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회복 (3)
그러자 자세히 말해보라는 표정으로 백리극이 백리우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백리우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이 친구들, 다 죽을 뻔했어요. 흑풍대주에, 적룡에, 이 아이까지. 만약 이 아이가 그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필경 다 죽었을 거예요. 이 아이도 지금쯤 흙 속에 묻혀 있거나, 그놈들에 의해 강시화되어가고 있었겠죠. 그런 상태보다는 적어도 이 상태가 낫잖아요.”
“이 아이가 그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직접 봤느냐?”
“아니요. 저도 싸움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서야 도착했어요. 마지막 순간에 이 아이를 위험에서 건진 사람은 아까 보셨던 전대 소수궁주였어요. 이 아이가 어떻게 싸웠는지에 관해서는 적룡에게 보고받은 거고요.”
그 과정에서 현 소수궁주인 심소옥의 공이 컸다고 들었다. 그녀가 강자 한 명을 맡아준 덕분에 전대 소수궁주가 묵룡 등을 구할 수 있었단다.
“그랬구나.”
백리극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하자 백리우가 문득 뭔가를 떠올렸다는 듯 물었다.
“이 아이가 소수궁주와도 연이 있다는 사실, 할아버지도 알고 계셨어요?”
“예전에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래도 소수마후라고 불렸던 나름 위험한 사람들인데, 이 아이가 잘못될까 봐 걱정되지는 않으셨고요?”
“이 아이를 믿었다. 너를 믿듯이.”
그 말에 백리우가 미소를 지었다.
백리극이 단유소에게 시선을 둔 채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혼원태극공이라 한다. 그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보완하기 위해 대라유유선공이라는 절학도 함께 익히게 했지.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리하면 이 모양이 되지만.”
“혼원태극공…….”
백리우가 무공명을 다시 한번 읊조린 후에 가만히 백리극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물었다.
“할아버지가 몸소, 먼저 시험해보셨던 거죠? 그 혼원태극공이라는 무공.”
백리극이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말했다.
“너도 이 아이를 아끼니 하는 말이다만, 어쨌거나 이 아이에게도 내 피가 너만큼은 섞여 있지 않으냐.”
똑같은 손자라는 뜻.
그렇기에 똑같이 아낀다는 뜻이다.
백리우가 씩 웃으며 말했다.
“듣는 장손 서운하겠어요.”
당연히 농담이었다.
그러자 백리극이 대꾸했다.
“너도 나중에 손자들 생기면 알게 될 게다. 똑같은 손자라도 할아비 입장에서 더 눈이 가고 더 예뻐 보이는 게 누군지.”
결국 장손이라는 뜻.
조손이 마주 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백리극이 말했다.
“일단 이 아이를 치료해야겠구나. 그러려면 이것저것 필요한 게 있다.”
백리극이 몇 가지 물품을 말하자 백리우가 즉시 석실을 나가서 예교령에게 준비를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백리우가 다시 석실로 돌아왔을 때, 백리극은 침상 옆의 탁자에 무언가를 잔뜩 늘어놓은 상태였다.
백리우가 보니 침이었다. 수백 개는 거뜬히 되는 듯했다. 색깔도 다양했고 길이도 다양했다.
“이게 다 뭐예요, 할아버지? 무슨 침이 이렇게 많아요?”
백리우의 물음에 백리극이 대꾸했다.
“이 침들을 거의 다 사용해야 할 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면과 등 쪽에 모두 침을 꽂아야 한다.”
“하면 질기고 팽팽한 그물을 준비하라고 하신 게…….”
“그래. 그물을 이쪽에서 저쪽까지 연결할 거다. 그 위에 이 아이를 눕혀야 한다. 눕혔을 때 허리와 둔부가 가급적이면 아래로 쳐지지 않도록, 그물을 최대한 팽팽하게 연결해야 할 게야.”
백리우가 고개를 끄덕인 후에 물었다.
“치료하시면 이 아이, 괜찮아지는 거예요?”
“일단 살려는 놔야지.”
“당연히 살기야 하겠지요. 할아버지가 치료를 하시면 이 아이가 원래대로 무공을 쓸 수 있는 거냐고 여쭙는 겁니다.”
그 말에 백리극이 대꾸하지 않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런 백리극을 향해 백리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이 아이의 상태를 알아요. 영약들을 먹여놔서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지만, 중요한 건 내상이잖아요. 이 아이의 체내에서 한 줌의 진기도 느낄 수 없고, 그나마 영약으로 생성된 기운들마저도 연기처럼 증발하고 있어요. 진원진기에 타격도 많이 입은 것 같고요.”
백리우가 바로 말을 이었다.
“저와 예 궁주가 무슨 짓을 해도 방법을 찾을 수 없었어요. 이 아이가 다시금 정상적으로 무공을 펼칠 수 있을 가능성? 솔직히 매우 낮잖아요. 제가 지금 이 아이의 능력을 원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니라는 걸 아실 거예요. 건강하게 일어나기만 해도 상관없지만…….”
무공을 잃은 무인은 누구나 크나큰 상실감을 겪는다.
강한 무인일수록 더 그렇다. 강호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로 평가받던 무인들도 불구가 되거나 무공을 잃은 경우, 폐인으로 전락한 예가 대부분이었다. 그 정신적인 상실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무인이기 때문이다.
평생, 무공에 모든 것을 바쳐온.
백리우는 지금 그러한 부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극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대꾸했다.
“설령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이 아이는 잘 견뎌낼 것이다. 할애비는 이 아이를 그렇게 키웠다. 그리고…….”
백리극이 감았던 눈을 뜨더니 백리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도 느꼈다시피 내 무인으로서의 인생은 거의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혼원태극공을 연구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끝난 것이나 다름없지. 그 위험한 무공을 이 아이로 하여금 익히게 했던 십수 년 전부터 내가 공부했던 게 무엇일 것 같으냐?”
백리우가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의술이라는 뜻이었다.
백리극이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이 아이가 강호인으로 살아가든, 일반인으로 살아가든 그건 이 아이의 선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게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될 일은 없을 것이다.”
무공을 잃고 어쩔 수 없이 일반인으로 살아가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라는 뜻.
즉, 어떻게 해서든 단유소의 무공을 회복하게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시설이 갖춰진 후에는 집중해야 하니, 네가 좀 도와다오.”
백리극의 말에 백리우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푸확! 헉! 헉! 허억! 허어어억!”
동굴로 통하는 수면 위쪽으로 머리를 내민 연소운이 거친 숨을 계속해서 몰아쉬었다.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연소운에 이어서 또 한 사람이 수면 위로 머리를 드러내었다.
심소옥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 거칠게 호흡하는 연소운과 달리 심소옥의 호흡은 평상시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
거칠게 호흡하는 와중에도 연소운이 심소옥을 바라보며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심소옥이 물가로 나와서 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풋! 발전? 웃기고 있네. 고작 그 수준으로 어디 가서 행세깨나 하고 다닌 모양이지? 창피한 줄 알아.”
“헉, 헉! 누나가, 헉, 헉! 너무 강한 거……. 헉, 헉!”
“흥! 사내가 한심하게 변명은.”
연소운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호흡만 골랐다
적당히 호흡을 고른 후에 연소운이 말했다.
“누가 어디 가서 실력 행세했다고 했나요. 예전보다는 좀 더 발전했다고만 했지.”
“훗.”
“누나도 그전에 봤을 때보다 더 강해졌네요.”
“그럼 뭐, 나는 그동안 놀고먹었겠어?”
심소옥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하자 연소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심소옥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연소운이었다. 표정이나 어투만 저렇지, 속내는 저렇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은 한 차례의 수련을 마친 직후였다.
동굴 안은 신룡대원들과 흑풍대원들로 온통 북적거려, 따로 몸을 움직이는 수련을 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때문에 대부분이 운기행공들을 통해 내공 수련 위주로 개인 수련을 하는 중이었다.
답답하긴 하나, 밖으로 나가서 수련할 형편도 아니었다. 자칫 혈천맹의 시야에 걸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던 와중에 심소옥이 수련할 수 있게 해주겠다며 연소운을 데리고 나섰던 것이다. 심소옥이 수련 장소로 택한 곳은 강물 속이었다.
“정말로 누나가 말한 대로네요. 수련할 장소가 없다는 건 핑계네요.”
물속에서의 수련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수련이었다.
자신이 물속에서 허우적댔던 것과 달리, 심소옥은 물속에서도 매우 안정된 모습이었다. 안정을 넘어서서 자유로웠다. 미꾸라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누나, 시간 있으시면 한 번 더 가요.”
“흥. 근성 있는 척은.”
“부탁 좀 해요, 누나.”
연소운이 짐짓 능글능글한 척하며 부탁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행동.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연소운을 바라보던 심소옥이 결국 체념한 듯 대꾸했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동생인데, 어디 가서 쥐어 터지고 다니지 않게 하려면 이 몸이 좀 더 고생할 수밖에.”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싫지 않은 표정.
두 사람이 막 물속으로 들어가려 할 때, 동굴의 어두운 통로 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다.
“궁주, 나도 좀 낍시다.”
동굴 뒤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그렇게 말한 사람은 진평이었다.
“길 오라버니.”
진평이 길평이라는 가명을 쓰고 있기에 심소옥이 그를 길 오라버니라 부른 것이다. 송주나 적룡에게도 모두 오라버니라는 호칭을 썼다. 그녀가 숙부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유소뿐이었다. 백리우와 혁련강에게 쓰는 호칭은 백부였다.
진평이 대꾸했다.
“부탁 좀 합시다.”
진평의 표정과 어조에 간절함이 스며 있었다.
심소옥도 그 간절함의 이유를 알고 있었다. 연소운으로부터 전해 들은 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 조원들은 누구나 조장님을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그 마음이 가장 큰 사람은 역시 부조장님일 거예요. 부조장님은 지금, 조장님이 저렇게 된 이유가 본인의 탓이라 여기고 있어요. 본인이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탓이라고, 본인이 약한 탓이라고 여기고 있는 거예요. 게다가 조장님이 저런 상태인 지금, 막중한 책임감까지 느끼고 있을 거고요.”
연소운의 그 말을 잠시 떠올린 심소옥이 무심한 표정으로 진평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 ‘적당히’라는 말을 몰라, 길 오라버니. 각오는 돼 있는 거지?”
심소옥의 말에 진평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세 사람이 물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오전에는 서백풍, 곽승추, 선화란이 강물 속에서의 수련에 합류했고, 그날 오후부터는 온 신룡대원들과 흑풍대원들까지 합류했다. 물속에서의 수련은 그날 후로 계속되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나면서 적룡과 송주는 몸 상태를 거의 회복했고, 안타깝게도 단유소는 백리극이 치료를 시작한 후로 닷새가 되기까지도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 * *
“후우우우우…….”
작은 석실 안에서 백리우가 홀로 한숨을 내쉬었다.
백리우는 그물망 위에 누워 있는 단유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유소의 몸에는 여전히 수백 개의 침이 꽂혀 있는 상태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의 정면과 후면을 가리지 않고 촘촘하게 꽂혀 있었다. 등에 닿아 있는 그물망 아래쪽에서도 침을 꽂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