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합일 (2)
한동안 맹주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맹주가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사부가 잠깐씩 끼어들어 부연 설명을 하는 식이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단유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천마 혁련강이 지원해준 영약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에서였다.
“천마신교주께서 어찌하여 제게 그런…….”
“두 가지 이유일 거야. 하나는 흑풍대주를 구해준 데에 대한 보답 차원이겠지. 내게 아우가 매우 중요하듯 그에게도 흑풍대주가 매우 중요할 테니까.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이유는 아마도…….”
잠시 말을 멈췄던 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혈천맹과의 싸움을 종결시키려면 아우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 또한 아우가 쓰러지기 직전에 보였던 엄청난 신위에 대해 보고를 받았을 테니까. 물론 그 두 가지 이유 외에도 이런 저런 정치적인 이유들도 당연히 존재하겠지만.”
정치적인 이유 같은 건 잘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너무 큰 것들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맹주의 이야기는 그 후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에야 단유소는 대강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단유소가 두 사람을 향해 깊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심려를 너무 많이 끼친 듯합니다. 송구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맹주와 사부의 이야기를 듣는 와중에 의아했던 건, 의외로 두 사람이 매우 친밀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무림맹에 있다는 사부님의 지인은 역시 맹주님이셨던 건가?’
이전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대하는 맹주의 모습은 단순히 능력 있는 수하를 대하는 모습 이상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사부와 맹주의 분위기를 보니 모종의 확신까지 섰다.
그렇기에 더욱 궁금해졌다.
‘과거의 강호에서 사부님은 대체 어떤 분이셨던 겁니까?’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지만 사부는 본인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았다. 강호에서 활동할 당시에 본인이 썼던 별호나 소속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본인의 이름조차도.
백리우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 시점에서 아우에게 말해줘야 할 중요한 사안들이 세 가지 정도 있네.”
단유소 또한 진지한 눈빛으로 백리우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우가 깨어나기 직전에 아우의 신체에서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었네.”
백리우가 잠시 그 현상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듣는 단유소의 눈동자가 계속해서 커져 갔다.
“어떻게 그런 일이…….”
“아마도 아우가 직접 운기를 해봐야만 상태를 정확히 알 수 있겠지. 하지만 운기는 다음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 하세.”
“예.”
“두 번째로 말해줘야 할 사안은…….”
잠시 말을 멈춘 백리우가 백리극을 바라보았다.
백리극이 눈을 지그시 감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백리우가 다시 단유소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와 아우의 사부님과의 관계네. 아마 아우도 많이 궁금하겠지. 가뜩이나 아우는 사부님의 함자도 모를 테니까.”
“그렇습니다.”
눈동자가 커진 상태에서 단유소가 얼른 대꾸하자 백리우가 말했다.
“아우의 사부님의 존함은 백리극이시네.”
단유소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바, 방금 뭐라고…….”
잘못 들었을 것이다.
천무검신 백리극은 전전대 무림맹주로서, 근현대의 강호사에 한 획을 그은 전설적인 존재다.
은거한 지 오래되어 수많은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확실한 건 그가 여전히 이 강호에서 가장 영향력이 높은 존재라는 점이었다. 현 무림맹주인 백리우보다 더.
그런 존재가……, 사부였다고?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말한 그대로네. 즉, 이분이 바로 내 조부시지.”
석상이라도 된 듯, 백리극을 바라보는 단유소의 표정과 자세는 한동안 변함이 없었다.
그 즈음,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백리극이 눈을 뜨며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백리극의 입이 열렸다.
“미안하구나. 미리 얘기해주지 않아서.”
단유소가 당황하여 대꾸했다.
“그,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사부님 같은 분께서 저를 제자로 받아주신 것만으로도 제가 오히려 영광스럽고 감사한 일인데…….”
여전히 현실 같지가 않다.
사부가 그 천무검신 백리극이었다니.
결국 사부는 은거한 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을 위해 쏟은 셈이다.
“혼란스러우냐?”
“아직 현실감이 덜 느껴질 뿐……, 혼란스럽지는 않습니다.”
그 후로 백리극과 백리우는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잠시 단유소에게 시간을 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에 백리극이 말했다.
“이제 운기를 해보자. 네게 일어난 그 신기한 현상이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는지 너무도 궁금하구나.”
“알겠습니다, 사부님. 한데 아까 맹주님께서…….”
그러자 단유소의 말을 끊으며 백리우가 짧게 말했다.
“형님.”
뜻을 알아들은 단유소가 바로 정정하여 말했다.
“혀, 형님께서 해주실 말씀이 세 가지 있다고 하셨는데, 아직 한 가지가…….”
그러자 백리우가 대꾸했다.
“세 번째 사안은 꼭 지금 들을 필요가 없는 이야기네. 다음에 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단유소가 대꾸하자 백리극이 말했다.
“이제 운기를 해보자. 현재의 몸 상태에 이상이 느껴지지 않는 건 확실하지?”
“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상이 없는 수준을 넘어선 상탭니다.”
그 말에 백리극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자세히 말해보거라.”
“일단 온몸에서 매우 상쾌한 기분이 듭니다. 또한 평상시에 활성화되는 대라유유선공의 느낌도 이전과는 매우 다릅니다.”
“어떻게 다른데?”
“부드러움은 여전한데, 그 안에 생소한 다른 느낌이 섞여 있습니다. 한데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운임에도 이질감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익숙한 듯도…….”
진지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백리극이 말했다.
“몸에 이상이 없다면 한번 시작해보자꾸나. 먼저 대라유유선공을 일으킨 후, 서서히 기운을 끌어올려라. 최대한으로 운용되는 상태에서 혼원태극공으로 넘어가 보자.”
“예, 사부님.”
대꾸한 단유소가 그물망에서 내려오더니 침상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그 상태에서 눈을 감은 단유소가 서서히 대라유유선공을 활성화시켰다.
백리극과 백리우는 단유소가 운기조식을 취하는 광경을 신중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아까도 그의 몸에서 신기한 광경이 벌어졌었다. 이번에도 외부적으로 어떠한 현상이 벌어질지 모르니, 그것을 관찰하기 위함이었다.
단유소가 계속 진기를 끌어올림에 따라, 서서히 휘날리던 그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거세게 휘날리기 시작했다.
종래에는 마치 폭풍 속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바람이 거세어졌는데, 신기하게도 그 바람은 단유소의 주변에서만 휘몰아치듯 불고 있었다. 당장 그에게서 세 걸음 떨어진 곳에 있는 촛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곱게 타오르고 있었으니까.
단유소에게서 발산되는 기운이 계속해서 커져, 백리극과 백리우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막대하게 커진 기운은 더 이상 커지지 않고 한동안 그 상태를 유지했다.
[정말 놀랍네요, 할아버지. 일전에 저 아이가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력해진 느낌인데요?]
[그러냐?]
되묻는 백리우도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더 이상 기운이 강해지지 않는 것으로 보니 아마도 저게 최대한인 듯한데…….]
[그렇게 보이는구나.]
동의한다는 듯 백리극이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다시 전음을 보냈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질투심마저 느껴질 정도예요. 저 아이의 나이 때 저는 저렇게까지 강하지 않았거든요.]
백리극이 빙그레 웃자 백리우가 다시 전음을 보냈다.
[솔직히, 저기에서 더 강력해지는 건 아닌가 하고 노심초사하기도 했어요. 그러면 지금의 제 경지에 맞먹게 되는 수준이라서…….]
백리우의 말은 사실이었다.
무공을 실전에 활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만 따지면 현 강호의 최강자는 단연 단유소다.
수년간, 단유소는 고난이도의 임무들을 수행하며 생사의 경계에서 살아왔다. 지금의 저 힘 또한, 당장 실전에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는 뜻이다.
게다가 단유소에게는 혼원태극공이 있다.
비상식적으로 강력한 힘을 제공하는 그 무공까지 감안했을 때, 현 강호에서 단유소를 상대로 우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 정도일 것이다.
바로 백리우 자신과 천마 혁련강이다. 물론 어떤 강자들이 존재할지 모르는 혈천맹 쪽은 제외한 결론이긴 하지만.
그 즈음, 계속해서 단유소의 주변에 휘몰아치던 거센 바람이 서서히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백리극이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구나.’
백리우의 말마따나 저 정도면 이 강호에서 단유소를 상대할 수 있는 고수가 거의 없을 수준이었다. 저 나이에 저 정도라면, 나중에는 능히 백리우의 뒤를 잇는 천하제일 고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속으로 그 생각을 하며 만족하던 백리극의 눈동자가 다시금 커진 건 바로 그때였다.
단유소의 주변을 휘몰아치던 바람이 완전히 가셨다고 느껴질 무렵, 그의 모습이 희미해지는 착각이 들며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던 것이다.
백리극이 손등으로 빠르게 눈을 비볐다. 눈이 침침해진 건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다시 봐도 착각한 게 아니었다.
원래의 자리에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단유소의 모습은 여전히 희미해진 모습이었다. 약간 반투명해진 모습이라고 할까.
기척도 역시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히 눈앞에 있는데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희한한 느낌.
오랜 세월 강호에 몸담았고 그러는 동안 수많은 기이한 일들을 보고, 들었음에도, 이렇듯 신기한 현상을 접한 적은 없었다.
‘이게 대체…….’
백리극이 곁눈질로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보고, 느끼는 이 현상이 여전히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한데 백리우의 표정에도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리극이 서둘러 물었다.
[너, 지금 저 아이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느냐?]
[믿어지지가 않지만…… 반투명해 보여요.]
놀람이 가득한 어조.
[기척은?]
[전혀, 전혀 느껴지지 않아요.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 어떻게…….]
손자도 같은 것을 봤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백리극이라 하여 이유를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 이유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 직후, 백리극은 또다시 깜짝 놀라야 했다.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던 단유소의 몸에서 한순간 엄청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이 아닌가.
아까보다 훨씬 강력한 기운이었다. 아까의 기운과는 아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지금도 강해지는 중이었다.
하지만 눈으로 보이는 단유소의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막강한 기운을 발산하는 것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반투명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아까 기운을 발산할 때에는 주변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지만, 지금 단유소의 주변에는 고요함만이 가득했다.
“말도…… 안 돼…….”
백리우가 혼잣말처럼 그 말을 중얼거렸을 때쯤, 거짓말처럼 단유소의 몸에서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스읍……. 후우우우…….”
그 직후, 단유소가 길게 호흡하더니 눈을 떴다.
순간, 그의 눈에서 번쩍이는 정광이 일었다가 서서히 사라졌고, 반투명해졌던 그의 몸도 금세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단유소가 운기를 시작한 후로 일각여가 흐른 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