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회복 (1)
탁! 탁!
두 중년인이 평상에 앉아 장기를 두는 중이었다.
가로 열 줄, 세로 아홉 줄로 이뤄진 네모꼴의 전장에서 벌어진 초(楚)와 한(漢)의 치열한 전투도 서서히 끝나가고 있었다.
초를 잡은 쪽의 근소한 우세.
결국 초를 잡고 있던 중년인이 한쪽 구석으로 상(象)을 옮기더니 말했다.
“장(將)이요.”
궁(宮) 안에서 왕이 피할 도리가 없는 외통수였다.
결국 한을 잡은 중년인이 긴 한숨을 내쉬며 패배를 인정했다.
“후우우우우우. 졌소.”
그러자 초를 잡은 중년인이 핀잔을 주듯 말했다.
“어찌하여 한 판을 못 이기시오? 봐주시는 게요? 접대 장기라면 되었소.”
한을 잡은 중년인이 대꾸했다.
“접대는 무슨.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다는데 왜 그러시는 게요. 가뜩이나 진 것도 서러운데.”
“귀하의 수 싸움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고는 생각할 수가 없으니 하는 말 아니오.”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이오.”
한을 잡은 중년인이 그렇게 대꾸하자 초를 잡은 중년인이 말했다.
“강호판도 이 장기판만 같으면 좋겠구려. 그러면 이 강호는 내 것인데.”
“실컷 드시구려. 이깟 강호…….”
두 사람이 앉아 있는 평상으로 누군가가 다가온 것은 그때였다.
한 손에 작은 다과상을 들고 있는 그 인영은 여인이었다. 그것도 기가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가 말했다.
“참……. 다른 분들이 했으면 우스갯소리나 객기로 보일 텐데, 무림맹주와 천마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농담 같지 않아 보인다구요.”
누가 들으면 깜짝 놀랄 말이었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장기판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두 중년인들이 바로 무림맹주 백리우와 천마 혁련강이었던 것이다. 초를 잡았던 쪽이 혁련강, 한을 잡았던 쪽이 백리우였다.
여인이 다과상을 내려놓으며 평상에 다소곳이 앉았다. 그러더니 장기판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백리 오라버니가 또 졌군요.”
“우헤헤. 예(芮)매가 옆에서 응원이라도 해주면 이길 것도 같은데.”
축 처져 있던 백리우가 갑자기 헤벌쭉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혁련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참, 여자 좋아하시는구려. 안 그럴 것처럼 생기셔서는.”
“아니, 난 미녀를 좋아하는 거라오. 허허허.”
“허이구.”
혁련강이 질렸다는 듯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백리우가 말한 예매라는 여인의 이름은 예교령(芮嬌玲).
바로 소수궁 전대궁주의 이름이었다. 즉, 그녀가 바로 현 궁주인 심소옥의 사부인 것이다.
백리우가 예교령을 향해 짧게 물었다.
“그 친구는……?”
예교령이 대답 대신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자 백리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면 지금 내게 필요한 게 뭔지도 알고 있겠군.”
그 말에 예교령도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어두운 구석 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휘익― 턱!
허공을 가르며 뭔가가 날아왔고, 예교령이 그것을 가볍게 낚아챘다.
술병이었다. 허공섭물의 수법을 쓴 것이다.
그녀가 술병의 마개를 따더니 백리우의 찻잔에 차 대신 술을 따랐다.
“오늘은 너무 많이 드시지 마세요.”
백리우가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의 표정을 바라보며 혁련강도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혁련강과 예교령 모두, 백리우가 왜 저러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묵룡 때문이었다.
산서 해안가에서의 일이 있은 후로 이미 며칠이 지났다.
묵룡과 적룡, 그리고 흑풍대주 송주 모두, 크게 다친 상태에서 예교령과 심소옥에 의해 구출되었다. 신룡대와 흑풍대가 합류한 건 그 직후였다.
예교령이 그 모든 이들을 이끌고 온 이곳은 근처의 강가에 마련된 은신처였다. 물속으로 들어와서 동굴 위쪽으로 올라와야 하는, 소수궁 특유의 은신처인 것이다.
백리우가 합류한 것은 그 후였다. 신룡대의 전서를 통해서 연락이 닿았고, 황 노파의 은밀한 안내를 통해 합류한 것이다.
비슷한 방식으로, 혁련강도 그 후에 합류했다.
최초에 발견되었을 당시, 적룡과 송주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상태는 이미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적어도 의식은 있는 데다가, 가뜩이나 무공 경지도 높은 그들이니 치료의 효과도 더 좋았던 것이다.
다만 묵룡만이 며칠째 의식이 없었다.
백리우와 예교령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음에도 여전히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백리우가 술을 들이켜더니 혁련강에게 물었다.
“천년설삼, 더 없소?”
“허……!”
혁련강이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더니, 찻잔을 들고 예교령에게 내밀었다. 예교령이 그의 찻잔에도 차 대신 술을 따랐다.
혁련강이 술을 단숨에 들이켜더니 대꾸했다.
“천년설삼이 뉘 집 개 이름인 줄 아시오? 그나마 두 뿌리 중에서 한 뿌리는 우리 흑풍대주 먹이려고 했는데, 그것까지도 묵룡한테 다 넘겼잖소. 어디 천년설삼만 넘겼나? 혹시 몰라서 가져온 천년하수오까지 넘겼잖소. 그거 값으로 환산해서 다 청구해드려?”
그러자 백리우가 민망하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니, 뭐……, 혹시나 하고 물어본 거잖소. 교에 남아 있는 게 있으면 공수해올 수도 있는 문제고…….”
“없소. 없단 말씀이오. 본 교라고 해서 그런 거 쌓아두고 있는 줄 아시오? 그나마 별로 없는 거, 탈탈 털어서 가져왔었단 말이오. 그나마 내 새끼도 못 먹인 그 귀한 것들을 남의 자식한테만 다 퍼준 꼴이라, 그 생각만 하면 배 아파 죽겠구먼.”
혁련강이 말한 “내 새끼”란 송주, “남의 자식”이란 묵룡이었다.
그의 말마따나 묵룡은 천년설삼 두 뿌리에 천년하수오까지 복용한 상태였다.
사실, 혁련강이 말을 저렇게 하고 있다 뿐이지, 당시에 묵룡의 상태를 확인한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 귀한 것들을 선뜻 내밀었었다.
당시의 묵룡은 거의 시체나 다름없는 꼴이었고, 차도가 없자 이후에도 남은 것들을 계속 내민 것이다. 아까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덕분에 송주는 백년설삼만 두 뿌리 복용했다. 적룡도 한 뿌리 얻어먹었다. 백년설삼만 해도 소림의 대환단을 능가하는 영약이었다. 두 사람은 금세 원기를 회복했고,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
그런데 정작 천년설삼 두 뿌리와 천년하수오를 먹은 단유소의 상태가 가장 좋지 않은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아물어가고 있는데, 내부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백리우와 예교령으로서도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방법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혁련강이 예교령에게서 술병을 넘겨받더니, 백리우의 잔에 술을 채워주며 위로하듯 말했다.
“괜찮아질 거요. 원래 강인한 친구잖소.”
그가 자신과 장기를 둬서 계속 지는 이유도 바로 묵룡 때문일 것이다. 뭘 해도 신경이 묵룡에게 쏠려 있는 것이다.
그가 묵룡을 얼마나 아끼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송주를 아끼는 마음도 매우 깊은데, 맹주가 묵룡을 생각하는 마음은 그보다 훨씬 더 깊어 보였다.
“고맙소.”
백리우가 그렇게 대꾸하며 술을 들이켰다.
그러자 혁련강이 예교령을 일견하더니 다시 백리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른 얘기를 좀 나눠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은데…….”
혁련강의 뜻을 알아들은 예교령이 서둘러 말했다.
“제가 자리를 비켜드릴게요. 오라버니들은 편하게 말씀들 나누세요.”
이들도 처음에는 서로 맹주, 교주, 궁주라는 호칭으로 불렀었다. 그러다가 백리우가 먼저 편하게 대하자는 제의를 했다.
백리우 본인이 사석에서는 묵룡과 형님, 동생으로 지내는 사이이니, 예교령과는 오라비와 누이 관계가 된다는 논리였다. 딱히 틀린 논리도 아니었기에 예교령이 그 말을 따랐고, 혁련강도 스리슬쩍 묻어간 것이다.
백리우가 대꾸했다.
“어차피 예매도 우리와 같은 생각이잖소. 함께 혈천맹에 맞서자고 했으니, 어지간한 사안이면 그냥 터놓고 얘기합시다.”
“굳이 저 때문에 그러지 않으셔도…….”
예교령이 그렇게 말할 때, 혁련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럽시다. 예매도 그냥 듣지.”
혁련강이 그렇게 말하더니 술을 한 잔 들이켰다. 그 후에 입을 열었다.
“혈천맹을 조사할수록 많은 증좌들이 하북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은 귀하께서도 잘 아실 것이오. 하북이 어떠한 상징성을 갖고 있으며, 그게 얼마나 민감한 문제인지도.”
혈천맹이 정치권력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였다. 역시나 무림맹에서 파악한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백리우와 예교령이 고개를 끄덕이자 혁련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들의 본거지가 하북에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소. 하북은 모든 이들의 눈과 귀가 집중된 곳이오. 하북 인근도 마찬가지요. 조금만 잘못 돼도 역모로 몰릴 수 있는데, 어떤 바보가 그런 곳에 본거지를 꾸리겠소.”
백리우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고, 혁련강이 말을 이었다.
“근처 이곳저곳을 주요 거점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그거야 유사시에 꼬리를 자르면 그만이오. 하지만 본거지는 다르오. 꼬리를 밟히지 않을 위치여야 하오. 그래서 우리가 찾기 힘들었던 것이고.”
“찾기라도 했다는 말씀처럼 들리는구려.”
“짐작되는 곳은 있소.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판단하고 있소.”
혁련강이 그렇게 말하자 백리우가 술잔을 들이켰다.
“장성 너머겠지요.”
백리우의 말에 혁련강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아, 알고 계셨소?”
“최근에 알았소. 그렇지 않아도 나 또한 그 이야기를 꺼낼 참이었고.”
백리우는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 담긴 표정이었다.
“역시 무림맹은 무림맹이구려. 이번에야말로 우리가 확실히 빨랐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솔직히 밝히자면 이건 무림맹의 역량이 아니오. 우리 문상 개인의 역량이지. 아시잖소, 우리 문상이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두루 존경받는 선생이라는 걸. 그리고 그 친구가 근래 조용히 황성에 한 번 다녀왔다오.”
“허어…….”
혁련강이 허탈하게 웃더니 술잔을 들이켰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처리할까를 고민하면 되겠구려.”
그 말에 백리우가 미소 띤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혁련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들의 본거지를 급습하는 싸움은 절대로 길어져서는 안 되오. 속전속결로 단번에 확실하게 뿌리를 뽑아야 하오. 만약 길어지면 그들도 그들대로 대책을 세울 것이고, 그러면 몇 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금 그 뿌리에서 싹이 틀 테니까.”
“동감이오.”
“혈천맹도 우리의 전력을 대강 예상하고 있소. 그렇기에 저들을 확실히 제압하려면,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력이 필요하오.”
“하면, 드러나지 않은 전력이면서 매우 강력한 전력이어야 하겠구려. 귀하에게는 그런 전력이 있다는 말씀처럼 들리기도 하고.”
“있소. 나와 마 군사만이 알고 있는 전력이.”
“규모와 수준을 물어봐도 되겠소?”
민감할 수 있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백리우가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보이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혁련강이 대꾸했다.
“수준은 흑풍대에 준하는 작전 수행 능력. 규모는 현 흑풍대 규모의 열배쯤이오.”
“호오!”
백리우가 짐짓 대단하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자, 혁련강이 백리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짐작건대, 귀하에게도 그 비슷한 전력이 있겠지요.”
말은 짐작이라고 했지만, 어조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백리우가 대답 대신 미소만 지어 보였다. 인정한다는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