녹지연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 차 있었다.

“…어떤 광년이가 저걸 쓰레기라고 부른 거야.”

* * *

한편.

‘운이 좋군. 그런 허세에 넘어가 주다니.’

어휴, 진짜로 허세였는데.

청유백은 내심 안심하고는 옅은 숨을 내뱉었다.

천주혈독의 기운 탓에 갈무리했던 마기가 날뛰기는 했지만, 단숨에 무언가 극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본래의 마기와 천주혈독의 독기가 합쳐져 가공할 만한 사이함을 만들어 내었고, 아직 경험이 부족한 어린아이였기에 그것을 필요 이상으로 경계했던 것뿐이다.

그녀가 정말로 ‘말하기 전에는 못 나간다’라며 막아섰다면 상황이 몹시 난처해졌으리라.

‘녹가의 앞마당인 녹운각에서 녹가의 후계를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만약 그랬다간 걸어서 녹운각을 나올 수도 없었으리라.

애초에 이길 수 있을지조차 확실하지 않았다.

독이 듣지 않는다 해도 기본적인 신체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녀가 진심으로 저항하면, 한 팔이 부러진 지금의 몸으로는 제압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청유백은 왼손을 쥐락펴락하며 몸 상태를 살폈다.

‘팔이 붙지는 않는 건가.’

불필요할 정도로 기운이 넘치고, 기맥에서 무한히 힘이 끓어오르는 것만 같은 전능감이 들기는 했지만 그것이 다다.

실제로 몸이 치유된 부분은 없었다. 근육이 뭉쳐 있는 부분의 피로도, 상처의 상태도 전혀 나아지지 않은 채 그저 고통만을 잊게 할 뿐이었다.

‘하긴, 천주혈독은 기맥에 작용하는 종류의 독이지 근육에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효과가 강력하다고 해도 분류부터가 다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일 테다.

‘이 독기를 단전에 들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독이나 약이라는 것은 결국 듣는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영약이야 워낙 긴 시간을 연단한 것이니, 그 세월을 품고 있어 그것을 쌓아내는 것이지만, 천주혈독에 들어가는 시간은 고작 일 년 남짓.

‘일 년 내공을 누구 코에 붙이나?’

제아무리 강력한 독기라고 하더라도, 지금의 청유백에게 있어서는 그리 큰 쓸모는 없었다.

일단은 양이다.

마기는 양이 최고다.

그 혼탁함과 사악함을 최고로 살리는 방법이야말로, 천마신공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방법이었다.

역대 천마들 중에 흡성대공과 같은, 내공을 빨아들이는 종류의 무공을 익힌 자가 많은 것이 괜한 게 아니었다.

마기는 어차피 혼탁한 기운이다.

질이나 정순함 따위는 개나 주고, 무엇이 섞여 들어가던 간에 양으로 찍어 누르면 그만인 일이다.

‘나는 그럴 시간에 영약이나 하나 더 찾아 먹는 게 빨라서 안 익히긴 했다만….’

이제는 익힐 수 있다면 익히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산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영약의 정보도, 앞으로 찾아올 기연의 소재도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 지금은 지금의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할 터였다.

청유백은 품속에서 느껴지는 병의 감촉을 느꼈다.

‘팔을 붙일 방법은 아직 있다.’

비산독.

독성 자체는 천주혈독에 비해 모자랄 테지만, 비산독은 근육, 그중에서도 사지를 마비시키는 계통의 독이다.

이것이 제 생각대로만 작용한다면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왼팔을 고칠 수도 있을 터였다.

‘문제는 이 천주혈독의 독기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다.’

계속 방치한다면 독기는 언젠가 빠져 사라지고 만다.

이 솟아오르는 전능감을 한동안 만끽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이것이 그저 기분이라는 게 문제다.

실제 몸은 나약해 빠졌으니 실제 강함은 별반 차이가 없다.

그렇다 하여 이 기운으로 육체를 강화할 방법을 모색하려니, 천주혈독은 근육에 간섭하는 종류의 독이 아니다.

여러모로 계륵인 상황이다.

녹가 중에서도 유력한 후계로 보이는 녹지연을 반쯤 적으로 만들면서 취한 것인데, 막상 부딪히니 쓸 곳이 마땅치 않았다.

의약전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청유백은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천마혼을 깨울까.’

천마혼(天魔魂).

그것은 마교 교주, 즉 천마의 계보에게만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천마신공의 진수였다.

선대 교주, 즉 옛 천마의 혼을 제 몸에 강림시켜, 선대 고수의 심득을 전해 받는 것.

그리고 그로서, 한 단계 위의 수준으로 나아가는 단초를 제공받는 것이 천마혼의 강림이었다.

하지만, 뭐.

‘그런 소소한 요소는 내게 전혀 쓸모가 없지.’

옛날 옛적─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의 옛 생에서는 천마혼의 조언을 들은 적도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방해에 불과했다.

깨달음? 심득?

그런 걸 남에게 들어서 뭐하나.

‘내가 더 잘 아는데.’

하지만 이번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내게 심득은 큰 의미가 없으나, 천마혼은 이 몸의 기억을 전부 기억하고 있겠지.’

청유백의 목적은 천마혼을 강림시킴으로써 얻는 심득보다는 천마혼이 기억할 마교의 기억에 있었다.

천마혼은 당대 천마와 같은 몸을 공유하는 또 하나의 자아로서 그 몸의 기억을 읽을 수 있다.

즉, 이 몸─청유백의 기억도 읽을 수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이 몸의 기억을 단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아 전부 일일이 새로 조사해야만 했지만, 천마혼이라면 이 청유백의 기억을 읽어볼 수 있을 터.’

그렇게 된다면, 청률 놈이 곤륜의 기술을 사용하는 이유나 현재 마교의 정황까지 한 번에 간편하게 알 수 있으리라.

‘다만 문제라면, 그 좋은 점들이 다 일단은 천마혼을 깨우는 데에 성공해야 해당된다는 점인데….’

천마혼을 깨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상단전, 즉 머리─뇌에 해당하는 기맥을 열어 정신을 각성시키고, 강렬한 마기를 계속 순환시켜 천마혼이 각성하기를 유도해야 한다.

가장 큰 난점은,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가장 짧으면 한 시진, 길면 일 년이던가.’

이건 순전히 몸의 재능이었다.

지금까지의 회귀에서도 무슨 짓을 하든 자신의 각성 기간은 3일로 항상 같았으니, 분명 천마혼의 각성 기간은 타고난 재능일 것이다.

‘보름 내에 깨울 수 있을까?’

천마혼을 깨우는 동안에는 상단전이 열려 있는 탓에 신경이 항상 곤두세워지게 된다.

전투 중에는 좋을지도 모르나, 잘 때에도, 식사 중일 때에도 항상 모든 감각이 또렷하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편히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피곤해지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몸이 체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해도, 정신이 휴식을 취하지 못하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천주혈독을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깝다.’

천주혈독의 독기는 양은 보잘것없었지만, 그 질의 혼탁함은 자신의 몸에 도는 기운 중 으뜸이라 할 만했다.

워낙에 눈에 띄어, 그 기가 몸의 어디를 돌고 있는지도 느껴질 정도다.

청유백은 걷고 걸어 의약전의 자신의 방문 앞에 숨어들었을 때 즈음에야 결국 결론을 낼 수 있었다.

‘좋아. 강행한다.’

그래, 까짓 피곤해져 봐야 새파란 애송이들에게 지기라도 할까.

설령 보름 동안 한숨도 자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딱 좋게 수준을 맞추는 정도이리라.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혹여나 녹운각에 다녀오는 동안 누군가 자신을 찾지는 않았을까 하는 것이 유일한 염려였지만, 이 또한 큰 문제는 없는 듯했다.

‘방에는… 아무도 없군.’

청유백은 방문을 열기 전, 방 안의 기척을 느꼈다.

하긴, 청가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만한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리 한 시진 정도 자리를 비워도 크게 소란이 없는 것을 보니, 앞으로도 멋대로 움직여도 상관없겠다 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며 방의 문을 여는 순간.

“──!!”

“컥!”

방 안에서 의문의 그림자가 습격하듯 날아 들어왔다.

이미 기척을 확인하여 안심했는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한순간에 명치를 허용해버린 청유백은 죽음을 직감했다.

“도련님! 어딜 가셨던 거예요!!”

3초 정도는.

“소, 소혜야?”

다행히도 반응도 못 할 속도로 제 명치에 쑤셔 박은 게 단검은 아닌 모양이다.

청유백은 정신을 차리곤, 저를 덮쳐 넘어뜨린 소혜를 제 명치에서 떨어뜨려 놓았다.

“좀 놔라. 마실 다녀왔다.”

“마실요?! 그 몸으로요?! 팔이 부러지셨다면서요!”

“팔 하나 부러진 정도로 뭘 그러냐? 유난 떨지 마라.”

청유백은 자신이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당황이 반, 소혜가 저를 걱정했다는 것에 대한 안심이 반인 감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렇군. 몸은 여전히 쓰레기라 내공이 별로 없는 사람은 감지하질 못하는 건가.’

사람은 시각, 청각, 후각 등 많은 정보를 복합적으로 활용하여 찾는다.

그리고 고수는 수없이 단련한 육체로 하여금, 그것을 더욱 날카롭게 연마하는 것이 탐색의 기본.

하지만 지금 청유백의 몸은 여전히 쓰레기인 그대로다.

오직 기감만을 옛 지식과 심득을 사용하여 뻥튀기시켜 놨으니, 신경에 불균형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었다.

청유백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혹시 누가 찾아왔었더냐?”

“음, 유 부인의 하인이 찾아왔었어요. 도련님은 좀 괜찮으시냐고 묻던데요.”

‘유 부인? 아, 청률의 모친인가.’

청유백의 팔을 부러뜨린 것이 청률이니, 그녀가 대신 사과를 전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으리라.

하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고?”

“무슨 소리세요! 유 부인인걸요. 평 부인이랑은 다르게, 엄청 선량하신 분이라고 평판이 자자하신 분이세요.”

“그래?”

소혜가, 이 어린 시비가 그리 말할 정도면 어지간히도 평판이 좋은 모양이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가 없이 칭찬하는 일은 결코 많지 않다.

“안에 들어왔었느냐?”

“아뇨. 제가 문 앞에서 돌려보냈었죠. 분명 그리 말씀하실 것 같아서.”

“역시. 눈치가 빨라 좋구나.”

청유백은 소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에도 수상한 흔적은 없군,’

혹여 누군가 자신이 어디 갔냐며 추궁했다면 귀찮은 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떻게든 잡아뗄 방법이야 있지만, 귀찮은 요소는 줄어들수록 좋은 법이다.

청유백이 계속 무심한 태도로 일관하자, 소혜는 얼굴을 붉히며 청유백에게 매달렸다.

“도련님! 자꾸 얘기 돌리실 거예요? 환자는 어디 나돌아 다니면 안 되는 거 아시잖아요! 지금까지는 말 잘 들으셨으면서!”

“가끔은 바람도 쐬어 줘야 상처도 잘 낫는 게야. 무얼 그리 걱정하느냐?”

“도련님은 걱정도 안 되세요? 지금 온 집안에 헛소문이 가득해요! 천마지회에는 청궁우가 나갈 거다, 청유백은 이제 진짜 쓰레기다, 라면서요!”

“호오.”

당돌하군.

녹지연이랑 대화할 때부터 새삼 느낀 것인데, 평씨 놈들 소문 부풀리는 실력이 제법인 듯했다.

‘이게 과연 누구의 솜씨인지는 모르겠지만….’

고작 반나절 만에, 어린 시비의 귀에까지 소문이 들어갈 정도로 파다하게 소문을 뿌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화답해 줄까.’

소문의 근원을 찾아 족칠까?

아니, 소문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청궁우를 직접 끌어내리는 방법도 있다.

‘어느 쪽도 재밌겠군.’

그러던 와중, 청유백의 고민이 소혜는 그저 가만히 있는 것으로 보였는지 성을 내며 매달렸다.

“도련님! 무슨 말이라도 해 보세요! 제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할 테니까요!”

“그래?”

“네? 네, 그럼요!”

“네가 나를 도울 방법이 있다.”

청유백의 입꼬리가 기다렸다는 듯 호선을 그렸다.

소혜는 그 미소를 보며, 어쩌면 내가 말을 잘못한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