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한설연의 대비책 (2)
적룡이 잠시 멍하니 단유소를 바라보았다.
‘괴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괴물이었나?’
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는 저 모습이라니.
빛나는 사람이다.
이런 곳에서 꺼트리기에게는 너무너무 아까운 빛이다.
적룡이 마음속으로 모종의 다짐을 하고 있을 때, 단유소가 턱짓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적룡의 고개가 그 방향으로 돌아갔다.
“하…….”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방금 전의 공격으로 인해 상당한 타격을 입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비응과 소응은 서 있었다.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로, 각자의 상처를 지혈하면서.
딱 봐도 단유소가 입은 상처에 비하면 훨씬 심각한 상처였다. 즉, 두 사람이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이유는 고통 때문이었다.
혈도를 짚어 지혈을 한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응급처치일 뿐이다. 고통까지 사라지지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비응과 소응이 제법 심각한 부상을 입었으니 아까에 비해 상황이 나아지긴 했지만, 그걸로 전세가 바뀌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그 두 사람이 전력에서 이탈된 게 아닌 데다가, 저들 중 한 명은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으니까.
스릉―
어느새 단유소는 쌍소검 대신 등 뒤의 장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한쪽 옆구리를 다쳤으니 양손에 동등하게 힘을 싣기가 힘들고, 그렇기에 쌍소검은 오히려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즈음, 송주가 거응에게 검을 겨눈 채로 천천히 뒤로 걸음을 옮겨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네 명의 적들이 단유소 일행을 포위한 형국이 되었다.
단유소와 송주 그리고 적룡이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등을 맞댄 채 세 방향으로 나누어 섰다.
그 상태에서 송주가 작게 말했다.
“어이, 친구. 그 잠깐의 시간 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저자들, 갑자기 눈빛이 무섭게 변했는데 말이야.”
능청스러움이 가득 묻어 있는 어조.
어떻게 된 상황인지 빤히 알면서도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농담조로 한 말이다.
송주의 말이 이어졌다.
“처음부터 아등바등 버틸 게 아니었어. 자네가 오기 전에 죽는 편이 차라리 나았겠어. 보아하니 이제는 곱게 죽여줄 분위기가 아닌데, 이거.”
역시나 농담조였다.
그러자 적룡도 작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러게 오지 말라면 좀 오지 말 것이지. 왜 기어이 와, 오기를?”
적룡다운 퉁명스러운 어조였지만, 그도 언월도를 고쳐 쥐고 있었다. 마지막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단유소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미 온 걸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고. 곱게 죽여줄 분위기가 아니라면, 우리 쪽에서 먼저 곱게 죽어주지 않으면 되겠군.”
그 말에 송주가 대꾸했다.
“후!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군?”
“칫. 끝까지 잘난 척은.”
마지막으로 적룡이 짧게 한마디 했을 때, 적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사 대 삼의 싸움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싸움이었다.
한쪽은 포위한 채 일방적으로 공격했고, 한쪽은 포위된 채 일방적으로 방어했다.
어두운 밤하늘도 노래질 수 있다는 걸, 적룡은 처음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그의 눈에는 실핏줄이 잔뜩 서 있었는데, 눈을 부릅뜬 채로 거의 깜빡거리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눈이 감겨버릴 것 같아서였다.
버텨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이제는 손에 쥔 언월도를 능동적으로 휘두르고 있다기보다는, 언월도가 본능적으로 휘둘러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사실, 포위 공격을 당하기 시작한 후로 시간이 많이 흐른 게 아니었다. 실제로는 아마 일각도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싸운 것처럼 피곤했다.
그 정도로 맹렬한 싸움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로 간에 수백 합이 오갔다.
상승의 경지에 있는 고수들 간의 싸움이니, 짧은 순간에도 공수 교환이 수없이 일어난 탓이었다.
진작 끝났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전투가 이렇듯 길어진 이유는 역시, 단유소 때문이었다.
단유소는 본인의 위치를 확실하게 지킬 뿐만 아니라, 송주와 적룡이 위험해지면 즉시 지원했다.
광응을 비롯한 적들도 진형을 유지하며 공격을 퍼부을 뿐, 승부를 낼 만한 강력한 살수를 선뜻 펼치지는 않았다.
아마도 앞서 단유소가 강력한 신위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무리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어차피 먼저 지치는 쪽은 단유소 일행일 수밖에 없었다. 이 인근을 포위하고 있는 것도 그들이니, 시간도 철저하게 그들의 편이었다.
이 상태만 유지해도 어렵지 않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데, 괜히 무리했다가 역공을 당하여 다치거나 피해를 입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상황은 적들이 의도한 바대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적룡의 상태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이제는 송주 또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온몸에서 비 오듯 땀이 흘렀다.
송주나 적룡 모두 상처도 많이 늘었다.
단유소의 지원 덕에 치명상까지는 어찌어찌 면했지만, 크고 작은 상처들을 너무 많이 입었다. 지혈을 해도 자꾸만 상처가 벌어져, 출혈량도 적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이 급격하게 지쳐가는 이유였다.
‘자네도 사람은 사람이군.’
싸우는 와중에 단유소의 상태를 확인한 송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단유소라 해서 멀쩡할 리 없었다.
그의 호흡도 매우 거칠어진 상태였다. 자잘한 상처도 많이 늘었다. 자신과 적룡을 도우며 격렬하게 움직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얼굴도 피곤해 보였다. 움직임도 아까만큼 날카롭지 않았다.
‘아까, 세상일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단유소가 광응에게 했던 말이었다.
‘과연 자네의 말대로군. 결국 자네와는 이렇듯 술 한잔 기울이지 못하고 헤어지게 생겼으니.’
다른 무엇보다 그게 가장 아쉬웠다.
두 번째로 아쉬운 대상은 교주였다.
교주는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준 존재였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믿어줬고, 밀어줬던 존재였다.
‘송구합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쉬운 대상이 있었다.
‘네 마음……, 알고 있었다. 모른 척해야 했을 뿐.’
그녀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었었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이뤄질 수 있는 미래일 터였다.
‘행복하거라.’
그 직후, 송주가 온몸에 남아 있는 진기를 모조리 끌어모았다.
‘생이 끊어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 송주는 천마신교의 흑풍대주이리라.’
거칠어진 호흡과 무뎌진 움직임.
그리고 피곤함이 점점 짙어가는 얼굴.
단유소의 상태는 누가 봐도 송주가 파악한 그대로였지만 실상은 매우 달랐다. 현재 단유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하고 있는 상태였다.
싸움이 시작된 직후부터 그야말로 치밀하게 표정과 움직임을 관리해왔다. 서서히 지쳐가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 것이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적들은 뛰어난 자들이니 의도가 눈에 보여서는 곤란했다. 그렇기에 서서히, 치밀하게 준비한 것이다.
‘한 번의 기회는 온다. 반드시.’
방심은 언제나 거의 다 이겼다고 생각된 순간에 찾아온다.
초고수들끼리 일대일로 싸워도 방심할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는데, 적들은 네 명이었다. 적어도 네 명 중에서 한 명은 방심을 할 것이다. 그들에게도 지금의 전투는 점점 지겨워지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한 번의 기회이자 마지막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송주와 적룡이 완전히 지친 지금이 바로, 적들 중 누군가가 방심하기에 최적의 순간이었다. 단유소 자신에게는 가장 집중해야 할 순간이기도 했다.
아까 혼원태극공의 힘을 두 번 썼다.
두 자루의 쌍소검으로 이기어검을 펼칠 때 한 번, 그리고 열 가닥의 지풍을 쏟아낼 때 한 번이었다.
현재 자신의 경지에서 안전하게 혼원태극공을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세 번.
단 한 번의 기회가 왔을 때 모든 것을 쏟아내야 한다.
단유소가 집중을 유지하며 적들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을 때였다.
“헛!”
헛바람 들이켜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싶은 순간, 적룡의 신형이 휘청했다.
그가 얼마나 지친 상태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 지쳐서 결국 중심이 흐트러진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적룡을 향해 파고든 하나의 인영이 있었다.
뚱뚱한 몸집의 사내, 거응이었다.
원래는 네 명의 적들이 항상 적당한 궤도를 이루며 이쪽과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거응이 적룡을 노리기 위해 순간적으로 궤도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든 것이다.
“조심!”
적룡의 상태를 확인한 송주가 반사적으로 그의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송주의 앞에 있던 소응도 안으로 파고들며 송주의 측면을 노렸다.
적들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움직임이겠지만, 이 순간이야말로 단유소가 내내 노리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단유소의 몸에서 강력한 기운의 파동이 일어난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광응이 두 눈을 부릅뜨더니 외쳤다.
“뒤!”
하지만 광응 외의 다른 적들은 의문 가득한 표정이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반응이었다.
당연했다.
물론 묵룡이 갑자기 강력한 기운을 발산했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묵룡을 포함한 모든 적들을 포위한 상황에서 왜 갑자기 뒤를 외치고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거응과 소응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미 상대에게 매우 가까워진 상태였고, 그들에게 도검을 쑤셔 박기만 하면 끝날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자신들이 노리고 있는 두 명은 지칠 대로 지쳐서 빌빌대는 자들이었다. 지금 그들을 처치하는 건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쉬운 일이었다.
광응의 지시에 따라 고개를 뒤로 돌린 사람은 묵룡 일행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은 비응뿐이었다.
그 순간 비응에게 보인 것은 회오리치며 가까워지고 있는 모래폭풍이었다.
모래폭풍은 매우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가까워질수록 더욱 거대해지는 중이었다. 마치 용오름처럼, 그 주변의 모래들을 빨아들이며 커지고 있는 것이다.
“뒤! 조심!”
그 순간에는 이미 거응과 소응도 상황을 알아차린 후였다. 모래폭풍이 사방에서 다가온 탓에, 그들의 시야에도 자연스럽게 들어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응과 소응은 속으로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모래폭풍이라니, 확실히 놀랍긴 했다.
한데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모래폭풍에 섞여서 날아오는 자갈들 쯤은 호신강기만 살짝 끌어올려도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그 외에 신경이 쓰이는 것은 시야 정도인데, 이 경지에서는 그 또한 문제될 게 없었다. 감각으로도 충분히 대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캉! 푹―
그 와중에도 송주의 검이 거응의 도를 막았고, 소응의 검은 송주의 복부를 찔렀다.
거응과 소응이 눈을 마주치며 짧게 고개를 끄덕여 보인 찰나, 모래폭풍이 그들을 덮쳤다.
휘이이이이잉―
휘몰아치는 모래폭풍 속에서 거응과 소응은 묘한 기분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상하게 서늘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였다.
슈슈슈슈슈슈슈슉―
모래폭풍을 뚫고 수많은 날카로운 것들이 사방에서 빠르게 날아들었다.
송주는 상처 입은 복부를 부여잡은 채 두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모래폭풍의 중심은 묵룡이었고 현재 자신과 적룡은 그의 곁에 붙어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세 사람이 서 있는 좁은 중심부에는 모래폭풍의 영향이 미치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다.
어쨌거나 모래폭풍을 뚫고 적들에게 날아오고 있는 것들은 검, 도, 창과 같은 병장기들이었다. 아마도 처치된 강시들과, 죽은 혈천맹의 무인들이 떨어트린 것들인 듯했다. 주변에 널려 있었으니까.
송주가 놀란 이유는 날아드는 병장기들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기 때문이었다. 수십 개는 족히 되는 것 같았다.
더 놀라운 건, 날아오는 병장기들 하나하나에 담긴 힘이었다. 강력했다. 자신이 집중한다 해도 제대로 막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떻게 이런……!’
이건 말도 안 된다. 아무리 고수라 해도 인간이 어떻게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단 말인가.
카가가가강!
푹! 푸북!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날카로운 뭔가가 살갗을 파고드는 소리들이 섞여서 들렸다.
상처 입은 복부를 부여잡은 와중에도 송주가 눈앞에 보이는 누군가의 등을 향해 검기를 발출했다. 거대한 등이었다.
푸욱―
검기가 거응의 등을 관통했다. 그가 날아오는 병장기들을 막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거응의 신형이 모래사장 위에 쓰러졌다.
슈악―
때에 맞춰 적룡이 언월도를 휘둘렀다. 그다지 강력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왜소한 소응의 등을 가르기에는 충분했다.
“크악!”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소응의 신형도 무너졌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송주는 중상을 입은 상태였고 적룡은 지칠 대로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거응과 소응의 위치가 가까웠기에 그나마도 처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광응과 비응의 모습은 이미 찾을 수도 없었다. 아마도 외곽으로 빠진 모양이었다.
털썩―
결국 송주가 버티지 못하고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 단유소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미안하네. 이 이상은……. 커억!”
송주가 말을 맺지 못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입에서 울컥 피를 토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묵룡이 이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털썩―
이어서 바닥에 쓰러진 사람은 적룡이었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그가 거의 기다시피 송주의 뒤쪽으로 이동하더니 등을 맞대고 앉았다.
일어설 힘조차 없을 것이다. 아니, 당장이라도 눕고 싶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최소한의 경계 진형을 취하고자 하는 눈물겨운 의지였다. 입가를 타고 한 줄기 피가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송주가 웃었다.
적룡으로 인해 웃던 그의 얼굴에 금세 수심이 담겼다.
사라진 묵룡을 생각하니 염려가 되었던 것이다.
부디, 아까의 그 강력한 공격에 의해 광응과 비응이 보다 많은 피해를 입었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절대 무리하지는 말게. 아무리 자네라도 아까와 같은 엄청난 힘을 쓴 후라면…….’
송주가 그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모래폭풍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제발 무사하기를, 친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