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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우면 네가 천마 하든가-1화 (1/200)

제1화. 이건 또 무슨 일이야 (1)

까마귀 울음소리가 산등성이의 여명을 타고 울려왔다.

그가 이미 한계에 다다랐음을 알고 있는 것일 테다.

까마귀들은 피투성이의 사내를 위한 장송곡을 분주히도 불러댔다.

“큭, 크헉….”

사내, 천류하는 가쁜 숨과 함께 핏물을 한 움큼 토해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다.

구멍이 뚫린 복부를 막으려 애써도 변하는 것은 없고, 피는 속절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갔다.

피로 물든 손과, 피로 물든 땅.

언제부턴가 돌아보지 못했던 풍경에 이제야 시야에 들어찼다.

붉다.

사람도, 땅도, 하늘도.

여느 때보다 붉은 여명이 산등성이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갔다.

푸르렀던 초목이 있던 자리에는 이미 온통 죽음만이 낭자했다.

몇 번이고 보아 왔던 대단할 것 없는 광경이었다고는 하나, 시체의 산과 피의 바다는 결코 익숙타 할 만한 것은 되지 못했다.

“…빌어먹을 놈들.”

물론 그 시신 전부가 아군의 것은 아니었다.

도리어 반수 이상은 적의 것.

수십의 문파와 세가가 연합하여, 대무림연합(大武林聯合) 따위의 이름을 내세우며 이곳 마교의 땅을 밟은 것이 불과 이틀 전의 일이었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가 산기슭을 가득 메운 광경을 사내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이 이제는 고향 대신 흙으로 돌아가게 생겼으니, 범부라면 마땅히 약소한 승리라고 치부해도 좋을 일이었다.

그러나, 혹여 그렇다고 하더라도.

천류하 그 자신은 이겼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가 누구인가.

패도천마(覇道天魔),

고금제일악(古今第一惡) 천류하.

오직 승리와 패도만을 걸어온 그였다.

그런 그가, 이만한 상처를 입고 이 정도의 군세를 잃은 시점에서 이 전쟁은 승리가 아니었다.

적을 멸했다 한들, 지킬 것을 잃고 모든 군세를 잃은 전쟁을 어찌 승리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래도 다행이군. 이번에도 가는 길 외롭지는 않겠어.”

천류하는 입안에서 울컥이는 피를 억지로 삼키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시산혈해의 위에 서 있는 단 한 사람.

무신(武神)이라 불리우는 자.

그러면서도, 무림연합 따위의 이름을 들먹이며 이 기만의 생명을 헛되이 소모케 한 전쟁을 일으킨 자.

천류하는 미간을 와락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진서령.”

그 말에 고개를 떨구고 숨을 다듬던 진서령은 고개를 치켜들어 천류하를 바라보았다.

무신과 천마라 불리는 두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상태는 어느 쪽도 성하다 말할 수 없었다.

사지 중 하나는 떨어져 나가 피가 울컥울컥 솟았다.

몸에는 수십의 상흔으로 가득하여 언제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단지, 두 사람이서 이 지옥도를 만들어 낸 대가였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그리고 그 끝에서야, 두 사람이서 서로를 마주하여, 끝을 보았다.

천류하는 용케도 땅을 짚고 일어나 비웃듯 코웃음 쳤다.

“어떻게 할 텐가? 이번에도 네놈이 진 것 같은데.”

‘이번에도.’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었다.

그 말에 대답하듯, 진서령 또한 칼을 지지대 삼아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웃기지 마라, 다음은 없다. 네놈은 여기서 죽는다!”

‘다음.’

또한 많은 의미를 담은 말이었다.

수많은 의미가 그 ‘다음’이라는 단어를 가로질렀으나, 그중 가장 중요한 뜻을 서로가 알았다.

천류하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질리지도 않나? 이번이 몇 번째지?”

“일흔여섯 번째. 네놈은 숫자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일흔여섯 번.

그들이 이리 검을 맞댄 횟수였다.

그러나─그저 평범한 싸움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단지 싸운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 지금 이 장소에서 동귀어진한 횟수.

그리고 나아가, 시간을 되감아 회귀하여 몇 번이고 수를 주고받는 횟수.

즉, 이와 같은 끝없는 전쟁을 반복하여 되풀이한 횟수였다.

둘 모두 한 치의 물러섬도 없다.

지금껏, 그 어떤 자리에서도 누군가 먼저 죽은 적은 있어도 둘 중 하나만 죽은 적은 결코 없었다.

타고난 재능도, 쟁취한 기연도, 쌓아 올린 노력도.

그 무엇 하나, 서로에 비해 모자라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것이 그들의 끝나지 않는 결투였으며, 끝이 보이지 않는 저주이기도 했다.

천류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결국 결말은 동귀어진이라 계속해서 회귀하긴 했다만.’

거짓 없이, 전적으로는 자신이 우수했노라 확신했다.

“내가 이긴 건 기억하지. 서른아홉 번.”

“헛소리. 서른일곱 번이다.”

“킥, 착각은 누구에게든 자유로운 법 아니겠나?”

처음에는 증오로 가득했던 감정은 이미 마모되어 그 부스러기밖에 남지 않았다.

이 증오가 무엇으로부터 시작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

지금은, 그저 지금일 뿐이다.

천류하는 가까스로 검을 꼬나쥐며, 번뜩이는 칼날을 들어 보였다.

“아직 더 해볼 생각이라면, 기꺼이 어울려 주지.”

패도(覇道)의 천마라는 호를 딱지치기로 얻었겠는가.

상대방이 검을 휘두른다면, 그저 싸울 의지가 있다면 그에 호응할 뿐이다.

앞으로 몇 수나 더 주고받을 수 있을지는 자신조차 모른다.

하지만 어차피 이다음이 정해져 있는 이상, 한껏 즐기다 다음을 기약할 뿐이었다.

“…….”

그러나 진서령은 대답이 없었다.

더 이상 기척도 기세도 느껴지지 않았다.

검을 지지대 삼아 억지로 버티고 선 채로, 고개를 떨군 채 대답을 거부했다.

천류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끝까지 자존심만 센 새끼.”

죽었군.

쓸쓸히 자조한 천류하였지만, 그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머지않아 자세를 무너뜨렸고, 피의 바다에 얼굴을 처박았다.

이제는 첫 번째, 두 번째 싸움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때 어떤 마음가짐을 지녔었는지,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수십 번의 삶을 넘으며 같은 삶을 반복한 정신은, 어떻게 해야 더 강해질까, 어떻게 해야 조금 더 많은 기연을 쓸어 담을까만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생각할 뿐이었다.

‘다음에는 끝을 내리라.’

사지의 끝에서부터 심장까지 경련하여 울리는 감각이 내달렸다.

이번에도 또 빌어먹을 회귀의 시작이다.

‘그래, 다음에는.’

전란의 시대에서 소교주로 태어나, 형제자매를 전부 죽이고 교주의 좌에 오르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마교의 거두들은 전부 고개를 숙일 것이며, 강호의 온갖 기연들을 다시금 쓸어 담으며 이번 생보다도 높은 경지를 향해 손을 뻗을 것이다.

이것은 다짐이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기정사실.

지금껏 일흔여섯 번.

그리고 앞으로 완벽한 끝을 맺지 않는 한, 기백 번은 반복될 회귀의 시작이었다.

천류하는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죽음의 감각에 몸을 맡기며 어둠 속으로 의식을 내던졌다.

* * *

“…큭, 머리야.”

가장 처음 맞이한 것은 두통이었다.

눈앞이 쨍해지는 감각과 그와 함께 미간을 두드리는 듯한 충격.

한순간 어둠 속에서 빛 아래로 던져진 듯한 감각이 천류하의 신경을 타고 흘렀다.

이 감각만큼은 몇 번이고 반복하고 그의 무공이 아무리 수위에 올라도 적응되지 않았다.

“또… 돌아온 건가.”

천류하는 다시금 과거로 돌아왔음을 느꼈다.

어렵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했던 일이다.

부연 당황하여 주변을 수습하는 것 따위는 몇백 년 전에 집어치웠다.

느끼는 것은 그저 한 줌밖에 없는 내공과, 한순간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빈약해진 육체.

언제 그 높았던 경지를 다시 오르나 한탄할 정도로 나약해진 무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여전히 거지같이 어두운 밤이군.”

천류하는 창 틈새로 달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는 어둠 속을 짚으며 물그릇을 찾았다.

회귀하며 사라진 것은 내공과 근육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그에 따라 시각, 청각 등의 오감도 퇴화했다.

천마 시절의 그라면 어둠 따위는 어떤 장애도 되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이 몸뚱어리는 안력을 돋워 어둠을 살필 내공조차도 지니지 못했다.

몇 번이고 땅바닥을 헛짚던 천류하는 상소리를 내뱉으며 그릇을 찾는 것을 포기했다.

“젠장, 몇 번을 해도 이 짓은 익숙해지지가 않아.”

안 보이는 것은 안 보이는 데다가, 팔다리까지 짧아져 길이와 위치에 적응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항상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기명아! 물 좀 떠 오거라!”

천류하는 목청을 높여 하인을 호출했다.

밖에 있는 것이 기명이라는 이름의 하인이었는지 다른 누구였는지는 가물가물하지만, 일단 목소리를 들었다면 누군가가 즉시 대답할 테다.

“…….”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하지만 그래도 대답이 없자 천류하는 다시금 목청을 울렸다.

“기명아! 무엇 하느냐!”

천류하는 몰려오는 두통에 짜증을 내며 계속해서 하인을 불렀다.

어릴 적의 그가 하인들과 꽤나 친하게 지내며 이것저것 챙겨주었기는 했으나, 명령을 듣고 무시하는 것을 방관할 정도로 위아래가 없지는 않다.

누군가 대답을 했더라도 진작에 했을 시간이었다.

마교의 근본은 상명하복.

윗사람의 명을 따르는 것이 아랫사람의 의무였다.

더군다나 천류하는 마교의 소교주였으니, 말을 듣고도 무시한다는 행위는 당장 목이 달아나도 할 말이 없는 행위였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회귀에서 항상 당연하다는 듯 두통을 달래었던 물 한 잔이 없으니 더욱 짜증 나는 것 같기도 했다.

“서기명! 게 누구 없는가!!”

천류하가 마지막으로 짜증스레 한 번 더 이름을 외쳤다.

이번에도 오지 않는다면 당장에 박차고 나가 손을 봐줄 생각이었다.

고작 이딴 일로 목을 따 버릴 정도로 인내심이 없지는 않았으나, 적당히 만져주는 것을 기피할 정도로 좋은 인간도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끼이익!

거친 경첩음과 함께 천천히 문이 열렸다.

귀찮게 일어날 필요가 없게 되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혹은 이 짜증을 풀 대상이 사라진 것에 대해 유감을 표해야 할까.

어찌 되었든 간에, 천류하는 지금껏 늦장을 부린 이 녀석을 가만두지는 않을 요량이었다.

“뭘 하다 이제야 들어오나? 있었으면 대답이라도 해야….”

아직까지도 두통이 머리를 조여 오는 탓에, 지금까지는 그의 시종이 말을 무시한 적이 없었다는 것에까지 생각이 닿지 못했다.

다만, 생각보다 이전에.

그리고 감각보다 이전에, 천류하가 쌓아온 오감을 초월한 육감이 먼저 상황의 이상을 느꼈다.

빛 한 점 없는 공간에서 한순간 무언가 번뜩이는 것만 같은 감각.

‘살기!’

천류하는 번뜩이는 본능에 몸을 맡기며 황급히 몸을 굴렸다.

멋들어지게 기상하여 낙법을 취할 기력 따위는 없다.

애당초 뭔가 보이지도 않았다.

나약하디나약한 육신은 이제야 어둠에 차츰 적응하여 무언가의 윤곽만이 파악될 뿐이었다.

단지, 직후 들린 바람 가르는 소리와 ‘쳇’ 하는 낮은 탄식만이 상황을 대강 이해할 단서가 되었다.

이 빌어먹을 삭월의 밤에서 당장 알 수 있는 것은 단지 둘뿐이다.

하나, 자신이 방금 회귀했다는 것.

둘,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없었던 암살 위협을 받고 있다는 것.

“이건 대체… 무슨 거지 같은 상황이냐?”

마교가 아무리 막장이라지만 감히 소교주에게 칼을 들이댈 정도로 막나가는 집단은 아니었다.

지금껏, 일흔여섯 번의 회귀에서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당황하는 천류하를 비웃듯 어둠 너머에서 습격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어라.”

일흔여섯 번이나 반복된 회귀.

앞으로 몇 번이나 반복될지 모르는 그 영겁의 저주에 이윽고 변화가 찾아왔다.

결코 좋다고 말하지는 못할 상황이었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언제 한 번이라도 이 거지 같은 하늘이 제게 좋은 일을 해 주었던가.

거지 같으면 거지 같은 대로.

뒤질 것 같으면 뒤질 것 같은 채.

천류하는 눈빛을 빛내며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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