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최후 (1)
경공을 펼치는 척조강의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정마 연합의 거의 모든 전력이 임서현 북쪽에 집결해 있다고 보고를 받았다. 무림맹주와 천마신교주를 비롯한 정마 연합이 모든 핵심 인사들까지도.
모든 게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상대를 완벽하게 속였으니, 이제 마지막을 장식하기만 하면 끝날 일이었다.
한데 생각지도 못한 시점에 정마 연합에서 척가장을 기습해온 것이다. 무림맹주와 천마신교주를 앞세워, 최정예 핵심 전력을 모두 이끌고.
애초에 성동격서(聲東擊西)의 수법을 준비한 건 이쪽이었는데, 오히려 그 수법에 당한 꼴이 된 것이다.
‘제갈윤……, 마연문…….’
역시 이 강호를 대표하는 최고의 수완가들다웠다. 없는 틈도 만들어서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일그러졌던 척조강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지금은 그들이 어떻게 이곳을 알아냈는지, 사태가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따위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건 자신이 살아남는 일이었다.
살아남기만 하면 어떻게든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경공을 펼치던 척조강의 눈매가 한순간 좁아졌다.
어느 순간부터 빠르게 자신의 뒤를 추격하고 있는 하나의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이 최대한의 속도로 경공을 펼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격하는 자와의 간격이 벌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오히려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상대의 경공이 자신보다 더 뛰어나다는 뜻.
물론 경공 실력과 무공 실력이 언제나 정비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경공 실력을 통해 상대의 경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는 있다.
즉, 지금 뒤에서 추격해오고 있는 자는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의 강자라는 뜻이다.
대체 누굴까.
무림맹주 백리우일까?
아니면 천마신교주 혁련강일까?
아마도 둘 중 하나겠지만 누구라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백리우든 혁련강이든 자신을 이길 수는 없는 실력들이다.
이건 자만도 아니고 방심도 아니다.
현실이고, 사실이다.
일이 조금 더 귀찮아졌을 뿐이다.
추격하는 자의 존재를 알아챘음에도 척조강은 최대한의 속도로 경공을 펼쳤다.
어차피 상대에게 따라잡혀서 싸우게 된다면 척가장에서 최대한 멀어지는 편이 낫다.
적들 중에 또 다른 강자가 그 싸움에 합류할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대한 멀어진 후, 지금 추격해오는 자를 빠르게 처치하고 다시금 달려야 한다.
척조강이 그런 생각으로 잠깐 동안 더 달렸을 때였다.
슈우우악―
계속해서 거리를 좁혀오던 상대가 기운을 발출해냈다.
뒤쪽에서 날아온 그 기운은 매우 날카롭고 빨랐지만, 피하는 게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달리는 와중에 척조강이 살짝 방향을 틀며 그 기운을 피해냈다.
슥―
은색의 기운 하나가 측면을 스치고 척조강의 전방으로 지나갔다.
검강이었다.
그 순간에 척조강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방금 스치고 지나간 그 검강이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또다시 자신을 공격해오는 게 아닌가.
놀라운 건, 방향을 튼 순간 그 검강의 비행 속도가 더 빨라졌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검강에 담긴 위력도 더 강해진 느낌이었다.
쉭―
막으려면 막을 수 있었지만 척조강은 이번에도 그 은빛 검강을 피해냈다. 막는 것보다는 일단 피하는 게, 도주에 더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척조강을 스치고 뒤로 지나가자마자 검강이 또다시 방향을 틀었다.
아까보다 더 급격하게 방향을 튼 그 검강의 속도는 더 빨라졌고, 위력도 더 강해져 있었다.
척조강의 눈동자가 더 커졌다.
슈앙―
뒤쪽에서 날아온 검강이 이번에도 척조강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피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피하는 것도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방향을 튼 은빛 검강의 속도가 더 빨라진 탓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은빛 검강이 전방에서 방향을 선회하며 빛과 같은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제는 피하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힘든 상황.
결국 척조강이 검을 들어 그 검강을 막아냈다.
콰르릉! 콰아아아앙!
우레 소리가 들릴 정도로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그 순간, 뒤쪽에서 몇 개의 기운이 동시에 날아왔다.
자신을 뒤쫓던 자가 몇 개의 기운을 동시에 쏘아 보낸 것이다.
모든 게 강기.
이미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상대와의 거리가 그만큼 가까워진 탓이었다.
척조강이 신형을 비틀며 그 기운들을 막아갔다.
콰과과과과광!
또다시 강력한 폭음이 일대를 울렸다.
시커먼 재와 흙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일제히 비산하여 주변을 가득 메운 가운데, 척조강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떠야 했다.
사실, 상대의 공격은 빠르기만 할 뿐, 자신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강력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그 공격을 막은 순간 두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야 했던 것이다. 검병을 쥔 손아귀가 저려올 정도였다.
이 정도로 엄청난 경지라면 백리우일 리 없었다.
그러니 혁련강일 리는 더더욱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이 정도의 강자가 이 강호에 존재하긴 했단 말인가?
그 즈음 시야를 가리고 있던 부유물들이 서서히 가라앉으며 상대의 모습이 드러났다.
청년이었다.
게다가 낯익은 얼굴이었다.
실제로 본 적이 한 번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년의 얼굴이 낯익은 이유는, 초상화를 통해 수도 없이 접했던 인물이었던 탓이다.
“묵…… 룡……?”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틀림없었다. 묵룡이었다.
묵룡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척조강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도 안 돼…….”
척조강의 표정이 그나마 정상대로 돌아온 건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였다.
“설마 그대일 줄이야…….”
실패할 리 없다고 여겼던 혈천맹의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지게 된 데에는 이런저런 이유들이 있겠지만, 그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눈앞의 청년, 묵룡 때문이었다.
그랬다.
저 묵룡이라는 청년이야말로 자신의 모든 목표를 망쳐놓은 장본인이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 자신의 최후까지 망쳐놓겠다는 듯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후후. 후후후…….”
진지한 표정으로 한참이나 묵룡을 바라보던 척조강이 불현듯 실소를 터트렸다.
실소를 터트리던 그가 옆에 있던 바위 위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또다시 실소를 지었다.
“후후후후후…….”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그의 웃음이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단유소는 무심한 표정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마흔 살 근처로 보이는 당당한 체구의 사내.
가만히 있어도 절로 느껴지는 그의 존재감은 백리우나 혁련강과도 충분히 비견될 만했다. 아니, 어쩌면 그 두 사람보다 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가 누구인지는 굳이 물어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척가장주 척천릉의 양자. 혈천맹주 척조강. 그러나 혈천맹주이기 이전에 그는…….’
단유소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척조강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물었다.
“그대는 괴물이라도 되는가?”
단유소는 묵묵히 척조강을 바라볼 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척조강이 다시 말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대는 백리우의 반 정도밖에 안 되는 실력이었지. 한데 어떻게 그런……. 하!”
척조강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넘어, 질려버렸다는 표정이었다.
“뭘 어찌하니 그리 되던가?”
그렇게 묻는 척조강의 눈동자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느껴졌다.
놀람과 황당함과 의구심.
단유소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스스로 뭘 어찌한 건 아니었소. 많은 분들의 도움 덕분이었고, 운도 좋았소. 그러나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귀하 때문이라고 봐야겠지.”
“말을 제법 재미있게 하는군. 후후후.”
척조강이 또다시 실소를 짓더니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그 상태로 있던 척조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힘없는 사람들은 참으로 살아가기 힘들고 괴로운 세상이라네. 그들에게만 일방적으로 가혹한 세상이지. 그렇지 않은가?”
“동의하오. 이번에 귀하께서 제대로 보여주셨으니까. 힘없는 자들이 어디까지 괴로워질 수 있고, 어느 정도까지 가혹한 일을 당할 수 있는지.”
그 말에 척조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대꾸했다. 씁쓸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알고 있네. 내 방식이 옳지 않았다는 것쯤.”
척조강을 바라보는 단유소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가 저런 대답을 내놓다니, 의외였다.
한데 거짓이라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느낌이었다.
믿어지지 않고, 믿어서도 안 되겠지만.
척조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느 사회나 비슷하다네. 강자는 약자가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괴롭히기도 하고, 알아차릴 수 없는 방식으로 괴롭히기도 한다네. 전자의 방식으로는 피눈물을 빨아가고, 후자의 방식으로는 고혈을 빨아가지. 약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네. 그래도 죽을 수는 없으니 살겠다고 몸부림들을 치지. 계속 착취만 당하면서.”
휘이잉―
탄내 가득한 바람이 불며 재가 한 차례 두 사람 사이를 휩쓸고 지나갔다.
재가 날리는 와중에도 척조강은 하늘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말이 이어졌다.
“약육강식이지. 상대적으로 강한 자가 상대적으로 약한 자를 착취하는……. 물론 세상의 모든 강자들이 그러는 건 아니라고 반론할 수 있겠지. 약자를 돕고 보살피는 강자들도 많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
척조강이 코로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말도 맞네. 나도 여럿 봐왔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예시들이 의외로 많다 하여 대전제 자체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쯤, 그대라면 알 것이네. 입만 열면 정의와 협을 외쳐대는 정파의 힘 있는 자들이 뒤로는 무슨 짓을 하는지, 그대라면 질리도록 봐왔을 테니까.”
거기까지 말한 척조강이 고개를 내리더니 단유소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면서 물었다.
“내가 궤변으로 그대를 현혹하려는 것 같은가?”
단유소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호오. 의외의 반응이로군.”
“현혹하려는 게 아니라 푸념하는 것처럼 들려서 말이오.”
“정답일세.”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이며 그렇게 대꾸한 척조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상대적인 약자였다네. 강자에 의해 아무리 불합리하고 엿 같은 일을 당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비굴하게 웃으며 늘 고개를 조아렸지. 혹시 모를 날벼락이 내게 떨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며, 항상 노심초사하면서 살았다네. 당시의 내 입장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내 처지를 바꿀 길이 없었지. 그러다가 이를 악물고 결심했다네. 내가 그 강자보다 더 막강한 힘을 갖기로.”
혼자서 뭔가를 생각하며 피식 웃어 보인 척조강이 말을 이었다.
“막상 힘을 갖고자 하니 쉽지 않더군. 거대한 기반을 이미 갖추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힘을 키우려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턱도 없었지. 결국 비정상적인 방법밖에 답이 없더군. 그러려면 나 자신이 먼저 악귀가 되어야 했지. 그 후부터, 비열하고 가혹하고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모든 방식을 동원했다네.”
“아주, 제대로 악귀가 되셨구려.”
“아까도 비슷한 말을 했지만 부인할 생각, 없네.”
그 후로 척조강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이 지속되던 와중에 단유소가 말했다.
“귀하가 왜 힘을 갖고 싶어 했는지, 그 심정은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소. 물론 귀하의 방식은 눈곱만큼도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만.”
척조강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대꾸하지 않았다.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귀하의 말마따나 어느 사회에서건 약자는 강자에 의해 알고도 착취당하고 모르고도 착취당할 것이오. 아무리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이 와도 그런 현상은 반복되겠지.”
이번에도 척조강은 대꾸하지 않았고, 단유소가 말을 이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르니, 그저 막연하게 바랄 뿐이오. 이후에 찾아올 세상은 약자가 지금보다 덜 착취당하는 세상이기를. 그리고 약자가 지금보다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기를. 그런 세상을 바라는 마음에서, 소소하게나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볼 생각이기도 하고.”
척조강이 빙그레 웃으며 대꾸했다.
“역시 묵룡이군. 내 푸념을 제대로 알아들었어.”
잠시 척조강을 바라보던 단유소가 이윽고 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이제 지옥에나 가시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