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회복 (2)
그러자 옆에서 듣고만 있던 예교령이 말했다.
“예상 외 전력이라면 우리 쪽에서도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곳저곳에 숨어 있는 인력들이 은근히 많거든요. 물론 실제로 오라버니들에게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자 백리우가 예교령의 하얀 손을 살포시 잡으며 말했다.
“예매와 같은 미인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야. 예매 같은 능력 있는 여인의 도움이라면 언제든 환영이고.”
“호홋. 백리 오라버니도 참.”
그러자 이번에는 혁련강이 물었다.
“원래 강호의 일에 이렇게까지 관여하는 성향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예, 혁련 오라버니의 말씀이 맞아요. 하지만 제 소중한 동생을 저렇게 만든 작자들이라면, 얘기가……, 많이 달라지지요.”
예교령이 마지막 말을 할 즈음에, 그녀의 손이 하얗고 영롱한 빛을 띠어갔다.
“아! 아야! 아파! 예매! 손! 손……!”
백리우가 옆에서 낮게 외치자 예교령이 화들짝 놀라며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하얗게 변한 그녀의 손이 움켜잡고 있던 손은 백리우의 손이었다.
“죄, 죄송해요, 오라버니. 저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져서 그만……. 호오……. 호오오…….”
예교령이 그렇게 말하며 얼른 백리우의 손을 들어 올리더니 입으로 바람을 호호 불었다. 그러자 백리우가 헤벌쭉 웃었다.
그 모습을 째진 눈으로 바라보며 혁련강이 말했다.
“눈꼴사나워 죽겠네. 내, 빨리 본 교로 돌아가던지 해야지 원.”
혁련강이 혀를 찰 때였다.
갑자기 그들이 있는 곳으로 한 사람이 빠르게 다가왔다. 서백풍이었다. 그가 백리우를 향해 예를 취한 후 입을 열었다.
“저어……,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물었다.
“손님? 이곳에? 누구시라던가?”
“그게……, 연로한 어르신인데 본인의 정체를 밝히지는 않고 계십니다. 혼자서 불쑥 찾아오셨는데, 소수궁주님이 그분과 몇 마디를 나누시더니 들여보내셨습니다. 지금 올라오고 계십니다.”
“혼자서 이곳을 찾아왔다고?”
“예.”
“소수궁주와는 아는 사이처럼 보이던가?”
“그렇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황 노파께서도 고개를 갸웃하셨던 것으로 봐서는 아마 아무도…….”
서백풍의 대답을 들은 백리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혼자서 어떻게 이곳을 찾아왔으며, 정체를 모르는데도 심소옥은 왜 그 노인을 들여보낸 걸까.
“나를 찾아오셨다던가?”
“아닙니다. 그게……, 조장님을 찾아 오셨다고…….”
묵룡을 찾아왔다는 뜻.
백리우가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을 때, 옆에서 혁련강이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누구, 짐작되는 분이라도 있으시오?”
백리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다만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일 뿐이었다.
그때였다.
몇 개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몇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맨 앞에는 심소옥이 있었고, 그녀의 뒤를 신룡대와 흑풍대의 선임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한 노인이 그들을 지나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노인이 안쪽을 쓱 훑어보더니 예교령과 혁련강을 차례로 바라보며 말했다.
“예쁜 아이야, 너는 여기 이 아이의 사부겠구나. 그리고 그 옆의 너는 천마신교에서 두목 노릇을 하는 꼬맹이일 것이고.”
그 말을 들은 모든 이들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노인은 혁련강의 정체를 아는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련강에게 꼬맹이라는 표현을 썼다.
세상에 누가 있어, 천마라고 불리는 존재에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어, 어르신께서는 누구신지…….”
노인의 기세가 남달랐기에 혁련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또다시 혁련강과 예교령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대꾸했다.
“아이들아. 내가 너희들의 입장이라면 지금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먼저 취할 것이다.”
혁련강과 예교령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 모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다만 한 사람, 백리우만이 눈빛을 교환하지 않고 멍하니 노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혁련강과 예교령이 주춤주춤 일어나려 할 때였다.
계속해서 멍하니 노인만 바라보던 백리우의 입에서 한마디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 할아버지…….”
백리우의 그 한마디에 의해 동굴 안이 온통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백리우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존재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한 사람일 수밖에 없었다.
천무검신 백리극.
전전대 무림맹주이자 당대 천하제일인이었던 무인이 바로 그였다.
전대 소수궁주인 예교령의 정체를 알아보고도 그녀를 “아이”라고 불렀고, 천마 혁련강을 알아보고도 그를 “꼬맹이”라고 불렀다.
이 강호에 누가 있어 그 두 사람을 그런 식으로 부를 수 있단 말인가. 천무검신 백리극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더 확실한 건 노인의 존재감이었다.
솔직히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여느 시골 노인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존재감이 있었다.
기세를 발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게를 잡고 있는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주변을 굴복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할까?
무림맹주와 천마신교의 존재감마저도 노인의 존재감 앞에서는 희미해진 느낌이었다.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이 강호에 몇 명이나 있을까? 아니, 있기는 할까?
노인이 백리우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오냐, 내 새끼. 잘 지냈느냐?”
그 한마디로 인해 모든 게 확실해졌다.
노인은 의심할 나위 없는 백리우의 친조부, 천무검신 백리극인 것이다.
백리우가 얼른 평상 아래로 내려오며 말했다.
“절부터 받으세요, 할아버지.”
“오냐, 그래.”
백리우가 노인을 향해 큰절을 올릴 때쯤에는 이미 혁련강과 예교령도 평상 아래로 내려온 상태였다.
백리우가 큰절을 마치고 일어서서 말했다.
“그간 강녕하셨어요, 할아버지.”
“그럼. 보다시피 이 할애비 아직 정정하다.”
그러자 혁련강이 노인을 향해 포권하며 말했다.
“혁련 모가 천무검신을 뵙습니다.”
백리극을 향해 포권하는 혁련강의 태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손했다. 그러자 예교령도 바로 포권하며 예를 취했다.
“예교령이라 합니다. 천무검신을 뵈옵니다.”
“오냐, 그래. 그래.”
백리극이 자애로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 모습이 딱 손자의 친구들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혁련강과 예교령 모두 백도인에게 저렇게까지 공손할 필요는 없는 사람이었다. 한쪽은 적대하는 세력이고 한쪽은 거의 상관이 없는 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저토록 공손한 이유는 하나.
백리극이 충분히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전설이기 때문이다.
“오래 살다 보니 이런 그림을 다 보게 되는구나. 나쁘지 않구나. 내 시대에도 못 이뤘던 일을 너희들이 이뤄냈구나. 다들 얼마나 고생이 많누.”
백리극이 말한 이런 그림이란 무림맹주와 천마가 함께 있는 지금의 상황을 뜻했다.
백리우가 물었다.
“혼자 오신 듯한데 어떻게 이곳을 찾으셨어요?”
“설화를 쫓아왔다. 대강의 위치는 그 아이가 가르쳐줬고, 자세한 수색은 내가 했지.”
“설화라니요?”
“있다. 그런 아이가.”
백리극이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자 백리우의 시선이 잠시 진평에게 머물렀다. 뜻을 눈치챈 진평이 즉시 전음으로 대꾸했다.
[해동에서 난다는 보라응입니다. 조장님의 애완용인데, 가끔씩 개인적인 연락 용도로도 쓰이는 듯했습니다. 한데 천무검신께서 어찌 설화를 아시는지는 저도…….]
그 말에 백리우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당연하게도 진평이 그 이유를 알 리 없었다.
백리극이 백리우에게 말했다.
“이제 그 아이 좀 보러 가자꾸나.”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예교령이 대꾸했을 때, 혁련강이 얼른 백리우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보아하니 천무검신께서 말씀하시는 그 아이란 묵룡 같은데, 하면 이곳에 오신 이유도…….]
[그렇소.]
[묵룡이 대단한 인재라는 사실은 나도 인정하오만, 천무검신 같은 전설적인 분께서 직접 관리하실 정도요?]
묵룡이 송주와 적룡을 구할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보고를 받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정말 대단했다.
현재의 모습만 비교하면 천마인 자신이 묵룡보다 훨씬 강하지만, 분명한 건, 지금의 묵룡이 젊었을 때의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백리우가 젊었을 때보다 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묵룡이 아무리 대단한 젊은 고수라 해도, 그 때문에 천무검신과 같은 존재가 직접 찾아왔다는 건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다. 천무검신은 가뜩이나 수십 년간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이 아닌가.
백리우가 뒤돌아서 웃으며 대꾸했다.
[그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제자이기 때문이오.]
혁련강의 눈동자가 커졌다.
묵룡이 천무검신의 제자였다니…….
이제야 조금은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묵룡이 저 젊은 나이에도 어떻게 그렇게까지 강할 수 있는 건지.
[일단 귀하만 알고 계시구려.]
백리우가 그 말을 남기며 멀어져 갔다.
자그마한 석실을 몇 개의 촛불이 밝히고 있었다.
예교령은 이곳까지 안내해준 후 자리를 비켜줬다. 그렇기에 석실에 남은 사람은 백리극과 백리우였다.
석실의 침상에 죽은 듯 누워 있는 사람은 단유소였다.
백리극이 옆에 앉아서 눈을 감은 채로 그의 신체 이곳저곳을 진맥하는 중이었다.
백리우가 그런 백리극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할아버지…….’
다시 만나게 되면 원망을 늘어놓을 생각이었다. 왜 묵룡으로 하여금 그런 위험한 무공을 익히게 한 거냐고 따지고 탓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조부를 다시 보고 나니 그러고 싶은 마음이 사그라졌다.
‘왜 이렇게 주름이 많아지셨어요…….’
조부는 천하제일인이었다.
조부가 자취를 감춘 요즘에야 자신이 천하제일인 소리를 듣고 있지만, 만약 자취를 감추지 않았다면 여전히 조부가 천하제일인이었을 것이다.
그런 무인이기에, 조부는 언제나 엄청난 동안이었다. 내공의 화후가 매우 깊은 탓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지금의 조부는 그야말로 너무 연로한 모습이었다. 동안이기는커녕, 비슷한 연령대의 다른 노인들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다.
비단 노화가 빠르게 진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몸도 많이 왜소해졌다. 즉, 신체 기능도 많이 약해졌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보니 너무 마음이 아팠다.
여느 집안과 마찬가지로, 손자인 자신을 특히 어여삐 여겼던 조부였는데.
아까 조부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멍하니 계속 바라만 봤던 이유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분명히 조부가 맞는데, 자신이 마지막에 봤던 조부의 모습과는 너무 차이가 컸던 탓이다.
그 즈음 백리극이 진맥을 마치고 눈을 떴다.
“……엉망이구나.”
백리우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리극이 가만히 백리우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너도 이 아이의 상태를 알고 있겠지.”
묵룡의 혼수상태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진원진기에 영향을 주는 그 위험한 무공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백리우가 지체 없이 대꾸했다.
“예.”
“이 할애비를 원망했느냐?”
“예.”
그 말에 백리극이 씁쓸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백리우가 말했다.
“지금은 아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