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합일 (3)
눈을 뜬 단유소가 처음으로 접한 건, 충격이 가득한 눈빛으로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백리극과 백리우의 모습이었다.
“사부님……?”
단유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을 때에야 두 사람은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었다.
백리극이 얼른 단유소의 근처로 다가가서 물었다.
“처, 처음이 대라유유선공이었고 나중이 혼원태극공이었느냐?”
“그, 그것이…….”
“운기를 하는 도중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상히 말해보아라. 어서!”
“처음에 운용했던 건 사부님의 말씀대로 대라유유선공이었습니다. 한데, 앞서도 말씀드렸듯 생소한 느낌이 섞인 기운이었습니다. 한순간에 기운을 극한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조심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무래도 생소한 기운이 섞여 있는 탓에 약간의 두려운 마음도 들어…….”
심마에 빠질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조심했다는 뜻.
“잘했다. 그 후에는?”
“진기가 혈도를 가득 채우고 흐르는데, 그 운행 속도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빨랐습니다. 그래서 더욱 조심하며 운기를 계속했는데, 그럴수록 운행 속도에 가속이 붙었습니다. 스스로 두려워질 정도로…….”
“그래서?”
“어느 시점부터는 운행 속도가 더 이상 빨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속도에 적응하다 보니 두려움이 서서히 사라져가며 평온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상태가 아마도 새로운 대라유유선공의 극한인 듯하여 혼원태극공을 끌어올리려 했는데…….”
백리극이 이어질 말을 재촉하듯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유소가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혼원태극공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이?”
“마치 원래 없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혼원태극공을 익히기 전처럼, 진원진기가 아예 호응하지 않았습니다.”
백리극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고, 단유소가 말을 이었다.
“너무 이상했습니다. 그 힘이 아예 사라진 게 아닌가 하여 두렵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혼원태극공을 끌어올릴 때의 느낌을 기억하고, 그것을 되살리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런데도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혈도를 타고 빠르게 돌던 진기의 운행 방식이 바뀌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간단히 비유해서 혈도를 타고 흐르는 진기가 기다란 관 안에서 흐르는 물이라고 했을 때, 제 안에서 흐르는 물은 관 안을 가득 채운 채로 빠르게 흐를 뿐이었습니다.”
거기까지는 이해했다는 듯 백리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관 안을 가득 채운 채로 평범하게 흐르던 물이 자체적으로 소용돌이치며 흐르기 시작한 겁니다. 마냥 쭉 뻗어나가는 형태로 흐르는 게 아니라, 관 안에서 자체적으로 회전하며 흐르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나선형으로, 조밀하게…….”
“그, 그런……!”
“한데 희한한 점은, 진기가 나선형으로 휘몰아치며 운행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운행 속도가 다시금 빨라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최대한에 이른 후 더는 빨라지지 않았던 그 속도가 더 빨라진 겁니다.”
단유소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두려운 마음이 들어 멈추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괴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잠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선형으로 회전하면서 돌기 시작한 그 진기에, 혼원태극공의 힘이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백리극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런 백리극을 향해 단유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부터는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지고 더없는 평온함이 느껴졌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해방감이 들더니, 나중에는 제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모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의 기분이 이럴까 싶은 희열도 느꼈습니다. 그러다가 운기가 저절로 끝났던 겁니다.”
“허어……!”
백리극이 탄성을 내뱉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듣는 나도 신기한데 직접 겪은 너는 오죽했을까. 어쨌거나 네 말인즉, 나선형으로 흐르는 그 기운 안에 혼원태극공의 힘이 담겨 있다는 뜻이지?”
“그렇습니다. 현재 제 몸에 흐르고 있는 진기는 대라유유선공도, 혼원태극공도 아닙니다.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기운입니다.”
“합해졌다?”
“그런 듯합니다.”
“활성화된 그 기운이 진원진기에 미치는 영향은?”
“아직 그 기운을 이용하여 직접 무공을 펼쳐보지는 않았기에…….”
말을 줄인 단유소가 고개를 돌려 근처에 있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촛불을 향해 검지를 뻗었다.
그리고 잠시 후, 타오르던 작은 촛불 안에 동그란 하나의 구멍이 뚫렸다.
그 동그란 구멍은 한동안 유지되다가 사라졌는데,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타오르던 촛불에는 미세한 흔들림조차 없었다.
놀라운 점은 단유소가 언제 기운을 발출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고, 더욱 놀라운 점은 그러는 동안 단유소의 모습이 또다시 어느 정도 희미해지면서 기척이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백리극과 백리우가 부릅뜬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을 때, 단유소가 손을 거두었다. 그러더니 백리극을 향해 말했다.
“이전과는 확실히 다릅니다, 사부님. 이전에는 혼원태극공의 강력한 힘을 사용하면 진원진기에도 강렬한 자극이 느껴지면서 온몸이 허해지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러한 자극이 없습니다. 다만 방금 전처럼 강력한 힘을 사용할 때에는 진원진기에서 진동 같은 게 느껴질 뿐입니다.”
“온몸이 허해지는 느낌은?”
“뭔가가 소모되었다는 느낌이 약간 들 뿐입니다. 이전과 비교하면 미약한 수준입니다.”
“허허…….”
백리극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놀라움, 대견함, 뿌듯함 등이 공존하는 웃음이었다.
“축하한다, 아우.”
백리우의 말이었다. 그는 줄곧 석실의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후로 처음 입을 연 것이다. 물론 지금 그가 보이고 있는 미소에는 잔잔함과 따스함이 담겨 있었다.
“이 모든 게 사부님과 형님 그리고 다른 많은 분들 덕분임을 압니다. 너무 많은 것들을 받기만 하는 것 같아서 염치가…….”
“아니, 아우는 당당하게 그 모든 것을 누려도 돼. 그 모든 것을 누려도 될 만큼 열심히 해왔으니 그럴 자격도 충분하지.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우가 그런 성취를 얻었으니 우형은 더욱 기쁘다네.”
“……감사합니다, 형님.”
백리우의 어조와 표정 속에서 백리극은 한 가지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유소가 우의 경지마저 뛰어넘은 게로구나! 천하제일인의 자리가 이렇게 갑자기 바뀔 줄이야. 허허…….’
그런 생각을 하던 백리극이 서둘러 백리우에게 물었다.
“만약 우리가 숨긴다면, 현재 유소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몇 명이나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으냐?”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이 강호에 없을 거예요. 다만 혁련 교주와 예교령 전 궁주라면, 아우가 본인들의 경지를 뛰어넘었음을 금세 알아챌 거고요. 이전의 아우보다 미세하게 경지가 낮았던 심 궁주도 어느 정도는 눈치채겠지요.”
“나머지는?”
“흑풍대주를 비롯한 몇 명도 아우가 더 나아갔음을 느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들도 아우가 실제로 어떤 경지에 있는지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할 거예요.”
그러자 백리극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변화는 우리끼리만 알고 있는 게 좋을 듯하구나. 혁련 교주, 예 궁주, 심 궁주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를 해두겠다.”
“저도 할아버지와 같은 생각이에요. 아우는 이후에 있을 혈천맹과의 일전에서 가장 강력한 변수로 작용할 테니까요. 물론 윤이에게는 알려야겠죠.”
백리우는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백리극이 말했다.
“아까부터 온통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더니 약간 피곤하구나. 이제는 내가 좀 쉬어야겠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단유소가 얼른 침상에서 벗어나며 침구를 반듯하게 정리했다.
그러자 백리우가 가볍게 그물망 위로 오르며 말했다.
“이제 걱정거리도 사라졌으니 저도 이참에 한번 푹 쉬어야겠어요.”
단유소가 석실의 문 앞으로 다가가더니 뒤돌아서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저는 가서 인사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사부님, 형님, 감사합니다.”
말을 끝낸 단유소가 두 사람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각각 자리에 누운 상태에서 두 사람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단유소가 밖으로 사라진 후 약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백리극이 조용히 물었다.
“기분이 어떠냐?”
“아까는 심경이 복잡했는데, 지금은 후련해요. 아울러 녀석이 대견스럽고.”
“후후…….”
“할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정점에 있는 사람이 느끼는 중압감이 어떤 것인지를.”
“누구도 이해할 수 없지. 그 중압감은.”
백리우가 누운 상태에서 손을 휘저으니, 석실을 밝히고 있던 촛불들이 거의 동시에 꺼졌다.
“그 어느 때보다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할아버지도 쉬세요.”
* * *
단유소가 모습을 드러내자 평상 위에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두 사람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동생!”
예교령이 단숨에 평상에서 벗어나 단유소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빠르게 단유소를 끌어안았다.
“누, 누, 누님…….”
“깨어났구나, 동생. 정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누, 누님, 저 아직 씻지도 못해서…….”
단유소는 벗어나려 했지만 예교령은 더욱 세게 끌어안을 뿐이었다. 예교령이 단유소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이렇게 동생이 깨어났는데.”
단유소가 포기했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예교령이 포옹을 풀더니 고개를 한 차례 끄덕여 보인 후 옆으로 비켜섰다. 혁련강과 먼저 인사를 나누라는 뜻이었다.
단유소가 앞에 서자 혁련강이 단유소를 쓱 훑어보더니 짧게 말했다.
“멀쩡한 것 이상이군.”
단유소가 혁련강을 향해 포권하며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감히 감당할 수조차 없는, 너무도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천하의 묵룡에게서 이런 대접을 받으면 기분이 정말 좋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불편하군. 자네의 마음은 알겠으니 자세부터 풀게.”
단유소가 천천히 허리를 편 후에 말했다.
“어쩌자고 그 귀한 것들을 제게 허락하셨습니까.”
“자네 덕분에 흑풍대주를 포함한 흑풍대 대부분이 살았는데, 그깟 게 아깝겠는가.”
“하오나…….”
“자네가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준 것이네만, 내심으로는 따로 기대한 부분도 있었네. 한데 자네는 기대를 훌쩍 넘어서 아예 나를 경악하게 만드는군. 역시 묵룡은 묵룡이야.”
영약의 기운을 토대로 단유소가 더 강해지기를 기대했다는 뜻이었다.
“흑풍대주가 복용했어도 큰 효과를 봤을 겁니다.”
“어차피 본 교에서는 조만간 또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야. 그 친구에게는 그것들을 주면 되네. 현재의 상황에서 가장 큰 효율을 볼 수 있는 건 자네였지.”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예교령이 말했다.
“정마알. 그렇게 갑자기 훌쩍 앞서 나가면 어쩌자는 거야.”
애교 섞인 농담.
백리우가 예측했듯, 예교령 또한 자신의 변화를 금세 알아챈 것이다.
단유소가 대꾸했다.
“그래봐야 누님한테는 언제까지나 귀여운 동생일 뿐이죠. 평생 그렇게 남을 겁니다.”
“푸호호홋! 하여간 말도 저렇게 예쁘게 한다니깐.”
단유소가 빙그레 웃어 보인 후에 예교령에게 말했다.
“그간의 일들, 맹주님께서 다 얘기해주셨어요. 고마워요, 누님. 저를 구해주신 것도. 모두에게 이렇듯 도움을 주시는 것도.”
“무엇보다도 동생이 무사해서 난 기뻐. 그거면 됐어.”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예교령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