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산동에서의 전투 (2)
적룡이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송주가 말했다.
“철수할 시간이 부족했을 정도로 이 거점에 많은 게 있다는 뜻일까요? 물론 저 강시들을 포함해서.”
송주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말에 적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저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뱃길을 이용해서 저것들을 옮기려 해도, 이 근처에 저것들을 수용할 만한 또 다른 거점이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럴 수도 있겠군요. 인근 지역들의 특성상 저것들을 효과적으로 숨길만한 곳이 별로 없기도 하고. 뱃길을 이용해서 저 많은 강시들을 먼 곳으로 옮겨버리면, 정작 필요할 때 기동성 있게 써먹기가 힘들 테니까요.”
송주의 말에 적룡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송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도 아니면 이곳이…….”
그 후로 송주가 한참이나 말을 잇지 않자, 적룡이 송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송주가 재빨리 적룡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더니 대꾸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좀 했습니다. 하핫…….”
그렇게 말한 송주가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의문이 담긴 눈동자로 송주를 바라보던 적룡도 결국 전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적룡이 선화란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을 무렵, 한동안 말없이 상황을 지켜보던 송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거, 화 소저에게 미안하군요. 그간 제가 화 소저의 실력을 너무 얕잡아봤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 무시했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화 소저가 수준 이상의 고수라는 건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제가 예상했던 수준 이상은 아닐 것이라고 내심으로 단정하고 있었거든요.”
여전히 선화란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송주가 말을 이었다.
“한데 지금의 화 소저를 보니 제 어리석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달려들 때는 벌처럼 매섭고, 싸울 때는 새처럼 날아다니는군요. 위치 선정도 매우 좋고.”
적룡은 대꾸하지 않았다. 하지만 송주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도 선화란이 현재 보이고 있는 움직임은 송주의 칭찬이 전혀 과하다 여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마냥 애송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의외로 훌륭했다.
송주의 말이 이어졌다.
“석 공자께서도 아시다시피, 무공을 펼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지요. 화 소저는 주변과 보조를 맞추며 함께 가는 성향이겠군요. 본인이 스스로 빛나려 하기보다는, 주변을 빛나게 함으로서 결국 자신이 더욱 빛나게 되는.”
선화란이 무리해서 청강시들 사이로 파고들지 않고 흑풍대와의 간격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고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적룡이 살짝 고개를 돌려 송주를 바라보니, 그는 만면에 잔잔한 미소를 띤 채였다.
적룡이 다시 선화란의 움직임에 시선을 두었을 때, 송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가장 인상적인 건 균형이군요. 모든 움직임 하나하나에 놀라울 정도로 균형이 잘 잡혀 있습니다. 화 소저 정도의 수준에서 저렇게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무인은 보기 힘들지요.”
그 말에 적룡의 눈매가 살짝 좁아졌다.
균형……?
황룡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그녀의 움직임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이라는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한 건 딱 거기까지였다.
한데 송주는 그 이유까지 파악한 것이다.
“보아하니 너무 낮지도, 높지도 않은 저 무게중심에서 아마도 그러한 균형 감각이 나오는 것 같군요. 아시잖습니까. 싸울 때 무게중심이 낮은 게 무조건 좋다고들 하지만, 상승의 경지로 갈수록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걸.”
송주의 말에 납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지에 비해 훨씬 안정감이 느껴지는 황룡의 움직임은, 치우치지 않은 무게중심에서 오는 절묘한 균형감각 때문이었던 것이다.
역시 흑풍대주라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 반성도 되었다.
어쩌면 그와 자신 사이의 경지 차이는, 막상 알고 보면 별것 아닌 이러한 사소한 차이들이 합해지면서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화란을 선두로, 흑풍대원들이 청강시들을 안정적으로 처리해 나가던 순간이었다.
잘 유지되던 진형이 갑자기 붕괴되기 시작하니, 적룡이 송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가보지요.”
전선에서 딱히 고수의 기운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형이 붕괴되고 있다는 건, 청강시보다 더 강력한 강시, 즉 혈강시가 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거나 이곳의 지휘관은 송주였다. 그렇기에 먼저 나서겠다고 말한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적룡에게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황룡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왠지 참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싸우고 싶어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맹렬하게.
그 즈음의 송주는 이상했다.
상황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전장만을 주시하고 있던 그가, 지금은 고개를 들고 절벽 위쪽의 끝부분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절벽 끝을 보는 건지 그 너머의 어두운 하늘을 보는 건지 애매하긴 했다.
혹시 절벽 위쪽에 뭔가 있나 싶어서 안력을 집중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절벽 위쪽에 시선을 둔 채로 송주가 대꾸했다.
“예. 석 공자께서 맡아주셔야 할 것 같군요.”
그렇게 말하는 송주의 옆얼굴에는 뜻을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적룡이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그는 이내 언월도를 고쳐 쥐었다.
송주의 표정이 심각하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다면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으리라. 가뜩이나 지금은 빨리 혈강시에 대처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럼.”
짧게 대꾸한 적룡이 경공을 펼치기 위해 진기를 끌어올릴 때였다.
“만약에 말입니다.”
조용한 송주의 목소리에 적룡이 고개를 돌렸다. 송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 애들을 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석 공자라면 믿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적룡이 보니 송주는 여전히 아까 그곳에 시선을 둔 채였고, 여전히 미소 띤 표정이었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적룡이 묻자 그제야 송주가 고개를 돌려 적룡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그냥,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적룡이 다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대꾸했다.
“전서를 날렸으니 어차피 묵룡이 신룡대를 끌고 이곳으로 오고 있을 겁니다. 그의 실력은 대주께서도 잘 아시니, 그에게 부탁하시면 될 듯합니다만.”
“아, 혹시 그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겼을 경우를 말씀드리는 겁니다. 노파심이지요.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잖습니까. 가뜩이나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고요. 아무튼 제 부탁, 들어주시는 걸로 알아도 되겠지요?”
여전히 송주의 말이 의아했지만, 미소 띤 그의 표정에서 딱히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가 말했듯 노파심인 모양이었다.
“뭐, 알겠습니다.”
그러자 송주가 만족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룡이 송주에게 말했다.
“그럼.”
짧은 한마디를 남긴 적룡의 신형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튕겨 나갔다.
[석 공자께서 알아서 잘하시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송주의 전음.
달려 나가는 와중에도 적룡이 짧고 굵게 고개를 끄덕였다.
혈강시들의 앞쪽으로 도약한 적룡이 허공에서 언월도를 풍차처럼 회전시켰다.
휙휙휙―
회전력이 담긴 적룡의 언월도가 선두에서 다가오는 혈강시의 어깨에 떨어졌다.
슈악! 서걱―
선두에서 다가오던 혈강시의 팔이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착지한 적룡이 몸을 낮추더니, 언월도를 길게 잡고 혈강시의 한쪽 다리를 노렸다.
서걱―
혈강시의 한쪽 다리가 어김없이 잘렸다. 이윽고 혈강시의 신형이 무너지더니 그대로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그 혈강시는 마침 선화란을 공격하던 혈강시였다.
갑작스러운 혈강시의 등장에 난감해하며 뒤쪽으로 물러나던 선화란의 표정에 안도감이 담겼다.
선화란이 자리를 잡고 주변에 있던 청강시들을 정리할 무렵이었다.
그녀의 뒤쪽에서 두 명의 흑풍대원들이 빠르게 앞으로 치고 나가더니 적룡의 옆에서 함께 혈강시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각각 검과 도를 든 자들이었다.
혈강시들을 향해 검을 떨쳐내는 와중에도 선화란이 그 두 사람의 모습을 주시했다. 그들에게서 발산되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던 탓이다.
그들의 검과 도가 혈강시들의 팔다리를 가르고 있었다. 적룡만큼 쉽게 가르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이 순간에 중요한 건, 그들도 혈강시를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고수들이라는 점이었다.
‘흠…….’
그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는 선화란은 뭔가를 생각하는 눈빛이었다.
그동안 며칠간 흑풍대와 시간을 함께 보냈기에, 그 두 사람 또한 아는 얼굴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평소에 조용하고 존재감이 없던 인물들이었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들이 지금, 혈강시들을 거뜬히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저 정도의 실력이라면 흑풍대 내에서도 최소한 조장급 이상일 것이다.
‘에휴. 또 눈치 못 챘네.’
고수를 알아보는 것도 능력이라는데, 여전히 자신은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혈강시들을 상대하는 적룡과, 흑풍대의 두 조장과의 실력 차이가 느껴졌다. 누가 봐도 적룡 쪽이 훨씬 더 강했다.
‘뭐, 실력 하나는 인정해줘야겠네. 그 개떡 같은 성격은 젖혀두고서라도.’
맹렬한 기세로 혈강시들 사이를 누비는 적룡의 등이, 이 순간만큼은 그렇게 듬직할 수가 없었다.
“그를 믿어. 그는 일찍이 신룡대를 거쳐 간 역대 조장들을 다 합해도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실력이라고 인정받았던 재목이야. 당장의 실력이나 잠재력 모두. 그러니 만약 내가 없을 땐, 그를 믿으면 돼.”
다시 흑풍대로 파견되기 직전에, 왜 또 적룡과 함께 움직여야 하느냐고 묵룡에게 살짝 불평을 늘어놓았었다.
만약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둘이서 합심해도 그 상황을 돌파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적룡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니 과연 그게 가능하겠냐며 호소하듯 말했었다. 솔직히, 그런 상황에서 적룡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었다,
그때 묵룡이 해줬던 말이었다.
지금 적룡이 싸우는 모습을 보니 왜 묵룡이 적룡의 능력에 대해 그렇게까지 얘기했었는지 충분히 납득이 갔다.
적룡이 흑풍대와 함께 별 탈 없이 강시들을 정리해 나갈 때였다.
“즉시 후퇴!”
뒤쪽에서 송주의 낮은 외침이 들렸다.
적룡이 고개를 갸웃했다.
한참 잘 싸우고 있는데 갑자기 웬 후퇴 명령이란 말인가. 게다가 다급한 음성이었으니 더욱 의아했다.
시선이 마주친 선화란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흑풍대원들은 이미 송주가 있는 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한 상황.
결국 적룡이 선화란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뜻을 알아들은 선화란이 흑풍대원들을 따라 송주가 있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적룡도 그 방향을 향해 도약했다.
그 와중에 허공에서 몸을 비튼 적룡이 적들이 있는 방향을 향해 언월도를 휘둘렀다. 모두가 안전하게 후퇴할 수 있도록 엄호하려는 것이다.
샤샤샥―
빠르게 휘둘러진 적룡의 언월도에서 묵직한 기운이 발산되었다. 언월도를 떠난 강맹한 기운이 가까운 강시들과 적들을 덮쳤다.
공격의 범위 안에 있던 혈강시와 청강시의 몸이 잘려 나갔다.
그 안에 있던 적들의 신세 또한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