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신룡무-179화 (179/200)

179화. 한설연의 대비책 (4)

“후우우우우.”

집무실의 탁자에 양쪽 팔꿈치를 걸치고 양손을 모아 이마에 댄 채로 제갈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이건 내 실수일세.”

그의 표정은 매우 괴로워 보였다.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는 걸 내가 진즉에 눈치챘어야 했어.”

“아닙니다, 문상 어른. 제가 더 신경을 많이 썼어야 했습니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집무실의 탁자 앞에 서서 그렇게 대꾸한 사람은 한설연이었다. 그녀의 표정에도 후회와 안타까움이 가득했다.

그러자 제갈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소저의 탓이 아니야. 그간 일이 너무 잘 풀리다 보니 내가 신경을 못 썼어.”

신룡대에 함정일 가능성이 높다는 전서를 보냈고, 답신을 받았다. 역시나 그들은 매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신룡대의 존속이 위험할 정도로 큰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방심이었다.

신룡대 전체가 함께 움직이고 있는 데다가 흑풍대와 합동으로 작전을 펼치고 있다 보니 너무 안심한 것이다.

적의 함정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신룡대와 흑풍대의 생존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는 사실을 보고하자마자, 백리우가 서둘러 그곳으로 떠났다.

그것도 단신으로 떠났다. 제갈윤은 백리우를 말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 백리우와 묵룡의 관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설령 자신이 말렸다 해도 백리우는 듣지 않았겠지만.

백리우가 떠나자마자 호위조를 급파하는 식으로 조치를 취해놓긴 했다. 백리우의 수호위인 표익은 표익대로 백리세가에 연락하여 대책을 마련한 모양이었다.

그 생각을 하던 제갈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백리우가 천하제일인이고 그의 능력이 무한에 가깝다 하더라도, 신룡대를 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룡대가 위험에 처한 곳은 산동 북부의 바닷가였다. 백리우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시간상으로 무리였다.

백리우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황이 종료되고도 시간이 한참 흐른 후일 것이다. 인근에는 신룡대를 도울 만한 역량이 있는 백도 세력도 없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상황이 신룡대에게서 보고받은 그대로라면, 그들을 구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들이 산개해서 퇴각하여, 전력의 일부라도 보전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괴로운 표정으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던 제갈윤의 얼굴에 이윽고 결심의 빛이 섰다.

제갈윤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초조함과 염려가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제갈윤이 말했다.

“미안하네.”

“어, 어인……, 말씀이신지…….”

“이제부터 우리는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맹주님의 무사 귀환을 위해 움직일 것이네. 경로상의 모든 위험 요소들을 파악하고, 정예 전력을 비밀리에 그 경로로 파견할 것이네. 이 시점에서 맹주님의 신변에까지 이상이 생기면, 백도는 끝일세.”

한설연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그, 그렇다는 말씀은…….”

“그래. 현 시간부로, 본 맹은 신룡대라는 전력이 없다는 가정하에 움직일 것이라는 뜻일세.”

한설연의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공식적으로 신룡대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의 옆얼굴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한설연이 조용히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제갈윤이 했던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는 그렇게 말한 것이다.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처음에는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을 뿐이네. 하지만 소저는 단순히 협조하는 정도를 넘어서 굉장히 적극적이었지. 눈치를 챈 건 그래서였네. 교월처럼 현명한 여인이라면 그런 진국을 놓칠 리 없지. 이 강호에 그런 멋진 친구, 또 없지 않나.”

그러자 한설연이 제갈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소녀의 의도가……, 불순했음을 인정합니다. 용서하십시오.”

“탓하고 싶은 마음, 조금도 없네. 의도야 어찌 되었건, 소저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임했고, 우리에게 큰 도움을 주었네. 게다가 소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 그리고 어쩌다 보니 때늦은 말이 되어버렸지만…….”

잠시 말을 멈췄던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저와 그의 사이를 내심 응원하고 있었네.”

그 말을 끝으로 제갈윤은 입을 닫았다. 한설연도 조용히 그를 주시할 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한동안 침묵이 이어지던 중에, 제갈윤이 긴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소저의 역량을 누구보다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네. 그리고 그 높은 역량보다 더 좋아하는 건, 소저라는 사람 자체일세. 그렇기에 소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게 너무 괴롭다네. 하지만 어쩔 수 없음을 소저도 잘 알 것이네. 나도 누구보다 신룡대를 아끼고, 또 묵룡을 아끼는 사람이야.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그들을 살릴 방법이…… 없어.”

말뿐만 아니라, 제갈윤은 실제로도 괴로워 보였다.

“감사해요, 문상 어른.”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그리고 송구합니다.”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는데도. 이해한다고 했잖나.”

“제가 방금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 건, 그 때문이 아닙니다.”

그 말에 제갈윤이 다시 고개를 돌려 한설연을 바라보았다.

이상했다.

그녀가 매우 상심한 표정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염려하는 기색은 여전한데, 상심하거나 포기한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제갈윤의 눈매가 좁아졌다.

“지금 무슨 말을…….”

“신룡대와 흑풍대가 생존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습니다.”

제갈윤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가 서둘러 물었다.

“방법이 있는가?”

한설연이 고개를 저으며 대꾸했다.

“이 상황에서 동원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습니다. 하오나, 소녀가 미리 조치를 취해둔 게 있기는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어서 알아듣게 얘기를 해보게!”

그러자 한설연이 호흡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신룡대의 소재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대외비입니다. 한데 소녀는 얼마 전부터 몇 차례 그 규칙을 어겼습니다. 소녀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누군가에게 비밀리에 신룡대의 소재를 알렸던…… 겁니다. 그래서 송구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렸습니다.”

“누군가.”

제갈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발설한 대상이 누군지에 따라, 그녀에게 죄를 물어야 할 상황에까지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었다.

한설연이 침을 꿀꺽 삼킨 후에 대꾸했다.

“소수궁주. 대부분의 강호인들이 소수마후로 부르는, 바로 그녀입니다.”

제갈윤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아……!”

제갈윤의 입에서 탄성이 흘렀다.

묵룡이 소수궁과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제갈윤도 알고 있었다.

한설연을 호위하는 동안에도 그쪽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묵룡의 보고를 통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지극히 개인적인 인연일 뿐입니다. 제 출신이나 성향과는 무관하며, 제가 임무에 영향을 끼칠 일도 없을 겁니다.”

당시에 어떤 관계인지를 물었을 때 묵룡이 했던 대답이었다.

한설연의 이야기가 길게 이어졌다.

그녀가 소수궁주를 어떻게 알게 되었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들어보니 제갈윤이 묵룡의 보고를 통해 들었던 내용들과 정황상 일치했다.

눈을 감은 채로, 조용히 듣기만 하던 제갈윤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소저가 취했다는 조치는?”

“소수궁과 직접 연락을 취할 수 있는 건 그 사람, 묵룡뿐입니다. 저는 방금 말씀드렸던 황 노파라는 분과 전서를 통해 가끔씩 연락을 취하며 지냈습니다. 개인적인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소수궁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전전대 소수궁주가 타계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제(祭)를 마친 후, 전대 소수궁주와 현 소수궁주가 강호에 나왔다는 소식도 함께였습니다.”

“왜 나온 거지?”

“아마도 현 소수궁주의 제자를 찾기 위함일 겁니다.”

그 후에 또다시 한설연의 설명이 짧게 이어졌다. 일인전승인 소수궁이 제자를 맞이하는 방식에 대한 설명이었다.

“소저의 말대로라면 원래는 전대의 소수궁주만 출도하는 게 원칙 아닌가?”

“내용에 적혀 있지는 않았지만, 소녀가 추측하기에는 아마도 이 강호의 현실 때문일 듯합니다.”

“혈천맹 때문이다?”

“예. 묵룡을 큰 위험에 빠트릴 정도로 그들이 위험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소수궁에서도 알고 있으니까요.”

제갈윤이 고개를 끄덕였고, 한설연이 말을 이었다.

“신룡대와 흑풍대가 산동으로 향할 즈음에 황 노파에게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황 노파도 두 소수궁주들을 보필하며 함께하고 있고, 당시에 그녀들은 하북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해서 묵룡의 소재를…….”

그러자 한설연의 눈빛을 주시하던 제갈윤이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일부러 밝혔군.”

“혹시 모를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노파심에…….”

제갈윤이 한설연에게서 시선을 떼고 고개를 돌렸다.

팔짱을 낀 채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제갈윤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노파심은 역시, 소저 본인이 혈천맹에 대해 직접 겪은 것에서 비롯되었겠지?”

한설연이 대답 대신 고개를 더 숙였다.

제갈윤의 말대로였다.

자신이 직접 겪은 혈천맹은 한번 노린 목표를 쉽게 포기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집요한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눈엣가시인 묵룡, 신룡대, 흑풍대 등을 가만둘 자들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고.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랑하는 사람의 안위가 달린 문제였으니까.

“정인(情人)의 안전을 위해서 맹의 기밀을 밝혔다라…….”

“송구…… 합니다.”

“그래서, 그 황 노파라는 분한테는 답신이 왔던가?”

한설연이 얼른 대꾸했다.

“예. 소식을 들은 두 소수궁주가 산동으로 향하는 중이라는 답신이었습니다. 마침 하북 남부를 돌아다니는 중이었으니 그 기회에 묵룡의 얼굴이라도 보러 가겠다며…….”

“하면 시간상으로는 맞아떨어질 가능성이 있겠군? 물론 우리가 바라는 대로 그림을 그려본다고 가정했을 경우에 말이야.”

“시간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 말에 제갈윤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팔짱을 풀고 다시금 한설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한설연이 말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일단은 결과를 지켜봐야겠지. 그러나 소저, 우리 무림맹의 행사는 언제나 결과만큼이나 그 과정도 중요해야 하네. 과정이 그릇되면 결과도 떳떳할 수가 없는 게 바로 우리의 입장일세. 명분이 무너지면, 무림맹도 와해되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거듭 사죄드립니다.”

“소저는 지금부터 가서, 신룡대에서 오는 모든 전서를 즉시 입수하여 내게 가져오게. 문상부에서 일하는 그 누구의 손도 거치지 않게 하게. 소저가 직접 전서를 받고, 바로 내게 가져오는 걸세. 알겠는가?”

“예, 문상 어른.”

“이번 일의 결과가 나오고 그 결과가 정리되기까지, 며칠이 걸리든 쭉 그렇게 해야 하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소저에게 내리는 벌일세.”

그 말에 한설연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신룡대의 기밀을 누설한 벌이 겨우 이 정도일 리 없기 때문이었다.

한데 제갈윤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한설연이 눈을 껌뻑이며 제갈윤을 바라볼 때, 제갈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소수궁주들과 묵룡은 우연히 만난 것이네. 그렇게 되게 만들라는 뜻이네. 내 말, 알아듣겠는가?”

즉, 둘만 아는 비밀로 만들라는 뜻이다. 결국 제갈윤은 자신에게 벌을 내릴 생각이 없는 것이다.

“무, 문상 어른…….”

“나는 지금 소저에게 알아들었냐고 묻고 있네.”

그러자 한설연이 주먹을 가슴에 대며 대꾸했다.

“충(忠).”

한설연이 예를 취하자 제갈윤이 턱짓으로 집무실의 문을 가리켰다. 바로 시행하라는 뜻이었다.

‘감사합니다, 문상 어른. 감사합니다.’

돌아서서 조용히 걸음을 옮기는 한설연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귓전으로 제갈윤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부디 그들이 우연히 만났으면 좋겠군.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이 강호를 위해서도, 내가 가장 총애하는 부하의 사랑을 위해서도.]

결국 한설연의 볼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산동 쪽의 결과가 한설연과 제갈윤에게 전해진 건, 그로부터 몇 시진이 지난 후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