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친구의 친구 (2)
방금 등장한 자는 평범한 키에 평범한 체구로, 짙은 녹색의 옷을 입었다. 등 뒤에 한 자루의 장검을 찼고, 나이는 삼십 대 중반쯤 되어 보였다. 뚱뚱한 사내나 마른 사내보다 약간 어려 보이는 정도였다.
어쨌거나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송주 혼자서도 저들 한 명을 감당하기가 힘든 현실 속에서 적 두 명을 상대로 지금껏 어찌어찌 버텨왔는데, 적측에 한 명이 더 추가된 것이다. 어쩌면 여태껏 상대해왔던 뚱뚱한 사내와 비쩍 마른 사내보다 더 강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수준의 적이.
묵룡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또 신룡대가 모두 함께 있었으면 어땠을까? 상황이 달라졌을까?
그 생각을 하던 적룡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조금 더 버틸 수는 있었을 것이다.
묵룡은 강하니 어떻게든 한 명쯤은 처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대세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을 것이다. 송주의 말마따나 적측에는 현재 저러한 고수가 다섯 명이나 되니까.
녹의 사내가 표정 없는 얼굴로 송주와 적룡을 응시하는 가운데, 송주가 적룡에게 전음을 보냈다.
[그러게 제가 도망치라고 했을 때 그냥 도망쳤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곁눈질로 보니 송주는 미소 띤 표정이었다.
포기한 미소도 아니고 해탈한 미소도 아니었다. 평상시에 송주가 보이는 여유로운 미소였다.
송주의 말에 대꾸할 수가 없었다. 대꾸를 했다가는 떨리는 자신의 어조가 그에게 여과 없이 전해질 것 같아서였다.
송주는 어떻게 저렇게 의연할 수 있는 걸까.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걸까.
아마도 이게 그와 자신간의 경지 차이일 것이다.
적룡이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길 서너 차례 반복했다.
이곳에서 곧 죽겠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
떨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죽는 바보 같은 꼴을 보일 수는 없다. 죽을 때 죽더라도 제 몫은 하고 죽어야 한다.
후회는, 없어야 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 말도 없이 송주와 적룡을 번갈아 바라보던 녹의 사내의 신형이 흔들렸다.
다음 순간, 녹의 사내의 신형이 적룡의 측면에 나타났다. 그가 옆구리를 향해 검을 찔러 넣고 있었다.
깜짝 놀란 적룡이 신형을 틀어 그 검을 막아갔다. 언월도의 봉 부분을 이용해서였다.
캉!
‘큭!’
적룡이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반탄력이 엄청났다. 결국 그 반탄력을 버티지 못하고 적룡의 신형이 세 걸음 뒤로 밀려났다.
그 즈음, 비쩍 마른 사내의 신형은 송주의 앞에 다다라 있었다. 아무래도 비쩍 마른 사내는 송주와의 승부를 마무리 짓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 순간 녹의 사내가 적룡의 정면을 향해 두 줄기의 기운을 발출해냈다. 강기였다. 발출된 순간에 알 수 있었다. 그 강기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둘 다 막을 수는 없다.
그리고 둘 다 피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하나는 막고 하나는 피해야 한다.
양손으로 언월도의 손잡이를 잡고 기운을 끌어올리던 적룡의 눈매가 좁아졌다.
‘헛!’
그러고 보니 어느새 시야에서 한 사람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뚱뚱한 사내였다.
그리고 그 순간, 적룡은 본인의 좌측 후방을 베어 오는 날카롭고 강력한 기운을 느껴야 했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뚱뚱한 사내의 박도일 것이다.
송주의 도움을 바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비쩍 마른 사내가 작정한 듯 몰아붙이고 있었던 탓이다.
‘아아……!’
속으로 탄식을 흘리는 와중에도 적룡은 자세를 최대한 낮추며 녹의 사내의 강기를 막았다.
카아앙!
이번에도 역시나 대단한 반탄력.
적룡이 즉시 몸을 웅크리며 우측 후방으로 굴렀다.
반탄력을 이용한 순간적인 임기응변.
그러나 뚱뚱한 사내의 도세(刀勢)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슈악―
모래사장을 구르는 와중에 뚱뚱한 사내의 도가 적룡의 신체 어딘가에 닿았다. 그 직후, 등 쪽이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크윽!”
적룡의 입에서 결국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몸을 일으키기 위해 고개를 든 적룡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뚱뚱한 사내가 이미 자신이 있는 곳으로 하강하고 있었던 탓이다.
뚱뚱한 사내의 신형이 하늘 전체를 가린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이미 그의 위치가 너무 가깝기 때문이었다.
자세도 제대로 잡지 못한 상태라서 더 이상의 방어나 회피가 불가능한 상황.
뚱뚱한 사내의 도가 적룡의 몸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양단할 듯 떨어져 내렸다.
반사적으로 언월도를 들어 올렸지만, 적룡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상태였다. 이후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콰아앙!
강력한 폭음이 들린 순간, 적룡의 몸이 반발력에 의해 뒤쪽으로 더 튕겨 나갔다.
‘어?’
적룡은 의아했다.
분명히 뚱뚱한 사내의 도가 자신을 갈랐어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자신과 뚱보 사내의 중간쯤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의 여파로 인해 자신이 뒤로 밀려난 것이다.
이미 눈을 뜬 적룡이 상대의 시선을 좇았다. 뚱뚱한 사내 또한 진기가 폭발한 여파로 인해 물러난 모습이었다. 모래사장 위에 깊게 팬 그의 족적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적룡이 서둘러 송주의 위치를 파악했다.
이 상황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도왔다면 송주일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 직후, 적룡의 양미간이 좁아졌다.
아니었다. 송주는 몇 보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찰나간에 도우러 왔다가 되돌아갈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그 즈음 전투는 잠시 소강상태였는데, 적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향해 있었다.
적룡이 보니 그들의 시선이 향한 곳에 화살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온통 묵색인 하나의 화살이었다.
“묵영시인가.”
묵영시.
날려도 소리와 기척이 없다는 특수한 화살이다.
그렇기에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보아하니 뚱뚱한 사내 또한 묵영시가 지척에 이르기까지 기척을 느낄 수 없었던 모양인데,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저 묵영시를 날린 사람 또한 엄청난 고수라는 뜻.
적들의 시선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송주와 적룡의 시선도 그 방향으로 향했다.
방금 전에 녹의 사내가 등장했던 바로 그 방향이었다.
사박, 사박, 사박.
모래 밟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뛰어오는 것도 아니고 걸어오는 소리였다. 그것도 매우 천천히.
이윽고 어둠 속에서 하나의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까지는 음영으로 사람의 모양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지만, 적룡은 그 인영이 누구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익숙한 체형과, 익숙한 걸음걸이였던 탓이다.
“아, 진짜. 오지 말라고 그렇게 당부했건만.”
송주의 말이었다. 그 또한 다가오고 있는 인영이 누구인지 이미 알아챈 것이다.
“후.”
어둠 속에서 짧은 음성이 들려오자 송주가 다시 말했다.
“아니, 그쪽 동네 사람들은 대체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는 거야, 다들?”
송주의 농담 섞인 핀잔에 어둠 속의 인영, 단유소가 대꾸했다.
“저 친구도 말을 안 들었나 보군?”
“친구의 친구는 친구라나?”
“후, 틀린 말은 아니군.”
“틀린 말은 아니지. 그런데 말이야. 친구고 뭐고 다 좋은데, 굳이 저승길의 친구가 될 필요는 없잖아?”
어느새 다가온 단유소가 자리를 잡고 서자 송주와 적룡이 그의 양옆에 섰다.
단유소는 한 손에 제법 커다란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쇠뇌였다.
단유소는 아마 저것을 이용해서 묵영시를 발사했을 것이다.
쇠뇌는 제법 크기가 커서 일반인이라면 혼자서 사용하기가 힘들 것 같았고, 수준 이상의 무인쯤 되어야 혼자서 사용이 가능해 보였다.
세 명의 적들이 표정 없는 얼굴로 단유소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때, 송주가 물었다.
“아무리 오지 말라고 해도 기어이 올 거라는 예상은 했지. 그래도 이렇게 빨리 당도할 것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는데.”
“자네의 전서를 받기 전부터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었거든.”
“응? 왜?”
“맹에서 전서를 받았거든. 함정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더군.”
“역시 그쪽 문상이 대단하긴 대단하시네.”
송주의 말에 단유소가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였다.
그러자 송주가 전음으로 빠르게 물었다.
[다른 인원들은?]
[잠시 후면 도착할 거야. 내가 먼저 달려온 거라.]
[그들까지 투입할지는 잘 생각해봐. 자칫 다 죽을 수도 있어.]
[도착하면 퇴로를 확보한 채로 대기하며 상황을 주시하라고 해놨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령을 어기고 튀어나올 인원들이 있을 것 같지만.]
[하여간 말 안 듣는 동네답네.]
[글쎄. 누가 가장 먼저 명령을 어길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
단유소가 씩 웃으며 그렇게 대꾸했다.
홍련을 염두에 둔 말임을 알고 송주도 미소를 지었지만, 그의 미소는 약간 씁쓸해 보였다.
단유소가 고개를 들어 절벽 위쪽을 바라보았다. 절벽의 끝자락에 한 사내가 여전히 장포 자락을 휘날리며 서 있었다.
“아주 조금이었지.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모든 게 완벽할 수 있었지.”
절벽 위에서 들린 목소리.
아까도 그랬듯, 멀리에서 조용히 말하는데도 귓가에 또렷이 들리는 음성이었다.
한데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단, 단유소만은 대강 알겠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절벽 위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린 정말 많이 준비했거든. 돈이며, 시간이며, 노력이며, 그야말로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이 소모됐어. 그리고 우리의 준비는 막바지에 이르렀었지. 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졌으면 일거에 이 강호를 집어삼킬 수 있을 정도로 준비를 완벽하게 마칠 수 있었어.”
독백하듯, 절벽 위의 사내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조금의 시간은 끝내 주어지지 않았어. 결국 계획이 틀어졌고, 완벽할 것이라 예상했던 우리의 행사도 이렇게 힘든 방향으로 진행되어온 거지. 어이가 없는 건, 그걸 망쳐놓은 사람이 단 두 사람이었다는 점이야. 그리고 오늘 그중 한 사람을 만나는군. 특히 가장 크게 망쳐놓은 그 사람을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송주가 생각에 잠겼다.
저들을 방해한 한 사람이 묵룡이라는 건 알겠는데, 나머지 한 사람이 누구인지가 의아했다.
묵룡과 함께 움직였던 교월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세상일이라는 게 참, 뜻대로 되지가 않지?”
단유소의 대꾸였다.
그 또한 매우 조용한 음성이었다. 목소리에서 차분함과 여유가 느껴졌다.
“하! 하하! 하하하하핫!”
절벽 위에서 들린 웃음이었다.
“재밌군. 들었던 대로 재미있는 사람이야.”
절벽 위의 사내가 그렇게 말하자 단유소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들을 처음으로 방해했던 그는……, 살아 있기는 한가?”
“진소학은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까지만 해도 살아 있었지. 지금은 모르겠는데, 아마 살아 있어도 산 사람의 꼴은 아닐 거야.”
그 말에 송주와 적룡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절벽 위의 사내와 묵룡의 말을 통해 진소학의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주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그랬군. 그래서…….’
교월이 비밀리에 강호에 나섰던 이유가 궁금했는데, 결국 진소학 때문이었던 것이다.
절벽 위에서 사내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진소학. 모든 게 틀어지기 시작한 게 바로 그 친구 때문이었지. 원래는 우리도 어지간하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어. 막바지 준비 단계였으니까. 한데 한번 꼬리를 문 그 친구는 끝까지 집요하게 조사하며 파고들더군. 똑똑하다는 그의 명성이 과연 헛되지 않다는 걸 알 것 같았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는 말인즉, 원래는 진소학을 건들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었다.
사내의 음성이 이어졌다.
“그 친구는 알아서는 안 될 사실까지 알아버렸고,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지. 현월곡에서 진소학의 실종을 알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그 일을 기점으로 지금에 이르게 된 거야. 우리가 상황을 주도했어야 했는데, 오히려 끌려온 거지. 뭐, 사실 거기까지만 해도 나쁘지는 않았어.”
사내가 말을 멈추더니 갑자기 절벽 위에서 몸을 던졌다.
마치 새가 날개를 펼치듯 양팔을 펼친 채로 떨어져 내린 그가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교월이 나섰다고 해도, 간단하게 정리하면 그만이었거든. 문제는, 그 교월을 지키기 위해 묵룡이 투입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점이었지. 더 큰 문제는 그 묵룡의 역량이, 우리의 많은 것을 망쳐놓을 정도로 대단하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아차렸다는 점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