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한설연의 대비책 (1)
절벽 위에서 뛰어내린 사내는 백의 장포를 입고 있었다.
외모를 통해 유추되는 나이는 삼십 대 초반 정도.
전체적으로 갸름한 얼굴에 눈매는 날카롭고 입술은 여인처럼 붉었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무섭고 잔인하게 느껴지는 미소였다.
단유소가 백의 사내를 바라보며 대꾸했다.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였다.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아무리 적이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그래야 우리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거고.”
백의 사내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단유소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물었다.
“그래서, 당신들은 무슨 학(鶴)이지?”
그 말에 백의 사내가 피식 웃더니 대꾸했다.
“우리는 모두 응(鷹)을 쓰지.”
하늘을 나는 매를 뜻하는 ‘응’이다.
“매라. 확실히 두루미보다는 무서워 보이네. 그래서 무슨 매들이신가?”
그 말에 백의 사내가 또다시 피식 웃더니 대꾸했다.
“동료들이 호흡을 고를 시간을 벌어보시겠다? 그래, 뭐 못 밝힐 것도 없지. 뚱뚱한 쪽은 거응(巨鷹), 체구가 작은 쪽은 소응(小鷹), 녹색 옷은 비응(飛鷹).”
“당신은?”
“광응(狂鷹).”
“미친 매라……. 무시무시하네. 왠지 나도 미치지 않으면 이 싸움, 힘들어질 것 같고.”
단유소의 반응에 백의 사내, 광응이 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이 미쳐 날뛰어도 힘들 거야.”
“자신만만하네. 아까도 말했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뜻대로 되지가 않는다니까.”
“틀린 말은 아닌데, 만사가 다 그렇진…….”
말을 끝맺기도 전에 광응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직후.
까앙!
광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단유소의 정면이었다.
“않지!”
그제야 광응이 하던 말을 맺었다.
적룡은 눈을 부릅뜬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앞에서 보고 있었는데도 광응의 움직임을 전혀 좇을 수 없었다. 묵룡이 어떻게 막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찰나의 순간, 언제 꺼냈는지도 알 수 없는 광응의 검이 묵룡에 의해 막혀 있었다.
묵룡은 묵색 쌍소검을 교차해서 광응의 공격을 깔끔하게 막은 모습이었는데, 그의 쌍소검 역시 언제 뽑혔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여태껏 상대했던 뚱뚱한 사내와 왜소한 사내, 즉 거응과 소응의 실력도 대단했는데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광응과 묵룡은 차원이 달랐다.
놀라고 있는 적룡의 귓전으로 단유소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정신 차려, 친구. 내가 아까 말했던 대로 움직여줘야지.]
그제야 적룡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에 광응과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묵룡은 전음으로 지시를 내렸었다.
거응은 송주가 맡을 것이니, 자신은 소응을 맡으라는 주문이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남은 모든 힘을 쏟아부어서 격렬하게 밀어붙이라 했었다.
보아하니 송주는 이미 거응을 공격하는 모습이었다.
적룡이 빠르게 소응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쉬쉭―
캉! 카강! 퍼엉!
하얀 바람과 검은 바람이 얽히고설키는 것 같았다. 묵룡과 광응이 싸우는 모습이 그러했다.
송주는 내심으로 크게 놀란 상태였다.
‘내가 눈으로 좇기도 힘들 정도라니.’
전투가 시작된 후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마음속으로 채 스물을 세었을까 싶은 시간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아마도 수십 합은 주고받았을 것이다. 백 합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칠팔십 합 이상은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전투는 그 정도로 빨랐다. 마치 두 사람의 전투만 다른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 것 같았다.
가끔씩 시야에 잡힌 묵룡의 표정은 침착했다.
너무 진지하지도 않고 그렇다 해서 너무 가볍지도 않은 특유의 표정과 눈빛.
그 분위기가 증명하듯, 묵룡은 광응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자신은 아까 소응을 상대로도 버거웠다. 거응을 상대하는 지금도 버겁다.
한데 묵룡은 거응이나 소응보다 훨씬 강한 광응을 상대로 대등한 전투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저 정도였다니…….’
근래 모든 시간을 묵룡과 함께 보냈기에, 그가 더 강해졌다는 사실은 느끼고 있었다.
한데 광응을 상대로 본격적으로 무공을 펼치는 묵룡의 모습을 보니, 예상했던 바보다 훨씬 더 대단했다.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광응이라는 사내는 진실로 강했다.
여태껏 수많은 혈천맹의 강자들을 상대해왔지만, 이렇게 강한 자는 처음이었다.
물론 백학이나 거학 등, 상대하기 버거웠던 자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실력 또한 그들을 상대할 때보다 훨씬 더 발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위를 점하기 힘든 상대가 바로 광응인 것이다.
대라유유선공을 극한으로 운용하고 있는 지금, 광응의 움직임에 어느 정도 대처가 가능하긴 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게 광응의 최선일 리 없다는 점이었다.
그가 지금 이상으로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할 경우, 자신이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였다.
혼원태극공.
제한이 있는 그 무공을 사용하되, 확실한 순간에만 사용해야 한다.
그 순간이 너무 늦어서도 안 된다. 송주와 적룡이 그나마 온전할 때 사용해야 한다.
그렇기에 시간이 많지 않다.
광응과 몇 합을 더 주고받던 단유소가 쌍소검에서 차례로 검강을 쏘아냈다. 각각 한 줄기씩의 강기였지만 이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강력함과 빠르기였다.
광응이 검을 들어 두 가닥의 강기를 막으려 할 즈음, 단유소가 이번에는 두 자루의 쌍소검마저 아예 그를 향해 던져버렸다. 물론 강기가 가득 주입된 채였다.
근거리에서 연이어 쏟아진 강력한 공격.
아무리 광응이라 해도 모든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카강!
광응이 처음 날아온 두 줄기의 강기를 막아내며 신형을 좌측으로 이동시켰다. 이어서 날아오는 두 자루의 쌍소검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스슥―
두 자루의 쌍소검이 광응의 옆을 스치듯 지나쳤다. 쌍소검이 날아간 속도가 매우 빠른 탓이기도 했지만, 광응이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피한 탓이기도 했다.
광응이 피한 곳을 향해 두 줄기의 강맹한 장력이 날아들었다. 단유소가 쌍장에서 시간 차를 두고 장력을 발출한 것이다.
슈슝―
날아오는 장력을 막아가던 광응의 양미간이 좁아졌다.
장력을 날린 묵룡이 빠르게 신형을 이동시키고 있었던 탓이다.
그가 향하고 있는 방향은 적룡이 있는 방향이었다.
이제야 상황을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방금 전에 묵룡이 퍼부었던 맹공은 적룡을 지원하기 위한 견제였던 것이다. 결국, 묵룡은 적룡이 상대하고 있는 소응을 타격할 심산이다.
소응은 묵룡이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소응의 실력이 묵룡에게는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니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림없는……!’
광응이 최대한의 속도로 움직이며 묵룡이 나아가는 경로를 향해 검을 뻗었다. 지금까지 광응이 펼쳤던 모든 공격들 중에서 가장 빠르고 강력한 공격이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이 정도면 묵룡의 움직임을 방해하기에 충분했다. 이만큼만 방해를 해줘도 소응이 알아서 대처할 것이다.
비응도 마침 묵룡의 의도를 눈치 챘는지 소응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었다. 묵룡의 경로를 막아서는 방향이었다.
이쯤 되면 묵룡은 피할 수밖에 없을 텐데, 피해야 할 방향은 너무도 빤했다. 그 방향을 자신이 장악하면 묵룡으로서도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광응이 그 생각을 하며 진기를 더욱 끌어올릴 때였다.
‘어……?’
이상했다.
자신의 검에 당하지 않으려면 묵룡은 이쯤에서 멈추거나 방향을 틀었어야 했다. 한데 그러기는커녕, 여전히 원래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검과 묵룡의 몸이 점점 가까워졌다. 당장에라도 검이 몸에 닿을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룡은 여전히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향을 바꿀 생각도 없어 보였다.
‘저런 미친……!’
묵룡도 대단한 고수이니 모를 리가 없었다. 현재 자신이 펼친 공격이 얼마나 날카롭고 강력한지를.
‘한데 왜……?’
그리고 그 순간.
스악―
광응의 검이 묵룡의 옆구리에 닿았다.
이가 부서질 정도로 이를 악물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소응을 상대하고 있는 적룡은 그야말로 한계를 경험하는 중이었다.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상대의 검에 찔려서 빨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죽으면 편할 것 같다는 강렬한 유혹이 들 정도로.
지혈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까 입었던 상처에서는 다시금 피가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점혈을 통한 지혈의 효과가 풀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고통스러운데, 시간이 갈수록 상처는 계속해서 늘어가는 중이었다. 상대인 소응이 너무 강한 탓이었다. 그와의 싸움이 시작된 후로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그랬다.
다행인 점이라면 녹의 사내, 비응이 아직까지 움직이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전투가 시작됐는데도 그는 광응과 묵룡의 싸움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자세한 상황까지는 모르겠지만, 묵룡과 광응 간의 싸움은 제법 팽팽한 모양이니까.
하지만 저러다가도 갑자기 움직일 것이다.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아마도 비응은 잠시 상황을 지켜보다가 가장 약한 부분을 치고 들어올 것이다. 그 약한 부분이 바로 자신이었다.
‘대체 언제야, 묵룡!’
아까 묵룡은 모종의 계획이 있다는 듯 말했었다.
광응이 얼마나 강한지 모르고 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니 분명히 뭔가가 있긴 있을 텐데, 묵룡은 아직까지도 별다른 움직임을 취하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버티는 건 나도 힘들다고…….’
상황이 변하기 시작한 건, 적룡이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할 즈음이었다. 여태 가만히 서 있던 녹의 사내 비응이 움직인 것이다.
보아하니 비응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소응의 곁으로 다가온 상태였는데, 의외로 다른 방향을 향해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자 소응도 즉시 반응했다. 자신을 공격하는 대신, 다가온 비응 쪽으로 신형을 튼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적룡도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묵룡!’
그가 빠르게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묵룡의 앞을 검 하나가 불쑥 가로막았다. 묵룡이 상대하고 있던 광응이 뻗은 검이었다. 묵룡이 다가오는 경로를 점한 한 수였는데, 참으로 절묘했다.
‘피햇!’
저대로라면 베이고 만다. 당연히 피해야 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적룡은 두 눈을 부릅뜨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뭐 하는……!’
묵룡이 피하지 않고 그대로 거리를 좁혀온 것이다.
스악―
결국 광응의 검이 묵룡의 옆구리를 베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분명했다.
한데 묵룡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비응과 소응을 향해 양손을 뻗을 뿐이었다.
펼쳐진 단유소의 양손에서 열 가닥의 지풍이 폭사되었다. 서로의 거리가 매우 좁혀진 상태에서 열 개의 점(點)이 다섯 개씩으로 나뉘어 비응과 소응을 향해 짓쳐들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라도 단번에 위험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기운들이었다. 혼원태극공을 이용한 수법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퍼버버버벙!
비응과 소응이 깜짝 놀라며 단유소의 공격을 막아갈 때였다.
“뒤!”
광응의 짧은 외침에 비응과 소응의 고개가 거의 동시에 뒤로 돌아갔다. 그 순간, 두 사람 모두 두 눈을 부릅떴다.
묵색의 소검이 등 뒤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각각 하나씩의 소검이 비응과 소응의 등에, 거의 동시에.
비응과 소응이 격렬하게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완벽히 피하기에는 이미 늦은 상태.
퓩― 퓨욱―
“큭!”
“컥!”
비응과 소응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동시에 들렸다.
하나의 소검은 비응의 어깻죽지를 관통하고, 다른 하나의 소검은 소응의 쇄골 아래를 관통한 것이다.
아까 광응을 공격하기 위해 날렸던 쌍소검이었다.
강력한 공격으로 비응과 소응의 신경을 분산시키는 와중에 은밀하게 이기어검술을 펼쳤고, 그게 통한 것이다.
관통한 두 자루의 소검을 단유소가 낚아챘다.
동시에 그가 빠르게 신형을 돌리며 쌍소검을 교차시켰다. 등 뒤에서 광응의 공격이 날아오고 있었던 탓이다.
콰앙!
공격을 받은 단유소의 신형이 튕겨 나갔다.
제대로 자세를 잡지 못한 상황에서 강력한 공격을 막다 보니 결국 버티지 못한 것이다.
터억.
튕겨 나가는 단유소의 상체를 낚아챈 것은 적룡의 팔이었다.
적룡의 도움을 받은 단유소가 빠르게 자세를 잡았다.
“후. 고맙군.”
단유소가 짧은 한마디를 남기며 자신의 옆구리 근처를 손가락으로 빠르게 짚었다. 지혈을 위함이었다.
적룡이 보니 위중할 정도의 상처는 아니었지만 결코 무시할 정도의 상처도 아니었다. 무리하다가 조금만 더 벌어지면 위중해질 수도 있는 상처였다.
적룡이 인상을 구기며 낮게 외쳤다.
“아무리 그래도 검에 몸을 대주다니! 미쳤나?”
그러자 단유소가 특유의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작게 대꾸했다.
“손해 보는 것 하나 없이 뭔가를 얻어 올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한 상대들이 아니잖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