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그와 그녀 (2)
소규모 장원에 들어선 단유소와 한설연이 천천히 중앙의 큰 길을 걸었다.
장원의 곳곳에 드문드문 가옥과 건물들이 위치해 있는 가운데, 이곳저곳에서 인부들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건물들을 수리하거나 이런저런 시설들을 손보는 중이었다.
“와아! 그새 작업이 많이 진척됐네요?”
“응. 뭐, 인부들을 많이 고용했으니까.”
그곳은 무림맹 근처에 위치한 소규모 장원이었다. 근래에 매물이 나온 장원을 얼마 전에 묵룡조원들이 공동으로 매입했다. 물론 비용의 가장 많은 부분을 부담한 사람은 단유소였다.
“좋네요. 곧 모두가 이곳에 모여서 살 것이라고 생각하니까.”
단유소가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잠시 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조장님! 오셨습니까?”
근처의 가옥 안에서 누군가가 나오더니 단유소를 발견하고는 그렇게 외쳤다. 진평이었다. 그의 뒤를 따라 여인 한 명과 아이들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평의 가족들이었다.
진평이 얼른 두 사람을 향해 다가오자, 한설연이 진평에게 물었다.
“어? 벌써 이사를 다 마치신 거예요? 수리는 다 됐고요?”
“애초에 이 집은 크게 수리할 게 없었잖습니까. 방금 짐을 다 옮기고 정리를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그때쯤 진평의 아내와 아이들 두 명도 단유소와 한설연에게 다다랐다. 아이들은 모두 여자아이들이었다.
“단 숙부다!”
“안녕하세요, 단 숙부!”
그러자 단유소가 두 명의 여아를 각각 양팔로 안아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이쿠, 우리 작은 선녀님들, 잘 있었어?”
“네!”
“보고 싶어쪄요, 단 숙부!”
“나도 우리 은이, 영이 너무너무 보고 싶었지!”
여섯 살가량으로 보이는 여아의 이름은 진은. 네 살가량으로 보이는 여아는 진영. 모두 진평의 딸들이었다.
두 아이를 안은 상태에서 단유소가 여인에게 물었다.
“형수, 몸은 괜찮으시지요?”
“예. 도련님. 걱정해주신 덕분에요.”
진평의 아내인 반여향은 만삭에 가까운 몸이었다. 그녀가 대꾸하자 한설연이 물었다.
“언니, 예정일은 언제예요?”
“후훗. 아직도 적응이 잘 안 되네요. 한 소저 같은 분이 저한테 언니라고 하시는 게…….”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러지 말아요, 언니. 그냥 눈 딱 감고 말씀 편하게 하셔야지, 안 그러면 서로 계속 어색해진다구요. 가뜩이나 이제는 이웃사촌이라서 늘 마주치게 될 텐데.”
그러자 반여향이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면 편하게 할게.”
그 말에 한설연이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여향이 다시 말했다.
“예정일까지는 삼 주 남짓 남았어.”
“우와아! 저, 정말 기대돼요!”
한설연의 말에 반여향이 빙그레 웃었다.
단유소가 진평에게 물었다.
“어머님은?”
“이사 도우시랴, 애들 봐주시랴 피곤하셨는지, 잠깐 잠드셨습니다.”
“그래. 일단 우리는 가볼 테니 어서 마저 정리해.”
“저도 좀 쉴 겸, 애들 간식만 챙겨주고 바로 댁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알았어. 이따 보자고.”
장원 중앙에 있는 가장 큰 건물이 바로 단유소의 거처였다. 이 층 건물이었는데, 널찍한 마당의 양옆에 별채와 사랑채도 딸려 있었다.
그곳도 애초에 수리할 게 별로 없을 정도로 상태가 양호했었다. 그저 도색을 새로 하고 집 주변을 깔끔하게 정리한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단유소와 한설연이 마당 안으로 들어섰을 때, 별채에서 나오며 두 사람을 맞은 이들은 송주와 홍련이었다.
별채의 마루에 포장된 이불 더미가 가득했다. 고급스럽게 포장된 것으로 봐서, 이불들도 고급인 듯했다.
단유소가 그곳에 시선을 두자 송주가 말했다.
“아, 입주 선물이야. 방금 별채에 하나 펴고 누워봤는데 감촉이 괜찮아. 마음에 들 거야.”
아니나 다를까, 두 사람이 나온 방에 이불이 깔려 있었다.
“고맙소, 홍 소저.”
단유소가 홍련에게 그렇게 말하더니, 송주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데 저 커다란 짐 보따리는…….”
선물로 가져온 이불 더미들 말고도, 별채의 방 안에 커다란 짐 보따리가 펼쳐져 있었다. 옷가지들과 소지품 같은 것들이었다.
그러자 송주가 품속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더니, 그것을 단유소에게 보이며 말했다.
“아, 장기 휴가야. 포상 휴가지. 교주님이 직접 수결해서 주시더군. 새로 받은 흑풍대 훈련생들 교육시키려면 시간이 한참 걸릴 테니, 그동안 푹 쉬라는 내용이고.”
“그래서, 이 기회에 둘이서 여기저기 여행 좀 다니게?”
“아니. 어차피 우리 둘 다 임무 때문에 이 강호에 안 다녀본 데가 없다고. 그런 판국에 여행은 무슨 여행.”
그러자 단유소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송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는 말은…….”
“응. 자네의 짐작이 맞을 거야. 휴가 끝날 때까지 여기 머물려고. 어차피 자네도 이런 경우에 대비해서 넓은 집을 구한 거잖아?”
“신룡대의 경우에는 훈련생들 제대로 교육시키려면 최소한 반년 이상은 걸리는데…….”
“응. 우리도 대충 그 정도는 걸려.”
그러자 째진 눈으로 송주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반년 동안 아예 이곳에 살림을 차리시겠다?”
“그렇지.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이런 때에 신세도 지고 그러는 거지.”
그 말에 단유소가 졌다는 듯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더니 물었다.
“한데 뭘 하고 있었기에 두 사람 다 얼굴이 상기돼 있었던 거야?”
그 말에 홍련의 얼굴이 부끄럽다는 듯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자 송주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홍련의 어깨를 감싸며 대꾸했다.
“어른들에게는 어른들만의 놀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뭐, 두 사람도 잘 알지 않나? 한 소저도 아시죠?”
송주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한설연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음, 저는 아직 어른이 아닌가 봐요. 잘 모르겠는데.”
“아, 그래요? 그럼 제가 이참에 그 놀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드리지요. 그건 일단 남녀 간의 은밀한……, 윽!”
송주가 중간에 낮은 비명을 지르며 말을 멈춘 이유는 홍련 때문이었다. 그녀가 송주의 옆구리를 강하게 꼬집은 것이다.
“그만해요, 가가. 실례잖아요.”
“그, 그래도 이건 저 친구가 먼저 시작…….”
“단 공자님이야 그냥 한번 해본 말씀이지만 가가는 지금 너무 노골적이잖아요.”
홍련이 눈을 흘기며 그렇게 말하자 송주가 포기한 표정으로 웃으며 대꾸했다.
“상관과 부하 관계일 때가 좋았어.”
홍련이 다시 한번 송주를 향해 눈을 흘길 때,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평과 곽승추였다.
“요 앞에서 만났습니다.”
진평이 그렇게 말하자 곽승추가 단유소에게 인사했다.
“조장님, 한 소저, 잘 다녀오셨습니까?”
고개를 끄덕여서 인사를 대신한 단유소가 물었다.
“그래. 집은 어때?”
“아, 공사가 끝나려면 한 달은 걸린대요. 아시다시피 그곳은 원래 가정용 시설이 아니었던지라. 저야 뭐 어차피 시간이 더 걸려도 상관없으니 제대로만 꾸며달라고 했어요. 어차피 그녀가 오려면 거의 일 년은 있어야 하니까.”
곽승추의 연인은 그의 고향 사람이다. 그녀는 아직 고향에 머물고 있는데, 곽승추는 이번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그녀와 혼약을 맺고 왔다. 내년 봄쯤에 혼인을 올리기로 했단다.
곽승추가 단유소의 집 본채를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함께 이곳 매입할 자금 마련한다고 그 전에 살던 집은 이미 팔았고……. 그렇다고 해서 공사가 마무리될 때까지 딱히 머물 곳은 없고……. 객잔 같은 데에 머물 돈도 안 남았고…….”
그 말에 단유소가 낮게 한숨을 내쉬니, 곽승추가 짐짓 침울한 표정을 보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물론 조장님께서 불편하시다면야, 제가 그냥 길바닥에서…….”
그러자 한설연이 서둘러 말했다.
“에이. 그게 말이 되나요? 객실 많으니까 그곳에 머무시면 되죠. 다른 분도 아니고 곽 공자님이신데.”
“우헤헤헤! 그럼 안주인께서 허락하셨으니 염치 불구하고 신세 좀 지겠습니다요.”
“예. 뭐, 제가 정식으로 안주인이 되는 건 가을쯤부터지만요.”
곽승추까지 끼어들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길 잠시, 또다시 두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백풍과 한 명의 여인이었다.
“오오! 간만에 뵙습니다, 조장님.”
“그래. 어서 와. 문 소저도 어서 와요.”
“안녕하세요, 단 공자님.”
문 소저라고 불린 인물은 서백풍과 예전부터 사귀고 있던 여인으로, 이름은 문주란이다. 문주란은 무창에서 이름난 학자 집안의 여식으로, 배움이 깊고 용모도 출중하기로 유명했다.
진평이 서백풍과 문주란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한데 둘이 함께 왔다는 건…….”
서백풍은 며칠 전에 기루에서 놀다가 딱 걸렸다. 새벽까지 기루에서 놀다가 나오는 서백풍을, 마침 그 시간에 장을 보기 위해 나가던 문주란의 시비가 발견한 것이다.
문주란이 진평을 향해 대꾸했다.
“사실, 말씀을 드리지 않았을 뿐이지, 서 공자님의 소문에 대해서는 저도 이전부터 종종 접했었어요. 그러한 소문들을 믿지 않으려 했지만 워낙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접한 소문들이었던지라,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요.”
서백풍이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릴 때 문주란이 말을 이었다.
“모든 게 소녀의 탓이지 누구 탓이겠어요. 서 공자님께서 그런 곳에 눈길을 돌리시는 건, 소녀에게 여인으로서의 매력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서 공자님이 미워야 하는데, 그 미움보다 여전히 연모하는 마음이 더 크니, 그 또한 소녀의 탓일 거고요.”
“그게 어찌 문 소저 탓이겠습니까. 다 저 못난 놈 탓이지요.”
진평이 대꾸에 문주란이 미소를 보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그런 서 공자님을 이해할 수 있다 해도, 중요한 점은 서 공자님의 마음이겠지요. 제가 싫다 하시면, 힘들겠지만 저도 서 공자님을 잊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어요. 제가 집착하면 할수록, 저나 서 공자님 모두 상처만 커질 테니까요. 그런데…….”
거기까지 말하던 문주란이 서백풍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었다. 서백풍도 문주란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문주란이 말했다.
“서 공자님께서 어제 저녁에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오셔서는 제 부친과 독대하신 거예요. 그래서 저도 황급히 달려가서 밖에서 들었는데…….”
그 말에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서백풍을 바라보았다. 서백풍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미소를 보일 때 문주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갑자기 제 아버지께 저를 다, 달라고 하시면서……, 서로 깊이 연모하고 있다고…….”
“오호?”
“그간 이래저래 제게 상처를 입혔던 게 사실이나, 앞으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라면서…….”
“그래서요?”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한설연이 묻자 문주란이 대꾸했다.
“곧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셔서 사실이냐고 물으셨어요. 저는 그렇다고 대꾸했고요. 그랬더니 아버지는 아무런 말씀도 없이 아주 오랫동안 서 공자님의 눈동자만 바라보셨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허락하시겠다고…….”
“허……!”
“와아!”
그 말에 모두가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한설연이 여전히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문주란에게 물었다.
“아니, 부친께서 원래 서 공자님에 대해 알고 계셨던 거예요?”
“아뇨. 전혀…….”
“그런데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용히 바라만 보시다가 바로 허락하셨다고요?”
“……네. 아버지께서 서 공자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한 건, 허락을 하신 다음부터였어요. 제게 간단한 술상을 봐오라고 하시더니, 그때부터 밤늦게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간만에 뵙는 기분 좋은 모습이셨어요. 나중에는 호칭도 아예 ‘서 서방’이라고…….”
자초지종을 듣고도 모두가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었다. 그러자 서백풍이 말했다.
“음하하! 아버님의 안목이 비범하신 거지요.”
“짜식이 까불기는. 앞으로 문 소저에게나 그 댁 분들에게 열심히 잘해, 이놈아.”
진평이 핀잔을 주자 한설연이 말했다.
“서 공자님은 잘하실 거예요. 본디 따뜻하고 배려심도 많은 분이라는 거, 저도 잘 알고 있거든요. 아무튼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두 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