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천하제일인, 천하제일미 (3)
한설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그간 자신이 직접 겪은 혈천맹을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낮지 않았다. 오히려 높은 쪽이라고 봐야 했다.
일반인들을 포함한 많은 인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동원하고 또 가차 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능력.
벽력탄이나 강시 등, 매우 위험하고 민감한 영역에 과감히 투자할 수 있는 자본. 또 그것을 은폐할 수 있는 역량.
중원의 곳곳과 변방의 많은 곳에 거점과 시설들을 구축하고, 그 거대한 체계를 철저하게 통제할 수 있는 힘.
알려졌듯, 지금의 혈천맹은 과거 혈교의 잔존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음지에서 힘을 키웠다 해도, 그들만의 힘으로 지금과 같은 체계를 구축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무림맹과 천마신교의 양강 구도가 지속되어온 근래의 강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속단하긴 이르지만, 소저도 예상하듯 많은 정황들이 그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네. 물론 나도 아니길 바라고 있네만.”
“어떻게 그럴 수가…….”
“정치권력은 기본적으로 강호를 썩 달갑게 보지 않지. 이곳의 힘이 커질수록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꼴이 되니까. 그래서 강호에서는 예로부터 정치권력과 연관되지 않는 것을 불문율처럼 지켜왔던 것이고.”
한설연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백리우가 말을 이었다.
“물론 모든 권력자들이 그런 건 아닐세. 세상 어디에나 비뚤어진 야욕을 가진 이들은 있네. 그들의 힘이 클수록, 그리고 잔인할수록, 풍파는 거세지지. 혈천맹이 딱 그런 경우이고.”
한설연이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지금의 추측이 현실이라 해도, 그것이 정치권 전반의 분위기라고 볼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한설연이 입을 열었다.
“만약 혈천맹 사태에 정치권력이 연관되어 있다면, 그 권력자의 힘이 상당하다는 뜻이 되겠군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걸까요. 수많은 일반인들을 희생시키고, 연관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까지 고통을 줘가면서…….”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유지하거나 차지하고 싶은 게 바로 그 권력이고 세력이라는 거거든. 강호도 마찬가지고, 세상 어디에서나 마찬가지지.”
어쨌거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맹주가 염려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를.
아울러 제갈윤이 몰래 자리를 비운 이유도 대강은 짐작이 갔다.
제갈윤의 명성은 비단 강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는 학문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우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런 사람들이 대부분 관직으로 진출하니, 정치가들 사이에서도 선생으로 대접받는다.
특히 제갈윤이 대단한 건 황실에서도 존중받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제갈세가주들은 말년에 종종 황태자나 황손의 스승으로 초빙받아 황궁에 가는데, 제갈윤은 몇 년 전에 이미 그 역할을 했었다. 무림맹이 한가하던 시기에 몇 달간이었는데, 당시에 제갈윤에게서 배운 황자가 바로 지금의 황태자다.
지금의 황태자가 스승인 제갈윤을 존경하여, 나중에 자신의 아들 교육도 맡아줄 것을 당부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 제갈윤이기에 아마도 몰래 황궁에 갔거나, 아니면 다른 권력의 실세들을 만나러 갔을 것이다. 정보를 구하기 위해서.
여담이지만 근래에는 현월곡의 위상도 많이 올라갔다.
절강은 물론이거니와 인근 지역의 권력자들이나 유지, 학자들도 종종 현월곡을 방문한다. 사부를 찾아와서 친분을 쌓고 조언을 구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제갈세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한설연은 속으로 짐작되는 바를 굳이 백리우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백리우가 말했다.
“그 친구, 이번 임무 끝나고 돌아오면 휴가 한번 길게 줄까? 소저도 그때쯤 휴가 한번 받고 말이야.”
여기에서 그 친구란 단유소.
한설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 사람의 휴식을 위한 휴가라면 상관없지만, 저와 그 사람의 관계를 배려해서 그러시는 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저도, 그 사람도, 할 일이 많은 때잖아요. 강호를 위해서도 중요한 시기이고…….”
“호오. 휴가를 준다고 해도 걷어차니 원. 어쨌건 나중에 딴소리하지 말게.”
“절대로 걷어차는 게 아니구요. 미뤄둔다는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허허! 손해는 안 보시겠다 그거군?”
그러자 한설연이 애교를 가득 담아 말했다.
“혈천맹 사태가 끝나면, 휴가는 그때 몰아서 주시면 안 될까요? 아주, 기이이이이일게.”
“푸허허허허허! 이거 원, 그 수법에는 도저히 못 당하겠군.”
“헤헷.”
한동안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있던 백리우가 잔을 들더니 말했다.
“막잔인 듯한데 아쉽군. 천하제일미녀와의 첫 술자리가 이렇게 끝나다니.”
“하오시면 제가 얼른 나가서…….”
그러자 백리우가 한설연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열었다.
“아닐세. 오늘은 이쯤 하지. 대신 술 한잔 마셔야 잠이 오겠다 싶은 날엔 또 부탁 좀 하지.”
“소녀에겐 거부권이 없을 것 같은데요?”
“설령 거부권이 있다 해도 소저는 왠지 거부할 것 같지 않군.”
“푸흐흡!”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건배한 후에 술잔을 비웠다.
백리우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한설연도 일어섰다.
백리우가 물었다.
“어딘가에 가기 위해 하루 종일 경공을 펼쳐본 적이 있는가?”
또다시 뜬금없는 질문.
“그 비슷한 경험은……, 있습니다.”
“그래야만 할 때, 무인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부분은 어떤 부분이던가?”
너무도 빤한 답을 요구하는 질문.
한설연이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대꾸했다.
“기력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지치지 않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무리해서는 안 되고……. 아!”
거기까지 말하던 한설연이 이제야 뭔가를 알아챘다는 듯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소녀에게 무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려고…….”
그제야 백리우가 만족했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천하제일미녀의 피부 관리일세. 충분한 잠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피부 관리라고 들어서 말이야.”
“푸흡! 명심하겠습니다.”
백리우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러더니 문 앞에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다음에는 소저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주게.”
“준비해보겠……. 아니, 준비하겠습니다.”
그러자 백리우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푸허허! 좋아, 좋아.”
백리우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나섰다.
한동안 문을 바라보던 한설연이 이윽고 돌아서서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 창문을 열었다.
만월에 가까워진 밝은 달빛이 창문 안으로 쏟아졌다.
한설연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차갑지 않고 시원했다.
그 어느 때보다 길게 느껴졌던 겨울이 지나가고, 서서히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휴가…….”
한설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만약 단유소와 함께 긴 휴가를 받게 된다면, 그때는 꽃이 만발한 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손을 잡고 알록달록 만발한 꽃길을 즐겁게 걸을 수 있다면.
나른한 오후,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반짝이는 그늘 아래에서, 그 사람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 수 있다면.
따뜻하고 포근한 봄의 정취를, 따뜻하고 포근한 그 사람과 함께 그렇듯 여유롭게 누릴 수만 있다면.
세상에 그보다 더 행복한 시간이 또 있을까.
한설연이 감았던 눈을 뜨고 달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그러니 다치지 말아요. 아프지도 말아요. 이 모든 게 끝날 때까지, 제발 무사해줘요.”
* * *
하남에서의 임무는 큰 성과 없이 끝났다.
거점으로 의심되는 시설을 찾기는 했으나, 이미 그곳에는 그 누구도, 아무것도 없었다.
흔적들은 모두 최근의 것으로, 산서의 거점들이 타격을 받은 것을 알아챈 적들이 미리 조치를 취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 흔적들이 모두 북쪽으로 향했음을 확인할 수는 있었다. 하남에서 북쪽이면 하북이었다.
“흔적은 행로와 이어지고 있어. 어차피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 이 이상의 추적은 큰 의미가 없을 것 같고.”
송주의 의견이었다.
단유소와 송주는 한적한 바위 위에 앉아서 이후의 일을 논의하는 중이었다.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송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다음으로 조사해야 할 곳은 산동인데……. 그쪽의 거점들도 다 정리하고 빠졌을 가능성이 높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어떻게 할까? 헛걸음이라도 일단 가서 조사를 해볼까? 아니면 보고에 대한 답변이 올 때까지 대기할까?”
이미 이곳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한 전서는 각각 무림맹과 천마신교로 날아갔다. 이미 두 조직이 협력해서 작전을 수행하라는 승인도 떨어진 상태였다. 물론 그 사안은 철저한 대외비였다.
단유소가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생각에 잠겨 있자, 송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 같아서는 괜한 헛걸음을 하느니 이런 때에 애들을 쉬게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데.”
정혼단의 거점 타격 작전이 시작된 후로 지금까지 신룡대와 흑풍대는 거의 쉬지도 못하고 움직였다. 긴장의 끈을 푼 적이 없으니, 휴식을 취하는 게 좋겠다는 송주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만히 뭔가를 생각하던 단유소가 입을 열었다.
“생각 같아서는 나도 대원들을 푹 쉬게 해주고 싶지. 하지만 어차피 자네나 나나 마음속으로 정해둔 결론은 같지 않나. 그럼 그 결론대로 해야지.”
“독심술도 익혔나? 내 마음을 자네가 어떻게 알아?”
그 말에 단유소가 피식 웃어 보이자 송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하여간 자네는 다 좋은데, 재미는 없는 친구야.”
“뭐, 항상 듣는 소리라.”
단유소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하자 송주가 졌다는 듯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래. 설령 헛걸음이 된다 해도 일단은 움직여야겠지. 눈으로 보고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잠도 안 오잖아.”
그 말에 단유소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룡대든 흑풍대든, 하는 일의 특성상 항상 철저해야 한다. 사실 그래서 피곤한 일이기도 하다. 늘 만에 하나를 가정하고 그것까지 확인하기 위해서 직접 몸으로 움직여야 하니까.
단유소가 말했다.
“이동 중에 휴식 시간을 충분히 주는 쪽으로 하지. 잠도 많이 재우고.”
“그래. 그러자고.”
“그 전에, 조금만 쉬었다가 출발하자고. 어차피 한 시진(두 시간)쯤 지나면 어두워질 테고.”
야음을 틈타 이동하자는 뜻.
단유소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해 보였다.
먼 하늘에 떠가는 구름을 바라보던 송주가 말했다.
“화 소저와 석(石) 공자 말인데.”
송주가 말한 석 공자란 석강무(石江霧). 적룡이 현재 쓰고 있는 이름이었다. 사실, 가명인지 본명인지는 단유소로서도 알 방법이 없었다.
물론 화 소저는 선화란이다.
송주가 말을 이었다.
“당연히 둘 다 조장일 테고.”
단유소는 대꾸하지 않았다.
눈치 빠른 송주이니 이미 두 사람의 지위를 파악한 모양이지만, 그 말에 직접 대꾸해줄 수는 없었다. 신룡대의 규칙이니까.
물론 지금의 무언이 긍정임을 모를 송주도 아니었다.
“일부러 그 둘을 엮어서 우리 쪽으로 보낸 거지?”