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합일 (1)
그러자 백리우가 웃으며 물었다.
“할아버지가 힘 좀 써주시게요?”
“아니. 네 아비 스스로 흔쾌히 승낙할 것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도울 게야.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게 그런 거거든. 너도 자식이 있으니 알 것 아니냐.”
그 말에 백리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또다시 잠시 침묵이 유지되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도 백리극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 불한당들을 상대할 만한 전력은 충분하고?”
“적들의 규모를 모르니 충분한지는 확신할 수 있어요. 다만 정예 전력이 많아야 할 테니 이번에 신룡령을 내릴 생각이긴 해요.”
신룡령(神龍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신룡대에 관련된 명령이다. 신룡대에 몸담았던 모든 인원들을 소집하는 명령으로 유사시에 맹주가 내릴 수 있다. 신룡대에 몸담았던 모든 대원들은 일생에 한 번, 반드시 신룡령에 응해야 한다.
“신룡령이라. 아주 좋은 생각이지.”
전대 무림맹주였던 백리인의 시대에는 신룡령이 내려진 예가 없었다. 전전대 무림맹주인 백리극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굳이 신룡령을 내려야 할 사안이 없었던 탓이다.
백리극이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많이들 모이겠구나. 잘하면 이 할아비에게 익숙한 친구들도 오랜만에 볼 수 있을 것이고. 다들 모이면 아주 볼만하겠어. 허허헛.”
백리극이 맹주였던 시절에 신룡대원이었다면 지금쯤 거의 노인들일 것이다. 살아서 무공을 펼칠 수 있는 한 그들도 예외 없이 모여야 한다. 그래서 저렇게 말한 것이다.
아무리 현역이 아니라 해도 신룡대는 신룡대다.
신룡대에 몸담았던 인물들이라면 무공 수준은 말할 것도 없고 작전 수행 능력 또한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 전력인 것이다.
백리우가 말했다.
“그리고 혁련 교주도 저와 같은 생각입니다.”
“허헛! 여기저기 숨어 있던 노마두들까지 다 집합하겠구나. 더 볼만하겠어.”
흑풍대에 몸담았던 인원들의 역량 또한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흑풍대의 성격상 위계가 뚜렷하고 응집력 또한 대단하니 그들도 신룡대만큼이나 강력한 역량을 보일 것이다.
일전에 백리우와 혁련강은 적들이 예상하지 못하는 전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었는데, 전 신룡대원들과 전 흑풍대원들이 바로 그 전력의 정체였다.
“그런 의미에서 할아버지께도 부탁드릴 게 있어요.”
“각 문파들의 지원을 이끌어내는 부분이겠지.”
“예. 맞아요.”
당장 천마신교주와 소수궁주마저도 극진하게 예우하는 존재가 바로 백리극이었다. 강호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큰 어른인 것이다.
전전대 무림맹주로서 백도의 중흥기를 연 만큼, 백도에 끼치는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힘닿는 데까지 도우마.”
“감사해요, 할아버지.”
“감사는 무슨. 당연…….”
백리극이 말을 제대로 맺지 않자 백리우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조부를 바라보았다.
백리극은 눈을 크게 뜬 채로 단유소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백리우도 고개를 돌려 그물망 위를 바라보았다.
그 직후, 백리우가 눈을 크게 뜨고 놀람 가득한 어조로 말했다.
“저, 저게 어찌 된……!”
단유소의 몸 주변에 희뿌연 안개 같은 것들이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니 안개는 단유소의 몸 자체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단유소의 몸에 꽂혀 있는 침들을 통해서였다. 그곳에서 발산된 희뿌연 안개 같은 것이 서서히 단유소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 것이다.
느껴지기로, 단유소의 몸을 감싸기 시작한 안개와 같은 것은 일종의 기운이었다.
백리우로서도 처음 접하는 신기한 현상이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러한 현상으로 인해 단유소에게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닌지 크게 염려되기도 했다.
“이, 이게 지금 어떻게 되고 있는 거예요, 할아버지? 이 아이, 괜찮은 거예요? 저, 저러다 잘못되는 건 아니겠죠?”
“나, 나도 모르겠구나. 이, 일단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은데…….”
백리극도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 즈음, 단유소의 몸을 빠져나온 하얀색의 기운이 점점 더 그의 몸을 두텁게 감싸기 시작했다.
이후에도 하얀 색의 기운은 계속해서 단유소의 몸을 빠져나왔고, 그의 몸을 점점 더 두텁게 감쌌다.
결국 뿌연 기운에 의해 단유소의 몸 전체가 거의 가려지다시피 했다.
단유소의 몸에서 더 이상 희뿌연 기운들이 발산되지 않을 무렵부터, 그 기운들이 단유소의 몸을 중심으로 서서히 휘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운들의 회전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하지만 점점 빨라지던 회전 속도는 일정한 정도에서 멈춰, 마치 하늘 위로 서서히 떠가는 구름을 보는 듯했다.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백리극이 그 현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의 기운인 걸 봐서는 대라유유선공과 관련된 기운이 아닐까 싶다. 저 기운들이 이 아이의 몸을 떠나지 않는 것을 봐서는 일단 다행이라 여겨지긴 한다만…….”
왜 저런 현상이 벌어지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는 뜻.
그때였다.
“하, 할아버지! 저건…….”
백리우가 단유소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황급히 말하자 백리극의 눈빛이 심각해졌다.
단유소의 입과 코 그리고 정수리에서 또 다른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단유소를 휘감고 있는 백색의 기운과 달리, 그 안개는 먹구름처럼 어두운 색이었다. 백리우가 느끼기에 묵색의 안개 또한 기운이었다.
처음에 묵색의 기운은 단유소의 입과 코와 정수리 근처에만 머물렀다. 뭐랄까, 빠져나오고 싶어 하는데, 백색의 기운에 의해 막히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유소의 몸을 빠져나오는 묵색의 기운 또한 그 양이 점점 많아지는 중이었다. 백색의 기운에 의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대신, 묵색의 기운은 그 안쪽을 서서히 채워갔다.
그 후로 약간의 시간이 흘렀고, 묵색 기운이 백색 기운의 안쪽을 가득 메웠다. 덕분에 단유소의 몸은 아예 시야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리고 묵색 기운도 백색 기운의 안쪽에서 단유소의 몸을 감싼 채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색의 기운이 휘도는 것과는 그 모습과 느낌이 매우 달랐다.
백색 기운이 횡으로 회전하고 있는 데 반해, 묵색의 기운은 종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부드럽게 회전하는 백색의 기운과는 달리, 묵색의 기운은 매우 격렬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두 종류의 기운은 확실하게 자신들의 영역을 차지한 채, 조금도 섞이는 법이 없었다. 두 기운이 이루고 있는 경계가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다. 유리 그릇 안에 담긴 물과 기름을 보는 것 같았다.
“모르겠구나. 어떻게 되고 있는 건지 나도 정말 모르겠어…….”
백리극의 말이었다. 염려가 가득한 어조였다.
그 후로 시간이 제법 흐른 시점에도 그러한 현상은 조금의 변화도 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백리극과 백리우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헛!”
“저, 저럴 수가!”
단유소의 몸이 그물망 위에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서서히 떠오르던 단유소의 몸은 그물망 위에서 한 자쯤 되는 곳에서 멈춘 후, 더 이상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부터 묵색의 기운이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색의 기운도 질 수 없다는 듯 더욱 빠르게 회전했다. 오로지 단유소의 몸만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요히 허공 위에 떠 있을 뿐이었다.
팅! 티딩! 티디디디딩!
그나마 단유소의 몸에 박혀 있던 나머지 침들마저도 강하게 튕겨 나오기 시작했다. 백리우가 얼른 기의 막을 형성하여 자신과 백리극에게 날아오는 침들을 막았다.
종으로 휘돌던 묵색의 기운과 횡으로 휘돌던 백색의 기운이 섞이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두 개의 기운이 이리저리 어지러운 방향으로 휘몰아치며 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휘이이이이잉―
단유소의 몸을 중심으로 석실 안에 바람이 강력하게 휘몰아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그로 인해 석실을 밝히고 있던 몇 개의 촛불도 순식간에 꺼졌다.
깜깜한 와중에도 백리극과 백리우는 단유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백색과 묵색의 기운이 섞이니 회색이었다. 회색의 기운이 계속해서 단유소의 몸을 타고 맹렬하게 휘돌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회색 기운의 회전이 점점 잦아들기 시작했다.
신기하고 희한한 점은 그 와중에 회색의 기운들이 점점 밝은 빛을 띠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회색의 기운이 점점 밝아지며 은빛으로 변해갔다. 기운이 더 은빛으로 변해갈수록, 휘도는 속도도 느려졌다.
완연한 은빛으로 변한 그 기운은 이제 매우 서서히 단유소의 몸 주변을 회전하고 있었다. 처음에 백색의 기운이 그러했듯, 매우 부드러운 느낌이었다.
허공에 떠올랐던 단유소의 몸이 서서히 그물망 위로 하강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 후, 단유소의 몸을 감싸고 있던 은빛의 기운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단유소가 호흡할 때마다, 그의 코를 통해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모든 은빛 기운이 단유소에게 흡수되었다.
“으음…….”
단유소에게서 작은 신음 비슷한 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 * *
계속해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리는데 왠지 모르게 귀가 멍멍하여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현상도 잠시, 점점 소리가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소야! 유소야! 들리느냐?”
“아우! 정신이 드나?”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몽롱한 상태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누군지 구분할 수는 없으나 익숙한 목소리들이었다. 그리운 느낌을 주는 목소리도 있었다.
“으음…….”
이상하게도 눈을 뜨는 게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눈에 들어온 건 두 개의 얼굴이었다.
아직 초점이 잡히지 않아 보이는 모든 게 흐릿했다. 그렇기에 누구의 얼굴인지도 제대로 인식되지 않았다.
몇 차례 계속해서 눈을 껌뻑거린 후에야 그 두 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중의 한 사람을 알아본 순간,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 사부님……?”
자신이 강호에 출도한 후로, 사부가 이렇듯 자신을 보러 온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어디이며, 사부가 어떻게 자신의 곁에 있는 걸까.
하지만 그런 의문과는 달리, 몸이 먼저 반응했다. 상체가 알아서 벌떡 일어나진 것이다.
사부님이니까.
“이 녀석……, 이 녀석아! 드디어 정신이 들었구나!”
침상을 벗어나지도 못한 시점에 사부가 자신을 와락 껴안았다. 사부의 음성이 격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사부의 몸에 안긴 상태에서 뒤쪽으로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맹주님…….”
그 즈음 사부가 팔을 풀고 떨어졌다. 그러자 뒤쪽에 서 있던 무림맹주 백리우가 말했다.
“아우, 드디어 일어났구나…….”
맹주의 눈가에 물기가 가득했다. 또한 그의 목소리도 사부의 목소리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맹주가 자신을 아낀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렇다 해도 저 정도로 격렬한 반응이라니. 의아했다.
어쨌거나 맹주를 확인한 이상, 정식으로 예를 취해야 했다.
그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예를 취하려는 생각이면 그러지 않아도 되네.”
“예…….”
사부와 맹주.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은 생각해본 적도 없는 광경이었다.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저어……, 송구한 말씀이오나 제가 지금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혼란스럽습니다.”
그러자 맹주가 황급히 되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하나?”
“적들을 상대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제가 크게 다쳤던 것까지는…….”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뇌리에 스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황급히 물었다.
“아! 적룡은, 흑풍대주는, 무사합니까?”
“그래. 무사하네. 지금은 멀쩡하게 회복한 상태고.”
맹주의 대꾸였다.
“아아……!”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아우를 구했던 건 전대 소수궁주였던 예교령 궁주였네. 이곳도 소수궁에서 마련해준 은신처고. 아우는 거의 열흘 가까이 의식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였지.”
“제가 열흘씩이나…….”
고개를 끄덕인 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일단 내가 보고받은 내용들을 토대로 차분히 설명을 해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